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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박진감과 세련미가 넘치는 영화 '놈놈놈'


황야(荒野)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무대는 허허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황야다. 욕망의 공간으로 치면 골드 러시로 표현되는 헐리우드식 서부고, 이념이나 정치적 공간으로 보면 무정부주의적이고 탈이념적인 만주다. 비록 시대적 배경은 근대지만 굳이 문예사조나 이념의 지점으로 보면 근대라기보다는 탈(脫)근대 즉 포스트 모더니즘적이고 탈이념적이다. 욕망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끝없이 달리지만 의식은 멈춰진 열차처럼 정지된 공간이다. 영화 '놈놈놈'에는 무겁고 불편해서 거북하고 버겁기보다는, 가볍지만 상쾌하고 의미심장한 김지운 감독 특유의 영상화법이 돋보인다. 몇 군데 옥에 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세련미가 돋보인다. 탈 이념적 성향은 극중 윤태구(송강호 분)가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 놈 밑에 사나 양반치하에서 사나 그게 그거지 뭐“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김지운의 ’놈놈놈’은 한국판 웨스턴의 전형을 제대로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황야(荒野)라는 배경만 그런 게 아니다. 내용도 전형적인 서부영화다. 서부영화에서 황금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만주벌판에서 보물지도로 인생역전을 꾀하려는 ‘놈놈놈’의 욕망은 동일하다. 황야는 법보다는 주먹이 앞서고 지성이나 제도 같은 문명사회의 양식보다는 본능과 개인기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앞서 달리는 공간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2007)

코엔 형제가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을 위한‘)에도 황야(荒野)가 나온다. 수풀이 없이 맨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황야는 꼭 실오라기 한 점 없이 알몸처럼 드러낸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다만 ’놈놈놈’과는 달리 ’노인을 위한‘에서의 황야는 좀 더 근원적이지만 일시적이고 허무한 내음이 흩날린다. 둘 다 ’200만 달러‘ 또는 ’보물지도‘ 같은 물신주의가 영화를 이끌어 가는 가장 큰 모티브라는 점도 비슷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영화 ’노인을 위한‘은 필자에게 오랫동안 영화평론을 쓰는 데 회의를 들게 했던 영화다. 아니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영화에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가 막혔고 ’내가 영화평론을 왜 써야 하나' 라는 회의를 들게 했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물론 원작 소설은 훨씬 나았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특이한 헤어스타일의 주인공이자 살인마인 안톤의 걸음걸이만큼이나 느릿느릿한 추보식 구성에다 어린애 키 정도 크기의 빛바랜 벽시계를 바라보는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코엔 형제 감독의 지나친 의욕에 비해서 그들의 영상화법이 훨씬 뒤쳐져 있음은 확실하다. 2시간 2분이나 할애하고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달하는 데 실패한 이 코엔 형제 감독에게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안겨준 아카데미 심사위원회는 정말 반성 많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라도 그렇게 좋다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저렇게 좋은 배우들을 쓴다면, '노인을 위한'을 제법 좋게 평해 놓은 리뷰 속에 나온 주제의식 정도는 훨씬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단도입적으로 말하면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은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은 ’노인을 위한’ 보다는 훨씬 빼어나다. 칸 영화제에서의 기립박수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영화 ‘크로싱(김태균 감독)’ 처럼 특별하게 코를 찡하게 하는 울림은 적다. 하지만 적어도 ‘놈놈놈’에는 ‘노인을 위한’에는 없는 스피드와 스릴, 그리고 풍성한 볼거리와 오락적 성찬(盛饌)이 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이는 장터로 치면 그중에서도 가장 왁자지껄한 남사당패의 풍물과 가락이 ’놈놈놈‘에는 확실히 있다. 배경음악도 없는 영화 ’노인을 위한‘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게 그나마 ’느림의 미학‘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었을 ’여운’이랄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운이 주는 파장마저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놈놈놈’은 몹시 스피디하게 전개되지만 그 중에서도 ‘여유‘와 ’세련됨’을 갖춘 몇 안 되는 영화다. 물론 김지운 감독의 세련됨은 헐리우드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린 공포영화 ‘장화, 홍련 (A Tale Of Two Sisters, 2003)’ 에서도 익히 확인한 바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자마자 필자는 이 영화평에 대한 부제를 즉각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영화’라고 잡았었다. 이 표현처럼 한마디로 느리고 지루하다. 이 영화에 아카데미가 감독상을 준 일에 대해서 전세계 영화평론가들이 흔히 하는 말인 ‘헐리우드는 유독 코엔 형제에게는 왜 이토록 관대한가?‘라는 비아냥 섞인 푸념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오히려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의 직무유기나 배임행위에 가깝다. 이에 반하면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은 ‘아날로그시대의 배경물을 디지털로 그린 수작‘이다. 매우 스피디하며 깔끔하고 재미있다.

스토리

혹자들은 영화 ‘놈놈놈’에 스토리가 없기 때문에 별로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영상예술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특히 관객이 많이 몰리는 블록버스터 오락영화를 폄훼하려고 스토리 부실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는 건, 놀이공원에 가서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를 즐기려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에게 “스토리도 없는 걸 왜 탑니까?”를 설명하는 일 만큼 황당하다. 또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점검할 때, 그 내용이 20단어 내외로 짧게 요약될 수 있는 스토리여야 한다는 건 업계의 상식이다. 원작소설은 안 그랬을 터지만 그 소설을 모태로 삼았다고 하는 영화 ‘노인을 위한’ 조차도 별 스토리가 없다. 얼핏 제목만 보면 세대 간의 소통의 단절이나 세대문제, 또는 영국 작가 폴 윌리스(Paul Wallace)가 말한 에이지퀘이크(Agequake)로 칭해지는 고령화문제나 현대문명의 부조리를 심오하게 다루었을 직 하지만 전혀 아니다.

몇 군데 은유와 상징을 주려는 대목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건 감독의 의도를 빗나가고 있고, 그냥 안톤이나 모스라는 두 중년의 남자가 200만 달러라는 돈을 매개로 한 사람은 쫒고 또 한 사람은 쫒기는 줄거리가 대부분인 영화일 뿐이다. 이 두 중년남자 뒤에 한 경관(토미 리 존스 분)이 뒷치닥거리를 약간 하면서 이 영화에 의미를 가하려고 하지만 코엔 형제 감독의 역량부족으로 풍취가 별로 없는 양념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영화에서의 스토리의 중요성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이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영화 비평가들은 ‘백설공주’나 ‘미녀와 야수‘ 같이 뻔히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리메이크하고 또 상영된 영화도 리메이크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캐릭터

한동안 모든 오락프로 중에서 단연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아니 웬만한 드라마보다 훨씬 높은 시청률을 올렸던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성공은 그 스토리의 치밀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유재석, 정준하, 정형돈, 박명수, 노홍철, 하하 등의 독특한 캐릭터의 성공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화 ‘놈놈놈‘의 성공도 감독의 치밀한 안배에 따라 기획된 연출력뿐만 아니라 송강호, 정우성. 이병헌의 캐릭터가 큰 힘을 발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배역‘ 처럼 보이는 정우성은 멋진 캐릭터로서의 부각으로는 완벽하게 성공하고 있다. 필자가 한국 영화 옥에 티 ’중천‘에서 정우성이란 스타의 활용방식이 잘못된 점을 세세하게 지적한 대목을 참고해 보면 왜 중천이 실패했고 ’놈놈놈‘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지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유독 스토리로 영화를 판단하겠다는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지금은 SF형 특수효과의 성취로 더욱 휘황찬란한 볼거리와 가히 꿈의 형상화까지 가능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상기술의 혁명을 넘어 선 시대다. 이런 시대에 이런 편협한 시각을 고수하겠다는 건 스스로 인식의 한계를 넓히지 않고 우물 안의 개구리 식으로 제자리에만 머무르겠다는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 스토리가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예술장르는 소설이지 영화가 아니다. 선조들이 영화를 두고 특별히 그 움직임(活動)을 중시 여겨 활동사진 또는 활극(活劇)이라 명명한 점은 참으로 현명하다.

‘트랜스포머‘에서 왜 소년배우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는 여배우 메간 폭스를 캐스팅해서 또 그녀의 옷매무새조차도 노출이 매우 강한 섹시코드 캐릭터로 활용했는지 한국의 영화산업관계자들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는 분명히 이 영화의 주 관객층인 청소년들이 변형로봇에 대한 관심과 애착만큼이나 성적 호기심이 대단히 많은 시기임을 감안한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주 고객층이 소녀들이었다면 남자 주인공을 훨씬 잘 생긴 꽃미남으로 설정했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이들 모두 관객층인 청소년들의 무의식을 파고들기 위한 치밀한 마케팅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영화 ’트랜스포머’에는 영화 흐름과는 별 상관도 없지만, 그 호기심을 타깃으로 해서 가벼운 정도의 베드신까지 마지막 눈요기로 선사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이런 점에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이런 점까지’ 세세하게 신경 쓸 줄 알아야만 뛰어난 감독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수 백 억 원을 투자받고서도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어쩌니 하면서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음은 순수함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무지함이고 더 나아가 무책임함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뛰어난 상업영화를 제대로 만들고 이해할 수 있는 프로들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에는 스토리의 빈약을 카버하고도 남을 만한 다른 요소들이 얼마든지 많다. 꽃에 벌이 모이듯 보물지도에 온갖 인간 군상(群像)이 몰려드는 건 특별하게 긴 설명을 들일 필요가 없는 당연한 이치인데, 일본군이 출현한 일에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다는 일은 좀 억지스럽다. 물론 시장에서 보물지도를 두고 한바탕 결투를 벌이고 난 후에,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처럼 시장 사람들이나 술집에서 보물지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수군대는 대목을 한 컷 정도 넣어서 이 보물지도가 세상에 다 알려져 버렸음을 보여주었다면 마지막 군상들의 출현이 좀 더 자연스러웠겠지만 영화 속의 그 정도로도 나름 충분했다.

페르소나

정우성을 김지운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영화 밖의 모습일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영화에서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윤태구(송강호분)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극중 윤태구는 거창하게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거나 그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을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불운한 시대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한국 민중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부랑아라고 해야 마땅한 그에게도 철칙은 있다. 그건 그가 비록 말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뚜렷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신사도(Gentlemanship)다. 즉 어떤 경우에도 연약한 여자와 어린이는 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건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든 상관없다. 여태까지 무수한 한국 영화를 보아 왔지만, 이 영화처럼 이 점을 멋지게 대비시킨 영화는 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윤태구가 열차 칸에 올라서자마자 좌석에 앉은 한 남자에게는 지체 없이 총을 발사한다. 하지만 그 이후 보물지도를 담은 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부닥친 여자에게는 절대로 총을 쏘지 않는다. 어쩌다 여자 침실에 뛰어드는 신에서는 이 점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때 여자가 변태라면서 베게로 자신을 아무리 사정없이 후려쳐도 그 여자에게 총으로 발사 또는 위협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나중에 폭소장면으로 유명한 똥꼬신에서도 두 아이들에게 짐짓 ‘눈감아!’라는 말을 하는 헐리우드식 여유를 부리고 나서야 결행한다.


보통의 한국영화의 방식이라면 일단 처치한 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거나 또 그 일을 감행하고 나서 새파랗게 질려있을 아이들을 품에 안아 감싸면서 달래는 순서였을 것이다. 이 점은 두 말할 필요 없이 김지운 감독의 ‘세련됨’에서 나오는 힘이다. 이 여유는 윤태구가 총알 속으로 달려들 때, '곧장 달릴까 지그재그로 달릴까' 하는 말로 웃기는 여유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이들에게 ‘눈감아‘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의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도저히 호흡될 수 없는 매너이자 세련됨이다. 사실 이 몇 장면만으로도 관객에게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여유라면 필자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앞으로도 한국 영화에서 이런 종류의 여유를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덧붙여서 최근 촛불집회에서 베이비 실드(Baby Shield : 어린이 방패)를 전략으로 이용한 진짜 ’이상한 사람들‘과 이를 공개적으로 두둔한 이상한 사제인 김인국 신부는 이 영화의 ‘이상한 놈’ 윤태구에게서 큰 가르침을 받아야 할 듯하다.

음악

더운 여름의 시원한 청량제 같은 영화 ‘놈놈놈’에서 음악과 효과음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의 맛은 진하다. 대역 없이 직접 했다는 배우들의 액션도 싸나이들의 냄새를 품기지만 어찌 보면 충실한 사운드 트랙과 효과음 때문에 마치 원액을 마시는 듯 진한 느낌을 선사하다. 이는 나중에 DVD로 보면서 볼륨을 끄고 보면 확연히 체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스토리를 중시하는 소설과 스토리 충실도 이외의 요소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영화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배경음악과 음향효과의 유무가 아닐까 한다. 소설과 영화 모두 눈으로 보는 점은 같다. 하지만 독자는 활자만 평면적으로 읽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대사 뿐 아니라 연기자의 동작이나 표정에 까지 세세하게 감응한다. 여기에 배경음악과 음향효과라는 오디오적 특성은 소설과 영화를 더 확실하게 구분 짓는다. 감각하는 기관들의 공감각적 효과로 그 파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활자로 읽는 이무기와 영상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이무기를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다. 여기에 ‘쉬이익‘하는 특수음향효과까지 가미된다면 그 다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영화 ’놈놈놈‘에서 충실한 음을 제공하신 김경태, 달파란, 장영규 님 등께 힘찬 박수를 보낸다.

명예욕

역시 인간의 욕망에서 가장 끈질기고 치졸한 것이 명예욕이라든가? 신필이라는 김용(金庸)의 소설 ‘소오강호‘에서 화산파 장문인 악불군은 무림맹주라는 세속적 명예를 위해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다 파멸해 간다. 아마도 헛된 명예욕은 인간의 다른 욕망보다 훨씬 큰 대가와 주변의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 같다. 영화 ’놈놈놈‘에서 ‘나쁜 놈’에 걸맞게 나오는 역이 박창이(이병헌분)다. 그의 만주, 아니 대륙 제 1인자를 향한 욕망 아닌 집착은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창이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엄청난 거금까지 도로 내어 놓으면서 제 1인자라는 명예에 집착한다. 윤태구는 “그까짓 1등 니가 해라!”고 하지만 헛된 욕망의 포로인 박창이에게 그게 통할 리 없다.

위대한 선도자들

2007년 심형래 감독이 <디 워>로 한국 SF영화의 신기원을 활짝 열어 주었듯, 2008년에는 김지운 감독이 한국 웨스턴의 전형(典型)을 선보였다. 선도자의 길은 비록 외롭고 고단하고 불확실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특출한 분들이 그 길을 몸소 개척해서 그 결과물이 <디 워>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일정한 품질만 담보해 준다면 이에 대한 대중의 갈채와 환호는 지극히 당연하다. ‘놈놈놈’ 포스트를 처음 봤을 때, 어릴 적 TV로 보았던 영화가 생각났다. 찡그린 얼굴에 담배를 피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이었던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다. 영어 제목도 마지막만 ‘The Weird-이상한 놈’으로 조금 다를 뿐 비슷해서 그 아류려니 했다. 하지만 상영관에서 ‘놈놈놈’을 직접 보니 그 영화보다 훨씬 박진감 있고 재미있고 캐릭터도 제대로 살아 약동하고 있음에 만족이었다.

시네마 컨설팅

한국 웨스턴이라는 새 장르를 멋지게 구축한 영화 ‘놈놈놈’에게도 몇 개의 티가 보인다. 첫째, 오프닝 장면에서 보물지도를 전해라고 건네주는 장면은 조금 어색했다. 아주 귀한 물건을 전달해달라고 할 때면 으레 가방 속에 넣고서 “자네는 가방만 전해주면 되네!”라고 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 보물지도라는 정보를 다 밝히면서 전해달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고. 그 가방 안에 든 물건이 보물지도임은 점차 밝혀지는 게 더 자연스럽고 호기심도 자극한다. 또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주 특이한 보물이 나왔을 때, 살아남은 윤태구의 반응이 나름대로 표현되었으면 했다. 세째, 박창이, 윤태구, 박도원이 만주로 오기 전의 유년기가 스쳐가는 흑백필름 양식으로라도 나왔으면 했다. 이 세 사람의 유년기가 곽경택 감독의 ‘친구’처럼 세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연관이 되어 있어도 좋고,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독립적이어도 좋다. 그리고 그 관계를 관객만 알게 하고 정작 세 인물은 마지막 단계의 결정적 순간까지 모르게 하는 것도 좋다.

예를 들면 임권택 감독의 활극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김동휘가 서로 적이되어 싸워야 하는 처지지만, 어린 시절 함께 국수를 먹고 돈도 안내고 도망쳤던 적이 있다. 이런 유년기의 에피소드가 아쉬웠다. 특별히 필자는 이런 구성을 '시간의 부채살같은 접힘 효과'라고 부른다. 이랬다면 극중 시간이 부채살처럼 펼쳐지고 접혀지곤 하는 효과로 인해 스토리의 부실 같은 아쉬운 비평도 훨씬 적어졌을 것이다. 특히 박창이(이병헌분)가 폭우 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을 깰 때, 그 이유가 어릴 적의 학대당한 일이라든지 하는 류의 에피소드가 악몽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병헌의 캐릭터도 더 잘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에 조금 아쉽다. 다만 과거의 에피소드들을 삽입하면서 이데올르기 색채까지 들어와서 영화가 다소 촌스러워진다면 안하는 것만 못할 수도 있으므로 지극히 조심스럽게 채색해야 할 필요는 있다. 김휘영/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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