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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 논란과 점차 화석화되는 파시즘 논리

더 이상, 대중선동이 먹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장미의 이름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변함없는 향기를 내뿜는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에 나오는 명구다. 매우 문학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이 명제가 진리일까? 전문가적 시각으로 대답하면 아니다(No!)가 정답이다. 장미에다가 호박꽃이라 이름지으면 호박꽃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장미 자체와 그 본질을 파악하는데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아무리 장미 비슷한 등급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지만 그 꽃이 대중에게 선보여지는 초창기에 누군가 제법 권위 있어 보이는 사람이 나서서 그 꽃을 '쓰레기꽃'이나 '엉망진창꽃'이라는 이름을 달아 대중 앞에 크게 어필한다면 그 이미지는 심하게 훼손되고 만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명예회복의 기회를 영영 갖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일정한 상영기간의 제한이 있는 영화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필자가 보기에 너무나 잔인한 이름이 붙여진 경우를 꼽으라면 '할미꽃'이다)

진중권이라는 이상한 문화평론가가 영화 디워를 두고 한 짓이 바로 이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호하지만 디워의 중요한 내용까지 말하는 소위 스포일러 짓까지 했다. 이는 신문사 견습기자조차도 하지 않는 몰상식 그 자체다. 때문에 그는 문화를 평할 수 있는 기본 자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지극히 당연하다.

용의 눈물

물론 진정으로 장미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라면 언젠가는 그 지위를 회복할 가능성은 가지고 있겠지만 이런 악성 이미지 메이킹이 짧은 시간에 스크린을 통해 대중의 눈앞에 방영되고서 그 결과물을 성취해서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영화라는 문화(상품)이라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혀 근거 없는 흑색선전에 의해서 낙선을 하고만 후보자가 나중에 그 마타도어가 흑색선전이라고 밝혀진다 한들 그 상처를 회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진중권이 문화평론가란 패널로 나와서 의도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던 '영구없다' '서사구조가 없다' 또 '사람이 안우니 용이 운다' 등의 발언은 한국 영화에 발전이 있으려면 평론가가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는 충정에서 나온 고언이 아니라는 건 일반 대중이 다 안다. 그는 비평이 아닌 비난을 했고 의도적으로 디워의 작품성을 까내리고 디워의 흥행을 방해하려고 의도적인 악성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일에 앞장 섰다.

악성 이미지 메이킹

이런 악성 이미지 메이킹으로 자신의 주장에 논리나 근거가 박약함을 숨기려는 시도는 진중권이 쓴 거의 모든 글에서 드러난다. 과거에 마광수 교수의 글을 보면서 그가 말하는 내용을 떠나 필자는 그를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는 연세대에서 '수사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마교수는 주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을 집약하고 있는 용어 앞에는 화사한 벚꽃을 뿌려놓는다. '건강한' '밝은' '세련된' 등의 각종 좋은 이미지를 가진 형용사로 치장하여 그의 글을 읽는 독자가 마치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주장에는 좋은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그가 공격하고자 하는 테제 앞에는 언제나 '음습한' '칙칙한' 등의 어두운 이미지를 주는 형용사를 입힘으로써 그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다. 그런데 그런 용어들과 그런 형용사가 어떤 논리적 합치성이나 논리전개상의 필연성을 갖고 있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조금만 자세히 쳐다보면 너무나 억지스러워서 마광수 교수의 작위적 장치임을 쉽게 알아차린다. 예를 들어 마광수 교수가 글 전개의 필요상 휴머니즘을 공격하고 싶다면 '값싼 휴머니즘'이란 표현을 쓰는 식이다. 이 경우, 비판적 사유능력이 좀 약한 일단 독자들은 휴머니즘이 가진 본래적 의미보다는 그걸 수식하고 있는 '값싼'이라는 형용사가 주는 이미지에 농락당하게 된다. 여기서 휴머니즘이 왜 싸구려인가 하는 이유는 당연히 밝히지 않는다. 대중이 그 수법에 농락당하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의미보다는 이미지(IMAGE)가 훨씬 투사능력이 빠르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광수 교수의 글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가 사용하는 용어 앞에 있는 '이런 이상한 형용사들'을 하나하나 가지치기 하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진중권의 이미지 메이킹 수법

마광수 교수가 즐겨 사용한 수법은 최근 대중 앞에 나타난 진중권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신사적이다. 진중권은 이런 점에서 훨씬 교활하고 정치적이다. 강준만은 진중권의 이런 글쓰기 형태를 '강간범의 글쓰기'라 칭했다. 즉 진중권의 품성이나 매너가 상종하지 못할 만큼 저질이라는 말을 빙 돌려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진단해 본 결과 진중권의 글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진단이 진짜로 저급하고 엉망진창인 까닭은 그의 품성보다는 근본적으로 진중권이 너무나 무식한 것이 근본원인이라는 결론을 상당히 오래 전에 내렸다.

진중권의 글을 보면 자신이 공격하려는 용어나 현상 앞에는 언제나 논리나 이유보다는 '조중동식' '박정희식' '전두환식' '파시즘적' '반지성적' ‘히틀러식’ 이런 황당하고 정치적인 용어를 갖다 붙인다. 그리고 상대를 비하하는 내용인 '--빠' '--까' 이런 용어를 마치 그가 황당하게 평론한 영화 '혈의 누'에 나오는 사람 죽이는 방식인 창호지로 얼굴에 붙이듯 상대가 숨이 넘어갈 때까지 더덕더덕 갖다 붙인다. 그리고 자신이 내세우는 말도 안되는 엉터리 주장이나 내용 앞에는 한결같이 '소수자 대변', '지성','다양성', '반파시즘' 이런 말로 위장한다. 사회현상을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으로 대중들이 알기 쉽게 해석해 내서 대중들 앞에 빛과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다. 대신 역겨움과 싸움을 유발시키고 자신은 그 노이즈 마케팅에서 '쓰레기처럼 길바닥에 떨어지는 전리품'을 줍는 일에 기꺼이 허리를 구부린다.

제리 스프링어쇼(Jerry Springer Show)

전리품들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 각종 미디어에 끌고가 진중권이 출연하면 이렇게 흥행이 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물론, 신문사나 방송국로 봐서도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신문사나 방송국 관계자들이 진중권을 불러들이는 건 그가 가진 식견이나 분석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진중권이라는 얼치기 지식인을 소위 삐끼로 잘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은 진중권 스스로도 이런 불건전한 유착관계를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진중권을 패널로 출연시키면 일단 기본적인 흥행이 보장된다. 그 대신 그 토론이 미국의 가장 저급한 토크쇼로 평가받는 제리 스프링어 쇼 직전까지 추락하게 되는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 제리 스프링어쇼의 특징은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에 패널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진풍경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온갖 욕설이 오가는데 이때는 '삐이-' 하는 소리로 그 부분을 살짝 걷어 내는 척을 한다. 한국 사회는 이런 싸움이 인터넷에서 일어난다는 점만 다르다.

지식인이 그저 대중적인 호불호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박정희식-' '전두환식-' 이런 정치적인 용어에 붙어 있는 이미지를 입히는 이유는 자신의 무식과 논리가 박약함을 감추기 위함이 첫째다. 그가 대중의 박정희와 전두환 같이 대중적인 호불호가 결정되어 있는 이미지에 편승하여 일부러 편을 갈라놓고 그 한 편을 숙주로 삼아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려는 저급한 수법이다.

뜨는 전두환

진중권은 한동안 자신의 글에다 '박정희식~ 논리'란 용어만 갖다 붙이면 자신의 목적이 다 달성되고 훌륭한 그 대가로 막대한 전리품을 주어 담으면서 자신은 그저 흥겨운 콧노래 부르면 되는 줄로 판단했다. 그러다 얼마 전 진중권이 '책을 말한다 - 장하준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가서 대중 앞에서 상상치도 못할 만한 심한 굴욕을 당하면서 그의 무식이 만천하에 폭로되자 한동안 미디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 동영상을 한번 쯤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이 사건 이후 진중권의 글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변화는 은근슬쩍 박정희 대신에 이젠 그 자리에 전두환을 모셔와서 VIP로 대접하는 빈도수가 현저하게 증가했다. 그동안 감정적으로 이미지로만 평가하던 박정희가 최근 국내외 학자들의 많은 연구로 이성적인 논리가 상당부분 갖춰지자 자신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 논리인지라, 박정희보다 더 확실하게 감정적으로만 대할 수 있는 전두환을 초빙한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의 어떤 현상을 설명하면서 '전두환식 사고방식'이라고 덫을 놓는다. 그 후 이제 자신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전두환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는 식이다. 참으로 교활하고 비겁한 장치다. 자신의 주장에 동의를 해야만 전두환을 좋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건전한 시민이 된다. 때로는 참으로 한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당신은 전두환이 좋습니까?' 좋으면 이 진중권의 말이 틀린 거고 전두환을 싫어하면 진중권의 주장은 옳은 겁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이런 식이라면 재미있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평가라도 해 줄 수 있겠다.

그러다 영화 디워현상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자 이들의 주체가 거의 다 자신이 자신 있어 하는 네티즌들임을 확인한 후 이를 통해 다시 대중 앞에 떠오를 수 있는 반전의 계기로 삼았는 듯 하다.

화석화된 파시즘 논리

파시즘이 활개치던 히틀러 시대에는 대중의 문화 공간인 인터넷이 없었다. 21세기 현재와 불과 60년 차이지만 이 60년의 간격 사이에는 1300년대의 500년, 1700년대의 200년 차이보다 더 큰 폭의 변화가 일어났다. 히틀러 시대에 인터넷이 있고 문화혁명시대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과연 히틀러나 모택동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즉 파시즘이라는 말은 이제 화석화 되어 박물관에서나 보아야 할 용어인데 자신이 배운 게 그것 밖에 없어서 인가? 진중권은 아직도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파시즘과 파시즘이 아닌 것' 두 가지로 나누어 보려는 황당한 시도에 매몰되어 있다. 그리하여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진정으로 큰 줄기를 못보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자 불쌍한 지식인의 자화상이 진중권이다.

그가 진정으로 한국 영상문화의 발전을 갈망하는 건전한 문화평론가라면 100분 토론에 나와서 이런 식의 악성 이미지 메이킹을 의도적으로 시도 할 리가 없다. 소수 매니아들이 보는 잡지도 아니고 일반 대중이 안방에서 접근할 수 있는 TV 토론에서 더구나 개봉한 지 채 10일도 안되어서 앞으로 보아야 할 사람이 훨씬 많은 상황에 있는 영화를 두고 그럴 수는 더 더욱 없는 일이다.

진중권의 패배주의

“프랑스와 독일이 못한 걸 한국이 어떻게 합니까?” 라는 패배주의에 빠져있는 이 한심한 지식인은 '한국은 못합니다'를 무려 예닐곱번이나 반복한다. 한국 지식인의 서구 사대주의 근성은 필자가 대자보에 쓴 '노블레스 오블리쥬', 그 오해와 편견(2005/01/28 ⓒ대자보)'이나 '조셉캠벨의 신화론과 진중권의 무식함(2006/04/03ⓒ대자보)'라는 칼럼에도 잘 나타나 있다. 또 진중권이 한 여성 시민논객과 질의응답을 주고 받을 때 무심코 '심형래 감독의 영화' 라고 하지 않고 '심형래 영화' 어쩌고 저쩌고 라고 한 것은 그가 얼마나 한심한 의식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심형래 영화가 무슨 국가보안법입니까?' 진중권은 미디어 권력에 진입한 이후 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본 적이 없다. 필자는 '열린 우리당이 아무리 과반 의석을 차지한 연후에도 절대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할 것, 아니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았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게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무엇보다 제도권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속성을 간파해 냈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을 감상하는 법

나의 감상평을 짧게 요약하라면 솔직히 트랜스포머 보다는 더 재미있게 보았다. 트랜스포머의 지저분한 장면보다 디워에는 깨끗한 화면이 많이 나와서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트랜스포머보다 확실히 나은 점은 영화음악이었다. 음악에 좀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에게는 디워가 훨씬 많은 장점을 갖고 있었다. 컴퓨터 그래픽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경이롭게 감상했다. 사실 필자가 책을 산 후 300-400 페이지 정도의 내용 중에서 단 한 페이지라도 필자를 감동시킨 부분이 있으면 책값이 안 아깝다고 여길 만큼 여지보면 매우 까다로운 편이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김연아가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예술성도 예술성이지만 그녀가 트리플 엑셀같은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진중권이 말한 '사람이 안우니 용이 운다'라고 혹평한 대목은 어린이 같은 순수한 시각으로 본다면 이 대목은 오히려 영화 ET에서 외계인과 어린이의 동심이 교류하는 한 장면처럼 완성도가 높다는 걸 말한다. 이 대목은 조그만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면 그만큼 이 영화의 CG 기술이 뛰어났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진중권의 의도적인 악성 이미지 메이킹 수법에 노출되어버린 관객들은 이런 시각을 갖는데 상당한 장애를 가질 수밖에 없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건 청량한 음악을 들어야 하는 관객들에게 심각한 잡음(雜音)으로 청각적 미감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사전에 봉쇄해 버린 것에 다름없다. 이런 악성 이미지 메이킹에서 벗어나 있는 10세 전후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무기(용)가 울 때 나도 눈물이 날려고 했어요”,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문화 사대주의

공자 가라사대, '見利思義 見危授命' 라고 하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또 시작한다' 라는 반응을 보인다. 미안하게도 진중권이 아리스토텔레스 가라사대, deus ex machina 할 때 '또 시작한다' 했다. 공자왈(曰)은 따분하게 생각하지만 서양의 공자격인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 왈(曰)은 참신하게 생각되거나 특별히 귀 기울여 들여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뭔가 어색한 이중잣대를 갖고 사람이지 않을까? 이것이 그 유명한 ‘권위에의 오류’와 지독한 ‘문화사대주의’를 동시에 목격하게 되는 재미있는 현장이다. 사실 100분 토론을 하고 난 후 진중권이 이상한 '꼬부랑 그 머시기'를 가져와서 유식한 체를 할 때가 되었는데...... 왜 조용하지? 내심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진중권이었다.

이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건은 그나마 볼 만했다. 진중권이 친절하게 이 부분을 어디서 따로 복사 해온 듯한 글을 오마이뉴스에 올려 주었기에 말이다. 이런 복사본이 없이 진중권의 두뇌회로 속을 한 바퀴 돌고 나온 것들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자신이 말하고 있는 현실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글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이 사태를 방관해서는 안되겠다는 자의식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아니 진중권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야그들아, ---" 식으로 네티즌들을 조롱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돈 지오반니’

모짜르트의 '돈 지오반니'가 진중권이 말한 이 기법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아무도 이걸 이유로 '돈 지오반니'가 완성도가 낮은 오페라라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전문가들은 이 돈 지오반니를 '오페라 중의 오페라', '최고의 오페라'로 평가받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왜 이럴까? 그건 오페라에는 소설의 서사구조가 담아내지 못하는 오페라 나름대로의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페라 보다 더한 종합예술로 평가되는 영상예술에도 소설의 서사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영상미학과 기법이 있다. 이를 모를 바 없는 진중권이 이런 이야기로 대중을 현혹하려 하다니 정말 배꼽이 빠질 일이다. 김휘영 <문화 평론가>

* 김휘영 <문화 평론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대자보와 진보누리 등에서 무위라는 필명으로 활발한 문화평론을 하고 있다.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근간)'이라는 한국 문화 전반에 걸친 실랄한 해부와 대안을 제시하여 한국 사회에 자그만한 등불을 비추는 시도를 하고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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