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 전북 진안에서 일어난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 전체가 반역향이 되어, 온갖 멸시와 천대가 시작될 무렵, 그로부터 3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 임진왜란은 전쟁 그 자체의 비극성뿐만 아니라, 동양3국이 최초로 비좁은 한반도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서로 최첨단의 군사기술과 문화와 역량을 총출동시켜 승패를 겨룬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사회 문화는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양반과 상민이라는 전통적인 신분질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우리 언어의 음운마저 사라지거나 변하였으며, 문물은 서로 교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 도자기공들은 일본 도예문화를 선도하였다.
백성들은 양반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평소 큰소리치며 군림하던 양반들이 왜군의 무력 앞에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 왜군과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 시작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원균의 조선 수군이 괴멸되자,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하며 호남으로 내려온다. 순천에 어머니를 모셔놓고 보성을 지나면서 남은 배 12척과 살아남은 수군을 모아 전라우수영이 있는 해남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명량대첩을 준비한다.
필자(筆者)가 지금 이 역사적인 내용을 여기에 싣는 것은, 반역향(叛逆鄕)으로 지목된 채 벼슬길마저 막힌 전라도 사람들이 그래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운 그 업적에 대해, 우리 전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애국적이며 충성어린 사람들인가를 밝히기 위함이다. 동학혁명도 그랬거니와, 명량대첩을 이룬 그 주체는 전라도 백성들이었다.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아니 하였다. 쌀 한 톨, 화살 하나 받는 일 없이 오직 해남과 진도 인근 전라도 백성들의 도움으로,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남을 해전을 준비한다. 이에 전라도 백성들은 여자들은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망을 보고, 노인들은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구워 군량(軍糧)을 대고, 장정들은 무기를 들었다. 지금도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따라가 보면, 반드시 넓은 농토가 있는 곳을 만난다. 군량미를 대기 위해 개척한 곳이다. 그리고 시누대라는,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밭을 본다.
진도에 가보면, 가장 높은 산 이름이 첨찰산(尖察山)이다. 날카롭게 살핀다는 이름의 산. 거기엔 왜적의 동정을 살피며 강강수월래를 부르던 아름다운 진도의 여인들이 있었고, 적의 침입을 알리던 봉화대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진도벽파진에서 마주 바라보면 해남 전라우수영이 있다. 이순신은 그 우수영에서 적을 기다린다.
200여척의 왜선(倭船)을 맞아 단 12척으로 적을 무찌른 전투는 세계 해전(海戰)의 공식을 바꾼다. 단순히 수와 무기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해류(海流)라는 자연의 힘을 이용한 전투는 그때까지 세계 어느 해전사(海戰史)에도 없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그 무거운 쇠밧줄을 거룻배에 싣고, 허리둘레만한 쇠말뚝조차도 휘어지는 거친 명량해협 속에 걸쳐놓는다. 지금의 과학기술로도 어렵다는 그 일을 오직 사람의 힘만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협 양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왜선이 몰려오는 순간 쇠밧줄을 당긴 것도 그들이었다. 무려 2백여 척의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그 엄청난 무게를 견디며 쇠밧줄을 당겼던 사람들.
명량대첩 승리 후, 왜군들은 패배를 자인(自認)하고 더 이상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이순신과의 싸움을 회피한다. 임진왜란 전쟁의 전체 판도가 바꾸어진 것이다.
전사(戰史)에는 해군의 사망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진도 십일시읍 근처에는 명량대첩 당시 사망한 무명용사의 묘역이 있다. 아마 배가 침몰하면서 물살에 떠내려 오던 왜군들이 인근 해안에 닿자, 그들과 싸우다 전사한 해남 진도 지역 사람들의 무덤일 것이다.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찾아가고,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지금도 진도 십일시 무명용사 묘역에 묻혀 있다.
반역향으로 손가락질 받던, 그리고 드넓은 평야지대로 인해 엄청난 수탈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갸륵한 죽음이었다. 이에 감격한 이순신은 若無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란 말을 남긴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으리라’
필자(筆者)는 명량대첩을 이룩한 전라도 백성들을 위해 한 편의 시를 쓴 바 있다. 총 4부에 이르는 이 장시(長詩)는 2003년 국가보훈처 공모전 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부끄러운 시(詩)지만, 오로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전라도 백성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실어본다.
-명량(鳴粱)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를 맞이함-
Ⅰ. 대적(待敵)
신(臣) 순신은 성은(聖恩)을 입어
이곳 전라우수영에서 원수를 기다립니다.
순천에서 보성을 지나 어란포로 오는 동안
12척의 배를 얻어
당당히 조선 수군의 위용을 갖추었으니
의로운 백성들은 하나같이 바닷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습니다.
어떤 이는 창을 들고
어떤 이는 톱을 들고
어떤 이는 소금 굽고
어떤 이는 강강수월래 부르면서 망을 봅니다.
신(臣) 순신은 행복하나이다.
이 백성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하여도
그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만년을 살 것이니
순신은 죽어서 영원히 살까 하옵니다.
Ⅱ. 결의(決意)
구월 이렛날
어란포에 들어온
적 전위부대 13척을
무찌르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오는 중
진도 벽파진을 바라보았나이다.
옛적 북방 유목민들이
금수강산을 유린하였을 때
황룡사는 불타오르고
왕조는 무릎을 꿇어
의(義)는 끊어지고
정기(精氣)는 꺾여
이 땅 이 하늘이 어찌 온전하였으리까.
중손(仲孫)은 당당한 檀國의 자손으로서
창의(倡義)의 기를 높이 올리며
이곳 벽파진에 와
고려 정통의 맥을 이어갔으니
그 때의 함성소리
명량바다에 깊이 배어
오늘밤
신명(神明)은 불을 밝혀
뱃길을 엽니다.
신(臣)의 불충(不忠)한 죄를 물어주소서.
섬 오랑캐가 들어온 지 어언 5년
칼 맞은 혼령들은 구천을 떠돌고
밤이면 세복지(洗腹池)를 찾아 배를 씻는 여인들.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찾고
아비 잃은 아이는 아비를 부르며
꿈길을 가는데,
신(臣)이 죽어서 산천이 산다면
저기 벽파진의 한 점 등불이 되어
물결 속에 사라지겠나이다.
Ⅲ. 전야(前夜)
신(臣)은 삼가 엎드려 오늘의 일을
고(告)하나이다.
원수사의 패전 이후 흩어진
병선과 군졸을 모으며
적을 기다린 지 2개월 여
그 적이 이곳에 이른다 하옵니다.
적이 심히 흉포하여 내일 일을 알 수 없어
신이 받은 여러 은혜를 기록하여 올리오니
하해 같은 성은을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위무(慰撫) 하소서.
이곳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뉘라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리까.
적은 백여 척의 전함을 몰고 온다 하옵니다.
12척의 병선을 이끄는 소신(小臣)을 따라
그들과 맞서 싸우려는 자 누구겠습니까.
장년들은 활을 메고
노인은 노를 저어
소년은 북을 치고
부녀자는 망을 보니
이같이 아리따운 일을
보고들은 적이 없나이다.
바다 남쪽에 사는 백성들은
적을 맞이함에 두려움이 없고
충성된 마음에 따를 자 없으니
농사를 지어 군량미에 대고
소금을 구워 팔아 군비를 장만하니
비록 공을 생각하여 관작을 내린다 한들
그것을 탐하여 싸우는 이 없어
혹여 주검이 있어 울어줄 이 없으면 울어주고
향화(香火) 올릴 이 없음에 한 곳에 묻어
죽어서도 흩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산 자들은 산 자들대로
죽은 자의 몫까지
서로를 돌보며 살되
이 바다 이 하늘
만세를 잇도록 오늘을 지키어
남기고 가오니 산하에 붉은 노을지거든
신(臣)이 보인 마지막 모습이라 일러주소서.
북쪽은
벌써 서리가 내린다 하니
우리 님군의 조석 안부를 누구에게 맡기리까.
창망하여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정유년 구월 열닷샛날
삼가 순신 배(拜)
Ⅳ. 승리(勝利)
오너라 구루시마여.
너였던가, 도도 다카토라여.
아리따운 내 백성의 피를 뿌리고
곱디 고운 내 형제의 목을 벤 자.
너희는 살아서 이 땅 이 바다를 벗어날 수 없다!
순신이 살아서
너희를 보고 있는 한
아무도 명량을 나가지 못하리니
천지여 신명이여.
보아주소서
이 맹세의 끝을!
바다가 끓어오른다.
군사들아 백성들아 나아가자.
원수는 목전에 총을 디민다.
쏘아라 백성들아
오오 바다가 돌아온다.
쇠사슬을 걸어라.
걸어라 걸어라 백성들아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불러라 여인들아.
소년아 너는 진군의 북을 울리고
쏘아라!
쏘아라!
쏘아라!
구루시마여,
순신은 보았노라.
더러운 너희 왜족의 피가
이 거룩한 바다에 씻겨 가는 것을
나는 들었노라.
너희의 비명소리가
명량을 지나
바다를 건너
괴수(魁首) 히데요시의 꿈을 깨뜨리는 것을!
구루시마여,
가서 일러라.
너희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나 역시 이 땅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조국의 해변가 어디일지라도
강강수월래 - 합창하는 아낙들이 모이고
소년은 다시 북채를 잡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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