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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임재범 Vs 진중권 설전의 결과:김형석 KO승-진중권 응급실행

궤변으로 사기쳐 온 진중권은 주제파악부터 하라!

진중권과 히틀러의 특이한 유사성

진중권이라는 특이한 인물과 진중권 현상을 퇴치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빌려 왔지만 차일 피일 미루다 반납일에 떠밀려 결국 읽어 본 책이 히틀러 평전이다. 악의 내면을 들여다 보다가 필자마저 악에 물들지 않을까 내심 두려웠지만 참으로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진중권이 아니었다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이 책을 보면서 내 정신세계에 조금이라도 나쁜 게 들어왔다면 나중에 예술적 체험이나 정신수양으로 닦아내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때마침 가수 임재범이 시연한 나치 복장 퍼포먼스를 두고 유명 작곡가 김형석님과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은 달고 있지만, 실상은 한국 최고의 궤변가로 명성이 자자한 진중권의 설전이 있어 더욱 시기적절했고도 유용했다.

루돌프 올덴(R. Olden)이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를 보고 평한 내용 중에 참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예를 들어, 그(히틀러)는 곤궁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히틀러의 독뱀

"졸라 죽이는 독뱀의 집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독니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 아돌프 히틀러 (필자 김휘영은 이 문장을 '히틀러의 독뱀'으로 부른다)

책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 짧은 한 문장에는 너무나도 많은 오류들이 들어 있어 논문 한 편을 써도 제대로 고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1) 독뱀은 집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2) 인간을 조여 죽일 수 있는 뱀은 독니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3) 설사 인간이 그런 뱀에게 목졸라 죽임을 당하더라도 결코 독니를 알게 되지 못한다. (p 358, 히틀러 평전, 요아힘 페스트, 한인희 譯, 도서출판 푸른숲)

번역자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히틀러 평전의 저자 요아힘 페스트의 지적인지 위 올덴의 평인지를 필자가 잘 구별하기 힘들지만 하여간 이 책의 같은 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계속된다. 그런데 아래 내용은 화제의 인물 진중권에게서 드러나는 특성과 너무나 비슷하기에 깜짝 놀랐다. 독자들도 함께 비교해 보기 바란다.

1. <나의 투쟁>에는 '사고의 과장된 무질서'와 동시에 그런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날카로운 확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2. 그러나 그러한 확신들은 깊은 비합리성에서 튀어 나온 것이며, 드물지 않게 적절한 형식이나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여기서 '날카로운'과 '인상적인' 이란 말은 비꼼의 뜻으로 보인다-필자 주) 3. 이 작품 즉 <나의 투쟁>의 내용을 특징짓는 것은 모순되고 차단된 모습들이다 4. 그의 완고함과 완강함은 폭풍우같은 구절들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취향과 모순된다. - 한국에서 좌파적 인사로 알려진 사람 중에 소통이 안되는 인물 1위에 등극한 진중권의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논리력이나 품성의 측면에서까지 꽉 막힌 사람이 폭풍우같이 온갖 이슈에 나대고 있는 진중권의 행각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5. 언제나 느낄 수 있는 양식화 의지는 자기통제의 결핍과 모순된다.- 해석이 어려운 점은 아마도 번역상의 실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원문의 의도에 따라 필자(김휘영)가 덧 붙이면 '자기 통제가 결핍된 인간인 히틀러가 언제나 양식화의 의지를 노출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우스꽝스럽다'는 점을 비꼰 대목이다. 이 점도 초딩 중딩들하고도 욕설까지 주고 받을 정도로 자기 통제가 안되는 진중권이 걸핏하면 한국인들에게 파시스트니 촌스럽니 하는 딱지를 붙히고 있는 행동 특성과 너무 비슷하다. 주제파악도 못하는 사람이 건방지게 나대는 꼴이다.

6. 이 책은 상당히 정확하게 저자(히틀러)의 초상을 보여준다. - 필자가 진중권과 관련해서 히틀러와의 성격적 유사성에 주목하는 부분은 아래 7번과 특히 아래 8 이다.

7. '단조롭고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중심주의'만이 모순없이 드러난다. - 얼마 전 B급 좌파 김규항씨가 진중권을 두고 "진중권은 좌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다"라는 주장을 하여 논쟁이 일었다. 하지만 김규항도 진중권을 잘못 봤다. <억지와 위선>이라는 책은 진중권이 실제로는 우파이면서 좌파로 위장하고 있음을 여러가지 실증적인 예로 증명했다. 사실 진중권을 두고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건 자유주의자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자유주의자는 최소한 다른 사람의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일에 철저히 책임을 진다. 이런 점이 결여된 진중권은 천상천하 유아독존격인 철저한 에고이스트에 불과하다. 그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능사로 하며,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때로는 인간의 죽음 마저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한다. 히틀러를 두고 평한 "광적으로 억누른 자기 중심주의"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자살세 논란이나 특히 살 수도 있었던 송지선 아나운서의 자살 직전에 자행한 진중권의 만행을 생각해 보라. 자살 하기 직전에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뭔가를 절실히 호소하게 된다는 건,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따뜻한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필자는 이 점을 군대에 있을 때 자세히 배웠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비꼴 수 있는 인성을 가진 인간이 우리 사회에서 적지 않은 환호를 받고 있다는 점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를 보여준다. 필자 같으면 행여 실수로라도 그런 행동을 했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대중 앞에 얼굴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짓을 하고서도 그는 건재하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일을 하고서도 건재할 수 있는 사회가 현재의 한국이다.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자신의 세치 혀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 하는 진중권은 반성은 커녕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날뛰고 있다. 한국 사회의 타락상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노력을 하기는 커녕, 이를 더 부추겨 가면서 철저히 이용하면서 개인 치부를 도모 하고 있는 진중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도 가르쳐 준다. 필자는 진중권이 가진 이 비법이 뭔지 다 알고 있지만 이는 차후에 밝히기로 한다, 하여간 진중권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진중권 현상이 결코 진중권 개인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저질 미디어, 수준 낮은 네티즌 등 한국 사회 전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라는 걸 명징하게 보여 준다.

8. 그는 남이 자기를 꿰뚫어 볼까 의심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주는 사람이다 - 히틀러 평전 p358 (요아힘 페스트 Joahim C. Fest 著, 안인희 譯, 도서출판 푸른 숲, 1998) - 진중권은 자신을 향해 쌍욕하는 건 아무리 많아도 일부러 내두려 둔다. 그러면서 그걸로 "자신의 논리는 맞는데 사람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라는 사기를 칠 때 철저히 이용해 먹는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진 면목이 드러나는 논리적 반론에는 언급을 회피한다. 필자가 이런 진중권의 행각에 경종을 울리려고, 공개적으로 내건 <디워의 서사구조에 대한 30억 내기>에 입도 뻥긋 못하고 도망만 다니고 있다. 요즘에는 이런 유형의 글이 종종 삭제 당하고 있는 현상까지 확인되고 있다. "논객의 싸가지는 논리로 대응하는 것"이라던 말이 과연 누구의 말인지 궁금하다.

여태까지 진중권의 발표해 온 글에서 분명하게 풍기는 '논리와 문체의 가난뱅이 냄새' 가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춘 독자들을 역겹게 만들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진중권의 글에 환호하는 소수 네티즌들의 지적 수준과 교양의 정도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이를 잘 이용해 먹고 있는 진중권의 능력도 정말 대단하다.

'콤플렉스와 왜곡된 사상의 집합체(p357)

<히틀러 평전> 중 '콤플렉스와 왜곡된 사상의 집합체(p357)'라는 소제목의 글에는 진중권과 너무나 비슷한 특성을 가진 히틀러에 대한 다음의 묘사들이 나온다.

9. 미술 아카데미에서 실패하였고 치명적인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민적인 교양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p357) - 진중권이 독일의 철학과 지도교수에게 학문에 대한 능력평가에 퇴짜를 맞고 쫒겨나야 했다는 진중권 자신의 인터뷰는 너무나 유명하다.

10. 큰 소리치는 앞모습 뒤에 자신의 지적인 능력에 대한 독자의 의심을 두려워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염려가 분명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단어들의 무게는 공허하고도 인공적인 효과를 냈다. 전체적으로 호흡이 없는 언어이고 자유가 없으며 마치 경련상태에 있는 것 같다. (p357) - 이보다 더 정확하게 진중권의 언어를 묘사할 방법이 있으랴?

11. 수많은 문체상의 탈선은 박학다식한 척하는 저자의 태도에 원인이 있었다. (p357)-이 점도 진중권의 글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계속) ~중략~ 간혹 두 세명의 고전작가가 등장할 뿐이었다. <나의 투쟁>은 단 한번 몰취미한 유대주의 맥락에서 괴테와 쇼펜하우어를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p355) 쇼펜하우어의 이름만 여러번이나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등장하고 있다(p354) - 특이하게도 히틀러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쇼펜하우어는 진중권에게도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이와 진중권의 관계는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12. 사실상 지식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는 지식의 높은 감정도 수고도 알지 못했고 오직 그 '쓸모'만 알았을 뿐이다. 그가 말한 독서연습은 존경받는 선서보증인을 찾는 행위에 불과하였다. '어떻게든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적합하게 꾸려넣은 방법'이었을 뿐이다(p355) - 진중권이 가진 학문에 대한 태도를 정확히 묘사해 놓은 것 같다. 정확히 지적하면 진중권은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서 부터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쓸모'가 진중권에게는 '사기술'에 해당한다는 건 다 알 것이므로 굳이 부언하지 않겠다.

13. 언제나 똑같이 암울한 강박관념을 드러내는, 환기되지 않는 그의 모든 콤플렉스와 감정이 기반 하고 있는 의식 바탕도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여태까지 진중권씨의 괴이한 행동을 보아 온 지성인들과 네티즌들 중에서 진중권의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을 콤플렉스를 지적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필자도 이 지적에 십분 동의하게 되었다.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유아기 때 부친을 잃은 점, 인생의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권위있는 기관으로부터 자신의 능력심사에 대한 냉혹한 퇴짜를 받고 좌절을 겪은 점 등 히틀러와 진중권의 성장과정에도 공통점이 많지만 필자는 두 사람이 각 사회에 내 보인 비슷한 성격 유형에 더 관심이 간다.

진중권의 경우, 여호와 신을 위해 일생을 바친 부친이 평생 가난하게 살다 죽어 갔었다는 데서 연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친(권위)과 신에 대한 일종의 정신 질환 같은 과도한 증오심도 쉽게 읽힌다. 신에 대한 증오는 조용기 목사 사건이 아니라 광우병 파동 중에 일어난 정지민('나는 사실을 존중한다'의 저자)과의 충돌 때 가장 많이 드러났다. 진중권은 성경에 나오는 많은 명언들을 자신의 증오와 궤변을 합리화 하는 도구로 철저히 써 먹었다. 기독교 사상이 조금이라도 진중권의 뇌리에 있었다면 성경말씀을 그렇게 망령되이 일컫으며 자신의 어두운 목적을 달성하는 데 교활하게 이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조용기 목사의 명백한 실언에 대한 진중권의 발언의 내용에는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진중권의 정신질환적인 과격성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주장할 자유를 위해 투쟁하게다"는 말로 타인의 의견 개진의 자유를 옹호한 볼테르조차도 "싸가지 없게 주장할 때도 그런 자유를 지지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설사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싸가지 없게 말하면 그 말에 수긍하지 못하는 건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지 그걸 오히려 논리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타박하는 사람은 정말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의 케이스로 보면 된다.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진중권의 인간성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듯 하다. 물론 어린 시절 부친을 잃은 건 히틀러나 진중권이나 매우 안됐고 딱한 일이지만 그만큼 주변에서 더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주었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히틀러나 진중권 두 사람 다 개인의 의미를 떠나 각자 세계와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더구나 한 사람은 며칠이 멀다 하고 한국 포털의 검색어 상위에 오를 만큼 그의 막강한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성장 환경 등이 불쌍했다는 이유로 사회가 입는 피해를 등한시 해야 한다면 유영철이나 조두순 같은 사람들도 충분히 사회적 책임에서 빗겨 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깊이 연구한 후 사회에 충분히 드러내서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 '문제적 인간'으로 드러난 사람들 중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이 좋았던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개인적인 문제로 덮어 둘 게 아니라 이런 사례들을 더욱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문제적 인간 진중권에 대한 연구를 해서 그를 제대로 진단해 내는 일은 한국 사회에 진중권 같은 사람을 덜 만들어 내는 데도 이롭지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진중권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더구나 진중권은 앞으로 살아 갈 날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히틀러 평전에서 히틀러의 유아기 시절을 연구하여 세상에 밝힌 일은 인류 사회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평전을 쓰는 저자로서의 기본적인 책임 사항에 속하는 일이지 이를 두고 우리는 전혀 잘못된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 사회에 제 2의 히틀러 같은 악이 출현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는 반드시 연구하고 발표해야 할 일에 불과하다. 지금 진중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가장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한 진정한 충고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필자 같은 사람들이 몇 번이고 따가운 충고를 하고 심지어 확실한 경고까지 했지만 솔직히 역부족이었다.

요즘은 유아기가 아니라 아예 태어나기 이전의 문제에 속하는 유전자의 연구로 각종 사회 문제의 해결에 응용하는 시대다. 21 세기 최첨단 뇌과학의 발달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특이 행동과 사회범죄적 행동들이 성격이 아니라 정신질환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이코패스는 그 사람의 잔악한 성격이 문제라 아니라 뇌의 전두엽에서 감정을 조절하는 부분이 정상인들에 비하면 15% 밖에 안되는 뇌질환임을 밝혀 낸 일 등이다. 이런 과학적인 연구는 머지않아 유전적으로 잘 못 타고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치료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을 준다. 필자도 이런 지식을 많이 알게 됨에 따라 최근에 들어 분노발작증이나 분리불안장애 등의 특이 행동들의 원인을 많이 알게 되고 그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진중권의 궤변

이번 임재범 사태에서 진중권이 보여 준 짧은 문장에는 위 히틀러의 독뱀보다 더 많은 논리적 오류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지성인이 잘 정리해서 올려 놓은 글을 소개한다(참고 : http://felab.tistory.com/206) 참고 글에서 보듯 몰취향, 윤리적 논란, 도덕적 변명 등 이 짧은 문장에 엉터리 용어가 얼마나 많이 등장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물론 소개 칼럼에는 진중권이 자신을 방어해 오는 데 철저하게 이용해 먹었던 '싸가지 타령'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오로지 논리적인 비판이다. 이것 마저도 네티즌들이 "자신 더러 논리는 맞는데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고 거짓말 할 것인가? 네티즌들이 진중권에게 하고 있는 말은 "진중권은 논리도 없지만 싸가지는 더 없다" 가 정답이다. 진중권이 알면서도 모른 채 딴청을 떨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인간인지 짐작케 하는 일이다. 필자가 진중권현상을 규정할 때 진중권의 무식함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극도의 뻔뻔함을 기본 요소로 든 이유를 알 것이다.

다음을 보자



필자가 누차 말해 왔듯이 진중권의 글은 3-4줄만 넘어가면 틀린 용어가 나온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누구보다 엄밀해야 할 평론가라는 사람이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주제에 여러 대학에서 강의까지 하고 있었다니 도대체 한국의 지식 검정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 났단 말인가? 위 문장들에서 인용한 대목을 빼고 나면 오로지 진중권이 쓴 문장만 남는다. 그런데 그 문장에 맞는 문장이 단 하나도 없다. 더구나 그가 미학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너무나 황당한 논리가 구성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진중권 이 미학(美學)이 뭔지도 모르고 그 역사와 속성과 역할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일단 평론가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인 진중권의 용어에 대한 개념파악의 능력이 과연 어느 수준에 있는지 부터 구경해 보자. 앞에서 말한 한 지성인의 비평을 부분 복사해 왔다. 참고 인용 : 진중권의 임재범 비판 무엇이 문제인가 (http://felab.tistory.com/206) 혹시 글자가 작아서 잘 안보이는 분들은 Ctrl+ 마우스 스크롤을 위로 하면 커지니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용이 더 있으니 제가 소개한 주소로 직접 가 보시면 더 좋습니다.



위 글을 쓰신 분이 필자의 블로그 안부 게시판에서 와서 이런 진중권현상(지독하게 무식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영역에 까지 나서서 욕설을 퍼붓는 현상)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한탄을 하시기에 직접 가서 보게 된 명문이다. 한국 사회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셔야 한다.



이게 지성이 상당부분 축적되어 있는 분들의 진중권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진중권은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이런 줄 알면서도 모른 체 딴청을 떨면서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다.


개념인지능력장애가 의심되는 진중권

인지능력장애라는 게 있다. 뇌 신경의 시냅스의 연결에 결함이 있어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이 장애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필자의 친구 중에 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아는 체 할 경우 참 당혹스럽다고 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장애인 난독증 정도로 심각한 장애는 아니지만, 의외로 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고 우리가 잘 아는 가수 신해철이 이 증상을 가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필자가 진중권의 글을 오래 접하면서 느낀 결론은 진중권이 혹시 인지능력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물론 얼굴 등의 이미지가 아니라 '용어의 개념 파악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맛이나 색깔, 음정, 글이나 얼굴 인식의 여부는 쉽게 판별이 가능하다. 이에 장애 증상이 있을 때, 각각 미맹, 색맹, 음치, 난독증, 인지능력장애라는 용어로 분류한다. 하지만 용어의 개념 파악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증상은 그 당사자 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색맹처럼 이를 간단한 테스트로 구별해 낼 수 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설령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한들, 이를 특정한 종류의 장애로 분류하여 연구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장애 증상들과 뇌 중추의 관계에 대한 특성으로 유추해 볼 때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다만 밖으로 드러나고 안 드러나고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필자의 글을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필자가 진중권을 향해 이런 의혹을 제기한 건 임재범 김형석 사태 때문이 아니라 벌써 수 년이 넘는다. 예를 들어 규모의 경제(The economy of scale)의 경우를 보자. 이는 생산량을 '늘릴수록' 여러모로 이롭다는 경제용어로 이 뜻은 고등학생만 되도 안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 용어를 가져와서는 <디워>같은 영화를 만들면 '안된다'는 해괴한 논지로 써먹었다. 이는 진중권이 여기에 나오는 규모가 원어에 나온 대로 스케일(scale)인 줄 모르고 크기 즉 사이즈(size)로 잘못 파악한 데서 오는 해프닝이었다. 이해를 위해서 필자가 좀 더 깊게 들어가면 한국에서 사이즈와 스케일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규모는 1)사이즈-크기-정태적(고정)인 외연이 있는가 하면 2)스케일-범위,품,용량-동태적인 외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이즈는 와이셔츠 크기인 X-Large 같은 데 쓰고 스케일은 "우리 사장님은 씀씀이가 크다, 또는 생각하는 스케일이 달라요"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을 바꿔 쓰는 경우는 없다. 이를 잘 알면 규모(規模=scale)의 경제가 생산량의 증가를 의미하는 즉 동적(動的)인 의미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이런 개념상의 구분이 전혀 안된다. 그래서 규모의 경제(The economy of scale)를 '시장의 크기(The size of market)'로 착각하고 헛소리를 논리랍시고 그 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다. 규모의 경제는 심오한 전문용어가 아니라 시사 상식 정도의 레벨 밖에 안된다. 수준이 좀 시시콜콜한 내용을 다룬다는 연예 분야에도 "드라마에 규모의 경제가 적용된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올 정도다. 즉 TV토론에 참석할려면 그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용어다. 필자가 이 토론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는 칼럼은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칼럼이 나간 후 다음 아고라에서는 김휘영이 규모의 경제도 모른다는 해괴한 글이 올라가 필자를 헐뜯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 또한 전형적인 진중권 현상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경제용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철학에 들어가서 좌파의 태두가 마르크스이고 마르크스의 바탕 철학이 유물론인데도 불구하고 관념론이 진리라고 신문기사에서 버젓이 말한다. 이를 보다 못한 한 네티즌이 독일서 5년동안 철학을 공부하고 왔다는 진중권을 보고 훈계한 내용은 유명하다. 기성용 세러모니에 나온 동물을 이용한 원색적인 용어를 빼고 옮기면 "이 바보야 철학이 어떻게 진리일 수 있냐? 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수단일 뿐이지, 하지만 널 원망하지는 않아, 덕분에 실컷 웃을 수 있었으니까" 이 얼마나 명쾌하고 확실한 반박 문장인가? 여기에 진중권이 평소 좌파진보의 대표적 논객이라고 광고해 온 걸 생각하면 더욱 기가 막힌다. 좌파논객이라면서 자신의 기반인 마르크스 철학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데 '마르크스의 반자락'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는 해괴한 일은 약과다. 좌파운동의 산실 민주노총 보고서에 있었던 '노동자에겐 조국이 없다' 라는 표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민족주의, 인문학적 자산, 한글의 과학적인 우수성 등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데 동원할 논리는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다. 이 많은 논리 중에서 하나를 가져와서 주장을 해야지 적어도 프놀레타리아 혁명을 위해서 민족을 버리라고 했던 마르크스가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경우 이런 해괴한 경우를 들라면 끝도 없다. 그런데 진중권은 마르크스를 통해서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세상 천지에 광고해 먹고 있다. 진중권이 마르크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진중권은 정말 경이로운 인물이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중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선전 광고 하나는 괴벨스 뺨치게 잘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제에 이렇게 유명해진 걸 보면 안다. 진중권에 대한 거짓 광고성 글이 가장 많은 곳이 네이버 지식in 이다. 심지어는 질문과 답변과 채택에 걸린 시간이 고작 4분 밖에 안되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질문을 올린 후 바로 답변이 올라 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답변이 올라오자 말자 채택이 되는 현상은 도저히 이해 불가다. 질문 속에 이미 존경스러운 진중권 이런 식의 낯 뜨거운 수사가 나오는 경우도 더러 확인된다. 누군지 모르지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광고에는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이런 우스운 일을 누가 벌이고 있을까? 오랜 시간이 흐르면 네티즌의 추천으로 선택되는 답변이 생기는 데 질문자가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선택한 답변과 완전 반대 내용이다. 이렇게 요즘은 진중권의 실체를 알아 차린 네티즌들의 반박문 때문에 이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매우 초조하리라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명언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몰취향과 모기향

음치가 가수 오디션의 심사위원이 되고 색맹이 타인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가 되고 (이미지)인지능력장애를 가진 사람이 강도나 살인범의 목격자 역할을 하게 되면 그 사회에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 건 자명하다. 음치 증상이 있는 분도 뛰어난 의사가 될 수 있듯, 각자 여타 분야에서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개념)인지능력장애가 있는 사람이 평론가의 탈을 쓰고 이러쿵저러쿵 헛소리를 하게 내버려 두면 안된다. 이를 방치함에서 오는 피해는 주로 나이 어린 학생들이 받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명색이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쓴 글을 본 학생들이 대입논술에서 '몰취향'이라는 국어 사전에도 없는 말을 따라 쓰다가 감점을 받아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그로 인해 인생 행로가 바뀐다면 진중권이 이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대학입시는 2-3 점에도 수만명의 순위가 걸려 있는 관계로 이럴 가능성은 충분히 많다. 미디어 다음의 국어사전에서 '몰취향'을 찾으면, '몰취향' 의 검색결과가 없어 ['모기향'(으)로 바꾸어서 검색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참 친절하고 예의 바른 국어 사전이다. 한국의 유명 문화평론가 진중권과 국어 사전이 협연해서 창출해 낸 '몰취향과 모기향!' 미묘한 운률을 느껴보면 정말 개그 심포니다.

기성용의 세러머니와 임재범의 퍼포먼스


얼마 전 기성용선수가 한일 축구 A 매치에서 원숭이 세러모니를 했다. 필자도 깜짝 놀랐다. 진중권의 말대로 나라 망신 까지는 아니지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 맞다. 그러나 이번의 임재범의 나치복장 퍼포먼스는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기성용의 인종차별 세러모니와 임재범의 나치의상 퍼포먼스는 결정적으로 두가지가 다르다. 1. 기성용은 국가 대표 축구선수이지만 임재범은 자유로운 개인이자 더구나 저항정신을 그 생명으로 하는 락아티스트다. 국가대표 선수는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민간사절단과 같은 지위를 가진다. 따라서 이유야 어쨌든 기성용은 충분히 비난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설사 기성용이 정말 관중석에서 욱일승천기를 보았다 하더라도 (필자는 이를 기성용 측의 궁색한 변명으로 본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국 축구협회에서 적어도 이 정도는 가르쳐서 경기장에 내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숭이 세러모니는 미리 연습을 해 두지 않으면 하기 힘든 동작이었기에 갑자기 화가 나서 그랬다는 말은 신뢰하기 힘들다.

스타일은 그 사람이다

기성용의 변명이 맞든 틀리든 간에 진중권이 기성용의 원숭이 세러모니에 대해 비난을 한 건 나름대로 옳다.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한 호되게 질타하는 칼럼을 쓰고 싶었는데 진중권이 대신 수고해 주었으니 감사하기조차 했다. 문제는 진중권이 워낙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각인되어 아무리 그가 선의를 갖고 한 말이라도 대중과 소통에 실패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곤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스타일이 그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가슴 깊이 새겨 보기 바란다. 논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싸가지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특히 오늘 날과 같이 소통이 중요한 시기에 아무리 논리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싸가지가 나쁜 사람은 그 만큼의 반발과 응징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기분나쁘게 할 권리는 없다. 진중권을 옹호하는 데 악이용되고 있는 볼테르의 명언 " 나는 당신의 의견과는 다르지만 당신이 의견을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의 그 어디에도 진중권처럼 싸가지 없게 주장해도 지지해 주겠다는 대목은 없다. 그리고 진중권에게 정작 논리라도 있었는가? 진중권의 말과 주장에 보이는 건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와 사기술이 대부분이었지 않은가? 어느 네티즌의 진단을 보자 "진중권의 주장은 독설이 아니라 욕설이다. 진중권이 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욕짖기다(짓기가 아니라 개의 언어 형식인 짖기임에 주의)."

결정적 차이-사회문화적 차이

2. 또 기성용은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보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런 몰상식한 짓을 했고 임재범은 역사적으로 독일의 나치와 피의 역사를 가진 유럽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임재범은 특별히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게 진중권이 말하는 미학적(美學的) 이유라면 하등의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사회문화적으로 봐도 큰 문제가 없다. 기성용이 만일 유럽에 가서 그런 식의 행동을 했다면 적어도 2-3 년의 출장정지를 받아 선수생활에 최대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국가대표가 아니라 일개 관중이라도 경기장으로 바나나를 던지는 등 인종차별 행위를 하면 경찰이 그를 잡아 처벌 한다. 하지만 관중이 아닌 국가대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기성용은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이것도 미학이나 윤리ㆍ도덕에 관계없이 오로지 사회문화적인 차이 때문이다. 유럽은 노예제도라는 잔인했던 역사가 있었다. 또 이민자가 많아서 인종차별은 현존하는 심각한 문제이기에 이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같은 피부색에 까만 머리색 까만 눈 등 외모에 의한 인종차별이 애초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동양 사회에서 같은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먼나라 이야기로 여기에 특별히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는 문화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인이 황인종보고 바나나라고 하면 문제가 되지만 같은 황인종끼리 바나나라 한들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한갓 우스개 소리로 다가올 뿐이다.

미학과 표현의 자유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피아노의 늘씬한 다리가 음란(淫亂)하다 하여 보자기로 싸고 공연을 하게 했던 게 인류 예술의 역사다. 온갖 이유를 들어서 학자들의 사상의 자유와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왔던 게 인류 역사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미학은 각종 예술의 존재양식을 규정하고 예술을 종교와 도덕 등 각종 억악과 규제로 부터 독립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화장실 소변기 조차 예술가에게 선택되고 전시회에 전시하면 예술 작품이 된다는 마르셀 뒤샹의 '샘(1917년)'의 미학과 1960년대 '해석에 반대한다'는 수잔 손탁의 이론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달했다.

표현의 자유의 역사

필자는 20대 때, 마광수 교수가 말한 "창작은 배설행위다"라는 배설론에 찬동하지 않고 "창작은 공감을 위한 활동이다"라며 공감론(共感論), 요즘 식으로 말하면 소통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법기관이라는 국가권력이 개입하여 마교수의 작품 <장미여관>이 예술이 아니라 외설이라며 법의 심판을 내렸을 때는 필자는 마광수 교수가 심하게 억울한 처분을 받았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촌스럽고 근엄했던 한국조차도 21세기가 되자, 마광수 교수의 그 장미여관을 올 누드 배우까지 출연해서 공연하는 시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있는 시대' 다. 불과 몇년 만에 변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 졌다는 증거다.

법적ㆍ 도덕적ㆍ 윤리적 측면과는 별개로 보통 사람들은 사실 이런 작가나 아티스트들의 지난한 투쟁과 저항의 역사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더 많은 자유를 누려 왔다. 이들 창작자들이나 공연자들이 단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했든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서 했든 상관없이 이들은 표현의 자유의 확장을 가져왔고 그 만큼 인류사회를 풍족하게 하는 데 기여해 왔다. 또한 그들의 저항과 투쟁은 고루한 사회인습과 도덕적 금제(禁制)에 대한 반기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의 튀는 행동엔 언제나 그 당시 사회 공동체로 부터 반대와 비아냥이 넘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지지가 따랐다. 예술과 사상 그리고 이에 밀접하게 연관된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다양한 권력들과 싸워 왔다. 법 등의 제도화된 권력 뿐 아니라 이데올르기, 편협한 종교단체, 고루한 도덕주의자, 진중권처럼 무식하지만 유명한 문화권력자, 보수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어용학자들과도 싸워 왔다. 미셸 푸코의 수십년에 걸친 저작들에서 보인 각종 억압과 금기에 대한 연구들은 이를 잘 드러낸다. 이처럼 적어도 미학자나 예술가들이 이들의 자유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투로 태클을 거는 일은 없었다.

배꼽잡는 진중권의 미학

그런데 2011년 7월 정말 해괴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미학적(美學的) 견지에서 한 아티스트의 공연 즉 표현의 자유를 비아냥거리며 딴지를 거는 특이한 인간이 등장한 것이다. 이건 정말 세계 미학사가 아니라 기네스 북에 올라가야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어이없는 현상을 보고 배꼽이 빠질 뻔 했다. 진중권을 노벨 미(美)학상 아니 미(未)학상에 추천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무식한 놈한테 봉변을 당한 유명 작곡가 김형석

90 년대 최고의 작곡가, 아니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위상을 가진 김형석님이 진중권이란 사람의 인성(人性)을 너무 모르고 끼여 들였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냥 어느 유명한 분이 진중권을 두고 평한 대목처럼, "미친 개가 짖어대는 구나"라고 생각 하고 지나갔으면 될 일을. 김형석 같이 점잖은 분이 상대를 너무 몰랐다. 업적과 인성, 그리고 논리에서도 자신보다 훨씬 무식하고 저질인 인간한테 그것도 말도 안되는 인신공격을 받아야 했다니...., 진중권에게 세련. 매너, 민주 시민의 소양, 게다가 논리, 이런 게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몰랐다는 점이 작곡가 김형석님의 불행이었다. 마치 으르릉거리는 야수처럼 물어뜯고 할퀴는 말싸움질을 논리적 대화라고 착각하는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다니. 진중권과 이런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부디 필자 한 명으로 그쳤으면 좋겠다. 필자는 이미 진중권에게 대응하는 순간부터 온갖 중상모략이 일어나 내 명예와 위신에 상당한 손실을 입을 것 쯤은 각오했다. 이를 각오하고서도 누군가 뛰어들어야 할 만큼 한국 사회가 심각하게 타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석 같이 재능을 타고 나신 분은 그 시간에 좋은 악상을 떠올리고 한국 대중 예술계를 좀더 발전시키는 데 신경 써 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의 부활을 위해 큰 역할을 하셔야 할 임재범님도 이에 신경 뚝 끊고 수많은 팬들에게 더 멋진 공연을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해 주시기 바란다. 감기와 스트레스는 후두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어 가수에게 치명적인 목앓이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팬들을 믿고 자신의 음악적 완성도를 점점 더 높혀 팬들의 기대에 보답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무식하고 막돼먹은 인간 한 명 때문에 이 무슨 국가적 낭비인가?

악마에 영혼을 판 지식인

필자가 보기엔 진중권을 규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진중권이 열심히 광고해 먹고 있는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벤야민이 아니라 히틀러, 괴벨스, 그리고 쇼펜하우어다. 이 점은 진중권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 세 사람을 연구하면 오늘날의 진중권이 나온다. 앞에서 밝힌 대로 진중권은 마르크스를 이해도 못하고 있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계철학은 진중권의 언어능력으로 볼 때 도저히 접근 불가 영역이다. 그가 독일에서 넌 학문할 재능이 없다고 쫒겨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벤야민은 진중권의 이해 여부는 제쳐 두고 달달 외우면 어느 정도 그걸로 사기쳐 먹을 수준은 될 것이다. 학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든 세 사람 중에서도 진중권의 양심을 가장 망가뜨린 정신적 스승은 쇼펜하우어다. 필자는 그의 책 <토론의 38 가지 법칙>을 보고 또한 깜짝 놀랐다. 진중권이 여태까지 해 온 수법과 너무나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진중권이 걸핏하면 말했던 '검객'이란 표현도 수없이 나온다.

이 책의 주제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이다. 놀라지 말기 바란다. 1)진리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싸워 이겨 얻는 전리품이다. 그러므로 토론에 이기려면 2)사악해져라 3) 극도로 뻔뻔해져라 4) 교활해져라. 5) 실제로 수준높은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밀리더라도 수준낮은 대중들 앞에 "이기는 체" 보이면 된다. 세상에 이런 책이 존재하다니..... 이건 필자가 전혀 과장한 게 아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1)사악 2)교활 3)뻔뻔 4)'이기는 체'란 용어가 몇 번이나 반복된다. 불과 70 장 정도 밖에 안되고 글씨도 큼직큼직하니 관심있는 분은 도서관에서 지나는 길에 한번 정도 슬쩍 훑어 보기 바란다. 토론에 이기려면 논리가 아니라 사기를 잘 쳐야 하며 마지막 38장에는 논리로 도저히 안 될 경우 마지막 수단으로 "인신모독을 하라"고 공공연히 가르친다.

장하준-정성일 교수와 'TV책은 말한다' 토론에서 무식한 진중권이 논리로 안되니까 써먹은 수법은 이 책의 16번째 기술(p73) 이다. 토론 상대가 아니라 '청중들을 향해서' 말도 안되는 이의제기를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이의제기가 전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은 오로지 전문가만 알 수 있을 따름이라고 책에 쓰여져 있다. 예를 들어, 진중권이 "그러면서 당신들은 왜 좌파라고 합니까?" 이런 유치한 수법으로 이의제기를 하다가 "우리가 언제 좌파라고 했나요?"라는 역습에 챙피만 당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진중권에 의한 이런 해괴한 이의제기는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건 자유기업원에서 하는 말입니다"는 "자유기업원에서 하는 말도 옳은 말이 있습니다"로 "당신들은 왜 독재자 박정희를 두둔하고 있습니까?"는 "우리는 지금 박정희의 독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실시한 경제정책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에 의해서 무참히 박살났다. 그들은 무식한 청중들이 아니라 소위 내노라 하는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신경쓰는 건 상대 패널과의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이 '더러운 책'이 말하듯이 <철저하게 무식한 대중들>이다. 진중권은 전문가들에게 아무리 무식한 인간이라는 평을 듣더라도 신경도 안 쓸 만큼 충분히 뻔뻔하다. 지적 수준이 낮은 대중들에게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게 훨씬 돈이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진중권의 문체를 보라! 그게 어디 지성인들을 향한 문체인가? 철저하게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의 감정에 솔깃하게 아부하고 고자질 해서 기분을 맞춰주는 형식의 문체이지 않은가? 무식한 대중이 많으면 그걸 깨우쳐 줄 생각은 않고 그걸 옳다구나 하면서 이용해 먹으려 하다니? 필자는 규모의 경제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을 경제 토론에 불러 낸 방송사의 의도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이런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문가들이 토론해야 하는 프로에 주제넘게 나가는 진중권의 특이한 배짱은 더 이상하다. 돈을 위해서라면 부끄럽고 창피한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가? 이 책의 p73 는 이렇게 계속된다.

"상대방은 전문가이지만 청중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말도 안되는 이의제기를 하면) 청중들의 눈으로 볼 때 상대방이 패배한 것이 된다. 더군다나 나의 이의 제기가 상대방의 주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청중들은 금새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고, 청중들을 쉽게 우리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p73

필자의 글 밑에 말도 안되는 해괴한 이의 제기가 댓글로 달라 붙는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 필자가 보기를 바라기 보다 필자의 글을 보는 네티즌들을 향해 이미지를 흐리기 위해서 이를 전략적으로 사용해 온 무리들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반론은 하나도 없고 매우 추상적인 인상비평 형식의 이의 제기가 전부였는데 이는 노골적으로 필자가 아닌 다른 독자들을 향해서 이미지를 떨구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보다시피. 이 책은 진리가 무엇이며 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전문가인 상대 패널의 논리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오로지 우매한 청중들을 속여서 "이기는 체" 사기를 치는 방법만 가르치고 있다. 진중권이 이런 괴상한 유머를 가장 많이 써 먹은 토론이 바로 디워 토론이었다. 논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갑자기 혼자 준비해 온 "충무로와 지하철 한번 갈아 타는 관계" 라고 말하면서 대중을 웃겨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가던 사기술.... 그리고 자신의 싸가지를 문제 삼는 건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걸 인정하는 거라는 사기술의 극치 등 무식한 대중을 상대로 이런 사기술을 써 먹은 걸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필자 같은 전문가가 보기엔 진중권이 토론에 나와서 논리라고는 논자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유독 수준 떨어지는 네티즌들도 제법 설치고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진중권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상대를 완벽하게 논리로 무너뜨렸다는 거짓 광고가 많이 나돌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서야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걸 아예 전략적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진중권의 정신적 스승 쇼펜하우어가 쓴 이 책에는 심지어 이런 내용까지도 나온다. 한자도 빼지 않고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옮기겠다.

"28번에서 배운 기술을 여기에 사용하여 , 상대의 대답으로부터 우리의 불합리한 주장이 증명되었음을 뻔뻔스럽게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위해서는 (논리력이 아니라) 극도의 뻔뻔스러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 기술을 잘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p112~P113

진중권이 이런 사기술을 극단적으로 발휘한 토론이 바로 지만원 박사와의 토론이었다. 내가 보기엔 진중권이 논리적으로 이긴 게 단 한 군데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인터넷에는 진중권의 최고토론으로 난리였고 아직까지도 난리다. 그런데 이 동영상을 자세히 보라. 진중권이 논리적 근거를 대고 데이터를 내 놓으며 전문가적 시각으로 접근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논제와 전혀 상관도 없는 노골적인 인신모독만 했을 뿐이다. 상대 패널을 앞에 두고 실실 비웃거나 "정신병원에 갈 사람"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떻게 논리인가? 이런 상대를 토론 상대라고 믿고 토론하러 나간 지만원 박사가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논리는 뒷전이고 인신모독과 사기를 칠려고 작정하고 나온 사람과 무슨 토론이 된단 말인가? 전문가적 입장에서 보면 진중권의 참패였다. 그러나 수준낮은 네티즌들에게는 진중권이 승리했다는 환호성을 올린다. 이성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에 솔깃하게 아부하는 목적으로 이 책에 나온 사기술을 제대로 이용해 먹은 것이다. 즉 진중권은 지만원 박사와 토론하는 체 하면서 실제로는 무식한 청중들과 토론하면서 논리적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진보는 가장 먼저 그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파고 들어야 하는 이념이다. 좌파진보라는 타이틀을 걸고 그동안 진중권이 한 일은 지성인들에게 단지 역겨움을 준 일 뿐이다. 게다가 '싸가지 까지 없는 놈'이라는 이미지로 일반 대중에게도 '진중권 수준의 저질 인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 좌파진보진영'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했다. 진중권은 자신이 좌파진보진영에 끼쳐 온 이런 해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좌파진보진영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보든 말든, 이런 사기술로 대중을 속여 유명세만 올려서 수억원도 넘는 연봉을 벌어 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서 도저히 논리적으로 상대가 안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인신모독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38번째 기술)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꺼꾸로 인신모독 수법을 주무기로 쓴 건 논리적으로 도저히 안되었다는 반증인 것이다. 필자 말을 못 믿겠으면 지만원 박사와의 그 토론 동영상을 다시 한번 살펴 보기 바란다. 한국의 TV토론 수준이 이렇게 처참하다. 이럴 바에는 아까운 전파를 낭비하면서 왜 토론을 하는가? 토론으로 인민재판이나 저질 감정 싸움을 할 게 아니라 뭔가 단 하나라도 발전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무엇보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무슨 근거로 이런 저질 사기꾼의 배를 채워 주는 일에 허비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다음이다. 이런 더러운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당장 쓰레기 통에 갖다 버리지 않고, 이걸 좋다고 기술이랍시고 체득하고 생활의 방편으로 몸소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정상적인 사람일까? 그는 사악한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사람임에 분명하다. 원래 이 책의 저자 쇼펜하우어는 위선자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이다. 적어도 지식인이라면 진리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진리를 싸워 이겨서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다니. 논리가 부족하면 더 공부할 생각을 않고 이렇게 사람의 영혼을 좀 먹는 사기논법을 배워 쓰다니? 이게 지능이 낮고 학식이 낮은 사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탐욕이 강할 때 생기는 비극이기도 하다.

독자와 함께 평가를

본론으로 돌아와서 임재범의 나치복장 퍼포먼스에 대한 김형석-진중권의 논쟁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독자들과 함께 내려 보자.

1) 윤리 도덕적 측면 : 이건 각자의 가치관이 개입되는 문제이기도 해서 한 쪽으로 판결을 내기 힘든다. 불행하게도 진중권은 윤리 도덕적 측면이 아니라 하여 스스로를 함점에 몰아 넣고 말았다.

2) 미학적 측면 : 공교롭게도 이 설전의 근거로 김형석 진중권 두 사람 다 미학(美學)을 들고 있다. 김형석은 미학적 입장에서 임재범의 퍼포먼스를 옹호하고 진중권도 미학적 입장에서 이를 비난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빠져나갈 길이 봉쇄되었고 두 사람이 같이 맞고 같이 틀릴 수는 없다. 과연 누가 맞고 누가 틀렸을까?

3) 논리적 측면 : 진중권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논리를 여기에 결합하여 논리적+미학적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면 이 부분은 확실하게 판가름 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곡가 김형석이 맞았고 진중권이 틀렸다. 왜냐하면 어떤 입장과 경로를 취하든 미학적 입장에서는 예술과 공연행위를 두둔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미학적 견지에서 이 공연에 딴지를 거는 일은 밴덤의 공리주의로 동기론적 윤리론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철저한 모순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 1917년

‘나는 변기를 들어 현대미술의 면상에 집어던졌다.’ - 마르셀 뒤샹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소변기가 마르셀 뒤샹에 의해 예술작품 ‘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면서 예술품은 유일무이해야 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들까지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온 지 거의 한 세기가 다 된다. 이와 함께 수잔 손탁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미학적 개념은 체험과 느낌이 중요할 뿐, 예술과 미학이 법,도덕,사회 문화, 윤리 등의 차원을 넘어 이젠 아예 해석이라는 구속으로 부터도 해방시킨 운동이다. 이렇듯 미학은 태생적으로 예술에 대해서 그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고 확장하게 하는 열혈 투사나 그를 호위하는 근위병 또는 종(servant)의 신분이었다. 따라서 진중권이 말한 미학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예술 행위든 그 어떤 의미로도 규제와 금지, 그리고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진중권이 진정으로 미학적 입장에서 비평하고자 했다면 미학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도덕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임재범의 공연을 비난할 지라도 자칭 미학자라는 진중권만은 이 공연을 두둔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학적으로 촌스럽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런데 개념 인지 능력 장애가 의심되는 진중권이 필자의 이 말을 이해나 할 수 있을려나? 화장실의 소변기도 미학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데 임재범의 남성다움에 잘 어울리는 나치 군복 퍼포먼스가 '미학적으로' 비난 받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미학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논리에 자유분방한 사람, 지식 속물 진중권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출신이면 누구나 다 아는 철학적 논리의 예를 하나 보자. 1)밴담-공리주의-결과론적 윤리설 2)칸트-관념론-동기론적 윤리설 이 두 개의 논리철학적 얼개는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자주 나왔다. 위에서 다른 노선으로 분류된 각각의 세 명사는 어느 것 하나라도 노선을 이탈해서는 안된다는 건 상식이다. 즉 칸트로 결과론을 옹호해서도 안되고 공리주의로 동기론을 주장하더라도 모순 즉 비논리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에겐 이런 일이 다반사다. 그는 그가 쓰는 용어들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논리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은 그가 가진 논리라는 궤를 이탈할 수 없다는 내재적 한계를 본질적으로 가진다. 하지만 진중권에게 이런 논리적 일관성을 바라는 건 과욕이다. 그는 논리에 있어 매우 자유분방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논리라는 차선과 신호등까지 완전히 무시하고 좌충우돌 하면서 내달리는 폭주족이다. 그런데 달리면서 이상한 것들이 도로 위에 나부낀다. 진중권이 내달리면서 벗어던지는 속옷들인데 이상하게도 전부 브랜드가 있다. 비트겐슈타인, 아방가르드, 벤야민,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데우스 엑스 마키나 등등. 그가 이런 지식 속물이 된 이유는 이런 브랜드를 이용해 대중을 속이려는 목적 때문이다. 좀 지나면 진중권이 지나간 길에 널브러져 있는 이런 해괴한 쓰레기들을 치우느라 다른 분들이 진땀을 흘려야 한다.

진중권의 경우는 이런 일이 다 반사다. 그는 어디서 용어만 가져올 줄 알았지 그 용어를 어디에 쓰야 할 지를 모른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곳에 2500년 전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가져와 무식한 대중들을 사기쳐 먹다가 필자에게 챙피를 당한 건 대표적인 경우라 할 만하다. 이게 다 진중권의 뇌 중추 중 개념파악을 관장하는 영역에 심각한 결함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미학과 윤리학-허용과 금지의 시학(詩學)



최근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유명가수 임재범을 두고 일어난 김형석과 진중권의 논쟁은 진중권이 얼마나 무식하고 촌스러운 사람인가를 잘 나타내 준다. 김형석과 진중권은 둘 다 미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의견이 맞는다고 피력하고 있다. 임재범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를 허용하고 이해하느냐 반대로는 말도 안 되는 짓이라며 배척하는 선택은 각자의 가치관의 문제이므로 접어두고, 순수하게 논리적인 측면만 따져보자. 이 두 사람의 논쟁은 나치 복장을 두고 일어난 사건이지만 인류 예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던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란과 그 궤도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문학으로는 <보봐리 부인>이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그랬고 <엠마누엘>이나 <색,계>등 농도 짙은 영상물이 나왔을 당시 그 사회가 반응하는 행동양상이다. 이때 이를 허용하는 나라일수록 사회문화적으로 똘레랑스가 있고 개방적이고 미학적으로도 세련된 나라다. 이안 감독의 <색,계>는 한국에서는 상영되고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성이 높은 영화로 평가되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상영금지를 당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동지들을 배신하고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 주인공 탕웨이는 중국에서 매국노라는 이지메까지 당했고 입국금지 조치까지 당했다.

1.윤리 도덕적 측면: 외설이니 안 된다.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치니 또는 인륜 또는 사회 정서, 민족정서에 반하므로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주도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규제를 한다. 이들은 법의 잣대로 재단하여 삭제조치니 19금이니 하는 금지 딱지를 붙인다.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법은 더 심하게 규제한다.

2.미학적 측면: 예술이니 허용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 누드 화가나 영화감독 행위예술가 등 예술가들이 연대해서 의견을 개진하면서 가능한 규제를 벗어나려고 한다.

이에서 보듯 어떤 형식을 취하든 윤리적 입장은 어떤 작품이나 퍼포먼스든 간에 지켜야 할 명백한 한계가 있다. 즉 도덕-> 건전한 사회질서나 미풍양속 기타 사회 법규에 의해서 -> 자유의 한도를 축소하고 규제와 금지 노선에 서 있다. 이에 반하여 그 어떤 형식을 취하든 미학적 입장은 어떤 작품이나 퍼포먼스는 예술가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 즉 예술-> 표현의 자유 ->허용하고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즉 자유의 확대의 노선에 서게 된다.

예술과 도덕 법규(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간의 갈등을 두고 규제와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과 허용하고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입장 간의 충돌은 인류 예술이 존재한 이후로 단 한시도 멎은 날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이 많은 이유는 그 당시 사회가 예술의 정신을 이해 못하고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억압하고 탄압했기 때문에 신화를 빌어서 은유적으로 작가의 생각을 나타내어 그런 억압들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번에 G20 회담에 쥐를 그려서 벌금을 받은 사건에 대해서도 미학적인 입장에서는 표현의 자유임으로 허용되어야 하고 따라서 무죄다. 반면에 법 도덕 윤리적 측면에서는 안 된다, 도가 지나치다 이런 논리로 제한되어야 하고 따라서 유죄다 이런 논리적 구조로 되어 있다. 실제로 박찬욱, 이창동 등의 예술인들의 노력 끝에 징역이라는 실형에서 가벼운 벌금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므로 임재범의 나치 복장 퍼포먼스는 예술 표현의 한 형식이므로 허용해야 한다는 김형석의 주장은 철저하게 미학적 견지에서 나온 논지로 일관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진중권이 미학을 들먹이면서 저건 도가 지나치다고 주장하는 건 철저하게 비논리적이다. 진중권이 임재범의 퍼포먼스에 불만이 있어 “저런 행동은 정도가 지나치다“라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그의 입에서 미학이라는 용어가 튀어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휴머니즘이나 윤리를 들면서 주장을 해야만 논리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임재범의 퍼포먼스에 진중권같은 주장을 하는 건 정말로 미학적으로 촌티를 팍팍 풍긴다. 게다가 위에 들은 현대 미학의 정신에서 견주어 보아도 작곡이신 김형석 교수의 주장이 맞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중권은 정말 미학이 뭔지 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미학을 논하고 있다.

현대 문화예술에 촌뜨기인 독일에 갔다 왔던 진중권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예술을 이끌고 있는 뉴욕도 아니고 정작 진중권이 공부(?) 하러 갔던 독일은 현대에 와서 패션과 예술에서 볼모지라고 할 정도로 후진국이다. 현대 예술이 최첨단으로 경쟁하는 분야가 패션계다. 첨단 신소재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시대의 조류에 맞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섬세하게 녹아들고, 전통이라는 과거와 유행이라는 현재와 새로움의 추구라는 미래가 치열하게 충돌하고 결합하는 분야가 바로 패션계인 것이다. 그런데 밀라노, 파리, 런던, 뉴욕, 심지어 아시아의 동경 컬렉션은 있으되 베를린은 없다. 이태리, 프랑스, 영국 등 세계 패션계를 주도하는 유럽에서 유독 독일은 없다. 패션에서 베를린은 한국의 서울 컬렉션보다도 훨씬 후지다. 프랑스 이태리 심지어 폴란드, 헝가리 영화는 종종 아시아권까지 오지만 독일 영화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베토벤, 괴테, 헤겔 등 학문과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과거 그 찬란했던 꽃을 피웠던 독일이 왜 이렇게 까지 시들고 추락한 걸까? 2차 대전을 일으켜 유럽의 이웃 나라들에게 저지른 원죄 때문이다. 주위 국가들이 배척하고 독일 문화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니 자연스럽게 내부가 고사한 것이다. 한류가 일본에 진출하는 건 별 저항이 없지만 일본 문화가 한국에 침투해 올 땐 심각한 저항이 있는 현상과 마찬가지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만약 한국의 안방까지 일본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점령하고 일본 탤런트가 한국 공항에서 수없는 여성 팬들에게서 환호를 받는 현상이 일어났다면 한국 사회가 이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었을까? 오피니언 리더를 필두로 온갖 트집과 비난이 가해졌을 것이고 덩달아 전 국민이 그 여성 팬들에게 된장녀들이니 하면서 심하게 지탄했을 것이 틀림없다.

오랫동안 한국 정부는 각종 일본 문화상품들을 소위 왜색문화라 칭하며 진입을 막아왔다. 이건 매우 잘한 일이다. 그런 보호를 받으면서 한국 문화도 점점 성장했고 이제 한류라는 자랑스러운 문화콘텐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화를 지배 당하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지배 당하고 말기에 스크린 쿼터와 같은 한국의 문화보호주의 정책은 너무나도 중요한 정책이었다. 진중권처럼 소니가 좋으면 소니를 쓰야 한다면서 이를 영화와 같은 문화상품까지 주장하는 건 정말로 해괴한 일이다. 도대체 얼마나 무식하면 이따위 말을 전 국민이 보는 TV 앞에서 뇌까릴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한류가 아시아권에 잘 퍼져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한국이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에 큰 피해를 끼친 적이 없는 것과 매우 밀접한 영향이 있다. 즉 그들이 한국에 특별한 거부감을 가지기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만약 2차 세계대전 같은 침략행위만 하지 않았다면 최첨단 기술과 더불어 아시아 문화시장을 거의 지배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화상품은 자동차나 아이폰 등과는 달리 대중의 문화인식에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일본문화는 주변국으로 진출하는 데 큰 장애에 부딪치기 마련이며 이는 억울한 게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사회적 징벌의 의미도 있다. 만일 독재자였던 박정희가 개발독재를 하기보다 군국주의를 부추겨 이웃나라들을 침략했었더라면 현재의 한류도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김형석이 진중권을 두고 미학이 뭔지도 모른다는 식의 주장은 어느 한 곳도 틀린 곳이 없다. 그리고 휴머니즘이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임재범이 그 옷을 입고 네오나치즘을 선동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입장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 이런 마당에 도대체 무슨 건덕지로 임재범의 공연을 비난한단 말인가? 그리고 진중권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건 유럽사회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차이다. 한국인은 유태인도 아니고 나치와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진 유럽인도 아니다. 한국인은 충분히 나치 복색을 패션이나 예술분야에 활용하고 심지어 꺼리김없이 조롱감으로 까지 삼을 자격과 자유가 있다.

한국에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개적으로 찬양하면 대중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김완섭이 그랬고 조영남도 책 한권 잘못 썼다가 호되게 그 대가를 치렀다. 왜냐하면 한국은 일본의 침략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이 영국 프랑스 독일에 가서 엉터리 논리로 라도 일본의 한국 침략행위를 옹호하면 그 반응이 어떨까? 전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때로는 참 진지하게 경청하고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추켜세워 주기도 한다. 진중권이 한국 작품인 <디워>를 악평했을 때, 미국 LA타임즈 기자가 진중권에게 저명한 평론가라는 칭찬을 해 준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 기자가 그 당시 진중권이 한국에서 어떤 짓꺼리를 하고 있었는지 알 리가 없고 알 생각도 없다. 그저 한국인이 한국인을 규탄해 주니까 어줍잖게 미국인으로서 우월한 심판자라도 된 듯, 진중권을 저명한 비평가로 추켜 세워 주었을 따름이다. 우리 한국인도 그렇지 않은가? 일본을 비판하는 일본인이나 중국을 비판하는 중국인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황당하더라도 왠지 깨어있는 지성인 정도로 보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진중권은 미국의 기자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점까지 교활하게 이용해 먹었다. 만일 필자라면 설사 그 기자에게 욕을 들을 지라도 한국을 옹호했을 것이다. 교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의 신문인 LA 타임즈와 행한 개인 인터뷰 기사에서 진중권이 행한 만행은 적어도 수 십 억원의 손실을 주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진중권이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하는 걸 잘 알 수 있다. 그의 의식 세계에 타인과 사회는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 있을 뿐이다.

진중권이 어거지 쓰고 있는 애국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애국심 조차 없는 인간이 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태어난 조국에 대한 사랑은 고향에 대한 사랑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이는 곧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 김휘영 문화평론가

유럽과 파시스트 , 한국과 파시스트

유럽에서 나치를 공개적으로 찬양하면 재판에 처해져서 실형을 선고받는다. 왜냐하면 나치에 의한 참혹한 역사를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 사회에서는 “너는 파시스트다“란 말을 하면 목숨을 내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고 무서운(?) 모독에 해당한다. 그래서 인터넷 게시판 등에도 파시스트란 말을 금지어로 지정해 놓은 곳이 많다. 그런데 파시스트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진중권은 멀쩡하다. 물론 유럽에 가서 진중권이 아무에게라도 이런 말을 해 왔다면 무사할 수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인강, 센느강, 또는 템즈 강변 어느 기슭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긴 한국이다. 그래서 진중권이 한국인들을 보고 아무리 파시스트라고 우겨댄들, 그 일로 재판정에 갈 일도 없고 오히려 그런 어거지를 쓴 대가로 돈까지 벌어 먹고 있다. 마찬가지다. 임재범이 나치복장 퍼포먼스를 유럽에 가서 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임재범도 진중권처럼 한국에서 했다. 진중권이 무사평온하듯이 임재범도 무사평온해야 오히려 정상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의 무의식엔 나치나 파시스트란 말은 '먼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안되는 진중권만 이상한 짓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진중권도 지적했다시피 나중에 No 히틀러,히틀러 이스 데드, 하일 프리덤(freedom) 이라는 자유에 대한 확실한 의사 표명으로 마무리 했다. 이 얼마나 멋진 퍼포먼스인가? 락 아티스트가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촌스럽게 마이크를 들고 "나치같은 전체주의의 싹을 뿌리 뽑읍시다" 이런 식으로 일장 연설이라도 해야 하는가?

그건 진중권의 어거지인 도덕적 비난을 빠져나갈 구실을 마련한 게 아니라, 나치 복장에서 초래할지도 모르는 나쁜(?) 영향을 뚜렷한 의지를 갖고 의식적으로 걸러 낸 예술 행위였다. 이렇게 불순물의 침투까지 걸러 낼 수 있었던 것 또한 이 포퍼먼스를 기획한 분에게 깊은 철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멋진 나치 복장의 겉멋만 취하는 속물 수준에 있는 분이었다면 이렇게 걸러 낼 생각 조차 못했으리라는 점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자신의 무식을 뒤로 하고 남들이 잘 모를 것이라고 착각하는 미학과 문화평론가라는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권위를 악용하여 남을 모독하고 이런 공연에 차질을 빗게 하고 그만큼 한국 대중 가요계에 자유와 번영보다는 제한과 억압을 가했다. 미학이 뭔지 문화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 한 아티스트의 행위에 구정물을 끼얹고 횡패를 부린 것이다. 이런 망발에 김형석님이 "공연을 보시고나 그런 말 하시죠" 하는 점잖은 꾸짖음은 너무 과분한 일이었다. 인격적인 대우는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에게나 해야 하는 일이다. 사람이 선의로 대하면 그 선의를 악용하는 데 도가 튼 인간에게는 주제파악과 자기 검정부터 해 보라고 혹독하게 꾸짖어야 사회가 정상화 된다. 진중권 같은 인간이 정식 교수가 되거나 문화부 장관이 되거나 높은 권력을 잡았다면 이 나라가 어떤 꼴이 되었겠는가? 그랬다면 우리는 분명코 제 2의 괴벨스의 등장을 목격했을 것이고 그 피해의 정도는 지금의 '진중권 현상'에서 초래되고 있는 것과 비교도 안될 것이다.

맥빠진 한국의 콘서트 문화

이제 한국 아티스트들의 공연 현황을 점검해 보자. 필자는 오페라와 뮤지컬 관람을 즐기지만 심심찮게 락 가수나 대중 가수들의 콘서트에도 즐겨 간다. 윤도현이 주연을 맡았던 <하드락 카페>를 동숭 아트홀에서 보았고 서태지 공연도 직접 보았으며 또 필자가 좋아하는 이승철 콘서트는 자주 참석했다.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새해 첫 날 정동진에 해돋이를 맞기 위해 갔다가 들국화 출신의 전인권의 열창에 맞쳐 수많은 관객들과 일어서서 합창했던 "행진"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반적으로 한국의 콘서트는 외국에 비해 너무 조용하다. 서양의 락 콘스트는 화려한 조명아래 기타를 깨부수는 일은 기본 아이템일 정도로 매우 역동적이다. 과거 80년 대 중반 미국의 프린스와 레볼루션이라는 락 그룹의 공연에서 키가 매우 작은 흑인 아티스트 프린스는 퍼플 레인(Purple Rain)을 부르면서 마지막에 기타를 깨부순다. 그냥 깨부수는 게 아니라 아주 예술적으로 깨부순다. 이를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에 상당한 연습을 했다는 뜻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번 임재범의 콘서트가 나치 복장을 입고 퍼포먼스를 한 건 그의 카리스마에 매우 잘 어울리는 컨셉이었다. 말미에 히틀러 이스 데드 특히 하일 프리덤이라 외치면서 나치 복장을 갈갈이 찢어 발기는 퍼포먼스까지 했다면 최절정이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얼마나 멋진 콘서트가 되었을까를 상상해 본다. 이것이 약동하는 젊음이고 창조적 파괴를 지향하는 진정한 락 아티스트의 정신에도 맞닿아 있다. 락 아티스트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런 저항의 정신과 젊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는 무려 70이 넘었지만 아무도 그를 두고 늙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 자체로 '젊음의 전설'이다.

사실 아이돌 천지인 한국 대중 음악계는 거의 질식할 지경이다. 대중 음악계가 질식하면 우리의 생활이 각박해지고 총제적인 문화의 꽃이 시든다. 이렇게 되면 그 빈 공간에 도박이나 마약 등 안좋은 문화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십상이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과 역동성을 위해서도 진정으로 한국의 콘서트 문화가 살아 나야 하고 임재범 같은 진정한 아티스트들을 키워 한국의 대중 음악계를 활성화시켜야 할 때다. 그럴려면 이번 임재범의 공연처럼 좀 더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새로운 바람을 넣을 필요가 있다. 락 콘서트까지 고리타분한 양반놀음이나 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로 한국 대중문화의 암흑기다. 이런 것을 지적해서 한국 대중문화가 더 활성화되도록 노력해야할 문화평론가(?) 오히려 고리타분한 도덕적 잣대를 이용해서 이에 찬물을 끼얹다니 도대체 어느 나라 문화평론가가 이 따위 무식한 짓을 하든가?

김형석과 임재범 같이 한국 대중음악의 질을 높이고 풍요롭게 한 분들은 정말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대중 문화예술가를 존중하지 못하면서 무슨 문화를 논하고 어떻게 질 높은 문화를 창달할 수 있겠는가? 진중권처럼 문화와 미학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의 선동질에 대중이 호응해서 한국의 사회에 피해를 양산하고 있는 건 정말 심각하고 해로운, 그야 말로 '진중권 현상'이다. 이 현상을 퇴치하고 한국 사회가 좀 더 진일보하고 세련된 문화 선진국이 되는 길은 가장 먼저 진중권부터가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진중권이 전두환을 욕하고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을 욕해 준다고 그의 허물을 용서해 주고 환호를 보내겠다는 질 낮은 네티즌들도 이젠 제발 자신의 감정보다 한국 사회 전체를 먼저 생각해 주기를 진심으로 호소한다. 문화가 썩으면 사회 전체가 썩는다는 걸 인식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식의 욕설로는 아무 것도 진보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주었으면 한다.



문화와 트라우마, 사라져 가는 나치 영화

1992년 05월 25일 동아일보 기획기사에서 보듯 독일 나치와 대항해 직접 피를 흘린 런던에서 조차도 나치 복식이 나온다. 그것도 세계를 무대로 한 공개한 패션쇼다. 한 술 더 떠서 유럽인들로서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릴 것 같은 그 악명 높은 卍자(字) 문장(紋章)이 나오는 패션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럽인들이 역사의식이나 교양이 없고 또 미감이 후지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미감으로만 치자면 전 세계의 군복중에 나치 제복만큼 멋지고 의미있는 복식이 어딨으랴. 히틀러는 군복을 가장 멋지게 디자인함으로서 군인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세계 정복의 야욕을 키우는 데 철저히 이용할 수 있었다. 패션계에서 반복되는 밀리터리룩도 그 원조는 나치 복장이다. 미학은 이렇게 윤리 도덕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객관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나치 트라우마의 당사자들인 런던 컬렉션에서 조차 나치 문장(紋章)이 등장한 것은 적어도 그들은 문화적 그리고 예술이나 그리고 의식차원에서도 나치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승전국이었기에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법,제도가 아니라 가장 어려운 단계인 문화적으로 까지 수용할 정도면 완전히 극복되었고 이를 과거의 유물로, 하나의 유희로 즐기게 되었을 정도로 승화되었음을 말한다. 동시에 적국이었던 독일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거의 매년 나오던 유태인 박해 영화를 요즘들어 찾아 보기 힘들어진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과 관계있다. 그런데 나치트라우마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나치 복장을 두고 그것도 나치를 고무 찬양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마지막 메시지로 반 나치 의식까지 의도적으로 가미한 퍼포먼스에 말도 안되는 해괴한 논리로 이에 딴지를 걸다니, 진중권은 나치에 피해를 받은 유태인 일족인가? 아니면 한국인들이 히틀러에 의해 철저히 폭격당했던 유럽 사람들인가? 설사 유태인이라도 적어도 미학적 견지에서는 거기에 딴지를 걸지 못한다. 나치 문장 패션의 공개적인 등장은 유럽 현지에서 그것도 1992년의 일이다. 유럽도 이러한데 여기는 수억만 리 떨어진 동양의 조그만 나라 한국이고 또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가까이 지난 2011년이다. 한국에서도 마광수 교수의 장미 여관에 대한 수용의 정도가 변화됨에서도 확인하듯 요즘 문화의식의 변동 속도가 얼마나 쏜살 같은 지도 모르고 있다.(동아일보 기사 중 밸리터리룩은 밀리터리룩의 오타임)

필자가 보기엔 일본이 한류를 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일본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한 우리 한국이 일본문화를 두고 왜색문화라며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한국의 유명 아티스트 임재범이 욱일승천기를 휘두르는 퍼포먼스를 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때도 미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사회문화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임재범이 한국 사회에서 나치 복장을 하고 퍼포먼스를 한 게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설사 문제가 된다 한들 그게 사회문화적인 문제이지 어떻게 미학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한번 말하면 미학적으로도 사회문화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락 아티스트와 충격적 새로움의 추구

위 동아일보 기사에도 보다시피 21세기 새로운 사조가 충격적 새로움 추구인데 이를 임재범같은 락 아티스트가 하지 않고 누가 해야 한단 말인가? 전 세계 모든 대중 음악 중에서 락 아티스트들이 가장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하고 또 하여야 한다는 걸 진중권은 모르는가? 김형석 같이 대단한 작곡가도 몰라는 보는 인간이 뻔뻔스럽게 어떻게 문화평론가 직함을 달고 다닌단 말인가? 어디서 대중에게 생소한 용어를 들고 와서 대중을 기만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는 사람은 평론가가 아니라 지식인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다. <쇼펜하우어의 38가지 토론의 법칙>을 읽어 보면 한결 같이 1) 사악해 져라 2) 뻔뻔해져라 3) 교활해 져라 하는 내용이 전부다. 이걸 한번 읽고 '나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게 아니라 이걸 익혀서 제대로 구사하려고 작정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떻게 지식인인가? 그건 악마에 영혼을 판 지식 사기꾼에 불과하다. 지식인은 적어도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앞에 두고 전략 전술과 사기술로 이를 뒤엎으려 하다니 이건 도저히 지식인의 양심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낮은 지능으로 인해 터무니 없이 무식한 분석을 연속으로 해 내고 있는 진중권의 말을 정말로 "개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진중권의 말은 거의가 무가치한 공해 수준으로 한국 사회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유형

히틀러 평전의 p403 를 보고 필자는 또 깜짝 놀랐다. 타락한 지식인의 전형인 괴벨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문장만 주면 그를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괴벨스, 필자가 보기에 전 세계 역사상의 인물 중에 진중권과 가장 유사한 인물이다. 실제로 진중권은 수십년간 문화인류학을 연구해서 한국학이라는 학문을 독자적으로 세운 이규태를 "호전적"이란 단어하나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간 적력이 있다. 문화인류학자에게 인종차별주의자란 모독은 그 분의 가슴에 총을 난사하는 짓이다. 무식한 진중권이 이를 알 리가 없다. 그런데 무식하다고 해서 이런 죄악이 용서될 일인가? 필자가 이규태님의 아들이었다면 진중권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일평생을 마다가스카르나 파뉴아뉴기니 같은 오지를 찾아가 원시부족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연구한 내용으로 이들 원시부족민들이나 문명의 세례를 받은 도시인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걸 증명하신 분들이 이 분 들이다. 다만 다름이 있을 뿐 차이는 없다는 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분들이다. 그런데 이런 분께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인격살인을 저지르다니? 일생을 아무도 하지 않았던 한국 문화에 대한 연구밖에 몰랐던 이규태선생이 이런 무뢰배에 의해 자신의 인격이 난도질 당할 때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실 필자가 진중권 현상을 반드시 퇴치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키와 얼굴 그리고 골격까지 진중권은 괴벨스와 인물 생김새만 유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괴벨스를 묘사하는 소 제목이 바로 "새로운 유형"이다. 바로 강준만 교수가 진중권의 행각을 보고 말한 것도 "새로운 인간 유형"이었다. 강준만도 이 책을 보았고 또 진중권의 본색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준만 교수도 진중권의 인성(人性) 부분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진중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참겠다'고 했다.

진중권이 저렇게 무식하고 싸가지가 없이도 한국 사회에서 종횡무진 날 뛸 수 있도록 방치한 공범들 중에는 이렇게 진중권의 본성을 잘 알면서도 그들의 목적에 이롭다는 이유로 자꾸 불러들인 미디어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또 이를 알면서도 너무 바빠서 여태까지 방치해 온 강준만 교수와 진중권의 디워에 대한 무식하고 폭력적인 만행을 <디워 대첩>으로 미화하는 등 오히려 부추겨 온 우석훈 교수 같은 사이비 지식인들의 책임도 막중하다. 그래서 진중권 현상은 결코 진중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하긴 진중권을 논하려면 온갖 인신모독을 당할 것 쯤은 각오하고 들어가야 한다. 어느 누가 이런 인간과 상대하려고 하겠는가? 이러는 동안에 그는 독버섯처럼 쑥쑥 자라 버렸다. 지금 현재 몇 몇 블로거들괴 게시판에서 필자를 향한 근거없는 중상모략을 포스팅하고 있는 걸 확인해 보라! 어떤 블로거는 필자의 학력의혹 문제를 수년 째 포스팅 해 놓고 있다. 김휘영의 문화평론 카페 회원이 가서 반론을 달면 삭제하고 인신모독용 글만 남겨둔다. 특이하게도 이런 포스팅이 거의 대부분 파워 블로거로 김휘영을 검색하면 최고 상단에 나온다. 이런 중상모략 포스팅이 올라올 즈음해서 그동안 필자에게 들어 오던 원고 청탁도 끊겨 버렸다. 필자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걸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무리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필자는 진중권과 이런 악연을 맺은 걸 후회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강준만의 말대로 사기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과 상대하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인지를 한번 상상해 보라.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과 상대할려면 필자에게도 많은 피해가 따를 것을 먼저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 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필자의 친동생과도 작은 언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의 양심이, 아니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이런 진중권 현상이 번져가면서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고 있은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 지 궁금하다. 이 분들에게 마이클 샌덜 교수가 말한 공공선이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알량한 패거리 챙기기가 사회 공동체보다 중요하다는 말인가?

p.s 1. 그동안 한국 사회에 심각한 문제로 부각된 진중권 현상을 퇴치하는 작업을 수행해 오는 동안 제 언어가 상당히 거칠어진 점을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오래 전의 제 글과 다른 문화평론 글을 보신 분들을 잘 알겠지만 이 김휘영은 열정이 좀 강할 뿐, 사실 부드러운 남자이니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p.s 2. 필자는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변희재 같은 후배들에게도 존대말을 씁니다. 하지만 제가 연구한 진중권은 서울대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런 대우를 해 줄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인간 유형입니다. 그런 대우를 해주면 더욱 기고만장해져서 사태가 더 악화될 뿐입니다.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이런 가짜 지식인들에게 농락당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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