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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백제 고위관리 묘지석 1천300여년 만에 찾았다

중국 시안서...당나라 최고위급 경비부대장 '예식진'
의자왕.부여융처럼 포로로 끌려간 후 고위직에 올라

중국 시안서..唐조정 최고위급 경비부대장 '예식진'
의자왕.부여융처럼 포로로 끌려간 후 고위직에 올라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높은 벼슬을 지낸 한 백제 고관의 묘지석(墓誌石)이 타계 1천300여년 만에 당나라의 수도였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출토됐다.
지난해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묘지석의 주인공은 백제 고위무관 출신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이라는 인물로 당나라 조정에서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의 정1품 관직인 좌평(佐平.장관급)이었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고관.장수들로서 그 묘지석이 중국에서 발견된 인물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흑치상지(黑齒常之),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예식진이 여섯 번째다.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최근호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뤄양(洛陽), 루산(魯山), 시안에서 출토된 당대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뤄양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의 공동집필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 전문이 인용된 묘지의 내용에 따르면, 예식진은 원래 백제 웅천(熊川.현재의 충남 공주) 사람으로서 관직이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인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다(藝多), 아버지는 좌평 사선(思善)이었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멸망케 한 당 고종 통치시기인 서기 672년(咸亨 3년) 5월25일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룽커우(龍口)인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11월21일 유해가 시안으로 운구돼 고관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됐다.
앞서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은 묘지에 기재된 내용과 기존의 역사서 등을 토대로 예식진이 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의자왕, 부여융 및 기타 왕족.대신.장수 등과 함께 포로가 돼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관직을 수여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백제 멸망 연도, 예식진의 향년 등으로 미루어 그가 46세 때 당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의 사망 장소가 현재의 산둥성인 이유에 대해서는 "조정이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끌려온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묘지의 전문을 검토한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새로운 백제 유민 관련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논문 저자들은 서두에서 "2006년 뤄양의 한 시장에, 시안에서 출토된 예식진의 묘지석이 나타났다...묘지석이 출토된 지역은 (시안시 창안<長安>구의) 궈두전(郭杜鎭)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모호하게 언급, 정확한 출토 시기와 지점, 발굴자는 물론 보관처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 저자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도 다른 곳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논문을 썼다. 아마도 작년에 출토됐을 것이다. 보관처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해 중국 문물당국이 아직은 이 묘지명의 공식적인 대외공개를 꺼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do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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