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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괴물과 전설의 이무기

D-War는 충분히 기술상과 시각효과상 자격을 갖췄다(2부)


한강의 괴물과 전설의 이무기 / 김휘영

D-War는 충분히 기술상과 시각효과상 자격을 갖췄다(2부)

작년에 한국에서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 <괴물 (2006년, 봉준호 감독)>을 다시 보면서 한가지 의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만일 <디 워>가 대중 앞에 먼저 선보이고 <괴물>이 나중에 나왔다면 시장의 반응이 어땠을까? 아마 이 순서가 바뀌었다면 영화 <괴물>의 총 관객동원은 700 만 명 정도를 넘기기조차 어려웠을 거라고 판단된다. 먼저 <디 워>에서 선보인 이무기에 비하면 그만큼 <괴물>에 나온 그 괴물(monster)은 괴물이라고 불리기조차 어색했다. 한마디로 초라했다. 봉준호 감독이 선보인 괴물 캐릭터를 솔직하고 간단하게 묘사하면 양서류인 '올챙이가 거대하게 확장된 모습'에, 가장 가깝다. 밑그림을 수천 장 이상 그리고 난 후에 만든 창작물이라고 자랑하고 있지만 역시 '창조는 모방(mimesis)에서 나오고, 비범(非凡)하려는 노력의 종착역 또한 평범(平凡)에 그치기 십상이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네 개의 다리, 긴 꼬리, 비슷한 모양새의 악어처럼 단단하지 않고 축축하고 흐느적거리는 피부조직, 거기다가 원형으로 오물거리는 입모양 등 영락없는 올챙이의 모습 그대로다.

벌거벗은 임금님과 올챙이

<반지의 제왕>시리즈와 <킹콩>의 시각효과를 담당했던 팀에 의뢰하고 그들이 수 천 장의 밑그림을 그린 후에 만든 작품인데 그게 기껏 올챙이라니? 이를 두고 올챙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을 못하는 것처럼 '권위에 의한 오류'이거나 '사대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임금님에게 벌거벗은 옷을 입히고 바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고 말한 팀(Team)과 올챙이를 만들어 놓고도 올챙이로 보지 말고 유식한 표현으로 <양서류와 파충류의 돌연변이>로 보아달라는 팀 모두 외국인들이다. 필자가 현대에 근무할 당시, 삼성이 새로 내놓은 도안 을 일본의 일류 디자인업체에 맡기면서, 그 당시 돈으로 무려 10억원을 주었다는 말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 중 가운데 '-'이 없는 'A'자인 '∧'(字)는 현대(HYUND∧I)의 로고의 표절이라는 소송논란도 있었기에 잘 기억한다. 이 논란의 핵심은 그 정도 도안에 10억원이라는 외화유출이 정당한 댓가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런 논란 자체가 그 당시의 한국의 디자인력이 취약해서 믿음을 줄 정도가 못 되었기 때문과 관계 깊다. 필자 생각으로는 S∧MSUNG 정도의 로고 도안은 국내의 디자인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마찬가지로 영화<괴물>에 보인 괴물 정도는 한국의 기술진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캐릭터로 보인다.

<괴물>의 무술스텝 10여 명

그저 걸어 다니고 비틀거리고 물에 뛰어드는 게 전부였던 괴물이 유일하게 특별한 재주를 선보인 장면은 한강 다리 난간 아래에서 재주넘기였다. 그 장면은 극 전개상 없어도 되는 부분이고 또 굳이 담으려면 그 정도는 스턴트맨을 이용해서 중국의 사자탈춤처럼 괴물 껍질을 뒤집어쓰거나 기타 방식으로 연출한 후에 나중에 CG로 보정하면 되는 부분이었다. 10 여명에나 이르는 이 스텝들이 어디에 쓰였는지 모르겠다. 다 알다시피, 영화 <괴물>에서 특별하게 격투씬이 나온 장면은 한 곳도 없다. 대역(스턴트맨)을 써야 할 장면도 딱히 찾으라면 괴물이 한강에 뛰어드는 장면과 그 재주넘기 장면 정도 밖에 안보였다.

이런 점이야 딱히 뭐라고 비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올챙이로도 진짜로 대단한 구조로 만들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놓쳐 버리고 말았음은 이후 밝히겠다. 먼저 한강에 괴물이 탄생하는 인과관계는 황당하기로는 그 짝이 없다. 독극물을 한강에 부은 일(원인?)하고 한강에 괴물이 탄생한 일(결과?) 하고의 인과성을 믿으라니? 독극물의 폐기에 의한 물고기들의 폐사도 아니고 새로운 종(種)으로서의 괴물의 탄생이라니? 이건 과학적 인과관계 구조가 아닌 마술(Magic)적 구조일 뿐이다.

감정(Feeling)이 낳은 괴물 아닌 괴물

한강에 나타난 그 괴물은 과학적인 인과관계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인간 감정에서 나온 산물임에 분명하다. 화면을 가득 채운 빈 병으로 말하는 독극물의 과도한 폐기에서 오는 일종의 '막연한 불안감'과 또 그 폐기를 명령하는 주체가 미국인이라는 '어정쩡한 반미의식'이 묘하게 뒤섞여서 형성된 선입견과 편견이 괴상한 피조물의 출현을 인정한다. 특별한 인과관계에 대한 장치나 아무런 검증과정도 없이 말이다. 봉준호 감독이 가진 고도의 심리학적 기교가 어설프고 순진한 한국 관객들을 농락하는 데 성공한 대목이다. 중학생이 미국인이 만든 것 같은 괴물의 인질로 잡히는 구조로 미순이- 효순이 사건에서 폭발된 반미감정까지도 잘 포착된 듯하다. 이건 봉준호 감독이 가진 흥행감독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이다. 단 국내용(domestic)이다.

그런데 이런 어설픈 수준으로 세계시장에 나간다면 어떨까? 세계시민들이 이런 허약한 구조에 한국관객들만큼 환호해 줄까? 몇몇 반미감정에 호의적인 비평가들의 인상적인 비평 정도를 얻는 데 그칠 것이다. 초반 트레일러 격투 장면에서라도 괴물의 꼬리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가고, 그걸 수거한 후, 국과수에 근무하는 한 과학자에 의한 발표가 필요했다고 본다. 즉, '포롬 알데히드 등에 의한 유전자 변형이나 돌연변이' 정도의 정보성 멘트라도 넣어서 그 연결성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아니면 영화 초기에 직접적으로 독극물이 떠내려가는 하수구의 끝 부분에서, 그 거품에 의해 괴로운 듯 꿈틀거리면서 떠내려가는 올챙이 한 마리를 카메라에 담는 센스라도 필요했다. 그것도 네 발이 자라난 상태인 올챙이와 개구리의 중간단계에 있는 양서류 한 마리가 거품에 휩쓸려 하수구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컷 정도를 카메라에 잡아두겠다. 그 이후 몇 년 후 괴물이 출현했으면 참 좋았겠다.

27년 전의 영화 앨리게이터

이런 인과관계는 도심 한복판에 괴물이 출현하는 헐리우드 영화 <엘리게이터, 1980년, 루이스 티그 감독>에는 매우 훌륭하게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일반 가정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던 새끼 악어가 하수구에 버려지는 일로 시작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생물급성장에 관련 유전자 실험을 하던 어느 약품 회사의 유전공학실험실에서 실험을 끝낸 개의 사체들을 몰래 하수구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여기에 살고 있던 그 악어가 이 시체들을 먹고 보통의 악어보다 무려 십 배 정도로 커지는 것으로 괴물 악어가 출현한다. 즉 영화 <엘리게이터>는 한국에서 1300만 명이라는 전무후무한 관객동원에 성공한 영화 <괴물>이 출현하기 무려 사반세기 전에도 이렇게 치밀한 구조로 선보였다.

하지만 한국 영화 <괴물>은 인과관계라는 과학적 구조보다는 반미정서라는 감정찌꺼기를 매개로 괴물을 잉태하고 출산했다. 원래 사람들은 냉혹한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심리'를 철저히 이용한 영화가 <괴물>인 셈이다. 그러나 <한강에 독극물을 폐기한 일>과 <수년 후에 한강에 괴물이 출현한 일>의 인과관계 성립을 헐리우드나 세계시장에 가서 믿어달라고 하면 어떨까? 차라리 전설이나 무당의 예언을 믿어 달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예언이나 전설은 서사구조의 전제조건에 속하는 일이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까닭에 봉준호가 낳은 현대적 괴물 콘텐츠는 심형래가 형상화한 전설적인 이무기 콘텐츠보다 훨씬 허약한 구조물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참고로 영화 <트랜스포머>가 '태초에 큐브가 있었다'란 설정으로 시작했을까도 생각해 보라! 이는 성경(Bible)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설정처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전제조건이다. 전제조건적 구조가 아닌 현대적 산물인 <괴물>은 훨씬 치밀한 얼개가 필요했음에도 교묘하게 '감정(feeling)'에 기대는 방식을 쓴 건 너무나 아쉽다.

발상의 전환과 거대 올챙이 효과

만약 영화 <괴물>이 영화 도중에, 독극물에 의해서 올챙이가 개구리로의 변태하지 못하고 거대 괴물로 생장했다고 직설적으로 밝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면 반응이 어떠했을까? 한국관객들과 세계 관객들이 크게 실망했을까? 필자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올챙이는 연약하기만 하고 공포스럽지 못해서 괴물로는 불합격이라는 건, 딱 그만큼의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올챙이가 거대하고 무서운 괴물로 성장하고 말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큼 환경오염에서 초래하는 폐해의 심각성을 제대로 웅변해 주는 게 있을까? 유전자 조작으로 슈퍼 쥐, 슈퍼 콩이 나오는 이 시대, 또 미국에서 이런 유전자 조작 생산물을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의 사람들에게 실험하고 있다는 뉴스에 전 세계 에서 분노하는 시대에, 유전자 변형에 의한 거대 올챙이가 한강에 출현한 사실만큼 공포감을 주는 설정이 있을까? 또 이보다 확실하게 약소국으로서 거대 제국주의 국가의 횡포를 고발하고 또 반미의식을 표현할 수단이 있을까? 수천 번의 밑그림을 거쳐 나왔다는 괴물이 결국은 올챙이의 확장버전에 그쳐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기회는 미꾸라지처럼 강물 속으로 빠뜨려버린 현장이다. 굳이 독극물이 아니라 한국 내의 미군기지에서 생화학 무기개발실에서 유전자조작을 하다가 나온 폐기물이었다면 미제국주의의 군사적 야욕에 대한 반감을 더 확실하게 표현했을 거라는 점도 못내 아쉽다.

보통의 괴물이 그 정도라면 외국 시장에 내놓기조차 창피스럽고 보는 외국인들도 쉽게 무시하고 고개를 돌릴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 조작에 의한 육식성 거대 올챙이의 탄생, 이런 구조라면 오히려 영화 <괴물>에서 나온 괴물의 왜소함이나 초라함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도 훌륭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작은 올챙이가 그 정도 크기까지 거대해지고 식성까지 변해서 포악한 거대 포식자(predator)가 된 구조라면, 이 영화를 접하는 세계인들 모두가 충분히 괴기스럽고 전율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서 이 거대 올챙이가 개구리의 천적인 뱀을 가볍게 잡아먹는 장면을 한 컷 정도만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었다면 그 상징성과 공포스러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전부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함으로 해서, 더 큰 극적(劇的) 효과를 거둘 기회를 놓쳐 버린 결과다. 게다가 올챙이의 확장버전이라면 미니어처(miniature)로 만든 캐릭터 시장 개척에도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진중권의 텍스트론 -- <소나기>와 <집으로>

이런 역발상(逆發想)을 하지 못한 채, 그저 수 천 장의 밑그림을 그린 결과로 올챙이 한 마리 그려놓았음도 모르고서, 미학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하는 진중권이라는 무식한 평론가의 말은 전혀 미학적이지 못하다. 그는 스스로 고정관념에 갇혀 살아가는 지식인임에 불과하다. <디 워>를 헐뜯기 위해 '원작이 없다는 이유로 텍스트가 없다'는 주장도 말까지 말도 얼마나 억지인지 다음으로 즉각 확인한다. 사실 이 말은 진중권이 텍스트가 뭔지 그 정의조차 모르고 있는 무식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텍스트란 '해석이나 번역 또는 이해를 하기 이전의 원본'을 말하는 것으로 즉 내용물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 어떤 소설이나 논문이나 영화나 시나 모든 작품에 텍스트가 없다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형용모순이다. 또한, 진중권이 말한 엉터리 명제가 맞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다음을 한번 생각해 보자. 황순원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소나기>가 왜 TV 문학관 수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원작도 없이 시나리오로만 된 영화 <집으로>는 왜 흥행대박을 거두었을까? 그 이유를 진중권보고 설명해 보라고 하면서 또 한번 그를 딜레마에 빠뜨려 보자. 이때도 진중권이 '영화 <집으로>는 원작이 없으므로 텍스트가 없다"라는 무식한 말을 할까? 원작도 없는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서 창의적인 시나리오를 만든 <집으로>와 <디 워>가 칭찬의 대상이 될지언정 비난의 소재로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창의성과 고정관념

또 중국 음식점에서 흔히 보는 그림이기에 용(龍)은 창의성이 없고, 기껏해야 올챙이를 닮게 그려놓고서 수천 장의 밑그림을 그린 후, 그 중에서 골랐을 터라 창의성이 있다고 말하는 논리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창의성이란 둔재들 수천 명이 모여 수만 번의 밑그림을 그린다 해도, 때로는 심형래 감독같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극소수의 천재들의 장난기나 그들의 단 한 번의 직관에도 못 미치는 일이 비일비재한 법이다. 창의성(創意性), 이 분야는 정말로 유력한 대권주자가 말한 표현대로, 바둑 9급 천 명이 모인다고 9단이 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면서 어떻게 미학(美學)을 한다고 주제넘게 나섰는지가 더 궁금하다. 진중권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무식한 말들을 대중 앞에 쏟아내고 있었는지를 파악할 능력이라도 제대로 갖춘 사람일까? 필자 같으면 그간의 행적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들 지경이겠다.

영화 더 플라이(The Fly, 1958년/1986년)에서는 올챙이보다 더 왜소한 파리 한 마리로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또 이 영화는 현대사회의 과학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려주는 데도 성공한다. 그런데 한강에 사는 올챙이는 왜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면 안 되는 일인지 스스로 물어 보자. 이에 답하다 보면 우리 한국인의 상상력이 얼마만큼이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지도 파악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노골적으로 올챙이를 대상으로 했다면 훨씬 세계적인 영화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파리(fly)처럼 올챙이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점은 세계인들에게 '일상의 공포'를 훨씬 극대화시켰을 것이고 그만큼 더 뛰어난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부작 중 2부) / 문화 평론가 (이 칼럼은 3부작 중 2부입니다. 3부작을 다 보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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