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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영화와 심형래에 대한 편견과 푸대접

상업영화의 세계적 성공이야말로 제대로 된 세계시장 공략법!

충무로의 심형래 감독 푸대접 논란

2007년 12월 중순 한국 영화계의 화두는 두 개다. 하나는 한국 영화계는 두 블록버스터 영화 <디 워>와 <화려한 휴가>의 흥행 이후, 제대로 된 흥행작이 없어서 본격적인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논란이다. 그 두 번째는 대한민국영화제와 청룡영화상의 향방에 대한 논란이다. 아니 두 번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007년 한국 영화에서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 <디 워>에 대한 두 영화제의 푸대접이다. 2006년 청룡영화상의 기술상은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받았고 2007년의 기술상은 <중천>이 받았다. 영화팬들은 2007년 기술상을 <중천>이 받고 <디 워>가 외면 받았다는 사실에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충무로의 심형래 감독에 대한 푸대접 논란은 사실이라는 판단이 절로 드는 대목이다. 두 논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한국 영화계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부터 그 첫 단추를 풀고자 한다.

예술 영화와 오락영화

예술영화는 오락영화보다 우수한가? 물론 예술영화와 오락영화의 구별자체가 다소 애매하기는 하다. 하지만 통념상 말하고 있는 예술영화와 오락영화 (또는 상업영화)는 뚜렷이 구별되어 말하여 지고 있고, 그 용어가 말하는 의미 또한 별다른 혼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영화가 오락영화보다 우수하다는 막연한 편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정 반대다. 오락영화, 즉 상업영화가 예술영화보다 훨씬 우수하다. 적어도 영화의 기술적 측면이나 난이도 측면에서 보면, 아무리 잘 만든 예술영화라도 보통의 상업영화를 따라잡기 힘들다. 물론 필자의 이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점이 한 가지 있음을 반드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오락영화를 제대로 만들기가 예술영화를 제대로 만들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이다. 기발한 발상이나 창의적 상상력(creative imagination)은 비교하기조차 어색할 정도로 오락영화의 수준이 훨씬 높다.

예술영화의 구조

인간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예술영화의 구조는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단순하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나 암(癌)에 걸려 거동까지 불편해진 배우자를 10년~20년 동안 돌보면서 그 사랑과 연민을 지켜가는 휴먼드라마도 보는 이들의 감동을 절로 울린다. 하지만 이는 영화상으로는 너무나 단순한 구조다. 이 구조는 영화가 아니라 흔히 TV <인생극장>에서 사용하는 나레이션을 동반한 몇 장면으로도 충분히 제작자의 의도는 성공한다. 시간적 흐름조차 때로는 10년 후(10 years later) 같은 자막처리로도 가능하다. 물론 10년의 흐름을 반영하는 장면의 변화를 위해, 수염이나 주름살 같은 분장이야 기본 사항이다. 주인공이 헤어진 연인이면 10살 즈음의 어린아이 한 명을 더 등장시키면 더욱 쉽다. 또 두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도 상대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이나 달콤한 대사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하다. 소품으로는 빨간 장미꽃, 놀이터의 그네나 벤치 등으로 충분하고 거기에 맞는 다정한 장면의 연출로도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오락영화의 어려움

하지만 관객에게 짜릿한 스릴(thrills)이나 서스펜스(suspense)에서 오는 흥분이나 극적인 재미를 주는 일은 절대로 그런 단순한 구조로는 성공하기 힘들다. 손에 땀을 지게 하는 흥분이나 몸에 소름이 돋는 설정을 영화 속에서 제대로 구현하려면, 그건 보통 사람들은 그 방법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이때에는 등장시켜야 하는 소품이나 세트조차도 다르다. 사랑이나 가슴 뭉클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동원됐던 작은 놀이터의 그네나 벤치보다 디즈니랜드 같은 놀이동산에서의 청룡열차, 자이로드롭, 또는 번지점프처럼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장치가 동원되어야 한다. 즉 더 많은 고민과 연구 실험 거기에 따라 들어가는 면밀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비용(자금)도 많이 든다. 소품으로서의 그네와 청룡열차의 차이 정도의 돈이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또 속도(speed)나 기발한 상상력의 구현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반응심리와 감각기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계산이 수반되어야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2(망자의 함)의 에피소드

우리는 <캐리비안의 해적2-망자의 함>에서 이런 오락영화의 치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극 중 잭 스패로우(죠니 뎁 분)는 원시 부족인들에게 온 몸이 통나무에 꽁꽁 묶인 채, 영락없이 바베큐 통닭이 될 상황(situation)이다. 그런 상태에서 혼란을 틈 타 그는 꼬치처럼 된 상태로 탈출을 감행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일단 묶인 줄부터 풀고 나서 다음 액션이 진행되는 게 (기존영화가 보여준) 상식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줄에 묶여 몸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그 상태로 10여 분 간 영화를 진행시킨다. 그러면서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에피소드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꼬치처럼 묶고 있는 통나무에 야자수가 날아와 차례로 박히는 장면에서 관객은 연신 킥킥댄다.

어디 그 뿐인가? 좀 지나면 그 야자수가 통나무의 한 쪽에만 몰려서 꼽힌 까닭에, '기우뚱' 기울어지고 그 결과 그는 아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중력(gravity)이라는 물리적 성질을 활용한 이 교묘한 설정'에 관객은 또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추락이 우스운 게 아니라 '야자수가 한쪽에 쏠려 있었던 원인에 의한 기우뚱거림의 설정'이 우습다. 이 설정이 없었다면 관객들을 차지해 버린 건, 웃음보다 당연히 불안, 초조, 긴장이 먼저였을 것이다. 웃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필이면 두 절벽사이의 간격과 이 통나무의 간격이 비슷해서, 양 벼랑 중간에 걸려 추락이 멈춘다. 폭소 다음에 엄습한 그림자처럼, 사망 아니면 중상(重傷)을 예상하고 돌연 긴장태세에 들어갔던 관객들은 또 당하고 만다. 이들에게, 잭 스패로우가 양쪽 벼랑 사이에 걸쳐진 통나무 중간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장면은 또 다른 웃음을 선사한다. 시간의 경과와 주인공의 몸무게에 못 이겨, 결국 그 통나무는 가운데가 부지직 부러진다. 당연, 잭 스패로우는 추락한다. 이쯤 되면 추락이 아니라 낙화(落花)라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벼랑의 중간에 걸려 한번 멈췄다가 떨어지는 설정이기에, 추락해도 큰 충격을 받지 않고 무사하다. 이 상황에 관객들이 전혀 어색함을 못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이 씬의 마지막에,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 잭 스패로우 둘레에 후두둑 떨어지는 야자수들의 명연기를 보았는가? 이 야자수들은 관객에게 선사했던 웃음의 식탁을 잘 마무리 해 주는 향긋한 디저트요, 절묘한 여운(餘韻)을 주는 마무리다. 이 모든 과정의 하나하나가 치밀한 계산과 철저한 고증과 실험의 산물이다. 당연히 많은 시행착오(NG's)를 거쳐 특별히 선택되고 편집된 장면임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영화가 예술이어야만 한다는 황당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인식체계에는, 이런 장면의 연출에 얼마나 심오한 내공(內功)이 필요한지를 파악할 인식의 공간이나 능력 자체가 없다. 아니 그들의 편견은 이런 시각(Eye)을 키울 여지를 가지치기 해 버린다. 그저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우는 모습을 쳐다보는 아마추어 수준에서, 그것이 진짜로 손쉬운 일로 착각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만큼 인식체계 자체가 좁고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그들일 뿐이다.

오락영화에서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아니 세계에서 진정으로 인정을 받고 또 세계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려면 예술영화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실제로 세계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 또한 예술영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기획되고 계산된 오락영화다. 그런데 한국의 영화 평론계는 이 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틀에 갇힌 사고에서 비롯된 지독한 편견의 결과로 이런 시각자체를 갖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봐야 정확하다. 필자는 다시 묻고 싶다. 아직도 예술영화만이 수준 높은 영화라고 주장할 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가 예술이다'라는 명제를 참이라고 믿고 또 그런 주장을 해대는 사람들은 정확히 두 부류다.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잘 알면서도 '영화는 예술이어야 한다' 라는 일종의 성리학적 명분이나 원리주의적 신념을 무기로 삼아, 남을 과도하게 공격하기 위한 억지행패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부) / 문화평론가(3부작 중 1부)/ 문화 평론가 (이 칼럼은 3부작 중 1부입니다. 3부작을 다 보시는 게 이해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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