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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기의 투신과 한국 문화의 그늘,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

성재기 한강 투신은 한국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


【빅뉴스=서울】김휘영의 문화평론=한강 투신사건으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성재기 남성연대 상임대표가 결국 비극적 죽음으로 끝맺음했다. 그와 일면식도 없지만 그가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랬던 사람으로서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성대표의 한강투신 후 결국 사망한 사건은 한국 사회의 많은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80년대 중후반 대학생 시절 사회과학서적 중에서 마르크스-레닌 서적 이외에도 매우 인기 있는 서적이 있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었다. 소위 베스트셀러였는데 필자는 사실 사랑보다 사랑의 ‘기술’에 호기심이 당겨서 이 책을 보았다. 그런데 사랑의 테크닉이나 기교를 논한 책이 아니라 매우 철학적인 책이었다. 이 책이 요즘 인기 상한가인 연애술에 관한 책인양 선입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출판사의 상업적 목적에 따른 번역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아트(art)’ 라는 게 실제로는 본질 또는 에센스(essence)의 개념인데 이걸 잘 알면서도 출판사 측에서 판매부수를 늘이려고 일부러 예술도 아닌 기술(technics)로 번역한 감이 없지 않았다. 대학시절 이 책에 감명 받은 나머지, 에리히 프롬 저작의 『소유냐 존재냐』,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까지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기억이 있다.

조화롭고 바람직한 인격

하여간 필자의 인생에 자못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되는 이 책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프롬이 규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견해였다. 흔히 아니마(남성성에 내재한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성에 내재한 남성성)의 원형(archetype)으로 대표되는 이 둘의 속성에 대해서 에리히 프롬은 완전한 인격체가 될려면 이 둘, 즉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harmony)를 이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에 의하면 도전정신, 모험심,진취성, 투쟁심, 엄격한 규율을 상징하는 남성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그 부작용으로 전쟁의 위험이 있고 온유함, 예술, 문화, 양보, 관용(똘레랑스), 세심함, 배려 등을 상징하는 여성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또 그 나름의 부작용들(이들테면 의존성, 피동성, 비주체성 등)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프롬이 주장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격체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잘 조화된 상태’다. 남성의 입장에 있는 필자가 에리히 프롬의 이 주장을 책의 흐름에 맞게 해석하면 ‘남성의 타고난 특성에다 여성성의 특징을 갖추기 위해 예술과 문화 그리고 관용과 배려, 화해, 부드러움 등의 미덕을 갖추어야만 완전한 인격에 가까워지고 또 참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 이상화된 남녀간의 사랑

적어도 필자가 이 책에서 얻은 건 우리가 흔히 ‘사랑(love)‘이라는 것을 너무 이상화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접하는 '사랑'은 세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 속의 사랑이나 헐리우드 영화식 사랑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랑‘하면 일단 남녀간의 뜨거운 열정을 먼저 연상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른 많은 가치들을 후순위로 두고 추구하면서까지 보호받아야 할 지고지순한 절대선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프롬은 남녀간의 이러한 사랑을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규정한다. 이를 두고 프롬은 마치 ’두 남녀의 이기심의 절정이 결합된 형태‘라는 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타인의 불행에 냉정한 태도를 가지면서 자기 가족만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 또한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확장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 두 철저한 에고이스트들의 비극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접한 후 한국의 고대시절 유명한 러브 스토리인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적어도 필자가 보는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는 둘 다 철저한 에고이스트들에 불과하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다. 사랑을 명목으로 하여 절대 있을 수 없는 요구를 한 왕자 호동도 그렇지만 특히 한 남자를 사랑하여 자명고를 찢어 자기 가족과 자기 나라를 패망하게 한 낙랑공주가 더욱 그렇다.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가 결혼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필자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에리히 프롬의 참 사랑을 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낙랑 공주의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잘못한 것이다. 필자 생각에는 낙랑공주의 아버지가 딸에 대한 애정표현을 많이 하면서 키웠다면 딸의 그릇된 사랑에 의한 처참한 비극을 방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알게 된 건 참다운 사랑을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건이라 하여 경제력 등이 우선이 아니다. 일단 올바른 인간으로서의 품격, 즉 인격(人格)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랑이 숭고하고 지고지순한 것이기에 사랑에 빠지고 거기에 집중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건 망상이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라는 프롬의 견해에 따르면 더욱 그렇다. 사이코 패스, 쏘시오 패스 등은 이런 예에 속한다. 필자가 보는 젊은 청춘 남녀간의 사랑은 ‘강한 이기심의 결합체’이지만 두 당사자간의 강렬한 공감의 장(場)이 진행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감의 능력이 현저히 결여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게 선천적인 유전적 요인이든, 후천적인 교육의 잘못이든 간에 이들에겐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조차 힘든 ‘이기심’을 충족할 대상을 골라 그걸 사랑이란 이름으로 잘 포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남녀간의 사랑은 지고지순하고 사랑의 힘은 그 자체로 위대하기에 사랑이 그 사람이 타고난 성격을 좋게 바꾸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건 착각이자 환상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엔 '인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름다운 사랑이 인격을 제대로 갖추게 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지 요소 - 훈련, 집중, 인내, 최고의 관심

참다운 사랑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에리히 프롬은 다음의 네가지 요소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훈련, 정신집중, 인내, 최고의 관심이다. 사랑의 기술을 설명하면서 교육과 연결시킨 점은 참 주목할만한 시각이었다. 그리고 최근들어 밝혀지고 있는 연구에 의하면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감의 능력과 감정조절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감정 중에서도 인간관계를 파괴하기 쉬운 '분노를 조절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 능력은 타고난 유전적 특성도 있겠지만 가정교육과 제도적 교육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좀 더 자세한 건 『EBS 다큐 프라임 - 퍼펙트 베이비(2013년 6월 방영)』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1부 태아 프로그래밍/ 2부 감정조절능력 / 3부 '공감 - 인간관계의 뿌리' 로 구성된 3부작은 현재 유투브에서도 이용가능하므로 가능한 많은 한국인들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한민국 :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가 힘든 사회

대한민국은 OECD 가입국 중에서 이혼률이 가히 1위를 달리고 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남녀간의 사랑이 결혼에 이르고, 막상 생활을 함에 있어 서로간의 공감에 전방위적으로 실패하고 파산하는 것이 이혼임을 생각할 때, OECD 가입국들인 경제 선진국들 중에서 유독 한국 사회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반증이다. 그중 하나가 오랜 유교 문화의 잔재로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화라고 필자는 파악한다. 최근 들어 다소 누그러뜨러지긴 했지만 한국 사회는 남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남자답게', 여성으로 태어나는 순간 '여성답게' 자랄 것을 사회문화적으로 지나치게 강조 받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에리히 프롬이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한 조건으로 설파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를 이루기는 참 어렵다. 남성은 남성다움을 보이기 위해 나약함을 감추고 강함을 밖으로 보여야 하고 여성은 여성다움을 보이기 위해 청순가련하게 보이기를 체득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평하면 양성 평등의 고취로 한국의 여성은 남성성을 많이 갖추어 갈 여지가 확장되었는데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성을 갖추어 ‘조화로운 인격’을 갖추기 보다는 여전히 더욱 강한 남성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지 않나 한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졌던 여자축구, 여자 권투가 활성화되었는데 이에 비해 남성은 부드러워지기는 커녕 더욱 강한 남성을 겨루는 격투기를 하는 식이다.

하필이면 한강‘투신’? - ‘남성의 앞치마 두르기 이벤트’가 더 좋아

남성연대 상임대표 성재기의 한강 투신사건을 한국 사회에서 드러난 ‘문화의 그늘’이란 측면에서 보면 무수한 모순들이 엉켜있다. 성재기 상임대표가 주장하는 건 일리가 있다. 문화평론가로서 입장을 밝히자면 한국 정부에서는 남성연대에 국고를 지원해 주어야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지원금이 ‘남성이 더욱 남성답게’ 하는 일에 쓰여지기 보다는 한국의 남성들도 에리히 프롬이 말한 여성성이 가진 장점들을 함께 갖출 수 있는 일에 사용되어졌으면 한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 좀 더 조화로운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올라갈 것이다. 물론 여성단체에 지원되는 정부지원금도 ‘여성이 더욱 여성답게‘ 보다는 여성이 남성성이 가진 장점을 흡수하여 '좀 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되는 데 쓰여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한국 사회 전체가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성재기 상임대표가 1억에 해당하는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한 이벤트로 왜 ‘하필이면’ 그 위험한 한강에 투신하기를 택했을까 하는 점이 필자의 관심이다. 성재기 대표가 “정말 부끄러운 짓입니다. 죄송합니다. 평생 반성하겠습니다" 라는 식의 메시지를 밝힌 것으로 보아 스스로 이 행위에 대한 자괴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는 왜 모금 이벤트로 '여의도 광장에서 풍선날리기' 이벤트나 또 남성이 조화로운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회원들이 ‘도심에서 앞치마를 두르는 날’ 같은 퍼포먼스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 남성우월주의 문화의 그늘

물론 남성들이 앞치마 두르는 이벤트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또 오랜 유교전통으로 인해 ‘남자답지 못한 짓‘으로 폄훼당할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서 여러 남성들이 도심 광장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꼭지점 댄스 같은 이벤트를 했다면 충분히 시선을 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무엇보다 성대표 등 남성연대의 회원들이 이런 일을 남자답지 못하다 하여 경원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적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성들에게 지나치게 남성성을 강조하는 문화는 남성우월주의 문화를 낳았고 남성들이 오랜 세월동안 이 문화의 혜택을 받은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이 남성우월주의 문화의 그늘은 한국의 중년 남성들에게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에 오르게 했다. 사실 성재기의 한강투신 및 사망한 비극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한참 일할 나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인력손실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을 넘어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안임에 틀림없다.

남학생은 <기술>, 여학생은 <가정> 과목에서, 남녀 공히 <기술·가정>으로

필자가 중학생 때 남녀공학을 다녔는데 남학생은 커리큘럼으로 <기술>을 배우고 여학생은 <가정>을 배웠다. 한 학급에 남녀학생이 같이 공부했지만 이 시간만은 남녀가 따로 따로 반을 나누어 배웠다. 한데 요즘은 남녀학생 구분없이 <기술·가정>으로 배우게 한다. 양성평등의 원리가 교육과정에 구현된 참 다행스러운 교육법이다. 67년생인 성재기 남성연대대표 또한 필자처럼 <기술>과 <가정>으로 분리된 교육을 받았던 시대의 사람이다. 이 세대의 남성과 여성들 또한 <기술>과 <가정>으로 분리된 교육이 아니라 현재의 청소년들처럼 <기술·가정>을 배우고 자랐더라면 한국 사회의 공감대가 확장되어 이혼이 많이 줄어들고,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 또한 좀 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글 : 김휘영 문화평론가·행복문화발전소장

(Note) 한국 문화의 그늘(The Shade of the Korean Culture)는 필자가 집필하고 있는 책 제목이고 <문화의 그늘>, <그림자 문화;Shadow culture>은 필자가 각종 문화현상 분석을 위해 직접 창안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인용시에 각별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휘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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