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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는 충무로의 집단 자살극

한국 영화계와 비평가들은 철저히 반성해야


【서울=빅뉴스】김휘영의 문화평론= 충무로에 사생아가 출산됐다. 한 관객의 리뷰 '나오지 말아야 할 영화'처럼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가 시뻘건 핏덩이 채 나왔다. 충무로는 지금 흥행이라는 악마적 주술(呪術)에 이끌려 집단자살의 길로 내달리고 있다.

기막힌 마케팅 수법들과 현명한 관객의 눈

외국 영화제에 '수상'한 것이 아니라 기껏 '초청장'이 온 게 온 인터넷 신문에 일제히 도배되는 시대다. 그것도 경쟁부분이 아니라 비경쟁부분이라니 말 다했다. 케이블 TV 약품광고에서 많이 쓰이는 수법인 <특허출원>을 보는 것 같다. <특허출원>과 <특허획득>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듯이 <영화제 초청>과 <영화제 OO상 수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특허출원은 불과 몇 푼만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웬만한 OO 영화제의 초청, 그것도 비경쟁 부분에서라면 약간의 수고와 돈, 즉 로비로도 얻어 낼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지만 특허획득과 OO상 수상은 정말로 품질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허<출원>과 영화제<초청>사이의 공통점이 재미있다. 일단 반복 세뇌한다. TV약품광고에서는 특허출원! 특허출원! 마치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한 특수효과와 함께 몇 번이나 반복한다. 영화마케팅에서는 이 별 것도 아닌 기사로 일거에 온 인터넷 지면을 도배해 버린다. 그 효과는 막강하다. 무엇보다 교육수준과 판단력이 좀 낮은 사람들에게는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특허>와 <영화제> 특히 외국 영화제라는 타이틀에 붙은 권위를 이용해서 약품과 영화에 대한 제대로 된 품질평가를 심하게 어지럽힌다. 두 번째 공통점은 더 기가 막힌다. 특허출원은 약장사를 다 한 후, 특허획득에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없다. 외국 'OO영화제 초청'도 마찬가지다. 그걸 언론에 도배해서 실컷 광고효과를 보고 나중에 수상권에서 탈락해도 특별한 문제가 없다. 이미 흥행 시즌은 끝났으니까. 흥행사는 무대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지폐를 세고 있다. 한국에서 수십억 이상이 투자된 영화라면 거의 모두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이런 게 만일 사전에 기획된 마케팅 전술이라면 한국 영화계는 아카데미 마케팅상을 수상하고도 충분히 남는다. 영화제작에 워낙 돈이 많이 들어가서인지, 사전에 영화잡지의 평론가들 마저도 거의 광고 대행사 비슷한 존재로 전락시켜 놓은 것 같다. 이제 한국 관객들도 정말 현명해져야 한다.

신종 인터넷 알바들

게다가 요즘엔 인터넷 게시판에도 프로급 알바들이 설친다. 이렇게 인터넷을 장악하고 광고성 글로 도배하는 알바가 가장 많이 활동한 영화가, 현재까지로만 평가한다면, <의형제,2010.02, 장훈>가 아니었나 싶다. 바쁜 일정으로 시사회에 못간 필자의 경험을 밝히면, 인터넷 평점과 리뷰 글들을 보고 예상한 품질과 실제 영화를 본 후의 품질 만족도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었다. 속된 말로 필자도 낚인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의형제>의 경우를 훨씬 초월한다. 네이버 리뷰를 보면 상당히 프로급의 리뷰를 써 놓고 글 말미에다 노골적으로 추천을 받기 위해 빨간 글씨체의 부탁까지 하고 있다. 이는 리뷰 맨 상단에 올려 지능적인 영화 광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아니면 뭐하려고 추천을 그렇게나 노골적으로 부탁하고 있을까? 뛰어난 글 솜씨를 이런 일에다가 사용하는 사람이 있음은 요즘에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인터넷 리뷰가 영화 흥행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시대에 영화 관계자가 알바성 글을 활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인 것은 충분히 이해 된다. 다만 이 모든 점들이 곧 한국 관객들이 좀 더 현명해져야만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자본의 횡포에 정보와 시장이 철저히 왜곡(歪曲)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지킬 방법이 없다.

외국 영화제의 초청

토론토 영화제의 한 유명(?)인사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루시퍼를 구현했단다. 루시퍼, 말 그대로 악마다. 추상명사인 '인간(人間:human beings)의 악마성'이 아니라 그냥 보통 명사 ‘악마(惡魔:devil)’를 구현했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한 마디로 영화가 인간으로서의 도를 넘어 섰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섬뜩한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표출된 말이다. 이 말에 숨겨진 뉘앙스를 알고서도 이를 단순히 칭찬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가 과연 한국 영화 아니 한국 영화인들의 수준을 얼마나 비웃었었을 지 필자는 그 속마음이 너무나 궁금하다. 더욱 놀라운 건 사회에 피해만 끼치기만 했지 이익이라면 눈꼽만치도 없을 이렇게 질 낮은 잔혹폭력영화가 대한민국에서는 제한 상영관이 아니라 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무려 580여 개의 스크린을 차지하면서 대중 앞에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외국 인사가 이 사실까지도 알았다면 얼마나 경악했을까? 동물 학대 영상에도 경악하는 선진국의 문화의식이다. <악마를...>에서 보인 인간에 대한 학대와 낭자한 인권유린을 담은 걸 영화랍시고 찍은 한국에 대해서 얼마나 문화적 소양이 낮은 국가로 생각했을까?

흥행

이따위 저질 영화라도 <돈>의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흥행>에서는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이는 외국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악마를 보았다, I Saw The Devil>이란 타이틀과 함께 악마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만 올려 놓아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는 데, 실제로 악마 두 마리를 우리 안에 잡아 놓았다고 광고하면 이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룰 것인가? 이러하기에 악마를 스크린이라는 우리(cage)에 넣어 구경시키면서 돈을 버는 흥행사는 신날 수 있다. 사실 원빈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아저씨>도 잔혹성에서는 <악마를 보았다>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악마를 보았다>가 너무나 적나라 하고 더 잔혹하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여간 2010 년 여름을 낭자하게 할퀸 두 편의 영화 앞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기분은 실로 난감하다.

영화감독과 배우의 소양

한 마디로 막장까지 갔다. 영화감독으로서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같은 값비싼 3류 영화를 찍는 건 인기가 떨어진 여배우가 단지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또는 돈을 위해 노골적인 싸구려 화보를 찍거나 포르노 등급의 영화에 연기를 자청하는 일과 동급이다.

이런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서 출연을 결정하는 배우가 상당히 유명배우인 경우,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떨어진 인기를 만회할 목적이거나 사업 실패, 도박중독, 낭비벽 등의 이유로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입장에 처했기에 어쩔 수 없이 출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킬 정도다. <쏘우1, 2004, 제임스 왕>에 형사역으로 출연한 대니 글로버를 두고 장재일 평론가는 이렇게 빈정거림으로 평을 대신했다. "이빨 빠진 고어 무비...대니 글로버가 출연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갚아야 할 채무가 많았나 보다!"(출처-네이버 영화란에 있는 ‘홍성진의 영화해설’ <쏘우>편)

대니 글로버와 최민식, 그리고 이병헌

아마도 한국 관객들은 대니 글로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긴 배우인지 떠올리지도 못할 것이다. 실제로 네이버 이미지 검색으로 직접 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지를 찾아 본 필자도 이 흑인배우는 누구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물론 영화감독 제임스 왕(황의유,본명:黃毅瑜)도 철저한 신인감독이었다. 헐리우드에서 차지하는 지명도와 비중이 매우 낮은 인물인데도 이렇게 차가운 평을 받는다. 만일 대니 글로버가 한국에서의 이병헌이나 최민식 레벨의 위상을 가진 배우라면 더욱 심한 혹평을 받았을 거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악마를 보았다>를 옹호하고 두둔하는 데 인용되고 있는 헐리우드의 쏘우(Saw) 시리즈는 비록 잔혹한 장면이 제법 나오기는 하지만, 한국의 <악마를 보았다>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심오한 철학이 기초된 영화다. 적어도 <악마를 보았다>와 비교 분석하기 위해 필자 스스로 볼 수 밖에 없었던 <쏘우1> <쏘우2>까지는 그렇다. 그래서 그 출발선부터가 너무나 다르다. 그렇지 않고 단순한 볼꺼리 위주의 잔혹영화였다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는 즉시 정말 세계적인 흥행 영화는 아무렇게나 되는 게 아님 여실히 확인했다. 한 마디만 덧붙히자면 <양들의 침묵>과 <쏘우>를 한국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와 견주는 건 이 두 영화에 대한 모욕 수준이다.

헐리우드 유명배우들의 자존심

최근 패리스 힐튼과 함께 비버리힐즈의 유명연예인 린제이 로한이 결국 플레이보이지 모델로 등장하는 계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던 일도 그렇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파멜라 앤더슨의 섹스 비디오 누출사건도 실제로는 그들 부부의 사치와 지나친 낭비벽으로 거덜난 재정(finance)상태가 원인인 것으로 차후 밝혀졌다. 이처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많은 행동에 돈과 결부되지 않는 일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하여간 이런 차가운 사회적 인식때문인지는 몰라도, 헐리우드에서는 흥행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유명 인기 배우가 이런 잔혹폭력 영화에 출연하는 일은 상상조차 어렵다. 더구나 그가 아직 배우로서의 수명이 많이 남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흥행에 제법 영향력을 갖고 있는 헐리우드 배우들은 시간과 노력에 비해 상상 못할 고수익을 보장해 주는 CF광고조차 좀처럼 출연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유명 영화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자신이 비흥행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해 주는 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게 한국 영화계와는 다른 헐리우드 유명배우들의 자존심이다. 최민식이 출연했다고 하는 사채대부업광고? 당연히 안한다. 참고로 필자는 행여 마음 속에서라도 한국의 유명배우가 사채대부업광고에 출연하는 일은 비난해 본 적이 없다. 그 최초격인 최민수가 대부업 광고에 출연한 일로 대중의 공분을 샀던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필자는 그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충분히. 연예인의 잘못보다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편협하기에 일어난 해프닝으로 치부했다.

몇몇 유명 배우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한국 영화배우들, 솔직히 먹고 살기 힘들지 않은가? 왕년의 명배우 김희라씨의 지적대로, 영화배우가 영화를 찍지 않을 땐 백수신세와 다름없어 그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고 한다. 단지 필자는 일반의 화려한 CF광고조차 나서지 않는 헐리웃 유명배우들이면 대중의 공분을 사는 사채대부업광고는 당연히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한국과 사정이 다른 걸 감안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고도 사치스러울 정도로 살 만큼 영화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걸 다 감안 하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은 보기에 굳이 싫진 않다.

포르노와 잔혹 폭력물, 그 악영향

부끄러운 한국영화 <악마 보았다>를 전문가 입장에서 에누리 없이 평가하면 싸구려 포로노물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니,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만 보면 인터넷 동영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단순한 포르노물보다 훨씬 심각하다. 외국에서는 음란물에 대한 규제보다 폭력물에 대한 규제가 훨씬 엄격한 점도 이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음이다. 한국의 일반인들은 이런 영화가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웬만히 선정적인 영상물을 접하더라도 구토, 역거움, 참지 못할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를 본 관객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한결같이 보기에 심하게 불편하고 괴로웠다고 전한다.

어린 청소년들에게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는 등 그것이 가진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많은 사회학자ㆍ성심리학자들은 포르노물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그 폐해만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인간, 특히 여성으로서 오랜 역사에 걸쳐 억눌려야만 했던 성적 만족감에 대한 발견과 부부생활의 행복에 대한 질적인 향상 등 적지 않은 부분에서 인류 사회에 기여해 왔다는 긍정적인 평가 보고서도 더불어 내놓고 있다. 실제로 어느 정도 품질이 수반되는 깔끔하고 소프트(Soft)한 등급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성교육 교재로 쓰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요즘은 이를 보는 여성들의 비율이 많이 증가하고 있으며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많이 보고 있다는 보고서는 이런 점을 잘 반영한다.

사회적 약자 보호와 폭력

이에 반하여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잔혹한 폭력과 살인을 담은 영상은 어떤가? 이를 굳이 포르노물에 비교하여 말하자면 실정법으로 매우 엄하게 처벌하고 있는 강제성폭행(RAPE)이나 아동포르노물에 비견할 만하다. 이 두 종류를 일반의 음란물과는 다르게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극도로 제한하면서, 매우 엄하게 처벌하는 근원적 이유는 이들 강제성폭행이나 아동포르노물은 단순한 성의 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강자가 그 우월한 힘이나 지위를 악용하여 약자를 착취하고 그 인격을 유린하는 일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치명적인 장면들을 영상에서라도 무방비로 허용해 주다 보면, 자연히 모방범죄의 욕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회가 입을 위험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의 기본구조를 파괴할 만큼 반사회적이고 심각한 폭력범죄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악마를 보았다>에는 성폭행 장면까지 나온다. 더우기 스토리 전개상 특별한 필연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매매춘과 성폭행은 그 처벌 수위는 하늘과 땅 차이다. 둘 다 성(性)에 관한 사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그건 폭력성의 유무에 있다. 매매춘은 돈을 매개로 한 합의에 따른 행위지만 성폭행은 신체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일방이 타인의 인권을 짓밟으며 강제적인 폭행을 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와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성년자에 관한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에 대한 사례를 영화계에서 찾자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칸영화제 감독상과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등 무수한 상을 수상하고 심지어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까지 역임하는 등 세계 영화계에서 온갖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는 43세 때 13세 소녀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죄목으로 무려 33년 간이나 해외로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이게 그냥 성관계가 아니라 강제 성폭행이었다면 어땠을까? 미국, 폴란드,프랑스, 스위스 등의 나라에서 외교적 문제로 까지 비화된 끝에 그의 나이 76 세에 결국 체포되었다. 그 후 이 소녀가 성년이 된 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을 용서한다고 언론에 공개적으로 의사표명을 했음에도 말이다. 그는 설사 개인적인 용서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사회적인 용서는 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10개월 후에야 풀려났다고 최근의 외신은 전한다. 아마도 그가 영화계에 끼친 공로와 그 소녀의 공개적인 용서, 그리고 체포 당시 이미 76 세라는 나이가 없었다면 훨씬 심한 처벌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참고로 로만 폴란스키는 <피아니스트>라는 매우 수준높은 영화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감독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한국에서도 미성년자에 관한 범죄에 관해서는 가중처벌을 하는 추세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영화사적 의의?

현재 한국에서 최고의 논란이 되고 있는 <악마를 보았다>의 영화사적 의의를 찾자면 무엇일까? ‘오랜 역사 동안 억눌려 왔던 폭력의 해방?‘ ’폭력과 잔혹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 이런 억지스런 명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참혹한 몰골이다. 이 영화의 목적이 한국 영화의 질적인 향상, 사회문제의 고발 또는 인간 내부에 깃든 폭력성에 대한 심오한 고찰 등이 아님은 본 사람들은 다 알 수 있다. 그럼 무엇인가? 말 그대로 흥행 즉 돈(MONEY)을 위함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 봐도 우리 한국과 같은 사례는 찾기 어렵다. <괴물>의 봉준호, <디-워, D-War>의 심형래, <쉬리>의 강제규, <공동경비구역>의 박찬욱, <왕의 남자>의 이준익, <놈.놈.놈>의 김지운 등 그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유명 감독과 이병헌, 최민식 같은 최고 레벨의 배우들이 동시에 의기투합하여 이런 잔혹무비를 찍은 후, 그 사회에 대량으로 공급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이름없는 3류 감독이 기획하고 그렇고 그런 배우들이 출연해서 소수의 변두리 3류 극장에서 작은 흥행을 목적으로 하거나, 비디오나 DVD 대여점으로 직행하고 있는 무수한 영화가 이런 종류다. 당연히 그 나라 스크린의 절반에 가까운 대규모 개봉관 상영은 꿈도 꾸기 힘들다. 1류 감독과 1류 배우가 모여 3류 영화를 찍어내는 나라. 또 그런 영화를 스크린을 독점해 가면서 배급하는 나라. 이것이 충무로의 논리이며 구조이며 이는 곧 한국 대중문화의 현실이다.

영상매체와 사회의 상호 역학관계

김지운 감독과 스타배우 최민식의 인터뷰를 보면 사회에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으며 영화는 사회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최민식은 영화는영화일 뿐이지 모방범죄 등 폭력 영화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 운운은 너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과연 그럴까? 현대는 영상미디어의 영향력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할 정도로 확산된 시대다. 따라서 드라마 영화 등의 영상매체가 사회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영상매체를 반영한다는 말이 더 타당할 정도가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배우의 어투나 말이 유행어가 되어 일순간에 사회 전역을 휩쓴다. 그들의 헤어 스타일이나 옷차림은 패션 아이콘이 될 정도로 영상매체의 위력은 막강해졌다. 즉 지금은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영화를 반영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시대다.

트라우마(Trauma)

연쇄 살인마들의 행적이나 청소년 범죄 등에서 접하게 되는 모방범죄들은 언론을 통해 사회 일반에 노출이라도 되기에 적어도 걱정이라도 한다. 사실 더 심각한 일은 이런 잔혹폭력영화에 노출된 사람들이 입을 트라우마다. 잔혹폭력행위를 자신의 뇌에 입력해서 소화해야 하는 끔찍한 경험은 자신의 인격(personality)과 자아(ego)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다. 이를 전문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 한다.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外傷)', 또는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게 되는) ‘정신적 충격(shock)'으로 이에는 무엇보다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일이 극히 많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장기기억 되는 특성이 있다. 증세는 크게 과민반응, 충격의 재경험, 감정회피 또는 마비로 나눌 수 있다. <악마를 보았다>와 같은 잔혹폭력영상물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미칠 공공연한 폭력행위에 대한 무감각, 마비 등의 문제도 심각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더 무서운 점은 한번 이런 일을 겪고 나면 그 방향성을 되돌릴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사회의 건강도에 심각한 부(否)의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악마를 보았다> 류의 잔혹폭력영화가 사회를 반영한다는 건 사회에 끼칠 이런 여러 악영향들을 알지 못할 만큼 지식과 소양이 부족하거나 보지 않겠다는 의도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영화가 자주 나올수록 그 사회에 경종을 주는 효과보다는 그 사회의 건강도가 점점 나빠질 뿐이다.

<영화>보다 <돈>을 찍기 위해 혈안이 된 충무로

솔직히 <악마를 보았다>가 김지운, 최민식, 이병헌 같은 한국에서 최고도로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투자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대규모스크린 확보라는 배급에서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영화계에 상존한 문제는 감독이나 배우들의 개인적 자질과 소양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그 뿌리는 무엇보다 투자 기획 배급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한 충무로의 구조적 문제에 까지 닿아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젠 충무로가 <영화>가 아니라 <돈>을 찍어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이다. "예술? 그 따위 것은 O나 줘라. 그건 가끔씩 독립영화 감독들의 작품에서나 가끔씩 보면 되잖아.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 그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해? 아니 왜 해야 하나? 그냥 볼거리 위주로 잔혹하게 찍어 놓고 마케팅 잘하고 스크린만 독점 또는 많이 확보하면 흥행이 되는데 뭐하려고 굳이...." 이게 충무로 흥행감독들의 속 마음이 아닐까?

고작 <악마를 보았다> 정도의 콘텐츠를 가지고 최고의 유명 감독, 최고의 유명 배우, 거액의 투자, 게다가 최고의 스크린 점유율로 개봉......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2010년 8월 12일 한국에서.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이다. 불과 3년 전, <디워, D-war, 2007, 심형래>에 비평 아닌 악의적 비난을 일삼았던 평론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어찌보면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건전하고 제대로 된 가족영화가 나왔던 일이. 이런 <디워>에도 온갖 억지스러운 문제점과 비난꺼리를 만들어 내고 그걸 일제히 쏟아내며 여론을 장악해 갔던 그 잘난 분들이 진짜로 심각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는 특별한 문제를 못 느끼고 있다는 말인가?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한국 영화계의 반응은 무엇보다 기획 투자유치 제작 배급 비평계 등을 총망라해서 한국 영화계의 판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실세 영화인들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다.

퐁당퐁당 개봉과 스크린 독점의 횡포

장나라가 출연한 영화 <하늘과 바다>는 그 유명한 '퐁당퐁당' 개봉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 이에 관련한 한국영화 배급계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그동안 한국 영화인들이 똘똘 뭉쳐서 스크린 쿼터를 지키려고 했던 게 기껏 <악마를 보았다> 같은 저질 영화를 무려 70억원이나 들여서 만들고서 전국 580 개 이상의 스크린을 독점하도록 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었을 것으로 믿고 싶다. 충무로가 이런 지경까지 추락하고서도 한국 관객에게 한국 영화를 사랑해 달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참고로 필자는 한국 영화를 비난하기보다 옹호하는 입장에 서 왔다. 김지운의 <놈.놈.놈>이 나왔을 때 아카데미 감독상에 빛나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비교하면서 <놈.놈.놈>이 훨씬 뛰어나다고 극찬을 했던 적이 있다. 미술, 소품 등에서 세심함이란 찾아 보기 힘들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엉성했던 <전우치>를 보고서도 그 평을 써 놓고서도 발표하지 못했다. 헐리우드발 허리케인인 <아바타>름 맞아서 선전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차마 그 약점을 대중 앞에 밝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의형제> 때도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김지운의 이번 작품 <악마를 보았다>는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느낄 정도다. <장화홍련>에서 세련된 연출을 선보였던 김지운은 사라졌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우리가 즐겼던 그의 절제된 액션과 뛰어난 상업적 감각을 절묘하게 결합시킬 줄 알았던 그 감독은 흥행의 구렁텅이로 끝없이 추락했다. 빼어난 외모와 뛰어난 연기로 한류 스타의 맥을 잇고자 했던 이병헌의 모습은 깨어진 거울 속에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헐리우드의 공세에 한국 영화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 스크린 쿼터 사수에 앞장섰던 대배우 최민식의 뜨거운 열정 또한 다 타버린 모닥불처럼 정처없다. 충무로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추락하고 말았는가?

충무로의 배신: 내팽개쳐진 한국 관객

가장 중요한 여름 방학 시즌에 우리 한국 관객들은 제대로 선택해서 볼 영화가 없다고 한국 영화계에 대한 푸념과 원망이 넘친다. 덕분에 어중간한 수준의 외화 <인셉션>이 흥행질주를 했던 건건 한국 영화계의 자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이다. 적어도 여름방학 성수기에 <전우치> 정도의 영화라도 한국 관객 앞에 출품되었다면 무서운 흥행질주를 할 수 있었을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쳤던 <아바타>가 휩쓰는 동안에도 <전우치>와 <의형제>가 상당히 선전할 정도로 한국 관객들의 한국영화사랑은 여전했다. 아니 각별했다. 하지만 충무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무얼 했는가? 이 중요한 여름 방학 휴가기에 사랑하는 사람과 기껏 이런 류의 잔혹 복수극이나 보면서 2010년 여름의 추억을 만들라는 것인가? 연인이 보고 싸움이나 안 일어났다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디워>같이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건전한 가족영화나 연인끼리 볼 수 있는 로맨스 멜러물, 또는 청소년, 학생들이 볼 수 있는 영화 중 단 한 편이라도 선보였어야 하지 않았는지 충무로는 정말 심각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내용도 없고 철학도 없고 미학도 없이 단지 볼꺼리, 그것도 구역질 나오는 잔혹한 볼꺼리가 전부인 한국 영화. 이것이 2010년의 여름의 자화상이다. 한국 영화의 총체적인 위기는 이렇게 성큼 다가와 버렸다.

한국에서의 제한 등급과 인터넷 다운로드 시대

한국 영화시장에서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게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처럼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형식적으로는 법적인 제재가 있지만 하등의 구속력도 없이 허울 뿐인 게 청소년 담배 구매, 공공장소나 어른들의 흡연금지, 10시 이후의 청소년 PC방 출입금지, 그리고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보기 아니던가? 더구나 인터넷 다운로드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라 한국에서 이런 규제가 무슨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제한상영이라는 게 오히려 훈장이라도 되는 양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흥행을 촉진시킬 뿐이라는 건 한국 사정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때문에 오로지 '영화 종사자들의 소양과 양심'만이 표현의 자유의 한계선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정도다. 이런 한국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사람들 또 영화제작에 참여한 당사자들일 것은 분명하다.

흥행=돈+명성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제한상영등급을 받았음을 반복하여, 언론플레이로 사용하고 있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제한상영을 당해야 할 정도로 잔혹성을 담았음을 의도적으로 부각해서 노이즈 마케팅효과를 얻고자 함이다. 다른 영화에서는 도저히 보기 힘든 장면들이 많이 있다는 노골적인 암시를 줌으로서 이를 가공할 흥행 무기로 쓰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하는 평론가와 관객들도 있을까? 영화는 이미 만들어 졌고 어쨌든 투자금 이상은 벌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모르는 바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흥행을 추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흥행 목적이 아니라면 자기 집에 소장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김지운, 최민식, 이병헌 정도의 조합이면 굳이 이런 영화를 만들어서 한국 사회에 심각한 폐해를 끼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을까? 최후로는 이 3인의 개인적 소양의 문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나머지는 그럴 듯한 핑계 또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건 오직 돈의 논리, 영화계에서 말하는 '흥행= 돈+ 명성'의 논리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불길한 예상의 적중

사실 <악마를 보았다> 같은 영화의 출품과 대규모 상영이 한국 영화계에 머지 않아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 점은 오래전부터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생각보다 조금 빨라졌음에 놀랄 뿐이다.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을 보고 나서였다. <투캅스> 시절의 명감독 강우석을 기대하고, 그 영화를 본 후 얼마나 후회했는지를 모른다. 정말시간과 돈이 아까웠던 영화였다. “그 많은 유산을 자식에게 안 물려주고 기껏 고아원에다 기증해? 너 같은 놈이 부모야?” 라는 증오의 대사를 내뱉으면서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 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는 아들(이성재)을 주역으로 처음으로 등장시킨 영화가 <공공의 적, 2002>이다. 이런 충격적인 소재와 표현방식을 담고 있는 영화가 대규모 상영관을 확보하고 무차별적으로 대중에 살포된 적은 이 영화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런 잔혹한 친부모 살해 장면을 소재로 삼고 그 방법상으로는 은유적으로 처리하지도 않은 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던 영화가 바로 이 시리즈의 첫 편이다. 층격적 소재라는 건 그 사회의 문화적 토대 위에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효(孝)는 인간의 근본가치라는 유교사상이 1500년 이상 지배해 왔고, 전세계에서 한국보다 효를 강조하는 나라는 찾을 길 없다. 물론 서양에서도 쇼킹으로 받아들이겠지만 한국에서 친부살해를 영화에 담아 대규모 상영을 하는 일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국가에서 마호메트를 공개적으로 헐뜯고 비난하는 일에나 해당한다. 무슬림 사회 마호메트에 대한 신성모독을 공개적으로 하고 목숨이 붙어 있을 사람은 없다. 효를 강조하는 한국문화에서 친부(親父)살해보다 충격적인 소재가 있을까? 효의 관념을 조선시대처럼 문화적 강박 정도로 답습하자는 게 아니다. 효도 현대에 맞게 건강하게 재해석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부모를 칼로 찔어 죽이다니... 이 정도면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저런 것까지 무난하게 허용되는 걸 보니, 이젠 모든 게 다 풀렸구나"라는 메시지로 받아 들이게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영화가 한번 '흥행에서 까지 성공하면 그 빗장이 열린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후 더 심한 소재와 표현방식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모든 잔혹 호러 영화를 봐도 속편으로 갈수록 작품성은 줄고 대신 잔혹성은 더욱 심해지는 건 기본이다. 왜냐하면 한번 강한 자극에 노출된 관객을 만족시키려면 언제나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충무로 대통령 강우석 감독에게

객관적으로 평해서 강우석 감독은 <쉬리>의 강제규 감독 등과 함께 헐리우드의 공세에 맞서 한국 영화시장을 키운 너무나 큰 공로가 있다. 하지만 그가 한국 영화에 끼친 여러 영향 중에서 바로 이런 점 즉 잔혹한 소재와 표현방식에서 조차 선도적 역할을 한 점은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실망의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그가 한국 사회에 <투캅스1,2>라는 너무나 멋진 영화를 출품한 강우석이었기에 더욱 놀랐을 지도 모른다. <공공의 적>시리즈물에 비하면야 관객들이 그동안 비꼬아 왔던 조폭코미디 영화들이 훨씬 낫다. 강우석 감독이 선도한 이런 정도의 표현의 자유라는 씨앗이 차후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건 필자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2007년 <디워>논란 때 한국영화의 역사를 논하면서, <공공의 적, 2002>을 두고 자신 있게 최악의 한국 영화라는 평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공의 적>과 <악마를 보았다>를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잔혹성만 닮은 게 아니다. 갈철중(설경구)이라는 형사가 경찰의 본분을 내팽개치고 사적인 응징을 한다는 것조차도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병헌)이 국정원 직원이라는 것과도 빼닮았다. 둘 다 악마같은 사이코-국가 기관원(형사와 국정원 직원)-사적인 응징(복수)의 완벽한 쌍둥이 구조다. 경찰이 국정원직원으로 응징이 복수로 조금 더 전문적이고 밀도가 강하게 진화했다. 당연히 더 잔혹무비해졌다. 아니 훨씬 저질로 타락했다. 이 두 영화에서 등장한 경찰과 국정원 직원은 응징과 복수를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한 직업일 뿐이고 명분으로 드러난 응징과 복수는 그저 잔혹성을 커버하려는 방패막이일 뿐이다. 이렇듯 <공공의 적>에서 뿌려진 씨앗이 배급사의 스크린 장악으로 발아하고 대중흥행의 자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성장해서 추격자(2008, 나홍진)라는 무성한 가지를 키우고 2010년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그 열매를 처절하고 쓰라리게 맛보고 있다. 씨앗에 비해서는 상상도 못할 극강의 잔혹성이 표출되었다. 이건 김지운 감독이 폭력을 그린 게 아니라 한국 관객에게 영화라는 흉기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당연히 최악의 영화는 <악마를 보았다,2010>로 바통터치 되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 막장으로 치달은 영화가 나올 줄은 강우석 감독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추격자>는 상당한 작품성을 갖추고 있고 그런 까닭에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나홍진 감독이 <추격자>에서 보여준 사회적 약자 즉 우리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애정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는 마이너리티는 바로 그저 학대와 유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감독의 철학적 공허함엔 잔인과 잔혹함이 들어차 있음을 확인한 관객들은 구토로 대답하고 있다.

충무로의 명언 : 놀면 뭐하냐?

충무로의 대통령 강우석 감독의 인터뷰로 매우 유명한 말이 있다. "놀면 뭐하냐?"다. 그는 1년에 2~3 편 정도를 찍어 내야 한다는 부연 설명이 붙혔다. 이 말은 질(質)보다는 양(量)을 중시 여기는 충무로의 시각을 대변한다. 한데 이젠 바뀌어야 할 때다.

강우석, 그는 아직 젊다. 영화에 대한 능력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우석 감독이 한국 영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많고 그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충무로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장진 같이 능력있고 감각있는 중진급 감독들을 큰 인물로 키울 수도 있고 또 능력에 비해 빛을 못보고 있는 신예감독들을 발굴하여 한국 영화계를 혁신시킬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한다. 내친 김에 <강우석영화학교>와 <강우석 어워즈> 같은 것도 자신이 그려 갈 미래의 그림에 넣기 바란다.

그래서 "놀면 뭐하냐?"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어내는 일을 확연하게 줄여 주기 바란다.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이 고갈된 나머지<악마를 보았다> 류의 영화를 만들어 우리 사회에 공급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냥 놀아 주시는 게 사회에 훨씬 이롭다. 그래서 언젠가 상상력과 감수성, 이 그 두 개가 충일해 지는 때 영화에 다시 몰입해도 충분하다. 정 안된다면 그 따위 영화로 스크린을 독점하기 보다는 재능있는 신인감독이 들어 설 공간을 제공하는 게 훨씬 이롭다.

강우석 감독의 재능을 한국 영화계를 위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면 그나 한국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강우석, 그의 힘있고 빛나는 눈을 보면 이런 일을 충분히 해내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까지 한국 흥행영화를 이끌며 한국 영화계에 공헌해 온 대단한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은 감독이다. 한국 관객 모두가 그를 위시한 충무로를 주시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곧 <골든 슬럼버>라는 일본 영화가 한국에 대규모로 개봉된다. 앞으로 이런 일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유독 일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영화가 헐리우드가 아니라 일본 영화에도 밀리는 상황을 목도하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국 영화계는 이제 정말 타성에서 깨어 나야 한다. 좁디 좁은 우물에서 뛰쳐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아야 할 때다.

<돈>은 눈이 없다. <돈>은 가치중립적이라 그만큼 맹목적이고 때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서운 결과로 이끌기도 한다. 한국영화가 흥행을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주가 되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특히 한국의 유명감독, 유명배우들은 더욱 그러면 안된다. 돈을 벌어가도 좀 세련된 방식으로 벌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들도 좋고 한국 사회에도 좋은 윈윈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안 그러면 결국에는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서 작품성은 고사하고 흥행조차도 건질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릴 것이다.

<공공의 적>을 대중 앞에 내놓을 때, 강우석 감독이 직접 TV에 나와 “그런 악마 같은 놈은 죽인다. 내가 영화에서라도 반드시 죽이고야 만다”는 자신에 대한 변호성 발언까지 해야 했음은 강감독 스스로도 그 영화를 만들어 사회에 유포하면서 내심 얼마나 게름칙하게 여겼으리라는 점을 여실히 반증한다. 이런 변호성 발언은 <악마를 보았다>를 만들어 사회에 배포하기로 의기투합 되었던, 세 인물 즉 김지운, 최민식, 이병헌의 인터뷰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다. <악마를 보았다>가 얼마나 잔혹한 표현이 나오는 지는 동일한 시기에 원빈을 주연으로 개봉된 <아저씨, 2010, 이정범>의 잔혹성은 차라리 미학의 경지라는 평이 나올 정도다. 이렇게 2010년의 여름방학-휴가철은 충무로가 내놓은 두 <복수>영화로 얼룩졌다.

진정한 문제는 이런 소재와 잔혹한 표현을 무기로 한 영화들이 흥행에서 실패를 맛보며 시들어 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연속되는 흥행성공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왔다는 점이다. 물론 임순례 감독의 <집으로><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나 심형래 감독의 <디워>같이 수준 높은 가족영화, 그리고 저예산 영화로 대박흥행을 했던 <워낭소리>같은 고감도의 영화들이 간혹 대중에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타고난 연출력(임순례)이나 최고의 IT 기술력의 구축(영구아트)과 경이로울 정도의 집념(심형래)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보통의 감독들은 누구나 꿈은 꿀 수 있을지언정, 막상 실현하려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디워 논란 때, 즉 그 시점 2007년 8월 후반 무렵 필자가 한국 영화 역사상 최악의 영화로 꼽았던 <공공의 적>이 한국 영화판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고 만 것은 그 감독이 한국의 대표적 흥행감독이라는 위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임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 영화판에서 감독이 살아 남고 명성과 돈을 양손에 쥘 수 있는 카드는 <흥행보증수표>감독이라는 말임은 한국 관객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듣기 좋은 예술성, 작품성은 먼 과거의 일이다. 흥행에 성공해야만 차기작에 대한 투자도 쉽게 해결된다. 단순히 재미로 보면서 즐길 자유를 누리는 일반인들보다 ‘흥행‘이라는 과도한 압박에 짓눌려 살아가는 감독들과 기획사들이 이런 손쉬운 롤 모델을 보고 유혹당하지 않고 쉽게 지나칠 수 없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와 선정적인 영화의 퇴장

특히 오랜 역사 동안, 잔혹 폭력성과 함께 표현의 자유의 논란에서 한 축을 당담해 왔던 고감도 에로 영화들의 퇴장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인터넷 동영상물의 범람으로 <애마부인><뽕><변강쇠><젖소부인 바람났네> 등의 에로영화들이 흥행의 여지조차 사라져 버렸다. 이를 감안할 때, 남은 한 쪽, 즉 잔혹 폭력성에로의 관심이 경도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쏠림현상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에 미치는 피해가 훨씬 심각한 잔혹한 폭력성을 매개로 한 영화가 70억원이라는 거대 자본의 컴컴한 외투를 걸치고 우리 앞에 닥쳐오는 일을 막상 한국 영화계에서 확인해야 하는 일이 소름 돋는다. 주류 감독에 주류 배우의 조합으로 이런 영화가 탄생하고 대규모의 개봉관을 확보하는 일은 그동안 한국의 주류 영화계가 얼마나 썩어 들어가고 있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한국영화계 들춰 보기

과거 중국 무술영화에서 보여 준 화려한 피아노 액션물이나 영웅본색 철혈쌍웅 등의 홍콩 르와르물 같이 한국 시장 이외에의 진출로 시장을 넓히는 일은 꿈조차 꾸지 못해 왔던 게 한국 영화판이다. 메이저리그의 박찬호, 최희섭, 추신수, 프로 골프의 박세리, 양용은 그리고 오랜 역사 동안 가히 불가능의 영역으로 생각해 왔던 수영의 박태환, 피겨의 김연아 등 스포츠 영역이나 여타 각종의 문화영역과는 달리 유독 한국 영화계는 심형래 감독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어느 누구도 세계 메이저 무대, 아니 아시아 무대에 조차 진출을 모색하는 사람이 없었다. 불가능의 영역이라 생각했는지 그 흉내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홍콩 느와르의 거장 오우삼(Jhon Woo,吳宇森)이 헐리웃에 진출하여 <페이스 오프(Face/off,1997)> 및 <미션 임파셔블 2:Mission: Impossible II, 2000>로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중국계 미국인인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의 흥행과 아카데미 석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색계(色,誡,2007) 처럼 가히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으로 아시아 시장이라도 석권해 보려는 감독이 한국 영화계에는 없었다. 해마다 설 추석 때면 성룡 이연걸 주성치, 주윤발, 장국영 영화 등이 한국 스크린을 점령해 오던 일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일본만 해도 <러브레터> 미야쟈키 하야오 감독의 <쎈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이 한국 영화시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심지어 영화 변방국으로 알려진 태국조차도 프라챠 핀카엡 감독의 옹박(Ong-Bak, Muay Thai Warrior, 2003)로 전세계 영화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옹박은 시리즈물로 무려 3편 까지 성공했다.

체념 속에 잠자고 있는 한국 영화인들

사실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라고 일갈했던 심형래 감독의 말이 맞았다. 꺼꾸로 한국 영화가 홍콩, 일본,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라도 영화가 흥행된 적이 있었던가? 아니 흥행하려고 시도한 감독이라도 있었던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한 여러 아시아권 감독들과 비교해 보면 충무로 출신 감독들은 능력 뿐만 아니라 그 노력조차도 심히 부족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국영화는 해외시장에서는 안돼!" 이런 고정관념과 자학과 체념의 틀을 깨고 헐리웃 시장에 나서려고 시도 했던 유일한 인물인 심형래 감독의 시도에 한국 영화계는 어떻게 대했던가? 격려는 커녕, 입에 담지도 못할 모진 비난과 노골적인 방해까지 일삼었던 게 한국 영화계의 일그러진 역사다. 어느 무식하고 야비한 인간이 영화평론가라는 탈을 쓰고 나와서 디워를 노골적으로 헐뜯기 위해 " 만난 지 얼마 안돼 키스한다!" 라는 악평도 사실은 <디워>의 주제나 줄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직은 <티>에 불과했다. 바닷가 석양을 배경으로 3~4 초 정도의 극히 짧은 시간 밖에 나오지 않았던 부분으로 이는 편집 과정에서 삭제되었어도 무방했다. <트랜스 포머1>에서 맨 끝에 뜬금없이 단지 눈요기감으로 몇초간 보여준 메간폭스와 남자 주인공간의 베드신처럼 처리되거나 영화가 끝난 후 메이킹 필름으로나 보여 줬어도 될 부분이었음은 <디워>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디워>와 <화려한 휴가>: 미래와 과거

다 알다시피 <디워,2007.7>는 세계적인 IT 기술력을 갖고 있었던 한국이 신기술을 접목시켜 만든 판타지 오락영화다. 때문에 큰 사건과 싸움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출해 내느냐가 중요하지 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처리되어야만 성공을 보장받는 로맨스 멜러 영화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이란 해괴한 영화평론가는 극도로 사소한 <옥의 티>를 들고 와서 전체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악질 수법을 썼고, 무수한 악플러들은 철학과 안목과 지식,그리고 소양조차 부족한 그의 교묘한 말빨에 옳타구나! 하면서 덩달아 비난에 열을 올렸다. 이런 무수한 악플러들이 과연 < 디워>가 바로 대선을 목전에 두고 <화려한 휴가,2007.7>와 함께 개봉되지 않았어도 그런 난장을 저질렀을까를 생각하면 한국 사회가 얼마 만큼이나 정치에 미쳐 병들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정치에 이렇게 미쳐 있는 한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발전은 그만큼 뒤쳐질 수 밖에 없다. <화려한 휴가>는 1~2년 늦게 개봉되어도 큰 문제가 없지만 <디워>같이 첨단 기술력에 기반한 영화는 개봉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면 그 피해가 말 할 수 없이 심각하다는 것 쯤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설마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시장을 점령해가는 시기에 3D로 영상혁명을 일으킨 <아바타,2010>가 1년 후에 개봉하고도 그만큼의 흥행에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명백히 과거를 지향하는 <화려한 휴가>와 미래를 향한 새장을 여는 <디 워>하고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가 자문해 볼 일이다. "<화려한 휴가>를 500만 명만 보면 대선은 끝났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지만 무려 750 만 명이 넘게 관람하고도 그해의 대선 결과는 이 말을 비웃었다.

실제로 필자는 <디워>와 <화려한 휴가> 둘 다 1000만 명을 넘어서거나 최소한 그에 육박하기를 바랬다. 이는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에게 보낸 글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화려한 휴가>는 과거를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 <디워>는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위해서 둘 다 중요하다고 한 내용이다. <디워>를 지지하는 팬들이 <화려한 휴가>에 악플로 도배하는 일은 드물었다. 정작 TV 100 분 토론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화려한 휴가>를 대상으로 해야 했는데 이를 도외시하고 <디워>만 토론하고 그것도 노골적으로 비난으로 일관했다. <화려한 휴가>를 지지하기 위해서 <디워>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일이 정상적인 일인가? 행여 진중권이 이 일에 총대를 메었다고 해괴한 변호성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나는 이를 믿지 않는다. 아니 도저히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숨을 쉬고 또 돈까지 벌어 먹고 사는 유명인으로서, 하고 많은 일 중에서 하필이면 그런 일에 스스로 총대를 매고 나서는 인간이라면, 그가 지식인의 탈을 쓰고 청부업이나 하는 조직 폭력배지 어찌 정상적인 사회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문화평론가의 완장을 차고 이런 일을 자청해서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디워> 그 후 3 년...

그렇게 욕을 먹었던 <디워>의 출품 이후, 가히 3 년이 더 흘렀건만, 한국에서 과연 <디워>에 견줄 만한 영화가 나왔는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과도한 CG의 남발로 영화를 망쳤다는 평을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있다면,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개봉된 영화 <러블리 본즈, The Lovely Bones,2009>를 보기를 권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킹콩><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의 작품이다. 또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 2009, 크리스 컬럼버스>은 어떤가? 놀랍게도 그는 <해리포터와 아즈테반의 죄수><박물관이 살아 있다1,2>를 출품한 감독이다.

과연 이런 세계적 거장들이 발표한 최근 작품들이 한국의 심형래감독이 출품한 <디워>보다 작품성이 뛰어난 지 눈으로 직접 비교 확인해 보라. <디워>에 선보였던 CG 장면 중 작품의 구성과 주제에 긴밀하게 연관을 갖지 않은 것을 찾기가 훨씬 어렵다. 못 믿겠으면 DVD를 다시 돌려 보라! 이런 영화 에 CG의 남발이라는 해괴한 딱지를 붙이다니? 이 사람들이 정말 CG에 기반한 판타지 영화를 알고나 있는 사람들인가? CG의 남발은 <러블리 본즈>나 <퍼시잭슨과 번개도둑> 같은 영화에나 지적되어야 오히려 더 올바름을 금방 비교 확인 할 수 있다. 두 영화 다 세계적인 유명 감독들에게서 만들어지고 전 세계시장에서 대규모로 개봉된 영화인 점은 정말 흥미롭다.

닫힌 비상구

한국 영화계는 해외 시장에로의 진출이라는 외부로의 탈출구가 꽉 막힌 상황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가 다르게 증가해 가는 제작비에서 초래되는 내부적 압박까지 점점 질식해 왔으니 더 이상 돌파구가 없었다. 이를 생각하면 기어코 <악마를 보았다> 같은 사생아를 출생하고 자살의 길로 내달리는 일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3 년 전 2007년 8월 1일,한국이 갖춘 세계 최고 수준의 IT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CG로 우리가 열등감을 갖고 도전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던 홍콩의 와이어 액션까지 한순간에 뛰어 넘어 버린 영화 또한 <디-워>였다.<디워> 이후 중국 홍콩의 피아노 액션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한국 사극 드라마에서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멋진 액션이 나온다. CG 등의 기술력의 진보가 경쟁력을 날개로 달아 준 것이다. 그런데도 <디워>가 출품된 당시, 이를 한국 영화가 모색할 새로운 계기로 삼지 못했다. 시대의 변화에 눈을 뜨지 못하고 저질 평론이나 일삼으며 또는 한갓 저질 정치 논리에 빠져 이런 귀중한 기회를 걷어차 버린 한국 평론가들의 책임도 너무나 크다. 필자가 <디워>를 관람하고 난 후 한국 영화는 <디워>이전의 영화와 <디워>이후의 영화로 나누게 될 것이라고 확언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 에너지를 정치 부분에다 소진해버린 까닭에 그 중요한 <디워>시대에 폭발했던 에너지를 올바르게 사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아바타>같은 3D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모멘트나 계기 조차 잊어 버렸다.

너무나 정치색을 강하게 풍겨서 공영방송인지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한 정당(政黨)인지조차 헷갈리게 하는 MBC는 그 때 과연 무슨 짓을 했던가? <디워>에 노골적인 테러를 가한 일에 대해서 관련자들은 양심에 기대어 심하게 반성해야 한다. TV 100분 토론은 한국 사회에 심각한 폐해를 끼칠 이런 잔혹 폭력 영화들의 범람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사회 심리 영상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공개 토론을 해야 오히려 마땅하다. 앞으로도 잔혹한 복수극이 몇 편이나 더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시나리오 기획 자본과 배급 또한 이런 잔혹영화 부류에 편중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 영화의 현실이 이렇게 처참해졌다. 일본 영화의 전철을 밟으며 추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영화 평론가 집단의 소양 부족도 심각한 문제다.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상관관계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가? 문화예술에 관련해서는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제한이 없고 어떤 식의 표현방식이라도 동원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하지만 마냥 좋을 것만 같지만 이는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 동전의 뒷면에는 곧 어떤 방식이든지 상관없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저질 경쟁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위험성까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의 논리인 상업성이 판치는 현대 사회에 와서는 무엇보다 대중의 시선을 잡기 위한 저질 경쟁의 남발로 문화예술계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시켜 버리기 십상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가까운 나라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의 변천사를 한국과 비교해 보면 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羅生門: In the Woods, 1950),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 The Seven Samurai ,1954)으로 대표되는 시절의 일본 영화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황야의 7인( 1960년)에 리메이크 되는 등 무수한 헐리우드 영화가 이 영화의 기법을 그대로 차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찬란하던 일본 영화계가 이제는 세계에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초라해져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너무나 과도하게 풀어 놓았기 때문에 퇴락의 길로 걸어가고 만 것으로 분석한다. 이는 일본 드라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표현의 자유의 역설(逆說)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유혈낭자한 장면이나 신체의 일부가 멀리 떨어져 나가는 일은 예사다. 10 시 정도만 넘어가면 TV에서도 폭력과 선정적인 드라마가 판을 친다. 현재 일본 영화는 한국 홍콩 대만 태국 등의 아시아 주변국 수준보다도 훨씬 낮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한국 영화가 일본의 수준을 뛰어넘은 지는 매우 오래다. 특히 드라마 분야는 일본에 비해서 턱없을 정도로 소규모 자본을 투입하고도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압도적인 질적인 우수성을 확보했다. 이른 바 한류(韓流)시대를 열었다. 그나마 일본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미야쟈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城), 2004> 등의 애니매이션이 과연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리는 데서 온 결과물들인가? "오겡끼데스까?"라는 대사와 함께 한국인들의 감성까지 세심하게 터치하는 데 성공하면서 흔치 않은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러브 레터>도 영화인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 논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빼어난 작품이었다. 물론 <러브레터>같이 세련된 감성영화로 흥행에 성공하는 일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폭력 선정 잔혹 등의 강력하고 무자비한 무기를 사용하는 영화감독이 출품하는 영화로 흥행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그만큼 감독의 영화에 대한 철학 및 섬세하고 세련된 기술이 요구된다. 따라서 흥행을 위하여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하는 감독일수록 능력이 부족한 감독인 건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에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의 강도가 일본 보다 훨씬 심했다. 공중파 드라마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이런 환경에서 드라마 작가들은 잔혹이나 폭력 그리고 선정 불륜 등의 흥행을 얻기에 너무나 손쉬운 무기를 빼앗겨 버렸다. 따라서 질적인 완성이나 표현의 절제와 미학을 수반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낳을 수 있었던 게 한류 드라마들이었다. 즉 한류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나쁜 환경에 덜 노출되는 혜택을 받았다. 즉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 자체를 잘 받고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한류 드라마는 한국의 드라마 시장을 일본, 중국, 태국 등 가히 아시아 전역에 까지 시장을 넓혔고 또 그만한 한류 스타라는 강력한 문화 자산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그후 세월이 흘러 2010년 현재엔 표현의 자유가 과거 한류 드라마가 나올 시절보다 훨씬 많이 허용되고 있다. 과연 그 결과가 어떤가? 아침에도 불륜, 저녁에도 불륜이라 불리는 소위 <막장 드라마>가 한국 드라마의 대세를 형성하고 말았다. 배용준, 최지우, 박용하 등의 한류스타를 배출한 <겨울연가>, 이영애의 <대장금>, 가장 최근의 <꽃보다 남자> 등 한류로 성공한 걸작 드라마들 중 잔혹 폭력 선정 불륜 등의 해괴한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린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었던가?

예술을 위해서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 총론으로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서 표현의 자유를 맘껏 누리는 영화나 막장 드라마들보다 정작 이 자유를 덜 누린 작품일수록 수준높은 작품들이 많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이게 표현의 자유의 역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누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내겠는가?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각종 문화예술께 종사자들이 갖춘 적절한 철학과 소양의 기반하에 잘 활용하지 못하고, 단지 흥행을 위해 악취나는 오물을 들이대는 막장을 열어 제치기 위한 수단으로나 이용할 때는 그 문화계에는 암울한 미래만 노정되어 있을 뿐이다.

표현의 자유와 영화의 질(質)

표현의 자유의 역설은 특히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 흥행에 대한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영화계가 가장 심할 수 밖에 없다. 공중파라는 속성상 많은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드라마 보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가 너무나 넓은 영화계는 이 역설이 치명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강하다. 게다가 시청료나 광고료 등으로 대표되는 공적 속성이 강한 자본과는 달리 영화에 투입되는 사유 자본은 그 속성과 목적부터가 너무나 다르다. 드라마의 시청률 저하로 쪽박차는 사람들은 극소수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면 그 관련자들은 일시에 빚더미에 앉기 십상이다. 얼마 전 흥행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영화 감독이나 조감독들의 연이은 자살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소규모 자본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과거에는 이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요즘에는 표현의 자유란 게 오히려 독액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흥행을 위해서 표현의 자유를 악용해야 하는 유혹이 너무나 커지기 때문이다.

소재-주제(what or, for what)와 표현의 자유

특별히 소규모 저예산 영화에는 표현의 자유라는 게 너무나 중요하다. 이때의 표현의 자유는 주로 표현 방식(how)의 자유가 아니라 그 영화가 담고자 하는 소재(what) 또는'주제(for what)'에 관한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소외 받는 부류, 즉 이주 노동자들의 애환, 장애우들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 노숙자나 극빈자들의 생활, 동성애 등 철저한 사회적 약자나 비주류의 삶을 영상에 담아 후 사회의 시선을 재조명하게 하는 일에 적용된다. 박진규 감독이 70 세가 넘은 노인들의 성(性)과 삶을 주제로 출품한 저예산 영화 <죽어도 좋아>등이 그 예다. 1990년 대 후반에서 향후 10년을 거쳐 오면서 주제와 소재에 대한 금기는 거의 다 풀렸다. 잔혹한 사적인 복수(친절한 영자씨), 과거 역사에 대한 해석(화려한 휴가), 남북 이데올르기에 대한 냉전적 사고 탈피(태백산맥, 남부군, JSA, 웰컴투 동막골 등) 동성애(후회하지 않아, 서양골동양과자점앤티크), 노인들의 성(性)(죽어도 좋아, 박진규), 심지어는 친부살해(공공의 적),근친상간(올드보이)을 소재로 삼은 영화까지 출품되었다. 더 이상 어느 선까지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만 성에 찰 것인가? 사실 위의 이런 소재를 영화에서 다루는 일은 이슬람 등의 종교가 지배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르기가 강한 나라에서는 제재가 아니라 <살만 루시디> 처럼 목숨조차 걸어야 할 사항이다. 한국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이런 소재를 다루었다고 해서 그 감독이 위험 지경에 처할 일은 없었다. 소재나 주제의 자유로움은 거의 대부분 한국 문화예술계를 풍성하고 수준높게 하는 이바지할 수 있다. 사실 정치적으로 미묘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된 나라가 한국이었다. 이 점 마저도 1990년대 후반 이후는 거의 다 풀렸다. 문제는 그 방식에서의 표현의 자유다. 이 문제는 양면의 칼과 같다. 잘 쓰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풍미로운 요리를 제공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

표현방식(how)과 표현의 자유

<악마를....>에서 보여주는 잔혹함 같은 표현방식에 대해서 ‘표현의 자유’를 입에 담는 건 그만큼 철학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이 영화 제작과 광고에 돈이 많이 들어 갔다. 최소한 그 이상의 돈은 벌어야 하겠기에 좀 심하게 했다“ 라고 말하는 게 더 정직하다. 참을 수 없는 잔혹성을 그려낸 사람이 표현의 자유를 빙자하는 건 극히 위선적이다.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잔혹성을 일부러 표면에 내세워서 과거의 다른 영화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볼거리가 그만큼 많다는 고단수의 간접광고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겠다는 의도로 밖에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흥행에 대한 그 절박한 심정이 처절함을 넘어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다.

헐리웃 영화 중에도 잔혹성이 드러난 영화가 더러 있다고 하는 변명을 하는 데 그걸로 방패막이를 해 보려는 시도 또한 너무나 비겁하고 초라하다. 설사 그런 헐리우드 영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감독이 <놈.놈.놈>에서 송강호, 정우성, 이병헌 같은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배우들을 한 작품에 출연시킬 만큼한 나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절대 아니다. 초절정 인기배우 3명을 한 영화에 섭외할려면 그 뒷배경, 즉 기획사나 투자사, 그리고 배급사 등 얼마나 좋은 입장에 있을 것이라는 건 상상가능하다. 외국에서 그 정도의 파워와 유명세를 가진 감독이라면 <드림웍스>의 스필버그 정도급이라서 <악마를 보았다> 같은 3류 저질 시나리오는 거뜰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쏘우>의 감독 제임스 왕도 <놈.놈.놈> 이후의 김지운 감독이 가진 위상만큼이나 유명도와 영향력을 가진 감독이 아니었다. 이미 최고의 감독 대열에 있던 김지운 감독이 악마의 유혹에 굴복해서 추락하고만 영화가 <악마를 보았다>임은 확실하다. 이 영화가 작품성보다는 잔혹성을 흥행을 위한 노골적인 무기로 삼고 있음은 제목, 포스터 디자인, 그 후의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인터뷰 등의 마케팅 전략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아무리 섬짓한 폭력을 행사하는 악마적 인간이 나타나는 영화라 할지라도 가령 '아저씨' '추적자''집행자' '공공의 적' 등으로 은유적인 제목을 달지 이 영화처럼 노골적으로 '악마'라는 용어 자체가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지운, 최민식, 이병헌 등 이 세 유명인의 인터뷰를 보면 더욱 가관이다.

둘째 외국에서 한국의 최민식, 이병헌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유명 배우가 <악마를 보았다> 같은 그런 3류 영화 따위에 출연하든가? 한국에서 잔혹한 표현법을 예로 들 때, 자주 인용되고 있고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추격자, 2008, 나홍진>의 경우를 보라. 그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신인남우상을 거머 쥐었던 하정우가 그 영화 이전에 그만큼 유명배우였던가? <추격자> 이전에는 한국인들 대부분은 솔직히 하정우라는 배우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추격자에 형사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김윤식도 지명도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신인급이 화려하게 대배우로 등장하는 영화는 대개 작품성이 높다. 스타라는 큰 흥행요소가 배제 되었기에 질적인 승부를 할 수 밖에 없다.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잔혹 폭력물에 김지운 같은 유명감독과 최민식 이병헌 같은 대배우들이 작당하고 달려 든 형태는 한국 영화판의 질적인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1135 구조다. 1류 감독과 1류 배우들이 모여 3류 영화를 찍어내는 나라. 나아가 그런 부끄럽고 사회에 심히 위험한 영화를 580개가 넘는 스크린을 독점하며 개봉하는 나라. 이게 대한민국 영화계, 즉 충무로의 현주소다. 이 분들은 한국 영화계에서 차지하고 위상에 걸맞는 철학은 커녕 당연히 가져야 할 책임의식조차 찾기 힘들다. 영화인의 명예는 영화인들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감독은 영혼이 없이 영화 대신 돈 찍어내는 기계고 배우는 스스로 가장 안 좋은 의미로 비하할 때나 쓰이는'광대' '딴따라'라고 생각하며 사는 게 속편하다고 자조하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딱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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