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기타


배너

한국영화 옥의 티, '밀양' <1>

'밀양'에 대한 자화자찬식 평단의 태도 문제있다.


2007년 한국 영화 옥의 티 시리즈 <밀양>편 <1>

'밀양'에 대한 자화자찬식 평단의 태도 문제있다.

송강호의 명연기와 전도연의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등으로 한국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영화가 '밀양'이다. 게다가 2007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까지 모두 4개 부문이나 수상했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 비친 '밀양'은 잘 만든 영화로 보기엔 뭔가 개운치 않다. 혹시라도 이 작품을 한국 영화사에서 작가주의의 지향점쯤으로 보겠다면 매우 많이 미흡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남녀 주연상은 몰라도 솔직히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은 좀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재의 탁월성

이창동 감독이 선보인 '밀양'은' 종교(특히 기독교)를 매개로 한 용서와 화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사회윤리와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개인윤리와의 충돌을 정면으로 부각시킨 점은 매우 탁월하다. 구원이나 해답을 그리고 있지 않은 까닭에 인간 고뇌에 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면 오롯이 감당해야 할,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빼어난 작품이다. 영화 '밀양'을 통해 신애(전도연)를 가둔 고통의 감옥에 대한 처절한 엿보기를 하다보다 보면, 그 죄수의 목을 차고 있는 칼은 어느덧 내 목을 옭죄어 오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칼의 무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부조리한 실존의 무게다. 어릴 적에 누구든지 생각해 보았음직한 "실컷 죄짓고 살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용서받고 천당 가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가?"라는 질문을, 한가한 제 3자가 아닌 신애라는 피해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그려 본 영화다. 따라서 죄지은 자(者)의 회개와 신의 구원이라는 일원적 구도, 어찌 보면 지극히도 이기적이고 일방통행적인 구도에서 철저하게 소외(疏外)당하면서 남겨진 자(者)의 절망과 절규가 영화의 중반 이후를 장식한다.

밀양의 마지막 장면--최고의 반전인가, 소통의 미흡인가?

영화 '밀양'의 마지막 씬은 시궁창을 비춰주는 장면이 부자연스럽게 지속된다. 이 장면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이 최고의 반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필자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 부분은 오히려 이창동 감독의 영상메시지 전달 기법에 대한 일종의 한계를 보여 준 장면이었다. 좀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 명감독 팀 버튼의 시각을 빌어 보자. 참고로 팀 버튼은 2007년 골든 그로브에서 조니 뎁에게 생애 최초로 남우 주연상을 안기며 그 자신은 코미디ㆍ뮤지컬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거머쥔 영화 '스위니 토드(Sweeney Todd)'의 감독이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이유는 감정을 너무 내면화한 나머지 감독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소재에 대한 초연한 관점을 유지하지 못할까 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최종 결과물이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들 때 내 목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로랑 티라르 지음, 조동섭 역 P206, 나비장) 물론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의 분리가 능사가 아니고 작가주의 영화 중에서 시나리오 작업과 감독을 한 사람이 겸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완성도 높은 영화를 위해서는 감독과 영화 사이에 '일정한 거리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팀 버튼과 필자의 견해가 정확히 일치한다. '밀양'의 경우, 팀 버튼이 유독 강조하고 있는 '소재에 대한 초연한 관점의 유지'나 '감독과 영화와의 일정한 거리두기'에서의 실패가 확연하게 드러난 부분이 군데군데 뾰루지 처럼 튀어난다.

피터 잭슨의 경우

영상언어 중에서도 특히 언어가 생략되고 거기다 특정한 액션도 없이 이미지로만 표현되는 장면은 그걸 보는 관객들이 너무나 다양하게 해석하고, 때로는 오해할 여지가 많기에 좀 더 구체성을 띌 필요가 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세계의 거장 반열에 당당히 올라선 피터 잭슨 감독은 대작 '킹콩'에서 다음과 같은 내러티브로 엔딩을 완성한다. 고층 빌딩 위에서 추락해서 죽은 킹콩 주위에 무수한 사람들과 기자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린다. 이때 한 사람이 묻는다. "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죽을 게 뻔한 데 왜 올라갔을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거든다. "말 못하는 짐승의 속을 누가 알겠어?" 관중에게 돌아온 대답은 옆에서 나타난 칼 던햄 (잭 블랙)의 한마디, 즉 "미녀가 야수를 죽였다! (Beauty killed the beast!)" 였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명대사로 꼽히는 이 말은 무려 3시간이 넘는 길고 긴 영화에 구두점을 쾅! 찍는다. 그 뒤로 마치 동양화의 여백을 장식하는 낙관인양 스텝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찬찬히 수놓는다.

이창동 감독의 안일함

이 짧고 함축적인 대사 세 개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영상 이미지는 말과 글처럼 화자와 청자 간의 특정된 약속이 아니다. 때문에, 오해할 소지가 많은 이미지에 의한 메타포(은유)보다는 언어에 의한 은유나 직설적인 표현이 더 우수할 수 있음이다. 감독 피터 잭슨은 여자 주인공인 앤(나오미 왓츠)때문에 킹콩이 죽음을 택한 스토리를 다 알고 있을 법한 관중들에게 재차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런 방식은 '밀양'의 중간에도 잘 활용되고 있다. 주인공 신애가 감옥에 가서 유괴 살인범을 면회하고 난 후, 허망하게 쓰러진다. 신애가 쓰러지는 설정과 연기가 워낙 뛰어나서 이 장면에서 컷하고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어도 관객들은 충분히 신애의 심정을 다 이해했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은 종찬(송강호)을 '킹콩'의 칼 던햄 처럼 잘 활용해서 관객과 직접적으로 소통한다. "사실 용서해 주려고 왔는데 하나님이 이미 다 용서해 버렸다니 정작 본인은 얼마나 허탈하겠어예?" 이런 화법을 잘 아는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엔딩의 실패는 너무 미숙하다기 보다는 안일했음에서 왔다고 봐야 올바르다. 이 작품의 질이 떨어진 원인은 이 안일함이 하필이면 매우 중요한 엔딩에서 발생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알랭 드 보통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에게도 이 마지막 장면은 "어, 뭐냐?" 정도의 어리둥절함이나 당황스러움, 아니면 감독의 안일함으로 인한 소통의 미숙 정도로 다가섰음직하다. 어찌 보면 그들이 이 영화에 여우주연상을 안길지언정,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외면한 이유가 충분히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소 황당한 엔딩을 보는 국내 평론계의 시각은 이구동성으로 칭찬 일색이다. 게다가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 까지도 한국 영화의 최고의 반전으로 이 장면을 꼽고 있다.

엔딩을 '햇살이 시궁창을 비추는 장면'으로 한 것이 2007년 한국 영화에서의 최고의 라스트 씬이라지만, 영화평론가 이동진 기자는 햇살이 비춘 대상을 시궁창으로 보지 않고 '따가운 마당'으로 기록하고 있다. 평론가들조차 그 판단이 엇갈린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있다. 해석의 엇갈림이 아니라 시궁창과 따가운 마당으로의 사실인식에 대한 헷갈림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즈음에서 '알랭 드 보통'의 말이 생각난다."누군가 내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독자의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다" 많은 사람들이 음미할 가치가 있는 명언으로 생각된다. 만약 이(李) 감독이 이 엔딩 장면의 처리에 좀 더 고민을 했더라면 작품상이나 감독상에 좀 더 가까워졌을 수 있다 (3부작 중 1부 끝)/ 김휘영 (문화평론가)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