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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D-war)와 H-war, 용과 드래곤의 신화

디워의 시리즈 후속편을 기대하며


프로 레슬링과 참기름

197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박치기 왕' 김일이 TV에 출연해서 그의 호쾌한 박치기를 선보이는 날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린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두가 TV 앞에 앉아 환호했다. 아주 어린 시절이지만 필자도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 라는 거대한 몸집을 한 프로레슬링 선수와 김일 선수의 경기를 본 기억이 난다. 한데 어느 순간 프로 레슬링의 인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어릴 적에는 그 현상을 설명할 까닭을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우리 한국 사회를 헤엄쳐 오다 보니 한국인에게 프로레슬링이 일순간에 인기를 잃을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건 한국인들의 유교에서 오는 지나친 명분사상이 그 원인이었다고 판단된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음을 느끼지만 십 수 년 전 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한 것은 마치 탈레반의 원리주의 같은 과도한 명분사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프로레슬링은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이라는 말이 시중에 나 돌았고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시들해져 버린 것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 한국 사람들만큼 진짜-가짜에 민감한 사람이 있을까? <‘참(true)‘기름>이라는 이름으로도 모자라서 ’진짜‘ ’순’등의 온갖 접두어를 붙이고 또 붙이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가짜로 쇼를 선보이던 프로 레슬링이 사라져서 대한민국이 더 행복해졌는가 하면 필자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오락 스포츠 하나가 사라져 버린 일에 지나지 않음에 주목한다. 그 만큼 한국 사회의 행복지수가 떨어진 건 어김없는 사실이다.--이상은 필자가 곧 선보일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이라는 제목의 책에 서술된 내용이다.

한국 사회에서 지금 가짜 학위 열풍이 불고 있다. 이 진짜 찾기 및 가짜 배제하기 열풍에 우리 한국 사회는 김옥랑이라는 의식 있고 유능한 문화 인사 한 분과 뛰어난 연극배우 윤석화라는 귀중한 문화자산을 잃어 버렸다. 필자는 이 진짜 가짜 학위 사태의 광란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면서 현재 한국 사회의 삶이 너무나 팍팍해져서 이젠 기득권들조차도 살기가 벅차서 제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서 관용이나 여유를 잃고 있는 어두운 일면을 확인한다.

한국에서의 SF 영화와 심형래의 의의

또 영화에 관련해서 말하면 한국의 문화토양에서 SF영화가 성공하기란 참 힘든다. 한국 감독이 만든 영화가 성공하기는 더욱 힘든다. 그나마 유교적 정명사상이나 명분사상에 덜 세뇌된 신세대들이 많이 생겨서 좀 나아진 점은 있지만 아직도 한국의 주된 정신세계는 실용이나 실물의 논리가 아니라 지나친 명분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화 토양에서 10여년 이상 이 분야에 매진하여 그 성과물을 대중의 눈앞에 실물로 선보인 심형래와 영구아트는 한국 사회의 문화와 정신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해 버린 것으로 평가될 것이 틀림없다.(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논하겠다)

정보화 시대의 미학자와 문화 평론가

미학은 이론 공부로 완성되기 힘든 학문 체계다. 후천적으로 쌓아올린 지식이나 논리보다는 천재적인 직관이나 타고난 심미적 사유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다. 직관과 독창적인 사유능력이 결여된 채 미학을 논하다가는 늘상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라고 했고 알세튀르나 들레즈가 어떤 말을 했고 또 촘스키나 비트겐스타인에 의하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런 수준을 벗어날 길이 없다. 굳이 평을 매겨서 따지자면 별 두개 이하의 최악의 등급이다. 무엇보다 미학이론이 복잡한 수식이 있는 물리학도 아니고 의사처럼 특별한 기능의 수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학문이라서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하여 경쟁자로 나설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이런 훈고학적 지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도 나름대로 필요한 시대가 있긴 있었다. 잘 알다시피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일반 대중은 영국 왕립 도서관이나 서울대학교 깊숙이 있는 규장각의 관문을 통과하여 그 서책에 접근 할 수 있는 통로가 아예 차단되어 있었다. 이런 시절에는 그런 정도로라도 대중 앞에 누구누구의 이론이나 주장을 책이나 강의 노트용으로라도 요약해서 내어 놓는 방식으로 사회 일반에게 그 접근성의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열어주는 일도 일정 정도의 사회적 의의를 가질 수 있었다.

패러다임의 변화

하지만 요즘은 누구나 검색창을 통해 쉽게 국회 도서관, 아니 영국의 왕립도서관보다 수만 배나 더 방대한 도서관으로 직행할 수 있는 시대다. 검색어만 누르면 도서관에 가는 차비나 시간적 낭비 없이, 또 하루 종일 도서관 책 목록을 뒤지면서 책을 찾아서 수북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활자를 인식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렇게 지식접근성이 활짝 열린 시대에 지식인이 그런 수준과 그런 방식으로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은 자기 스스로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열심히 저명인사들의 말을 복사해서 남에게 내어 놓는 카피돌이 수준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진중권이 카피해 오는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문화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기라도 하면 그래도 참아 줄 만하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용어를 카피해 와서 그것만이 최고고 그 기준 때문에 남의 말은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사람들은 하품이 터져 나온다. 이 하품이 겨우 멈춰지고 있을 때, 괴이한 잡설로 ‘서사구조가 없다’ '사람이 안 울고 용이 운다'는 식의 ‘악성 이미지 메이킹’을 의도적으로 하고 있는 걸 보느라면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나 슬그머니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런 무식한 지식인의 폭력을 대하면서 일반 대중이 그것을 반론하여 그를 깨우쳐 주어야겠다는 행위는, 하늘로 오르려는 이무기가 용트림하는 것만큼이나 오히려 자연스럽다.

디워의 서사구조

디워를 비평하면서 ‘디워에 서사구조가 없다’ 란 주장을 하면 자신이 정말 무식한 사람이라는 걸 온천지에 광고하는 꼴이다. 아무리 그가 영화 디워가 싫고 이 영화의 흥행이 못마땅해서 의도적으로 흠을 잡으려고 해도 그 서사구조를 문제 삼다니 정말 황당하다. 진중권은 영화나 문학 더 나아가 변희재의 지적대로 미학 자체에 대한 기본기가 안 갖춰진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백번 지당하다. 미학이야 그의 전공으로 공부는 한국 사람들 중 많이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런 무식한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고 있는 걸 보면, 이게 진중권 자체의 내적 한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즉 심미안이 없거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야 아무리 어떤 목적의식으로 TV에 출연했다고 해도 자신의 내적한계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지혜 정도는 가지고 있으리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디워는 진중권의 무식에서 나온 지적대로 서사구조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훌륭한 서사구조를 갖고도 그 정도로 밖에 못 살려내었는가 하는 비평이 오히려 어울리는 영화다.

인간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원형으로 시간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버전을 가지고 구전되던 이야기 얼개들 중에서도 서사구조가 특별히 탄탄한 것들만 신화나 전설의 지위에 자리매김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영화 디워에서 인간 연기자들, 특히 이든의 뻣뻣한 연기가 미흡했음은 아쉽다. 하지만 그 연기의 어색함이 탄탄한 서사구조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찬탄을 내질렀던 일에서도 증명된다. 한국의 이무기 전설에서 기초한 너무나 치밀하고 탄탄한 서사구조와 세계인 모두가 감탄할 만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탄생된 진정한 주인공인 부라퀴의 명연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가 탄탄한 생명력을 얻고 있다.

드래곤과 용

베오울프, 니벨룽겐의 반지 등에 나오는 용의 형상은 흡사 징그럽고 강한 인상의 코모도가 수십 배로 확장된 모습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의 용(龍)은 12가지의 각종 동물들의 이미지가 합성된 형상이다. 사슴의 뿔, 호랑이의 눈, 뱀의 혀 등이 조합되어 나타난 형상이다. 가장 확연한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배(Stomach)다. 서양의 드래곤은 배가 남산만큼 부르다. 반면에 동양의 용은 마치 S-라인을 그리는 몸매의 여인처럼 시원하고 늘씬하다.

필자는 저렇게 비만한 드래곤의 배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서양인들의 물질제일주의에서 발원하는 끝없는 탐욕이 그득히 또아리를 틀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반면에 동양 용(龍)에서 보는 전혀 군더더기 없이 슬림한 배에는 동양인들의 높은 정신세계가 담겨있다. 12가지 동물이 조합된 형상에서도 보다시피 주위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정신, 욕망의 절제나 자기 극복을 통해 도달하려는 높은 정신적인 경지가 들어 있다.

서양의 드래곤은 서양 사람들의 물질적 탐욕과 그 소유욕을 극한도로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동양의 용은 동양인들이 닮고 싶은 이상적인 모델이자 궁극의 지향점이다. 그런 이유로 서양의 드래곤은 인간 속 깊숙이 숨겨진 탐욕이 감춰져 있는 읍습한 동굴 속에 살 수밖에 없다. 반면에 동양의 용은 세속을 떠나 푸른 창공에서 구름위의 산책을 즐기는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무기(Imoogi)

서양의 용은 어떤 서사적 영웅의 출현에 의해 죽어야 하는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에
동양의 용은 고고하게 창천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인간세상이 질서를 잃고 극도로 혼란의 상태에 빠져 민중이 도탄에 허덕일 때, 한 번씩 나타나 인간 사회의 혼란을 초래한 범인을 직접 심판하는 구원자(Saint)다. 디워에서 선한 이무기의 역할이 그것이다. 심형래 감독은 한국의 전설 중에서 특별히 이무기에 주목했는데 이는 참으로 참신하고 멋진 문화콘텐츠임에 틀림없다. 일단 이무기는 용보다는 훨씬 다양한 컨셉과 버전이 있어서 영화적 서사구조로 가공하기에 좋고 또 이무기가 갖고 있는 신화적 코드 또한 한 개로 정형화 되어 있지 않아서 좋다. 이 점은 영화 ‘왕의 남자’처럼 관객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감정이입을 하여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뛰어난 문화 아이콘이다. 하지만 심형래 감독은 이 지점에서 이런 다양한 코드를 완전히 살려 내지 못함으로 해서 수백억불짜리가 될 수 있었던 영화를 희망 수익치 수억 불짜리 영화에 머무르게 하는 중요한 실수를 하고 말았음은 아쉽다.

D-War와 H-war

왜 주인공들의 역할이 그것밖에 안되며 용이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며 그건 아리스토텔레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관점에서 보아서 형편없는 서사구조라고 말하고 있는 진중권은 위의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이 가지는 신화적 코드의 차이점 해석할 수 없는 지독한 무식에서 출발한다. 진중권이 신화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상태임은 필자가 쓴 '조셉 캠벨의 신화와 진중권의 지적 사기'란 글에서 잘 논증해 놓았다.

세계가 극찬한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가 왜 디워의 여의주 같은 코드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졌는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이동진 기자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 반지는 현대사회의 원자폭탄을 의미한다고 했던 지적도 매우 참신한 발상이라 새겨볼 만하다. 하지만 실제로 절대반지가 파괴되어야 세계가 평화로워지는 구조의 원형은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된 북유럽 신화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오딘과 토르 등의 신과 거인족의 영웅들이 중심으로 활약하는 북유럽 신화를 읽어 보라. 여기서 반지는 하나같이 저주가 담긴 물건이다. 그 반지를 소유한 자에게는 재앙을 안겨다 준다. 놀라지 마라! 이 구조는 중세 신화에 까지 어김없이 이어진다. 지그프리트의 영웅서사시를 담은 중세 신화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라인 강 밑바닥에서 세 처녀가 지키고 있던 황금을 훔쳐내어 그것으로 가락지를 만들었는데, 그 가락지에는 저주가 담겨 있어 차례로 비극이 생긴다. 즉 가락지는 세계지배를 상징한 것으로, 이 황금 가락지를 둘러싼 장기간의 투쟁이 있은 후, 마지막에는 신(神)들도, 소인(小人)들도, 영웅들도 모두 멸망하고 구(舊)세계는 몰락하고 만다.”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신, 영웅, 소인의 구도나, 반지의 제왕에 설정된 중간계도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스가르드, 미드가르드, 요툰하임 (또는 니플하임)의 구조에서 따왔고 호빗족도 신화 속의 소인족(小人族) 코드에서 나왔다.

반지의 제왕에 설정된 중간계도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스가르드, 미드가르드, 요툰하임 (또는 니플하임)의 구조에서 따왔고 호빗족도 신화 속의 소인족(小人族)에서 따왔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무식을 폭로하면서 까지 비평 아닌 비난을 한 문화평론가 진중권의 우스꽝스러움은 이런 신화 전설 등의 의미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거나 또는 여러 단편적인 지식을 접했다 해도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자기 자신의 내적 한계에서 출발한다.

용과 드래곤의 신화코드

필자는 영화 디워에 나오는 선한 이무기가 왜 인간대신 인간세계의 무질서를 회복시켜주고 하늘로 승천하는 구조가 되어야 하는지를 위의 드래곤과 용의 서사구조가 갖는 의식의 원형을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지점에서는 우리 동양인들이 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오랫동안 응축시켜 왔던 이 원형을 고도의 영상 언어로 충실하게 살려낸 심형래 감독과 영구아트야말로 진정으로 뛰어난 미학자들이다. 게다가 디워는 D-WAR이지 H-WAR가 아니다. 즉 DRAGON-WAR이지 HUMAN WAR가 아니다. 말 그대로 이무기와 용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인간은 조연의 역할에 머물러야 하는 신화적 필연성이 있는 영화다. 즉 서양 신화인 '베오울프'나 '니벨룽겐의 반지'속에 나오는 드래곤은 말 그대로 흉물(Monstrous Creature)이다. 드래곤은 언제나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역할로 나오고 그 질서는 드래곤의 죽음이나 극복으로 회복된다.

동양에서 출현하는 용은 언제나 인간질서의 회복과 완성을 지향하거나 은혜나 구원의 역할로 등장한다. 즉 동양의 용은 그 자체가 초월적 존재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에 의해 극복되면서 피를 토하고 죽어야 하는 영웅적 서사시 속의 조연물이 아니다. 간혹 동양에서 변형버전으로 출현하는 용 신화에서도 사악한 용이 출몰해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이때의 용은 주로 악을 상징하는 검은 색을 띠고 나온다. 이때도 이 흑룡을 죽이는 임무는 인간이 아니라 선을 집행하는 신적인 영물인 다른 용이 맡고 있다. 영화 디워에서는 부라퀴가 악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색깔을 검은 색으로 하지 않은 것은 다소 유감이다. 하지만 아주 섬세한 피부의 움직임까지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최상급의 CG기술을 가진 영구아트 측의 입장도 이해된다. 만약 부라퀴를 검은색으로 했다면 미세한 피부 부분을 드러내는 효과가 반감되었을 것이고 이는 신화적 코드에 너무 집착하여 소탐대실하는 결과를 낳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디워 II, 디워 III 를 갈망하며

심형래 감독이 진중권이라는 무식한 문화평론가의 시각처럼 인간의 활약상을 용의 활약상보다 더 많이 부각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천만다행이다. 이는 동양의 신화 속 영물인 용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왜곡해서 전파하는 일이다. 실제로 영화 디워가 가진 한계는 인간의 활약상이 적어서가 아니라 선한 이무기의 역할이 너무 적었음에 있다. 국내 및 해외에서도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도 있었던 디워가 아쉽게도 이 정도에 머무른 것은 한국 영화와 영화산업의 발전을 기원하는 본인의 입장에서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디워가 종영된 이후에 대중 앞에 자세히 선보이겠다. 일단 내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먼저 영화 디워를 관람해 주기를 바란다) 물론 이 정도라도 매우 훌륭한 영화라는 건 충분히 인정한다.

세계의 하늘로 승천해야만 했던 동양의 신화, 용(Ryoung)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서양의 드래곤(Dragon)이라는 단어에 가려져 빛을 못보고 있는 점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데 그나마 한국의 이무기(Imoogi)라도 서양인들, 아니 전 세계인들의 시야에 드러난 건 오로지 심형래 감독과 영구아트의 힘이다. 그들에게 존경과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필자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디워가 흥행에 성공하고 그래서 그 역량으로 곧 디워 II, 디워 III 도 나와서 세계 시장을 무대로 맘껏 승천하는 이무기를 보았으면 하는 강렬한 바램을 갖고 있다.(4부 끝)


* 김휘영 <문화 평론가>
서울대 상대 졸업(경제학사) 영어영문학사 획득(독학)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근간)'이라는 책으로 한국 문화 전반에 걸친 신랄한 해부와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여 한국 사회에 자그마한 등불을 비추는 시도를 하고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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