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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편지요!"
자전거를 멈춘 우편배달부는 대문을 삐긋이 밀고 들어와 '새소식'이 왔음을 알렸다. 그리고 편지를 마루 위에 던져놓거나 우편함 속에 꽂아두고 대문 쪽으로 다시 등을 돌렸다.
마침 주인이 집에 있을 경우엔 간단한 수인사를 하곤 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은 '고생하신다'면서 시원한 사탕물 한 사발을 내놓았다. 자주 만나다 보니 남남같지도 않았을 거다.
사각의 조그만 우편함에는 시대상이 담겨 있다. 말없이 우두커니 늘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지만 세태 변화를 반영하는 또하나의 거울이다.
그랬다. 세상이 숨가쁘게 돌아가지 않은 얼마 전만 해도 우편함에는 주로 편지와 엽서, 신문이 옹기종기 어깨를 비비며 꽂혀 있었다.
정다운 이가 만년필이나 볼펜, 연필로 또박또박 써서 보낸 사연은 먼 길을 달려와 주인의 눈길을 기다렸다. 인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신문에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사람 살아가는 얘기들이 우편함에 도란도란 피어나고 있었던 셈이다. 손으로 써내려간 사연 속에서는 아카시아향처럼 글쓴이의 애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편지나 엽서가 없는 날에도 혹시나싶은 마음에 빈 우편함을 괜스레 열어 보곤 했다.
그런데 요즘 우편함엔 사람의 온기가 없다. 대신 돈의 차가움이 똬리를 틀고 소비자를 기다린다. 편지나 엽서는 사라진 지 오래고, 각종 공과금 납부청구서나 보험가입 안내유인물, 대형쇼핑몰 홍보전단지만 그득하다.
그 멋대가리 없는 우편물 뭉치를 누가 언제 우편함에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또 알려 하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우편함을 비긋이 열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설렘도 사라졌다. 사람은 없고 돈만 있다고 한 까닭이다.
아파트, 빌라같은 공동주택이 고층화, 밀집화하면서 우편함은 인정에서 더욱 멀어졌다. 얼굴 모를 배달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 복층식 닭장처럼 한 곳에 모여 있는 공동 우편함에 다다닥 우편물들을 꽂아놓고는 '왱!' 하는 엔진음과 함께 단지를 빠져나간다.
그런 우편배달부에게 냉수 한 잔 권하는 사람을 찾긴 힘들다. '고생하신다'는 수인사는 물론 없다.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모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다. 우편배달부는 포근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직무를 민첩하게 수행하는 '기능인'일 뿐이다.
우편함은 예전의 주 기능을 이메일과 전화기에 빼앗겼다. 소통 수단의 첨단화와 다양화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컴퓨터와 전화기로 소식을 주고 받을 뿐 더이상 수기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그만큼 생활이 기계화와 즉시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애련한 그리움과 풋풋한 기다림이 없는 것이다.
세상이 빠르고 편리하고 풍요로워졌는데 사람들의 외로움이 커져가는 것은 왜일까?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소외감도 커져가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들은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 시대의 따뜻함을 잃어버렸다. 광속의 이메일이 수시로 오가고 휴대전화기를 열어놓고 살다시피 하지만 그 기계들을 닫는 순간 공허가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까지 숨길 순 없다.
이유는 '사람'이 사라져서인 것 같다. 정감이 사라져 버려서인 것 같다. 내 가슴 속에서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사라졌듯이 그 누군가의 가슴에서도 나를 향한 그리움이 사라져 버려서인 것 같다.
현대문물은 편리성, 효율성, 즉시성을 '선물'로 주는 대신 따뜻함, 그리움, 넉넉함을 '답례'로 빼앗아갔다. 우린 과연 지난날보다 더 행복해졌는가. 22일 정보통신의 날(1994년까지는 '체신의 날')을 맞아 가져보는 단상이다.
id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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