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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카페 폐쇄에 대한 단상’에 대한 반론

친알카페 폐쇄는 정당하고 필요한 일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세속적 인본주의자(secular humanist, http://en.wikipedia.org/wiki/Secular_humanism )를 자처한다. 그래서 과학적인 사항에 대한 비평이 더 관심이 있고 편하다. 하지만 최근에 빅뉴스에 올라온 친일카페 폐쇄를 지적하는 최석영 비평가의 글(친일카페 폐쇄에 대한 단상 )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어서 이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최석영 비평가의 글은 일단 어떤 스탠스에서 좌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부터가 모호하다. 친일카페를 폐쇄하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래서 안된다고 하는 것인지 여기에 대한 최석영 비평가의 의견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좌파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최석영 비평가가 해당 글을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할 때는 그것이 제한될 수도 있다는 스탠스에서 썼다면, 친일카페 폐쇄를 반대하지 않은 좌파들의 문제에 대해 굳이 논할 필요도 없었다고 본다.

필자는 최석영 비평가가 표현의 자유는 그 어떤 경우에도 지고의 가치라는 스탠스에서 해당 글을 썼다고 본다. 그래서 좌파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뿐만이 아니라 태평양전쟁의 전범으로서의 일본을 찬양하는 표현의 자유까지 정당화해줘야하는 맞는 것 아니냐는 입장을 해당 글에 전제로서 깔고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것이 정말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사실 세속적 인본주의자를 비롯한 과학적 회의주의자들(scientific skeptics, http://en.wikipedia.org/wiki/Scientific_skepticism)은 어떤 성역도 두지 않으려 하고 통념에 도전하는 다양한 주제로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들도 되도록 다루고 싶어하지 않은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이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은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에서부터, 학살은 있었지만 그 숫자가 정확하지 않고 매우 적다거나 혹은 당시 유행하던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지 의도적이지 않다는 등 여러 가지 변형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나름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만약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러한 내용을 읽게 되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실관계를 중요시하는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박하며 굳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해당 주제를 거론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런 행위 자체도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공론화하게 만들어 키워주어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들 중에서도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같은 이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문제점을 다루는 “역사 부정(Denying History: Who Says the Holocaust Never Happened and Why Do They Say It? )”과 같은 책을 역사학자와 공동으로 저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지간해선 과학적 회의주의자건 그 누구건,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를 공격하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자료를 정리해서 언제든지 그들의 왜곡을 교정, 반박할 준비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들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치나 홀로코스트 부정론 문제는 서구 사회에서 예민한 문제이다. 서구 사회의 수많은 진지한 지식인들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어떤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하다. 자기들 나름대로라면 진지하다면 진지하게 통념에 도전하는 입장에 서있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을 우리의 문명사회가 그렇게까지 ‘왕따’를 시킬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일단 필자의 스탠스부터 밝혀야할 것 같다. 필자는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본다.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회적 합의에 가깝다. 그리고 그 합의는 공공의 이익에 의해서 언제든지 제한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문명사회에서 너무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공공 방송에서 적나라한 성관계 장면을 방송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과 같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원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하게 소수파의 생각을 보호해주는 것보다는, 더러는 소수파 입장에 있을 수 있는 올바른 생각을 보호해주기 위함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하려는 것은 사실 소수파의 생각이 아니다. 올바른 생각이다. 올바른 생각이 뭔지 모호한 경우가 많으므로 일단 모든 생각을 공론의 장에 끌어올리자고 표현의 자유가 있을뿐이다.

필자는 친일카페 문제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서구의 세속적 인본주의자들, 과학적 회의주의자들 등이 단호하게 다루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일카페의 문제는 단순히 그들이 전전의 일본에 호의적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있다. 그들이 거론하는 자료들이 대개는 왜곡되어 있고 특히 인본주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매우 악의적이다.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던 일제의 행위에 대해서 침묵하고 몇 가지 사실만을 왜곡해서 지속적으로 피해당사자들에게 고통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위인지 이해한다면, 친일카페의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 윤리문제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최석영 비평가는 “일본은 현재 외교적으로 볼 때 우리의‘우방국’이다. 그런데 우방국을 찬양하는 것이 왜 법적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지적을 하였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가 단순히 우리나라에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또 아름다운 일본 문화를 사랑하는 것 자체를 뭐라할 사람도 없다.

문제는 거론되는 친일카페는 그런 건전한 유형의 친일카페가 아니라는데 있다. 해당 친일카페는 과거 일본의 명백한 전쟁범죄까지 사실상 찬양하는 곳 아닌가. 이런 친일카페의 폐쇄가 타당하지 않다는 식의 지적을 하는 최석영 비평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려시대의 몽고 칩입 얘기도 나왔지만, 일제시대는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다. 이 시대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들의 시대다. 위안부 할머니 등 피해자로서 살아계신 분들이 많다. 이런 분들에게 엄청난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짓된 얘기를 조직적으로 마구 쏟아내는 곳에 어떠한 제한도 가해선 안된다는 식의 자유지상주의적 가치관은, 적어도 인본주의적 가치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 현실적 관점에서도 한번 생각해보자. 필자는 북한의 김정일, 김일성 등을 찬양하는 일을 우리가 국가보안법까지 만들어서 굳이 공권력까지 동원해 금지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 생각한다.

뭘까? 그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자인 김정일, 김일성 등을 찬양하는 표현의 자유가 빚어내는 반인본주의적 가치관의 팽배, 확산이 차후 국가전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상상이 아니다. 만약 공중파 TV에서 아이들도 다 볼 수 있는 시간에 포르노 방영을 전면적으로 허용했을 때 이어질 일을 한번 상상해보라. 해당 사회의 성 도덕성이 어떻게 순식간에 붕괴되겠는지 말이다. 표현의 자유 문제는 단순히 도덕성만의 문제도 아닌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보편적이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준비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가치관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공감(empathy)”임을 알아야겠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주장이 틀렸을 것 같아도 동조하는 이유가 바로 공감(empathy)에 있다. 그 점에서 만큼은 보수는 지금까지 진보진영에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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