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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스트레스의 주범- 지나친 간섭, 애정인가 질병인가?

올바른 대화법은 공감에서 시작한다

【미디어워치】김휘영의 문화평론= 설·추석 등 명절이면 그동안 자주 만나지 못한 일가친척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흔히 아랫 사람들은 윗 사람에게서 온갖 간섭을 듣게 된다. 한국 사회는 말하자면 ‘간섭이 강물처럼 넘치는 사회’다. 명절이 되면 그야말로 간섭의 홍수다.

“수능시험은 잘 봤니?“ ”어느 대학에 붙었니?” “직장은 구했니?” “결혼은 언제 할거니?“ 이런 질문들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명절증후군이 생길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2014년 올해 초 앙케이트 조사에서 명절스트레스의 주범으로 ‘지나친 간섭’이 1위에 올랐다.

간섭은 애정?

"이게 다 니가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내가 너한테 애정이 없으면 이런 간섭도 안해, 니가 잘되든 말든 가만 내버려두지 왜 간섭을 하겠니?"

이게 바로 ‘간섭=애정'론자들이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이유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유가 아니다. 간섭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자세히 분석하면 대부분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간섭 욕구를 합리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이고 변명이고 핑계다. 내세우는 이유란 것이 객관적인 타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간섭자의 일방적인 판단에 좌우된다. "니가 간섭받을 만한 짓을 하니까 그런다" 고 하지만 폭력을 가해놓고 "니가 맞을 만한 짓을 해서 때렸다"는 논리와 뭐가 다른가?

서양인들의 경우

서양인들이 한국에 오면 한국인들의 지나친 간섭에 상당히 불편해 한다. 한국인들이 걸핏하면 "나이는 몇이에요?(How old are you?)", "결혼은 했어요?(Are you married?)" 같은 호구조사를 마구 해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은 서양인들에게 개인 프라이버시(privacy)를 침범하는 사항에 속한다. 본인 스스로 말할 때까지 묻지 않는 것이 예의고 에티켓에 속한다. 물론 이에는 다른 것을 물어볼 만큼 한국인들의 영어구사 능력이 높지 못한 것과도 약간의 상관성이 있을 거로 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층적이고 중요한 문화적인 문제가 있다.

사실 한국인들끼리도 인간관계를 맺을 때 나이, 고향, 학교 등 이런 걸 캐내지 않고서는 대화가 안될 정도다. 이런 방식으로 캐내는 개인 정보로 이후 이어질 대화로 존댓말과 낮춤말을 구별해야 하는 잣대가 될 정도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사회적 유대관계가 수평보다는 수직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상하를 중시여기는 수직적인 인간관계는 그 사회에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컴포터존(comfort zone)과 간섭

짐승들도 자기 영역을 지키려 한다. 혹시라도 다른 개체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면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모 사피엔스 또한 엄연히 동물 속의 한 종(種)이기에 과도한 간섭에 반발하고 대항하는 심리 또한 이와 유사하다. 인간들이 서로 일정거리 이상 가까이 다가서면 심리적으로 불편해지는 공간이 있다. 이를 전문용어로 컴포터존(comfort zone) 이라 한다. 엘리베이터처럼 좁은 공간에 함께 있을 때 느끼게 되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이 영역이 침해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적인 공간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영역에서도 작용한다. 간섭은 언어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공간을 침해하고 침해받는 사회적 행위다. 사실 문화적으로 세련된 사회일수록 간섭 활동이 적다. 또 개인적으로 덜 권위적이고 민주적인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간섭을 적게 한다. 즉 사회 문화적으로 세련된 사람일수록 간섭을 적게 한다. 또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에 대한 간섭욕구를 잘 자제한다. '노파심'이란 말은 간섭자의 정신력과 간섭행위의 빈도수와의 상관관계를 잘 드러내는 용어다.

또 우리 한국인들은 실제로는 스트레스만 줄 뿐 실질적인 별 도움도 안되는 방식으로 간섭을 한다. 가령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서 좋은 직장이 하나 나왔는데 너만 괜찮다면 소개해 주마“라는 형식이 아니라 무턱대고 ”직장은 구했니?“ 라고 물어본다. 이때 혹시라도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 좀 쓰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대응하면 졸지에 ‘저런, 남은 걱정돼서 충고했는데 버릇없는 놈‘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지나친 간섭은 질병

청결에 대한 강박관념이 결백증이란 정신 질환이듯 무엇이든 지나치면 질병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과도한 간섭은 정신질환이다. 간섭이 문제가 되는 건 타인의 독립된 자아(ego)에 상처를 주고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유아교육학에서도 아이를 올바르고 제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아이가 어떤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그 중간 과정에 엄마가 끼어들어 간섭하기보다 가만히 지켜보는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의 조바심이 인내와 절제력을 잃게 만든다. 이 경우도 엄마의 정신력이 약하거나 현명하지 못한 것이지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실수하는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엄마의 간섭이 반복될수록 아이의 자아(自我)는 늦게 발달하고 왜곡되어 간다. 훌륭한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바램과는 반대로 점점 소심하고 일그러진 자아를 구축해가기 십상이다.

이런 예는 명백한 질병에 해당한다. 필자가 군복무 중에 알게 된 하급자였는데 자신의 홀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첫 휴가 때 강원도 고향에 갔다 온 후에 당시 상병 말기였던 필자에게 이렇게 고민을 토로했다.

“상병님, 엄마의 간섭 때문에 미치겠어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엄마랑 밭에서 일하다가 걸핏하면 화를 내며 농기구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가버리곤 했어요. 그때마다 엄마랑 둘이서 밭일을 하면서 아빠를 원망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번 휴가를 갔다 온 후 아빠가 문제가 아니라 엄마가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홀로 일하시는 엄마가 안쓰러워 감자밭에서 함께 일을 했는데 엄마는 감자를 캐고 저는 감자를 카트에 담아 날랐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금새 일이 끝날 걸 엄마가 내가 일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고 쉬지 않고 참견을 하지 뭐예요. 가령, 카트를 그 방향으로 가지 말고 왼쪽으로 끌고 가라. 이렇게 좀 기울여서 가면 편하다는 둥 일하는 내내 온갖 지시와 시시콜콜한 간섭을 하는 거예요. 이게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알아서 감자를 다 운반할 건데, 그걸 꼭 엄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에요. 잠시도 못 지켜보고 계속 그러니 어휴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이제야 일하다가 농기구를 던지고 집으로 가버리곤 했던 아빠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동네에서 울 엄마 별명이 뭔지 아세요? ‘알래이 박사‘여요. 동네의 온갖 일에 아는 체 나서길 좋아해서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에요”

필자는 ’알래이 박사‘라는 특이란 별명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좀 있다가 그 일병이 덧붙힌 말은 자못 심각했다.

“누나와 형도 온갖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게 설마 이게 유전병이면 나는 어쩌죠?”

재미있기도 해서 물어 보니 그 일병의 어머니는 형제자매가 매우 많은 집에 장녀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그후, 아버지 형제자매 즉 삼촌들과 고모들이 많은 자기 집안에 맞며느리로 시집 온 분이라 했다. 필자는 그 일병의 어머니가 설사 장녀로 태어났다 해도 셋째 또는 넷째 며느리로 시집살이를 한 분이라면 상태가 조금은 나았을 거로 판단되었다. (중략)

간섭의 정치사회학 – 권력 게임

한국 사회에서의 간섭이 이루어지는 프로세스를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권력의 비대칭(the bias of power)’이 철저히 작용한다. 즉 이 과정에 공평한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 간섭이 진정으로 ‘순수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참견’이라면, 아랫사람도 윗사람의 일에 참견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아무리 윗사람일지라도 아랫사람의 말이 끝날 때까지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 문화에서는 나이 여하를 떠나 서로 존댓말도 안 쓰는 친구지간이라 이런 문화가 성숙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이런 바램은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아무리 애정이 있다한들 아랫사람이 섣불리 윗사람 일에 간섭 정도가 아니라 작은 참견이라도 하고 조언을 말하다가는 엄청난 대가를 각오해야 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참견은 애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참견은 애정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굴복시켜야할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간섭질환자와 지배욕

간섭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지배욕이 병적으로 강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의도대로 안되면 폭력성을 행사하기도 한다. 때때로 자신의 간섭을 수긍해주지 않으면 상대방 앞에서 역정을 내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고 부수기도 한다. 이들에게 주변의 아랫사람들은 '존중해 주어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자신이 지배해야할 영역'과도 비슷하다. 자신의 컴포터존은 매우 광대해야 하지만 상대방의 그것은 협소할수록 좋다. 이는 분명 철저한 이중성에 기반을 둔 폭력적인 사고방식임에 틀림없다. 사실 주변에 대한 간섭을 적게 하는 사람일수록 인격이 높은 단계에 다다른 사람이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반면에 아랫사람에게 간섭질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가부장적 권위주의 문화’에 쩔어 사는 구시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혹시라도 간섭을 하면 마치 짐승이 불가침의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것처럼 강하게 응징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애정어린 충고를 "니 일이나 잘 해"라고 쉽게 거부하며 뿌리치지만, 아랫사람이 위사람에게 "너나 잘하세요!" 하다가는 뒷일을 걱정해야 한다. 심지어 대화 중에 “이 ××가 어디서 감히~“ 라는 말도 튀어나오기 일쑤다. 영역을 침범당한 들짐승의 ‘으르렁‘ 거림에 다름없다. 이런 사람은 대화도 할 줄 모른다. 오로지 부인, 자식, 동생, 하급동료 등의 아랫사람들에게 지시와 명령이 있을 뿐이고 이게 대화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무의미한 간섭

한국 사회에서 윗사람의 간섭에 아랫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고 심리적 저항감이 생기는 건 이 간섭들이 그 순간의 말 뿐이고 스트레스만 줄 뿐 실질적으로 본인에게 별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간섭을 하는 방식 또한 세련되지 못하고 매우 거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개인이 25세 정도를 넘어서면 인간 그 자체로 개성을 존중해주고 인격적으로 존중받아야할 존재가 되었음을 잘 인지하고 또 그렇게 대우해 줄 줄 안다. 상대방을 인격체로 준중할 줄 아는 건 바로 자신이 올바른 인격체에 다다라 있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공감: 인간관계의 뿌리- 어드바이스를 위한 세련된 화법의 기초

간섭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유독 대화법에 서툴다. 설사 아무리 애정에 기반한 일이라 할 지라도 이런 상태의 간섭은 상대방에게 도움은커녕 상처를 주기 일쑤다. 이런 사람들은 EBS 다큐프라임 퍼펙트 베이비 5부작 중에서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공감- 인간관계의 뿌리> 편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수능시험은 잘 봤니?“ ”어느 대학에 붙었니?” “직장은 구했니?” “결혼은 언제 할거니?“라는 형식의 마치 심문하거나 추궁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질문을 무턱대고 하기보다는 좀 더 공감어린 방식으로 다가설 필요가 있다.

굳이 질문을 해야 한다면 “수능 준비하느라 고생많았겠다. 이젠 좀 홀가분하지?” 또는 “이번 수능이 참 어려웠다는 데 넌 어땠니?(이번 수능이 쉽게 나와서 오히려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넌 어떻니?” )라는 형식이 바람직하다. 영어로는 "했니/안했니?( Do/Did ~)"나 "무엇을/ 언제 (What/ When ~?)"의 형식 보다는 가능한 대답할 상대방의 감정이나 느낌이 드러나는 표현의 형식인 "어때? (How~?)"으로 시작하는 형식이 권장된다.

공감의 마술 화법 "넌 어떻니? / How~"

또는 ”어느 대학에 붙었니?”는 “듣기에 수도권 4년제 대학가기가 옛날 서울대 가기만큼 힘들다더라. 그리고 요즘엔 학교보다는 전공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든데 넌 무슨 과를 원하니?” 라는 형식으로 해도 금방 질문자가 궁금해 하는 사항에 자연스럽게 다가선다, 그리고 섣불리 학교나 학과에 대해 등급을 매기는 대화는 자제해야 함은 물론이다.

“직장은 구했니?”는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4년제 대학 나와도 취업하기가 참 힘들다더라 너도 힘들지?” 결혼에 대해서도 정 궁금하면 “결혼은 언제 할거니?“ 보다도 “요즘 좋은 사람 만나고 있니?” 이런 식으로 일단 서두를 여는 게 무난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해 주는 방식으로 먼저 질문해본 후 대화를 시도하는 게 좋다. 이럴 경우는 간섭일지라도 배려한다는 느낌이 들기에 부작용이 덜하다. 간섭이라는 형식으로 타인의 고유 영역을 함부러 침범하면서 이를 '애정'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간섭자가 이 정도의 노력과 매너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이건 무엇보다 간섭자 본인의 인격 수양에 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아이가 놀다 넘어져 울 때, 윗 사람이 처음 해야 할 말은 " 내가 거기서 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가 아니다. "어이구, 얼마나 아프겠니?" 가 되어야 정상이고 이게 바로 공감의 본질이고 공감은 원만한 대화 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잘 형성해 가는 방법이다. (계속) / 김휘영 문화평론가·행복문화발전소장wepa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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