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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筆者)가 동학혁명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 아팠던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적을 향해 나아가던 사람들은 평소 타 지역이나 권력자들로부터 천대받고 멸시 받았던 설움 많이 받던 전라도 민초(民草)들이었다는 점이다.

전라도 사람들을 구박하고 손가락질 하던 자들은 국난을 만나 매국노로 변하였으나, 천대 받던 전라도 사람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낫과 괭이를 들고 전쟁터로 나갔다. 매국노들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 호의호식(好衣好食) 하는 동안, 전라도 흰옷 입은 백성들은 뜨거운 피를 이 땅에 뿌리며 죽어갔다. (‘일어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란 말은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고부의 언덕에 모인 농민군들이 모두 죽창을 들고 흰옷을 입었음을 뜻하는 풍자이다.)

필자(筆者)는 이 모든 애국행위를 ‘전라도의 영광’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 전라도 사람들이 어떻게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 이야기를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전하려고 한다.

면암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경주 최씨 대(岱)의 아들이다. 수봉관ㆍ지방관ㆍ언관으로 재직 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전남 신안 흑산도에서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ㆍ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면암 최익현은 고종으로부터 사무사(思無邪)라는 글귀가 적힌 밀명(密命)을 받는다. 생각함에 사심이 없으라는 글귀의 진의(眞意)는 나라를 지키라는 고종의 뜻이었다. 이에 면암은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800 의병을 이끌고 궐기하였고, 74세의 고령으로 최후로 진충보국(盡忠輔國)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창전투에서 패배하여 잡혀가 적지(敵地) 대마도 옥사(獄舍)에서 적 일본의 음식을 거부한 채, 굶어 순국(殉國)하셨다.

면암 최익현, 그는 국난을 맞이하여 천대와 멸시의 땅, 전라도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 곡성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순창 전투를 치른다. 의병의 함성이 누리를 덮던 곳, 지금도 곡성 성출산 입구에는 이 사무사(思無邪)라는 글귀가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다. 면암은 이곳 전라도에서 전라도 백성들을 이끌고 구국의 일선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창의 선비, 일광(一狂) 정시해도 고창 무장 일대의 선비들을 이끌고 면암의 군영에 합류하여, 중군장으로 면암을 보필하다 순창전투에서 홀로 순국하였다. 후일 사람들은 정시해를 포함 면암과 면암의 7대 제자들을 지금까지 곡성 사당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면암의 봉기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0년 후의 일이었다.

동학교도(東學敎徒) 색출로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면암의 부름을 받은 전라도 백성들은 동학의 의기를 이어, 면암의 의병에 합류하여 나라를 보위하고자 하였다. 생각해 보면, 가엾은 일이었다. 어찌하여 평소에는 좋은 벼슬은 다 자기들이 차지하면서, 전라도를 반역자들의 고향, 사기꾼 뒷통수 치는 범죄자들이 사는 곳으로 매도하면서도, 국난(國難)에 이르면 제일 먼저 전라도 사람들의 피와 희생을 요청하였던가.

하긴 넓은 평야지대라 군량미를 얻기가 쉽고, 대부분 소작인들이거나 머슴들이 많기에 의병을 모으기가 용이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니 무엇이 두려웠을 것인가.

대한민국 근대화 시기에도, 모든 경제발전의 열매는 타 지역 사람들이 가져가고, 천대 받고 혜택 받지 못한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어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 같은 국민의 의무를 강요하였었다. 의무만이 평등하였고, 혜택과 입신출세, 경제성장의 과실은 불평등하였다.

군대 안 가는 사람을 신(神)의 아들이라 부르던 시절에, 전라도 사람들은 빽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라 군대는 빠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정관계에 즐비하게 늘어선 군대 안 간 정치인들, 군대 안 간 잘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 가엽고도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사람들은 대의(大義)를 잊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더 앞장섰으며, 누구보다도 많은 피를 흘렸었다. 그리고 누구를 원망함이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높은 벼슬에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은 나라를 팔고, 가난하고 천대받는 백성들이 나서서 나라를 지켜냈던 것이다. 바로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어느 겨울 필자(筆者)는 곡성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고종의 글씨를 바라본 적이 있다. 글씨엔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알려주는 청태(靑苔), 푸른 이끼가 끼어 있었다. 사무사(思無邪), 곡성 성출산 계곡 입구에 새겨진 고종의 친필 글씨는 진정한 전라도의 영광을 가르쳐주는 증거라 할 것이다. (아래는 순국한 면암 최익현의 중군장 일광 정시해를 기리기 위해 쓴 시로서, 2003년 보훈처 공모전 추모헌시 부문 장려상 수상작임)

謹弔 一狂 鄭時海

해 저무는

저기 저 산봉우리

산화(散華)한 넋 하나가 태양 속으로 날아가는구나.

곡성 땅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누리에 금성은 밤하늘을 뚫고

오인(吾人)은 時海의 주검을 안고,

이름 모를 계곡에서 우니는 새여

이 한천(寒天)에 겨울 샛바람은 연실처럼 풀어져 날리고

온기 없는 주검 위에 흘러내리느니 단장(斷腸)하는 피눈물

너를 조상(弔喪)하는 부의(賻儀)라 믿어 세상에 뿌리노라.

孝라

양친(兩親) 무덤가에 6년 시묘(侍墓)살이 초막을 짓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 자름이 없이

기름지고 비린 음식 밥상 밖으로 물리고

정한 하늘 올려봄도 죄 지은 듯 하여

고개 숙여 발끝만 보고 살았니라.

孝 지극하여 정성이 상제(上帝)께 닿아 신령이 보내신 산군(山君)

더불어 산다는 말 내 천리 밖에서도 들었느니라.

매서운 동짓 추위를 山君이 품어주고

섣달 삭풍은 산령(山嶺)이 막아 너를 지켜 기름은

호국충렬(護國忠烈)의 제단(祭壇)에 너를 쓰고자 함이었으니

총을 쏘고 칼을 두르며 청구(靑丘)의 산하(山河)를 달리던 싸울아비여.

義兵의 무리를 이끌고

못난 스승을 향해 허위허위 달려오던 날

천년 느티나무처럼 강한 두 팔 두 다리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불눈

시퍼런 초생달 목에 걸고

왜적을 노리던 네 충렬한 넋.

너는

산과 내의 신령을 모으고

반만년 역사의 강물을 배 저어 건너

잠든 겨레의 혼을 일깨우듯 산천을 호령하여

비바람처럼 적을 향해 나아갔구나.

산도화 붉은 꽃잎처럼 떨어지는 전우의 시신을 넘어서

가을 소슬한 뜨락에 떨어지는 오동잎처럼 큰 슬픔으로

적 앞에 섰으나, 적은 어디 가고

동포의 얼굴만 보이느냐.

조선 관군만 밀려오고 왜군은 저 멀리 있어

총알은 닿지 않고 일으켰던 칼바람은 숙어드네.

동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함인데

동포를 죽이고 무슨 의(義) 있으리.

하늘을 우러르고

칼을 놓는 참

사위를 벼락처럼 흔드는 총소리...!

이후

내 어찌 상투를 자르고 이적(夷狄)의 옷을 입겠느냐.

흰옷 조여 입고 스승을 대신하여 적을 향해 나아가다

네 몸 어드메 흉환(兇丸)이 찢어 지나가고

하늘의 천사 너를 일으켜 데려간 후

뜨거운 얼 빠져나가고

남은 차거운 주검만 미망자(未亡者)의 품에 안겨있구나.

오호 희(噫)라, 누가 우리 時海를 앗아갔느냐.

나랏 사람으로 강토(疆土)를 위해

칼날 날카로이 벼르어 두지 못한 어리석음

오랑캐를 탓한들 무엇하겠느냐.

모두가 나의 잘못 나의 미련 나의 게으름

스승 되지 못한 자의 훈육(訓育)에서 비롯되었다 하리.

時海 時海여

너의 피는 하늘에 올라 동트는 일광(日光)의 빛으로 빛나고

너의 이름은

나라 하나만 미치게 사랑한 일광(一狂)한 충혼(忠魂)이 되었구나.

孝와 忠을 양전(兩全)하여 한 몸으로 아우르니

後世 後人이 기록할 역사 위에 불천위(不遷位)할 사표(師表)가 되리라.

제자여 이 아늑한 골짜기에 소쩍새 우는 밤

곧 구천(九天)에서 우리 만나리니 먼저 하늘에 오르지 말라.

내 너를 업고 환인천제(桓因天帝)의 뜰에 날아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왔음을 너보다 먼저 호곡(號哭) 대죄(待罪)하리라.

罪人 勉庵 益鉉 書

<詩作노트>

이 시는 면암 최익현의 거병 당시 전북 무장 고창에서 의병을 이끌고 면암의 휘하에 합류하여 중군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하신 일광 정시해를 추모하는 시입니다.

일광 정시해는 고창 성송 사람으로, 양부모님 시묘(侍墓)를 6년을 한 효자이며, 시묘살이 도중에 호랑이가 찾아와 함께 기거했다는 이야기가 고창 고을에 지금도 전해집니다. 오직 나라 사랑에 미쳤다 하여 일광(一狂)이란 호를 사용하였으며, 효와 충을 겸했다 하여 양전사(兩全士)라는 호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이 시는 일광 정시해의 순국 당시 면암이 통곡하면서 말했다 하는 “누가 우리 시해를 죽였느냐”라는 말에서 모티브를 잡아, 면암의 목소리로 쓴 시입니다. 또한 충효정신이 사라지는 오늘, 학생들에게 가르쳐도 좋을 나라 사랑과 효애를 북돋을 귀감으로서 손색없는 정시해라는 인물을 알리고자 쓴 시입니다.

시적 능력이 모자라 그 분의 모든 것을 담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공경(恭敬)의 마음자리 가슴 아팠습니다. 글/ 데일리안광주전라 정재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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