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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국 신부는 사제인가 사탄인가?

김인국 사제는 세 가지 질문에 답하라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얼마 전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라는 작은 책을 만났다. 데이비드 폰더라는 주인공이 링컨 나폴레옹 솔로몬 등 세계 역사상의 위인들을 만나는 가상현실을 자연스럽게 풀어내고 있었다. 특히 솔로몬 왕을 만나는 대목에서 필자는 자못 흥미진진해졌다. 분명히 솔로몬의 그 유명한 재판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새삼 이 대목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주 어릴 적부터 품은 작은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과연 솔로몬이 아기의 친모를 찾아 준 판결이 완전무결하고 흠이 없었느냐 하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다투는 광경을 목도한 후, 한참을 고민하던 솔로몬왕은 해결책이 없으니 칼로 두 아이를 잘라서 반반씩 가지라고 명한다.

그때 한 여인은 울면서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아이를 반대편 여인에게 주라고 한다. 하지만 다른 한 여인은 절반의 아이라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솔로몬은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생모가 아니라며 죄를 자청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라고 판결한다. 이 판결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판결로 회자되고 있고, 동시에 이 에피소드는 솔로몬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트레이드마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의문

한데 필자는 이 판결을 접하면서 '내 아들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게 낫겠다.' 고 주장한 여인이 진짜 친모일 가능성은 정말 없을까? 하는 미묘한 의문을 품었었다. 만약 오늘날 남의 아이를 탐냈다는 죄로 처벌을 받은 여인과 문제의 그 아이의 유골이라도 발견되어 유전자 조사를 해서 그 둘이 모자관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어찌될까? 그때에도 솔로몬의 판결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 사극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어미로서 원자 아기씨를 보고 싶다고 청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인륜적인 동정심에 호소해서 원자 아기씨를 마지막으로 볼 기회를 얻은 그녀는 자신이 낳은 친자식의 남근을 떼어내 그녀 나름의 복수를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게 전해져 내려온다. 물론 요즘 같다면야, 솔로몬의 다소 애매모호하고 찜찜한 지혜보다 유전공학을 이용한 간단한 지식으로 더욱 더 확실하게 판별해 줄 것이라서 이런 의혹은 없을 터다. 만일 필자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현인(賢人)으로서 지상에서 그 짝이 없다는 솔로몬의 위상은 어찌되었을까?

이런 의문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까닭에, 혹시라도 데이비드 폰더씨가 필자의 매우 오래된 의문을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겨 이 대목으로 먼저 내달았다. 한데 필자의 이런 기대는 곧장 산산조각나 버렸다. 이 책에서는 폰더씨의 입을 통해서 솔로몬 왕에서 필자의 이런 의혹에 대한 질문을 전혀 하지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만 재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머니즘의 원형(元型)

한국에도 특출한 인간의 뛰어난 지혜에 관한 우화로 이와 유사한 설화나 민담이 많이 내려온다. 명나라 사신이 낸 3가지 수수께끼를 조선의 어린 소년이 쉽게 풀어냈다는 일화 같은 것도 그 예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이런 설화민담은 무수히 많다. 한데 유독 솔로몬의 친모 찾기 송사가 유독 전 세계로 이렇게도 많이 퍼져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바이블을 위시로 하는 기독교의 위력이나 알파벳의 위력 때문으로 보면 너무 피상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이유라면 솔로몬의 지혜를 드러낸 일화가 무수히 많았는데도 그 중에서 특별하게 이 우화만이 많이 퍼져나간 이유를 설명하진 못한다. 필자 생각에는 이 일화에는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참다운 자세', 즉 휴머니즘에 대한 원형(archetype)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모차 논란

한데 얼마 전 한국에서 이와 매우 흡사한 논쟁이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타올랐다. 촛불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이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앞장서서 시위를 한 일이 발생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에 격분한 네티즌들끼리 “어찌 폭력이 난무하는 시위 현장에 애기를 앞장세울 수 있느냐? 분명 친모가 아닐 것이다 ” 라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이 논쟁이 번지는 걸 접하고서 필자는 한국 사회가 상당한 정도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사탄의 대변인이 된 사제

이 논쟁은 최근의 촛불시위에 관련한 광우병 논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광우병은 과학과 건강에 관한 논쟁이라면 유모차 논란은 인간의 참 이성과 휴머니즘에 관한 논란이다. 그리고 광우병은 에이즈 등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유사하 질병들은 얼마든지 발견될 것이고 이는 그때마다 과학적으로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다. 이에 반하여 촛불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유모차 논란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이고 인본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이 논란에 대한 다른 건전한 시민들의 생각을 아예 책망까지 해대면서, “내 아이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라는 대목을 발표하는 김인국 사제의 성명서를 보고서 갑자기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암담함 그 자체였고 몸서리치도록 무서웠다. 어찌 저런 분이 한국 카톨릭 사제 중의 한 사람까지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하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참담했다. 하나님은 저렇게 덜 떨어지고 잔인한 족속에게도 사제라는 직위를 주시는구나 하는 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어찌 보면 정말 사탄이란 게 있다면 저런 모습으로 인간 앞에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제대로 지적하면 아무리 순수한 마음이라고 강변한다 하더라도 서로의 폭력이 맞부딪치는 시위현장에 아이를 데리고 갔다면 그건 이미 순수한 마음일 수가 없다. 그런 식이라면 어떤 치명적인 사고사나 극악한 짓이라도 순수한 마음이란 미명하에 호도될 수 있다.

아동보호 특별법

반미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존심 몹시 상할 테지만 이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칸트가 주장한 대로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지 못하고 가장 수단시되는 군대에서조차도 그런 일은 상상에서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전시(戰時)가 아니면 미군부대 안에서도 임무(Mission) 보다는 안전제일(Safety First) 수칙이 먼저다. 특히 어린이 보호에 관해서라면 그걸 말로는 다 표현 못할 지경이다. 일례로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호송용 차량은 언제나 특별대우다. 다른 차량들은 이들 차량 근처에도 가지도 못할 정도로 우선권을 주고 운전자들을 특별하게 교육시킨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법이 있다. 만약 이들 차량과 부딪혀 사고라도 발생하면 지나칠 정도로 반대편 차량에 가혹하다. 왜냐하면 유치원생 등 어린이들은 법적으로 특별보호대상이기 때문에 이들을 호송하는 차량과 사고가 발생한 경우, 반대편이 보호받을 길은 거의 없다. 만약 미국이나 서구유럽 선진국에서 폭력시위현장에 유모차에 애기를 데리고 나갔다면 여론의 뭇매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단 그 자체만으로도 아동보호특별법 등의 실정법을 위반한 명백한 범죄행위로 당장 ‘실형감’이다.

어느 사진사의 자살

다음은 소설 속의 폰더씨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프랑스의 케빈 카터(Kevin Carter)라는 보도사진사에 관한 실화다. 아프리카 기아의 실상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사진을 찍으러 수단으로 직접 찾아갔던 그는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한 소녀가 아요드의 식량 센터로 가는 도중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고, 그 앙상 마른 어린 소녀 뒤에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 소녀와 그 아이가 죽은 후에 그 시체를 먹으려고 그 몇 발짝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살찐 독수리 한 마리, 이 충격적인 장면은 그의 앵글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사진은 즉각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성공했다.

케빈 카터는 그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영예를 안았고 아프리카 기아의 실상을 접한 많은 사람들에 의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한데 그가 폴리처상을 수상한 후 더욱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1994년 7월 케빈 카터씨는 33살의 짧은 생을 자살로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유인즉 사진을 본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보다는 그 아이를 먼저 보호소로 이송해야 했다는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케빈 카터씨는 셔터를 누르는 불과 몇 초간에 발생했던 직업적 사명과 인간적 윤리 사이의 작은 비끗거림에서 발생한 양심의 가책과 그로 인한 대중의 비난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살을 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그런 비난에는 순수한 비난 뿐 만 아니라 그가 문제의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데 대한 질시에서 비롯된 거짓 휴머니즘이나 과도한 원리주의도 분명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의 질시나 악감정을 그럴싸한 다른 명분을 무기로 삼아 공격할 줄 아는 비겁하고 야비한 성정(性情)까지 갖춘 지구상의 유일한 종(種)이니까.

필자는 케빈 카터씨가 보도사진사로서의 직업윤리와 자신의 사명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비윤리적이거나 비인간적인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잔인하다면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르고 온갖 비난을 퍼부어 댔던 사람들이 오히려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셔터를 누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단 몇 초면 충분하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케빈 카터씨는 그 장면을 사진에 담은 후, 즉시 그 아이를 보호소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사진을 찍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아프리카 오지까지 간 사람이라면 능히 그랬을 것이다. 인간에게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잔인하다. 단지 그들이 자각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도저히 그 공격본능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걸 억누르지 못할 뿐이다. 대부분 그 완벽한 도덕성이라는 명분은 그들의 야비함과 무지함과 열등함을 가릴 수 있는 좋은 가면일 뿐이며 억누를 수 없는 저급한 공격본성을 가리면서 남을 공력하려는 핑계꺼리다. 그들의 잔인함은 케빈 카터씨에게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자살을 택하게 했다.

아기방패논란

한데 한국에서 일어난 유모차 논란은 어떠한가?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건 유모차 논란이 아니라 어린 아기를 시위대의 인간방패로 사용한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몰상식한 사건에 대한 논란이다. 이에 대한 건전한 시민들의 항의는 케빈 카터씨의 경우에서 보듯 타인에게 대해서는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인간의 잔인성을 들추어내주는 한 단면이 절대로 아니다. 단지 어머니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지키라는 요구다. 폭력시위현장에 어린 애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앞장 선 행위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이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 어린 아이를 안고 대중 앞에 나타난 행위보다 훨씬 질이 나쁘다. 적어도 독재자와 함께 있었던 그 아이는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과격한 시위와 공권력의 대응이 맞부딪치는 현장 속에 내몰린 그 아이는 너무나 위험하다. 그 어떤 동기가 있었다고 한들 이 현장에 아이가 동원된 일은 어른의 지나친 목적의식에 희생된 것일 뿐이다. 고귀한 생명체이자 인격체인 아이가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 상황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하다고 주장한들 절대로 순수할 수 없다.

수양이 부족한 한 사제

이 사실은 하느님의 권능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제가 나서서 그 순수함을 강변해 준다고 해서 바뀌어 질 성질의 일도 아니다. 따라서 김인국 사제가 낭독한 그 대목은 아직 덜 성숙한 인간의 잠꼬대 짓이거나 아니면 교묘한 사탄의 속삭임이었을 뿐이다. 그가 정말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제라면 “순수한 어린 아이까지 시위대에 동원되는 불행한 현실 앞에 저희 사제들이 침묵할 수는 없었습니다! 라는 식이었어야 마땅하다. 걸핏하면 어린 자식들이 동반자살이라는 미명하의 가족 살인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저렇게 미성숙하고 비정한 사제단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의 크나 큰 불행이다. 김인국 사제가 그런 저열한 주장을 하고서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필자의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 줄 것을 요구한다.

사제단을 향한 세 가지 질문

첫째, 내 아이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의사표현방식이 아이를 폭력이 맞부딪치는 시위현장으로 끌고 가는 방법 밖에 없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야 한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자신이 없으면 불건전한 정신 상태로 사제복을 입고 일반의 건강한 시민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먼저 정신병원에 가서 자신의 정신건강부터 먼저 체크해 보기 바란다.

둘째, 김인국 신부 표현대로 한국 사람들의 건강을 그렇게 걱정하고 건강을 천부권으로 생각한다면 왜 한우의 위험성을 적시하면서 국민건강을 위해서 전수조사를 주장하지 않는가?

필자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 주변에서 일명 다우너 소라 불리는 앉은뱅이 소를 몇 번이나 목격한 경험이 있다. 최근에는 과거처럼 한우를 가래를 끄는 농사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게 할 청년들도 없어진 이유도 한몫 하겠지만 요즘의 한우는 거의가 육류공급을 위한 축산용으로 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시중에서 유통되는 한우라는 이름하의 쇠고기는 거의 다 육식용으로 길러진 젖소로 누런색의 토종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육우다. 이들은 풀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 사용한다는 동물성 재료가 첨가된 사료를 그대로 먹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중 송아지를 낳기 위한 어미 소 등을 포함하여 30개월이 한 참 지난 소의 뼈 내장 등 SRM 이라는 위험부위를 그대로 생산해서 시판해 내고 있다.

셋째 현재 북한에서는 건강권이라는 천부인권을 가진 동포들이 건강이나 웰빙은 커녕 끼니가 없어 내일 조차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려 수백만이다. 정녕 필자에게 재산이 많다면 미국산 쇠고기를 값싸게 사서 북한의 꽃제비 등 인간이하의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그리하여 동포들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건강을 되찾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이후에,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라도 10년이라는 긴 잠복기 후에 발병할 지도 모른다는 광우병에 신음하는 동포가 생긴다면 차라리 그 일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당히 받는 길을 택하겠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웰빙 건강권보다 더 중요한 북한 인민들의 생명권에 대해서는 왜 함구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더불어 북한 인권 법안의 통과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세계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묻는다.

정구현사제단은 평화사제단으로 바뀌어야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촛불시위에 관련한 현재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행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께름칙하다. 게다가 “정의구현”이라는 용어가 사제단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현상자체부터가 매우 건방지고 독선적이다. ‘정의(사회) 구현‘란 말은 5공 시절 전두환이 가장 즐겨 쓰던 말이다. 정의란 말은 평화나 자비와는 달라서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는 차갑고도 공격적인 용어다. 게다가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정의롭지 못하게 보이던 사람들 보다 오히려 ‘정의‘를 독점했다고 착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더 큰 참극을 불러왔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성지회복이라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명분으로 내걸고 몇 세기에 걸쳐 학살을 자행했던 불순한 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은 그 적절한 본보기다.

과거 5공 시절에는 이런 명칭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해도 너무나 변했다. 이제 그런 이름은 북한의 김정일 독재정권에 대항할 경우에나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사제복을 입은 수십 명의 정의구현 사제단보다는 국경없는 의사회 출신의 폴러첸 같은 사람이 훨씬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이제 ‘정의구현사제단‘이란 명칭을 시대에 걸맞게 ’평화사제단’으로 바꿀 의향은 없는지 공개적으로 질의한다.

인간에 대한 참다운 사랑

인간성에 대한 많은 연구 성과로 성직자나 사제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특별나게 우월한 존재일 거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사제들도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권세와 명예와 욕망에 유혹을 쉴 새 없이 받고 있는 불쌍한 어린 양들임을 다 알고 있다. 특히 각각의 교회의 수장으로 위치하는 개신교 목사와는 달리 특정 지역의 교구를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카톨릭 사제단은 역사이래로 늘 내부적인 권력암투가 심했음을 잘 알고 있다.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이 특정한 방에 추기경들을 가두어 놓고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투표를 속하는 이유조차 선출과정에서 발생하는 분파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제도적 장치임을 잘 알고 있다. 교사들도 삶의 표상인 스승이 아니라 노동자이며 간호사도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인식이 대중에게 공감될 때, 그들의 인권과 권익이 제대로 보호되듯이 역설적으로 사제 또한 불완전한 인간 중의 한 명일 뿐이라는 대중의 이런 자각(自覺)이야말로 사제들을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존경하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천주교 사제들, 특히 정의를 실현한다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주예수님이 행한 대로 40일 금식기도를 몸소 실천하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앞장 서 희생하라!" 식의 맹목적이고도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사회가 얼마나 숨막히고 무서운 사회인지 사제단 스스로가 잘 알 것으로 판단한다.

북한인권법안에 반대한 성직자들

약 일 년 전 쯤, 필자는 북한 인권 법안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한 성직자를 보고서 깜짝 놀랐다. 하긴 성직자도 사람이니까 그가 접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그 심지어는 그가 자주 만나면서 친밀하게 교감을 갖는 인간들의 성향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 존재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들을 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사제들 사이에도 분명 파벌이 있을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권세를 얻기 위한 권력투쟁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현재 종교는 인지과학이나 뇌과학의 획기적인 발전에 의해서도 그 근원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단들 스스로 낮은 데로 임하지 않고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천국이 아니라 지옥 불에 떨어질 오만이고 건방짐에 다름 아니다. 진정 정의구현사제단들 면면의 의식이 깨어있는 분들로 구성되었다면 이제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그 명칭부터 좀 덜 공격적이고 덜 오만한 명칭으로 바꾸어야 함이 바람직하다.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지만 사제라는 권위를 빙자한 오만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어린 아이는 수단일 수 없다

유모차에 태운 아기를 인간방패로 쓰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두고 인간의 본성에 준거하여 가장 크게 꾸짖어야 할 사제가 오히려 정상인들의 휴머니즘적 시각을 공격하면서까지 도리어 면죄부를 발송하다니 정말 가증스럽기로는 그 짝을 찾을 길 없다. 그 일에 조금이라도 양심에 꺼림칙했다면 이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한데 공개적으로 이를 그릇되게 표명한 일은 김인국 사제의 의식세계에 잠시 사탄이 강림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온갖 양태의 시위가 있을 것인데 그때에도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다가 불상사라도 발생하면 김인국 사제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런 저급한 발언을 한 김인국 신부가 “종교적 수양이 몹시 덜 된 사람이며 지성조차 덜 갖춰진 괘변론자” 라는 건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서 사용한 언사를 보면 즉각 파악할 수 있다. 보통 종교적 수양이나 인격이 완성된 단계에 이른 사람은 일반인 보다 훨씬 순화된 언어를 사용한다. ‘추장의 목소리는 낮다‘라는 격언에서 보듯이 말의 힘은 그 담긴 뜻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공격성이나 핏대 세움에서 오지 못한다. 이러함에도 사제라는 직분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 공격적이고 과격한 언사만을 골라서 사용하고 있다. 평화, 화해, 비폭력, 관용 그리고 사랑의 언사가 아닌 ‘방패로 찍는다’ ‘억압과 윽박’ ‘굴종’ ‘폭력’ ‘폭군’ 등의 지극히도 자극적이고 공격적이고 정치적인 언사를 남발하고 있음에서 확인한다.

잔인한 원리주의자들

또한 FTA를 말하면서 국민의 높은 자존감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황당하리만큼 원리주의자임을 드러낸다. 원래 이런 원리주의자들이 가진 동전을 살펴보면 앞면에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뒷면엔 언제나 잔인성이나 비겁함이 함께하고 있다. 이는 앞의 글에서 밝힌 ‘빵을 훔친 소년에 관한 기사’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다. 과거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후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창했던 꼴통 원리주의자들의 모습이 김인국 사제와 오버랩됨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결국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어서까지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했던 그 꼴통 명분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오판으로 인해서, 성밖에서 무참하게 짓밟히고 능욕당하고 있던 민초들의 생명권과 자존감은 안중에라도 있었을까? 그 당시 민초들은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의 노선과 명분주의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를 위한 반미인가?

사실 필자는 지금이라도 가능만 하다면 북한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소수 지배 엘리트들이 차라리 반미전선을 포기하더라도 굶주림에서 허덕이는 민초들의 생명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왜냐하면 민초들은 몇몇 지배엘리트들의 비인간적인 신념이나 이데올르그를 위해 희생을 감내해야 할 수단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의 목적적 존재로 대우받아야 할 천부적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을 인간 존엄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미(反美)를 하더라도 그게 ‘누구를 위한(For Whom?) 반미’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반미를 해서 민초들이 더 잘 먹고 잘 산다면 필자부터라도 더 극렬한 반미전사가 되겠다. 하지만 반미자체가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배 엘리트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엉뚱한 수단으로 전용되어 버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민초들은 그를 위한 부차적인 도구로 전락하는 상황이, 진정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인지 정의구현사제단에게 묻고 싶다.

사제단의 업적

이런 명백한 오류를 범한 와중에서도 이번 촛불시위정국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한 업적은 분명히 있다. 쌍방간에 폭력으로 치닫고 있는 촛불시위를 비폭력 평화시위로 바꾼 일이었다. 이 점 칭찬받아 마땅하다. 제발 끝까지 비폭력 평화시위로 이 시위가 끝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해 주기 바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유리해 진 쪽은 이명박 대통령 쪽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촛불 시위는 이명박측의 승리로 귀결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짓은 잠시 진실을 이길 수 있지만 오랫동안 이길 수는 없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하게 고려해야 할 변수는 4년 반이나 남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다. 과거 김영삼 집권말기에 닥친 IMF는 레임덕으로 손을 쓸 수 조차 없었다.

IMF의 기억

그중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의 국회 파업은 IMF의 직격탄이 되었음을 역사는 기억한다. 지각 있는 지도자들이라면 도움을 줘서 난국을 돌파하도록 해도 모자랄 텐데, 제 1 야당이 국회파업으로 IMF를 재촉한 일은 절대로 페어플레이가 아니었다. 지금의 촛불시위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취임한지 불과 100일 밖에 안 된 시점에서 특별한 근거도 없이 탄핵까지 주장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대통령이 몸소 사과까지 하고 재협상까지 한 상황에서 또 전면 재협상을 하라면서 생떼를 쓰고 있는 형국이다. 일단 이 시위대가 원하는 전면재협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기 바란다. 처음부터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음은 정부가 국제관례를 어겨가면서까지 힘든 재협상을 하더라도 계속 또 다른 생트집을 잡기위한 교묘한 장치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적어도 광우병 대책회의 등 촛불시위를 주체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쇠고기 전면 재협상 같은 황당하고 추상적인 말 말고 그들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혔어야만 옳았다. 그래야 협상을 주도하는 실무행정가도 훨씬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게 또 올바른 자세다. 국민들은 이들이 원하는 것이 전면적인 수입 금지를 원하는 건지, 어느 정도 선이면 수입을 허용하겠다는 건지조차 애매모호한 상태다.

폰더씨의 질문

다시 비록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라는 책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필자가 폰더씨를 대신하여 솔로몬 왕께 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물론 필자가 그 책의 저자였다면 분명히 이 질문을 했을 것이고 다음과 같이 이 대목을 완성했을 것이다.

폰더씨는 근엄하고 더 없이 총명한 눈빛을 한 솔로몬 왕을 향해 한 걸을 다가가서 예의를 표하고 물었다. 오랫동안 품어 온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하늘아래 더 없이 현명하신 솔로몬 왕께 감히 아뢰옵나이다. 만에 하나라도 아기를 반으로 나눠 갖자고 했던 여인이 생모일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까? 솔로몬 대왕은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자네 말대로 그 여인이 생모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네. 토끼같은 동물은 자식을 낳은 순간 남이 들여다보면 자기 자식을 삼켜서 죽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솔로몬 왕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눈은 마치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을 보고 경탄하는 순수한 목동의 눈빛 같았다. 폰더씨가 솔로몬 왕의 눈빛에 넋이 나가 있을 때, 마치 하늘에 계신 그 분의 근엄한 음성처럼 그의 귓전에 또렷이 울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설사 그 아이가 진정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 해도 칼로 둘로 나누어 갖고자 하는 순간, 그 자격이 박탈되어야 정당하지 않은가?“ 솔로몬 왕의 대답은 마치 섬전같이 폰더씨의 정수리를 스쳐 지나갔다. 폰더씨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이 찬란한 햇살에 눈이 녹아 사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김휘영 (문화평론가)

알림)

1.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이명박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이유(국민은 성공할 대통령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2. 직전 칼럼 ‘촛불 시위 지식인들은 너무나 비겁했다’에 대한 맞춤법 지적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곧 교정본을 올리겠으니 염치없지만 졸고를 퍼 가신 분들은 번거럽더라도 정정 부탁드립니다.

3. 이번 촛불시위는 한국의 미래와 민주주의에 대한 워낙 중요한 문화현상이므로 4~5부 이상의 시리즈가 나올 예감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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