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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눈(The Painter's Eye)

약 15년 전 쯤 인가? 아주 우연히도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를 만났다. 신록이 우거진 5월, 하얀 솜털처럼 부드럽게 창문을 터치하며 수줍어하던 햇살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어느 날. 여행을 하던 열차 안에서 이 친구와 가벼운 농담을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운명적으로 필자를 미학의 세계로 인도했고, 예술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화가와 그의 눈(서광사)>이란 책이다. 화가 및 감식가이자 비평가인 모리스 그로써(Mauris Grosser)가 쓴 이 비평서는 1956년에 발간되었는데, 1987년에야 한국어로 번역되어 그 빼어난 자태를 대중 앞에 선보였다.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음악에는 신동(神童)이 있는데 왜 미술에는 신동이 없는가? 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에, 이 친구는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음악적 재능(talent)은, 심지어는 음악적 창의성조차도 아주 나이가 어린 단계에서도 나타나며. 4.5세밖에 되지 않는 음악 신동이 있다는 것은 드문 현상이 아니다. 이 재능은 성인이 되어서도 거의 차이가 없이 영속된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가 어린 아이였을 때 작곡한 음악과 그가 어른이 되어서 작곡한 음악 사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어디까지가 훌륭하게 훈련받은 재능 있는 어린아이의 작품이며, 어디서부터가 성숙한 모차르트가 보여주는 표현 또는 독창적인 창조물인가를 구별시켜줄 명확한 구별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차릴 수 없게시리 전자로부터 후자가 성장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경우는 다르다.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은 그가 어른이 되어서 그린 그림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화가의 경우에는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재적응, 즉 세계에 대한 자아의 재적응이 반드시 있는데, 이는 청년기에서야 비로소 일어난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외계를 느낀(feeling)다는 것이 외계를 본다(seeing)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어린아이는 그가 그리는 모든 것을 손으로 만지거나 숫자를 셈하는 것처럼 촉각적 부호로 나타낸다. 얼굴을 그릴 때, 어린 아이는 동그라미로 눈을 나타내고, 헝클어진 연필선 으로 머리카락을 나타낸다. 코는 밑부분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 삼각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눈동자는 둥글고, 머리카락은 가는 줄이나 철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고 손가락으로는 코가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p182-184 발췌) ( 여기서 ’feeling’이 ’느낀다‘로 번역되었는데, 필자 생각에는 감각한다(sensoring)로 번역되었다면, 원저자의 뜻을 좀 더 충실하게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김휘영 註)

어린아이가 그리는 그림은, 그가 보는(seeing) 세계가 아니라, 거기 있다고 그가 알고 있는 그러한 세계인 것이다. 반면에 어른이 그리는 것은 시각적인 세계이다. 어른은 거기 있다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눈으로 보도록 배운 것을 그린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화가의 기술이란 눈과 공간감각의 훈련에 달려 있고, 음악에 있어서처럼 매우 중요한 손과 기억의 훈련에 별로 좌우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가에게 필요한 기억력과 기민한 손놀림이 화가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실 화가에게는 자기 이름을 쓰는 정도의 근육의 기민성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화가란 눈으로 그리는 것이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시인이란 태어나는 것이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화가의 경우를 말하자면,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기술인 것이다. 그런 결과로 “회화에서의 창의성이란 것은 눈과 사고의 창의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눈과 마음, 따라서 세계에 대한 관점이 각기 다르다. 이것이 화가(painter)가 표현해야 하는 창의성이며, 이 진실하고 천부적인 독창력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화필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작품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p186)

감독의 눈(The Director's Eye)

바로 위의 마지막 문장은 영화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영상언어에서의 창의성이라는 것은 눈(eye)과 사고의 창의성에 달려 있다. 감독마다 눈과 마음, 따라서 세계에 대한 관점이 각기 다르다. 이것을 영화감독(director)이 표현해야 하는 창의성이며. 이 진실하고 천부적인 독창력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영상기법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작품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회화를 영상언어로, 화가를 영화감독으로, 그리고 화필을 영상기법으로 바꾸어 본 것이다. 어떤가?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정확하게 정의되는 문장으로 재탄생하고 있지 않은가?

강우석 감독의 눈(Gang's Eye)

강우석 감독이 만든 영화 ‘공공의 적(敵)’은 ‘충무로의 눈‘을 대표하고 있다. 이는 작품성이나 예술성보다는, 돈이 되면 어떤 소재나 어떤 주제라도 찍어 내겠다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눈이다. ‘공공의 적(敵)’에서 형사 강철중은 영락없이 감독 강우석의 눈이다. 논란이 되는 마지막 부분에서 공공의 지팡이 강철중이 규완과의 결투신이 끝나고 규완의 몸 위에다 흰가루(마약)을 뿌리는 장면은 논란이 많은데, 필자가 보기에는 강철중이 규완을 살인한 것이 분명하다. 이는 강우석 감독이 TV에 나와서 “그런 인간은 죽인다. ‘내(我)‘가 영화에서라도 반드시 죽이고 만다”라는 말로 확인해 준 것에 방점을 찍을 필요도 없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몸 위에 마약을 그렇게 많이(치사량 이상으로) 뿌려 놓으면 그게 감각기관, 특히 코에 영향을 끼쳐서 멀쩡한 사람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비평가의 눈-김휘영의 눈(Critic's Eye-Kim's Eye)

펀드 매니저 규완(이성재粉)이 사악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법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직접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평면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심층적으로 보면, 사실 규완은 강우석 감독이 가지고 있는 증오의 철학이나 특이한 세계관(세계를 보는 눈)을 피력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캐릭터 일 뿐이다. ‘감독의 눈(The Director's Eye)' 때문에 규완은 어쩔 수 없이 냉혈한이 되어야 했고, 더 나아가 친부모까지 잔인하게 살해하도록 설정되어졌을 뿐이다.

‘법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상대(antagonist)가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서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치자. 그 라스트 신은 절벽 위나 고층 빌딩 옥상 정도로 잡아서 해결하면 된다. 격렬한 격투신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그를 제압해 놓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스스로 악마적 본성을 표출하며 더욱 발악하다가 낭떠러지나 빌딩 아래로 추락사하는 구조로 간단히 해결된다. 빌딩옥상이나 절벽이 아닌 보통의 공간에서라면, 뾰쪽한 돌출부같은 것에 머리가 부딪치는 등의 우발적인-그러나 필연적인- 사고로 천벌을 받는 형식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면 최소한 공공의 지팡이가 공공의 킬러로 변하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자본의 눈과 투캅스 (The Capital's Eye & Two Cops)

그러나 강감독은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고 직접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대중의 감정에 철저히 영합해서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된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동건에 대한 별로 필요도 없는 수십번의 난도질도 같은 맥락이다. 작품성이 매우 높았던 영화 ‘친구’가 그 장면을 조금만 순화시켰더라면 어찌되었을까? 물론 관객들은 “고마해라, 마이무따아이가?”란 대사를 접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곽감독은 대종상에서 그렇게도 철저하게 외면받아야 했던 이상한 핑계꺼리-그렇다. 사실 명백한 핑계였다-를 사전에 차단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했을 것이다. 감독 비평가 관객 모두에게 중요한 관심사인 관객 동원수는 어떨까? 영화 ‘친구’의 경우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을 거라고 판단한다. 그건 필자가 명명한 '앨범영화(album movies)‘의 속성을 알면 더욱 그렇다.

필자가 충무로가 낳은 최악의 작품으로 ‘공공의 적(敵)‘을 꼽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 즉 ’강우석 감독의 눈(Kang's Eye)’에 있다. ’공공의 적(敵)‘에서 만들어낸 캐릭터인 규완은, 마치 진중권이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서 교묘한 목적으로 조작해 내는 파시즘만큼이나 위험하다.

충무로에서 최고의 자금력과 기획력 및 배급력을 갖춘 감독이 내놓은 영화라고 해서, 이런 저급한 영화가 스크린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것은 일종의 월권행위다. 또 강우석처럼 아까운 재능을 갖춘 감독이 이런 저급한 수준의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 영상예술계의 지나친 자원낭비며 강우석 감독 개인의 역사로 봐서도 매우 불미스러운 일로 기록될 것 같다.

'자본의 눈(Eye)'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악한 메시지를 담게 된 영화 ‘공공의 적(敵)‘이 한국에서 300만명 이상이 관람했다고 하니 그 폐해와 오염은 능히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이런 특이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가 독재자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 시절이 가장 전성기였다. 투캅스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강우석도 없었다고 할 만큼 그의 출세작이다. 가벼운 주제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영화였다. 요즘같이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는 시대였다면 투캅스가 능히 1000만명을 돌파하고도 남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후 실미도를 포함해서, 강우석 감독이 내어 놓은 그 어느 작품들도 ‘투캅스‘의 수준 가까이에도 못미쳤음은 너무나 안타깝다. 강감독의 세계관에 엄청난 변화를 갖게 한 그만의 특별한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도 충무로를 지배하게 된 거대 자본의 속성이, 강우석 감독이 지녔던 아까운 재능을 삼켜 버린 현상으로 풀이된다.

심형래 감독의 눈(Shim's Eye)

이에 비하면 심형래 감독의 눈은 그가 영화를 처음 선보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영구와 땡칠이’ ‘공룡쭈쭈‘ ’우뢰매‘ ’용가리‘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대한 심감독의 애정어린 시선이 오늘의 ’디워’라는 대작으로 열매를 맺은 것에 불과하다. 이 시선은 심형래감독이 충무로의 영화문법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줄 것이다. 더 행복한 것은 심감독의 열정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디워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축적한 노하우와 경험이 장래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를 확실하게 갖게 하기에,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눈은 너무나 행복하다.

CG와 안료

첫 미팅 때, 이 책 <화가와 그의 눈>이 내 시선을 확 끈 이유는 의외로 회화(Painting)에서 그 안료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색깔과 색(7章), 믿을 수 없는 안료들(8章) 등에서 상세하게 묘사한 바와 같이 회화의 발전에는 인디고 등의 안료와 색깔의 발전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의 두 번의 혁명 중 첫 번째 혁명은 미술가의 사상이나 소재의 변화가 아니라 1400년대 초, 반 다이크에 의한 유화(Oil Painting)기법의 시작에 의해서였다. 즉 기술이었다. 영화사에서도 기법의 발전이 다른 여타 영화의 예술성까지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지는 예(例)는 허다하다.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가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 건, 그 구성이나 예술성 못지않게 카메라 3대를 동시에 사용해서 현장을 사실감 있게 잡아내는 특별한 기법에 있음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영화 디워를 창조하는 동안, 심감독이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축적한 CG역량은, 회화에 있어서 이런 안료의 발전이나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카메라 사용기법보다 훨씬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평가된다. 적어도 한국영화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디워의 CG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무기와 비슷한 거대 파충류인 뱀이 출연하는 헐리우드 영화 아나콘다를 보았다. 아나콘다가 극중 총을 맞고 떨어지는 장면은, 마치 통나무가 뻣뻣하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실제 살아있는 생물인 아나콘다가 이랬는 데에 비해, 전설 속의 이무기인 브라퀴가 미공군의 폭격을 맞고 떨어지는 장면은 정말로 살아있는 생물체의 그것 같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진짜 주인공인 브라퀴의 명연기를 제대로 연출한 영화 <디워>의 제작진의 역량이다! 이것을 보며 전율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은 당연히 인간이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눈(Eye)이다.

두 미학자(美學者)의 눈(Two Aestheticians' Eyes)

몇 시간 동안 서고를 뒤져 이 책을 다시 찾았다. 먼지를 털어내고 꽃단장 시킨 채, 커피 향기 옆에서 재회하고 보니, 이 책의 공동번역자가 새삼스럽게 내 눈(Eye)에 클로즈업 되어 온다. 한 분은 오병남으로 당시 서울대 미학과 교수셨고 또 한 분은 신선주로 당시 서울대 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한 후, 스탠포드 대학 철학과 박사학위 과정으로 있었던 분이다. 그 당시에는 읽지도 않았던, 이 두 분이 서문(序文)에서 밝힌, 주안점을 보면서 더욱 놀라왔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디워 현상에 대한 ’진중권 현상‘(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상태로 전문가들의 영역에 나서 폭언까지 일삼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참으로 정확한 명언(名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중권의 눈-‘불치(不治)의 색맹(色盲)’(Jin's Eye - Incurable Color-Blind)

두 분은 연배상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진중권의 선배이자 은사이신듯 한데, 번역글이 아닌, 자신들의 주장을 드러낼 수 있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미학이론의 무용성을 말한다면 스스로의 문맹(文盲)을 퇴치하지 못한 결과다. 반면에 미학이론과 미적경험을 통한 비평 활동을 구분하지 못한 채, 작품에 대한 자기 일방적 재단을 한다면 그것은 ‘불치(不治)의 색맹(色盲)’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이다.(p10)” 그렇다. 색맹이 무엇인가? 색깔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문화평론가로서 문화를 보지 못하고, 영화평론가가 영상미학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색맹이다. 도저히 치유할 수 없는 ‘불치의 색맹(色盲)!’ 이보다 더 쉽고 정확하게 ’진중권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는 없다.

알량한 미학이론 몇 가락을 익혔다고 해서, 게다가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영화를 만드는 미적 경험 자체가 전무한 채, 전문가가 오랜 세월동안 역량을 축적하여 만들어낸 영화를 평하면서 ‘엉망진창’이니, ‘서사가 아예 없다’느니, ‘비평할 가치도 없다’느니, ‘독일도 프랑스로 못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등등의 헛소리를 해대는 진중권은 ‘불치(不治)의 색맹(色盲)’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예(例)라 하겠다.

4가지 코드와 사육제 코드(Four Codes & Carnval Code)

진중권은 디워현상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4가지 코드를 거론했다. 하지만 필자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불치의 색맹‘증세 때문에 도저히 볼 수 없었을 사육제(謝肉祭) 코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육제는 사순절(四旬節)로도 말해 지는데, 이를 한국식으로 말하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같은 대동제 코드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이미 우리가 월드컵 때에도 경험했던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코드다. 축제다운 축제문화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이 코드는 2002년 당시 전국을 열광으로 휩쓸었던 ‘대중의 자발적 참여‘ 현상을 너무나 잘 설명해 준다. 진중권이 ‘비평할 가치도 없다는 영화’라는 디워보다 더 많은 비평과 해석이 쏟아진 영화를 대한민국 영화 역사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필자는 이 디워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디워 현상에 할애한 이 시리즈로도 할 말이 턱없이 모자란다.

무법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디워를 제 입맛대로 재단하고 그것도 모자라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해서 악성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 쉽게 이야기하면 겨우 전시회 초반에 있는 작품에다 황칠을 하고 구정물까지 확 부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각기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순수하고 본원적인 권리마저 난도질당하고 말았다. 한국 문화 지식인계의 불한당, 아니 시사평론가 김석수의 지적대로 평론깡패란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진중권이 꼭 새겨들어야만 할, 두 서울대 미학과 선배님들의 말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병남, 신선주, 이 두 역자(譯者)는 ‘올바른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상태로 미학이론에 선 추상적 재단이란 실제의 작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른바 '황야의 무법자가 하는 총질'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화가와 그의 눈, 서문 p10 중간)라고 확실하게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

스스로 그 지적수준이 형편없는 ‘불치의 색맹(色盲)' 상태에 있으면서,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영화평론가라는 권총을 차고 대중 앞에 홀연히 나타나, 온갖 비속어와 무식함을 무차별적으로 난사(亂射)하는 ’황야의 무법자’가 바로 이 두 분의 제자이자 후배임을 알면 얼마나 낯이 뜨거울까?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네티즌들이 사과하면 받아 주겠노라!”며 도둑이 주인을 나무라고 훈계하는 짓까지 서슴없이 했음을 알면 또 어떤 상념이 드셨을까? / 김휘영(문화 평론가)

1. 서고에서 위 책을 찾아내느라 늦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표현이 다소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 일관된 내용을 유지하되 좀 더 매끄럽게 읽히도록 교정했음을 밝힙니다.

2. 글의 앞 부분에서 번역된 원문을 토씨하나 틀림없이 가져오는 것이 예의이나, 너무 오래된 책이라서 그 문체상, 독자의 이해도를 좀 더 높이기 위해서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3. '화가와 그의 눈'에 나온 원문에서는 색맹(色盲)이란 말이 'Color-Blind'가 아닌Illiteracy(문맹文盲)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원문을 확인할 수 없는 관계로 번역본에 충실했음을 밝힙니다--김휘영 註)

<디워와 심형래 감독의 영화문법(7-II부)>는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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