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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옥의 티, '밀양' <2>

'밀양'에 대한 자화자찬식 평단태도 문제있다.


거리유지의 실패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영화와 자신과의 거리 유지에 실패하는 대목이 문득문득 등장하고 있음은 아마도 그가 소설가적 시점에 익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설에는 전지적 작가시점이란 게 있다. 즉 작가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의 심리에 까지 뛰어들어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소설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 영화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문법을 '시각화'라는 과정을 통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영상언어 특유의 문법이 따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들이 유괴당한 사실을 알게 된 신애가 종찬을 찾아가서 되돌아오는 대목의 처리도 영상언어 문법으로는 좀 어색하다. 냉정하게 지적하면 이 대목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이 장면이 소설 속이라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신애의 속 마음을 상세히 묘사가능하다. '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이 절박한 순간임에도, 가라오케를 틀어놓고 신나게 노래를 하고 있는 저 미련한 인간에게 차마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순 없었다. 그래서 신애는 망연자실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오히려 종찬이 가라오케가 아니라 스트립 쑈를 하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도움을 갈구해야만 오히려 그 절박한 심정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아니면 되돌아설 수밖에 없는 특별한 상황을 묘사해 주어야 할 책임이 감독에게 분명코 있다.

세계적 흥행몰이에 성공했던 영화, '패닉 룸(Panic Room, 2002)'의 경우, 조디 포스터는 절박한 상황에 몰려 한밤중에 전(Ex)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이 장면은 "오죽하면 과거에 자신을 배신했던 전(前)남편에 까지 도움을 요청했을까?" 하는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신애처럼 되돌아서는 행위는 전지적 소설작가가 그 주인공의 속 마음을 따로 묘사해주지 않는 한, 관객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지푸라기'라고 해서 붙잡지 않는다는 건, 그 만큼 절박하지 않음을 표현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게다가 극중 신애와 종찬의 관계는 나도향의 소설 '뽕'에 나오는 안협집과 뒷집 머슴 삼돌이의 관계도 아니다. 신애가 처한 상황은 안협집보다 훨씬 절박했고,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밀양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종찬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종찬이 혹시 유괴범일 수도 있다는 의혹--물론 그의 목소리를 아는 까닭에 이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이 떠올라서 그랬다고 양보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경로로든 관객에게 표현되어야 했다. 즉 상황이 많이 진행된 후에라도 신애가 "저기요, 그 날..... 우리 준을 유괴했다는 전화가 왔던 날, 카센터에 왔었어요" "신애씨, 그래서요?" " 갑자기 혹시 우리 준을 유괴한 사람과 한 패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라고 오열하며 쓰러진다. 신애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종찬, 담배를 꺼내 불을 붙히면서 " 기분이 좀 섭섭...." 이때 쓰러지는 신애를 황급히 붙잡으며 급히 말을 바꾼다 " 하긴 요즘 세상에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예요" 이런 식의 장면을 삽입했더라면 관객들도 " 아!, 내가 신애라도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라고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더 이해하고 더 가슴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발길을 되돌린 신애의 속 사정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영화 감독 자신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전지적 작가시점의 소설을 읽는 독자가 아니다. 이런 이상한 상황 또한 이창동 감독이 신애라는 인물에 너무 몰입해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촌극이다. 팀 버튼(Tim Burton) 감독이 말한 "감정을 너무 내면화한 나머지 감독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소재에 대한 초연한 관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최종 결과물이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경우"의 예로 볼 수 있다. 팀 버튼이 강조한 "감독과 영화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들

정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혼자만의 고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다고 하자. 필자라면 이런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허겁지겁 달려간 신애가 카센터의 창문을 두들긴다. 안쪽 방에서 노래 부르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종찬은 이를 못 듣고 계속 노래만 부른다. 신애의 손이 유리창을 계속 두들기다가 아예 문을 밀치고 들어가려 한다. 그런데 문은 굳게 닫혀있고 가라오케 소리만 요란하다. 이때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경찰에 신고하면 아이는 죽엇!' 하는 인질범의 협박성 멘트를 기억해 내는 의식적인 장면이 삽입된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멋칫!' 한다. 곧 신애가 맥없이 돌아선다. 되돌아가는 신애의 뒤로 종찬의 노랫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벗겨져 나갔던 신애의 신발 한 짝 위로 폭주족이 탄 오토바이가 "타타타타" 지나가는 장면이 클로즈업된다(이 장면은 아들 '준'이 죽는다는 복선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이런 형식이 되어야만 신애의 고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고 또 그 고통은 더욱 예리하게 관객에게 파고들 수 있다. 또 '절박하게 문을 두드리는 행위', '시끄러운 가라오케 소리', '굳게 닫힌 문','소란스러운 폭주족' 등은 현대인의 소외(疏外)와 소통의 부재 같은 강한 상징으로 투사되는 부수적인 성과물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창동 감독이 표현한 장면대로라면 종찬이 구원의 손길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애가 구원을 요청하기를 스스로 포기했음이다. 관객이 납득할만한 뚜렷한 이유는 표현되지 않았다. 이는 정상적인 시각--특히 서구의 시각--이라면 자식의 안위(安危)까지도 자신의 '감정적 사치'를 위해서 희생시키고 말았다는 도덕적인 비판까지 감내해야 할 지 모른다. 이런 효과가 나오고 마는 점 또한 글로 묘사되는 소설문법과 주로 이미지로 표현되는 영화문법의 현격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아쉽게도 이 차이점은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영화와 자신과의 냉정한 거리두기에 실패한 부분을 너무 크게 부각시켜 버렸다.

비밀의 햇살과 빽빽한 햇살

밀양에서 햇살이 신의 의지를 은유하는 대목은 서너 군데 나온다. 첫째는 극의 초반에 밀양을 '비밀스러운 햇살'로 해석한 부분이다. '밀양' 할 때의 밀(密)은 '정밀'이나 '치밀'에 나오는 '빽빽할 밀'이 원뜻이라 차라리 꿀을 말하는 당밀(糖蜜)의 '밀'이나 함양(咸陽)할 때의 '함'에 가깝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씨크릿 썬싸인'이란 영어제목에서도 보듯이 비밀(secret)의 '밀'로 해석한 것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일관되고 있어 좋다. 아쉬운 점은 이 의도가 얼마 안가 종찬(송강호)의 대사 "한나라당 도시고요!"에서 심하게 삐꺽거린다. 영화의 주제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고, 칸 영화제에서 한국의 지역감정에 기반된 정치문화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선보이면서 영어자막으로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이 대사 한마디는, 세계 어디에나 있을 법하기에 보통명사의 속성이 강한 '비밀의 햇살'로서의 밀양을 '빽빽한 햇살'이 비추는 대한민국의 특정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원위치 시켜 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만큼 카메라의 초점이 휘청했다. 이창동 감독이 밀양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표충사와 얼음골이 있는 밀양이 아니다. 영화 종반에 종찬이 "사람 사는 곳은 다 똑 같아예" 라는 대사로 말하듯,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명사 '밀양'이다. 소설이든 영화이든 등장하는 모든 행위와 묘사가 주제에 일관되게 기여할 수 있을 때에 질적인 우수함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나라당 관련 대사는 엉뚱한 '옥의 티' 였다.

둘째로 약국에서 주인공 신애가 교회에 다니도록 전도하는 약사와 나누는 대사 중에 등장한 햇살은 나름 괜찮았다. 그 다음은 교도소 면회에서 용서의 문제에서 하느님과 살인범의 일방통행에 절망감을 느낀 후 신애가 신에 대들며 절규하는 장면의 연속이다. 하필이면 자신을 교회로 인도한 사람의 남편인 집사를 유혹에 빠뜨리는 현장을, 하늘에 있을 신(God)이 잘 볼 수 있도록 굳이 차 밖으로 의도하는 장면도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으리라 본다. (3부작 중 2부 끝) / 김휘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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