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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와 심형래 감독의 영화문법

'디워' 한편으로 열등감을 날려버린 심형래


메이저리그와 한국

미국의 메이저리그가 2007년 한 해 동안 TV 중계권료 등의 이유로 1억 달러 이상을 벌어갔다. 한국시장에서 이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가면서도 왜 이렇게 메이저리그가 한국을 홀대하느냐? 메이저리그가 한국을 위해 해 준 일이 뭐가 있느냐?“ 고 한국의 기자가 볼멘 목소리로 항의성 질문을 하니까, 대뜸 한다는 말이 “한국 사람들이 메이저리그 같은 수준 높은 경기를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냐?” 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건 명백한 실화다. 한국은 메이저리그에 이렇게 엄청난 투자 아닌 투자를 하고서도 고작 이런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이를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있다. 한국보다 그 국가적 위상에서 훨씬 떨어지는 푸에르토리코,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등 이런 나라에는 팜 스프링 같은 시스템을 갖추고 야구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하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는 늘 이런 식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비교해도 한국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박찬호 김병현 최희섭 등의 활약과 일본 출신 메이저리그인 스즈키 이치로, 히데키 마쓰이,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의 활약상이 확연히 차이가 났기 때문임도 부인할 수 없다. 도미니카 공화국 또는 푸에르토리코 등의 출신인 페드로 마르티네즈나 알렉스 로드리게스 급의 스포츠 엔터테이너를 배출해 내지 못하는 한, 한국에 대한 이런 푸대접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 어쩌면 이 분야에서는 한국이 아무리 전성기의 박찬호 같은 선수를 많이 만들어 낸다고 할 손 어차피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일 지도 모른다.

헐리우드 영화 1편과 한국의 1위 기업

슈퍼맨, 배트맨, 죠스, 스파이더맨, 터미네이터, ET, 쥬라기 공원,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트랜스포머 등 나열하기도 힘들만치 수많은 헐리우드산 블록버스터들이 한국의 영화시장을 뒤흔들어 놓고 지나갔다. 각 원작에 그 시리즈물까지 꼽으라면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란다. 1년 주기로 살펴보면 많이 출품되지도 않는다. 단 한편이면 족하다. 그러나 그 위력은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가히 허리케인이고 쓰나미다. 단 한편으로 전 세계시장을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참혹하게 널브러진 잔해들을 정리하느라고 바빴다.

‘헐리우드가 <쥬라기 공원> 단 한편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대한민국의 현대 자동차가 1년 내내 전 세계에 수출해서 벌어들인 이익을 넘는다’는 믿기 어려운 몇몇 신문 칼럼이 나오고, 이런 현상을 다룬 심포지움은 부러움 반 질투심 반의 분석으로 중반을 수놓다가 그 피날레는 늘 경탄과 한탄의 이중주로 연주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쓰나미가 1년에 한번이 아니라 2-3번이 될 정도로 자주 들이 닥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가 매년 한국시장을 휩쓸고 지나가면 곧 <스파이더맨3>나 <트랜스포머>등이 따라온다. 이들이 주도하는 요란한 축제가 끝난 후, 어김없이 이런 신문기사가 또 한국사회를 울린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삼성전자가 1년 내내 벌어들인 수익을 넘어섰다‘ 단지 차이라면 ’현대자동차‘에서 ’삼성전자 또는 삼성반도체‘로 바뀔 뿐이다.

숫제 이런 기사를 하도 많이 봐서인지 이제는 놀라는 일이 어색할 정도로 체념과 패배주의가 한국인들과 특히 한국의 영화산업관계자들을 지배했다.

충무로의 영화 문법

그나마 최근 몇 년간의 한국 시장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올드 보이>의 최민식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전 영화산업관계인이 일치단결하여 애국심마케팅으로 ‘스크린 쿼터사수 결의집회‘를 연 것이 주효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산 영화 <왕의 남자>나 <괴물>이 1200만 고지를 넘어서면서 한국의 영화시장은 인도시장과 함께 전 세계에서 자국영화 점유율이 헐리우드 영화의 잠식률을 넘어선 유이무삼(唯二無三)한 국가다. 한데 그건 그야말로 ’한국만의 리그’요 ’주머닛돈이 쌈짓돈‘ 이라는 사실은 애써 신경 쓰지 않아야만 그나마 자위(自慰)라도 할 수 있다.

이런 체념과 패배주의는 충무로 특유의 무사안일주의와 결합해서 특이한 흥행공식 하나를 만들어 냈다. 이 공식은 <조폭 마누라> <두사부 일체> <가문의 영광>을 만들어 내었고 또 흥행에서도 상당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폭 마누라>가 I, II, III 까지 나오고, 또 <두사부일체>가 <투사부일체>로 옷만 갈아입고, <가문의 영광>은 <가문의 위기>에서 <가문의 부활>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공공의 적(敵)

아니, 필자가 충무로에서 나온 최악의 영화로 꼽는 <공공의 적>조차도 <공공의 적2>로 다시 관객 앞에 나타났을 때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는 말을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공공의 적(敵)’에서는 공공업무를 수행하는 형사가 범인을 자의로 죽여 놓고 그 위에 밀가루를 뿌려 증거를 은폐하는 장면을 그려냄으로써 ’공공의 적(敵)’을 일순간 ‘사사로운 감정의 적(敵)‘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CSI 과학 수사대처럼 철저한 과학수사로 획득한 증거로 ’공공의 적’을 처벌하지 않고, 형사가 일순간 킬러로 변신하면서 결말을 맺는 그 순간만은, 영락없이 진중권이 언급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 다만 서사구조 자체(시나리오)가 엉망인 영화에서 주연배우였던 이성재와 설경구의 연기가 워낙 뛰어났었기에, 이 영화에 깃든 악마성을 일반 관객들이 읽어 내기란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개인의 원한을 사적으로 해결하는 사회는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아니라 야만으로의 회귀요, 짐슴들이 사는 사회가 되고 만다. 이런 사회에서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원을 푸는 상생해원(相生解寃)의 사회가 아니라 힘있고 권세 좋은 야수들이 활개치는 저주스러운 사회가 될 뿐이다. 얼마 전 한 재벌 총수님이 총까지 들고 아들의 복수극을 벌이며 ‘고매한 부성애‘를 과시한 일이 화제가 된 건, 혹시 이런 영화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절로 들 정도다. 그나마 영화 <공공의 적(敵)>보다 훨씬 저예산이 들어가는 드라마에서 모처럼 보는 수작(秀作)이었던 <마왕>과 또 공지영의 탄탄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볼 수 있었기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건강성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럽다.

스쿼린쿼터와 영화인들의 의무

‘스쿼린 쿼터 사수를 외치면서 한국관객에게 한국영화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런 영화를 관중 앞에 내어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가 한국관객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니 특별한 사랑을 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한국 관객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감도 져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런 영화를 내어놓는 사람들은 영화의 최종 소비자들인 관객들과 한국의 영화 평론가들을 아예 무시하고 있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힘없는 관객들이야 그렇다 치고, 그동안 제대로 된 비평보다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비평을 해 온 평론가들은 스스로 무시당할 일을 해온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알아보니, <공공의 적(敵)>을 만든 감독은 1996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한국영화 Power 100人‘에서 1위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강우석 감독이었다. 기획력, 자금력, 배급력에서 강우석 감독정도면 영화평론가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그 붓끝을 무디게 할 정도의 인물이자 한국 영화산업의 최고 권력가라는 점은 나중에 알았다. “강우석의 동의와 지원 없이는 충무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국 영화의 <공공의 적(敵)>은 누구인가?‘ / 趙熙文-상명대 교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충무로의 절대자 강우석. 하지만 그가 그의 라이벌인 강제규 감독이 한국 영화사에서 부흥기를 이끈 영화 <쉬리, (1999)>나 <은행나무침대><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여준 철학적 메시지의 구현이나 셈세한 영상미학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에 대단히 회의적이다. 다만 이번 디워 논쟁에서도 디워의 배급사가 강우석의 라이벌인 강제규 감독이 출품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배급한 <쇼박스>라는 사실, 그리고 이 배급사 <쇼박스>가 강우석 감독이 가진 배급사와 경쟁하는 라이벌이라는 중첩관계에 있다는 사실과도 결코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강우석 감독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영화 디워 혹평에서 흐르고 있는 권력관계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디워에 대한 혹평의 배경에는 충무로의 권력관계 뿐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권력의 함수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즘은 반 대중들도 다 안다.

댄젤 워싱턴

참혹함과 동시에 무개념 무철학 영화를 만들어서 흥행까지 성공시켜 우리 사회를 오염시켜 놓고 그 감독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낯이 뜨거워서인지 되뇐다. “그런 놈은 죽인다. 그런 놈은 내가 영화 속에서라도 반드시 죽이고야 만다!” 맨 온 파이어 (Man On Fire, 2004)에서 유괴당한 어린이의 복수극을 열연한 댄젤 워싱톤(Denzel Washington)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피력한다.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사로운 복수극을 벌이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두 사람의 말은 영화 속의 사정을 감안하면 더욱 더 역설적이다. 적어도 영화 <맨 온 파이어> 속의 댄젤 워싱톤은 전직(前職) CIA, 그것도 정직원도 아닌 스파이이자 자객이었던 신분이었지만, <공공의 적(敵)>속의 설경구는 엄연히 공직을 수행하고 있는 현직 형사였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도 이런 구조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유괴범인 백선생의 죄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등,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고서도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사적인 원한을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되갚는다. 다만 이 잔혹한 복수극이 ‘공공의 적(敵)‘보다 나았던 점을 애써 찾으라면 적어도 그들은 형사가 아니라 피해자들 신분이었고, 극 전개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군상(群像)들의 리얼리티를 그려내는 기교에서 조금이라도 성공하고 있는 정도다.

영화평론가들의 의무

적어도 디워는 이런 영화들에 비하면 일단 소재나 그 서사구조, 그리고 주제의식에서도 훨씬 양질의 영화다. 진중권의 말대로 평론가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비평을 해서 그 피드백 기능으로 이 사회에 좀 더 양질의 영화를 내놓기를 바란다면, 바로 이런 ‘공공의 적(敵)’이나 ‘친절한 금자씨’ 같은 영화를 신랄하게 비평해서 우리 사회에 적게 나오도록 걸러 주는 역할을 해야 오히려 옳다. 이런 영화에 조용하던 사람들이 이들보다 훨씬 양질의 영화인 디워에 대해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혹평을 퍼붓다니 실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디워의 브라퀴보다 수만배나 사악한 메시지를 저주처럼 퍼뜨리는 영화 <공공의 적(敵)>에도 조용했던 사람들이 단지 디워에 드러난 몇몇 연출상의 미미점을 빌미로 전혀 엉뚱하게도
'비평할 가치도 없는 영화'라느니 ‘서사구조가 없다’라는 헛소리를 해대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

진중권을 딜레마에 밀어넣기

그렇게 말하는 진중권을 상대하는 간단명료하지만 진중권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방법을 하나 소개한다. 나는 진중권의 상대패널들이 진중권에게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된다. “디워에서 서사구조가 아예 없다는 진교수님께 묻습니다. 그럼 진중권 겸임교수가 생각하는 서사구조란 무엇입니까?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중권은 서사구조를 정의하는 방식에서 그의 완벽한 무식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그 과정에서 디워가 너무나 훌륭한 서사구조를 갖춘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 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서사구조란 진중권이 말하는 식의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런 주장을 부끄러움도 없이 대중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진중권이 가진 내적한계 즉 ‘진중권의 상상할 수도 없는 무식함’에서 온다. 어떤 사람은 서사구조란 시간의 전개에 따른 이야기의 흐름 정도로 정의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 김경수 역, 민음사>이란 책을 권한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는 <시모어 채트먼>의 'Story and Discourse: Narrative Structure in Fiction and Film'을 완역한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서사물의 필수요소는 이야기(내용,) 사건들 및 존재하는 것들, 그리고 담화(표현, 내용이 전달되는 수단)다. 이야기는 서사물에서 묘사되는 무엇이고, 담화는 서사적 표현의 형식, 즉 어떻게(how)이다.

충무로의 위기와 영화 디워

충무로는 모처럼 맞은 한국 영화의 ‘영광‘과 ‘부활‘을 ‘빈곤한 상상력과 무사안일을 답습하는 덫’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스스로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때 <디워>와 <화려한 휴가>두 영화가 등장하여 한국 영화를 일시적인 위기에서 구원해 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 중에서도 디워는 한국 영화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천편일률 같은 메뉴에 점점 관객들이 식상해 하면서 점점 영화관으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있을 때, 즉 한국 영화가 위기일발에 처했을 때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심형래 감독이다. 게다가 그가 출품한 영화 디워는 그동안 충무로가 구축해 놓은 공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관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면서 즐기고 찬탄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패배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심형래 감독은 한국관객들이 갖고 있던 그 복잡미묘한 열패감을 ‘디워‘ 한편으로 하늘 위로 날려 버린 것이다. 전설 속에 가려져 있다 모습을 드러낸 이무기 만큼이나 새롭고 신선한 발상,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친구와 화려한 휴가
무식한 비평가들의 무자비한 폭악적 권력에 대한 유식하고 의식있는 관객들의 저항은 어쩌면 영화 ‘친구’가 대종상에서 철저히 외면 받았을 때부터 내정된 일이었다. (7부 I 끝)
(계속--7부 II는 내일 계속됩니다)

/ 김휘영 (문화평론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경제학사)를 졸업했다. 문학에 관심을 가져 내친 김에 독학사로 문학사 자격을 획득했다. 한동안 대자보와 진보누리 등에서 활발한 문화평론 활동을 펼치다가 최근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신랄하게 해부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바램을 갖고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을 집필 중이다.

(P.S : 필자와 관련하여 학력위조 논란이 있는 모양인데 필자는 학력위조와는 무관하며,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는 글은 단 한편도 쓴 적이 없음을 밝히며 이에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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