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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요정 김연아

日 언론, "김연아는 강했다!" 2006년 12월 18일, 미모의 아나운서 박혜진씨의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김연아 선수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MBC 뉴스의 헤드라인이다. 이 시원한 동영상 뉴스는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의 김연아를 보면서 일본 언론들이 칭찬하는 꼭지들로 짜여 있다. 일본 언론들은 김연아 선수가 강한 근성과 냉정함을 지녔다고 인정한 반면, 미라클 마오라는 애칭을 가진 일본의 히어로는 강한 마음이 부족했다고 냉정하게 자평했다. 여기에 "내가 우승한 것은 아사다 마오가 실수했기 때문" 이라는 김연아의 말을 전하면서, 일본 언론들은 김연아에게 냉정함에 겸허함까지 갖춘 선수라고 칭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대목을 보면서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일본의 문화를 또 한 번 확인했다. 한국 언론이라면 어땠을까? 김연아 선수가 빙판에서 엉덩방아를 찍어서 금메달을 놓쳤다면 한결같이 ‘아깝다! 김연아’ '사소한 실수로 우승을 일본인에게 넘겨줬다'고 아쉬움을 타전하는 내용으로 뉴스를 구성했을 것이다.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이 동영상 뉴스 끄트머리에 나오는 일본 전문가의 냉정한 평가다.

전문가

그는 아사다 마오의 실수를 아쉬워하거나 두둔하는 대신, 냉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꼭 필요한 순간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기술은 진정한 실력이 아니다" 일본 피겨연맹 위원장의 이 한 마디가 패인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고 일본 언론들이 언급하고 있음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MBC 동영상 뉴스도 끝을 맺는다. 이 뉴스에서 보듯이 이웃 일본인들은 승부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가 그들의 바램에 미흡해도 언제나 그 결과에 승복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칭찬까지 해주는 부러운 문화를 갖고 있음을 확인한다. 더 나아가 자기편의 실수를 사소한 실수라느니 하면서 감정에 솔깃하게 감싸지 않는다. 아니 냉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패인을 분석한다. 물론 이런 문화는 비록 지금은 완패했음을 인정하지만 절치부심 노력해서 다음 기회에는 꼭 승리하겠다는 의지의 또 다른 표현으로 봐도 좋다.

또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2006년부터 아사다 마오 등 일본 선수가 부진한 경기에서는 한국인 공작원이 몰래 약물을 들여와 일본 선수에게 복용하게 했다'는 소문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태도다. 한국에서라면 일부러 이 정도에서 끝내거나 이 황당한 의문을 더욱 부풀리는 형식으로 반일감정을 더 부채질 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들의 감정에 편승해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산케이 신문 국제부에 근무하는 사사키 마사아키 기자는 “이와 관련된 기사나 보도는 모두 네티즌에 의해 조작된 가짜 정보이므로 스포츠 행사를 끝내 민족적인 감정에서 바라보아야 속이 시원해지는 극단적인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 고 충고하면서 대중의 인기보다는 올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선택하고 있다. 이 기사를 두고 편협한 민족감정의 입장에서 비뚤어지게 재해석한 한국 기자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이만기와 무르팍

과거 씨름판을 호령했던 천하장사 출신인 이만기 인하대 교수는 후배 강호동이 주 MC로 활약하는 무르팍 도사에 나와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씨름의 인기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씨름은 영원히 사랑받는 스포츠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씨름만큼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스포츠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요지의 발언이다. 이(李)교수는 구체적으로 덧붙여 한국인들은 삼촌과 조카가 ‘가위 바위 보‘를 해도 첫 번 째에 진 조카가 대뜸, "삼촌, 삼 세 번이야, 삼 세 번" 한다. 이게 한국인의 정서다. 그리고 이 정서에 가장 잘 맞는 스포츠가 씨름이다. “라고 했다. 정확하게 보았다. 필자는 이 심리를 한국인들에 있어 독특한 ‘불복의 문화’ 라 하고 이에 관련한 한국인들의 심리를 ‘불복의 심리’라 명명하고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이하 자세한 건 곧 출간할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을 참조해 주기 바란다)

씨름과 스모

잘 알다시피 일본의 전통 스포츠로 최고의 위상을 가진 스모는 중요한 경기일수록 단 한 번의 시합으로 결정한다. 그런데 한국의 씨름은 준결승전, 결승전으로 올라갈수록 3판 2승, 5판 3승 이런 구조로 결정되는 정반대 방식이다. 한국인은 중요한 경기일수록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는 문화다. 반면에 일본인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모두 단 한 번에 결정되고 있으므로 오히려 중요한 경기일수록 단 한 번에 결정해야 한다는 문화다. 일본의 경우, 이런 문화는 스모에 국한되지 않는다.

후지쓰배 세계바둑대회

세계 바둑대회 중에서 일본에서 주최하는 후지쓰배는 특이하다. 한국인들에게는 2008년 7월 7일 이창호 9단이 중국의 구리 9단에게 지기 전까지,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등의 한국 선수들이 독점하면서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정상을 다른 나라에 허락하지 않았던 점이 특별히 자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특이한 점은 다른 세계 대회와는 전혀 다르게 후지쓰배의 결승은 단판승부라는 점이다. 이 대회의 후원사는 후지쯔(주)일본항공인데 이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대회 결승전을 한국의 LG배나 중국의 잉창치(應昌期)배 처럼 5판 3승으로 한다면 티비 뉴스와 신문기사에 노출되는 빈도수가 몇 곱절이나 높아지고 그로 인한 광고효과가 엄청나리란 점은 상식이다. 이러함에도 이 후원사는 그 막대한 무료 광고효과를 다 물리치고 단 한 번에 결정되는 방식을 첫 회부터 현재의 21회 까지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주최 측에서 언제라도 바꿀 수 있음에도 그렇다. 우승 상금이 무려 ‘1천 500만 엔‘인데 5판 3승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결정됨을 고려하면, 상금으로 따져 이보다 순도 높은 바둑 시합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이승엽이 활동하고 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회장이 2007년 저팬 시리즈를 앞두고서 "이미 리그 우승을 했는데, 7전 4승제의 제팬 시리즈를 또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고 불편함을 드러낸 일화 또한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이런 문화의 맥락에서 읽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물론 중계방송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라는 미디어 상업주의가 점차 이런 일본의 고유한 문화를 이기고 점차 득세를 하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말 그대로 돈이 걸린 ‘프로‘야구 아닌가.

불복의 문화와 삼세번의 심리학

이 문화의 뿌리는 아마도 수 백 년 이상 지속된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게뮤샤’나 ‘자토이치’ 같은 일본영화를 보면, 사무라이들의 목숨을 건 결투는 단 한 번의 칼가름으로 끝난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단 한 합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현실 앞에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문화가 의식의 원형(元型)으로 형성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중요한 결전일수록 단 한 판에 결정되어야 오히려 합리적이고 또 정당하다는 일본의 이런 문화는 기업 활동에서 불량률을 줄이고 워커맨 같은 경소단박(輕小短薄)으로 대표되는 초정밀 전자산업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며 초일류기업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을 거로 생각한다. 또 이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라이벌 전에 대한 태도에서 보듯, 비록 아사다 마오가 실수를 했을지언정 깨끗하게 승복하고 오히려 상대 라이벌을 칭찬까지 해주는 매너 좋은 문화를 낳았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참으로 부러운 문화다. 단 한 번에 결정하는 문화 자체가 실상은 상대방의 ‘깨끗한 승복’이 없다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겠기에 하는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인들이 가진 삼 세 번에야 승복하겠다는 심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불복의 문화’를 부산물로 낳았다. 물론 불복의 심리가 먼저인지 삼세번의 문화가 먼저인지 그 전후 관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둘 사이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은 분명하다.

2차 대전 때 일본 천황이 미국에게 항복 선언을 한 후, 모든 일본인들이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정에 끈질기게 저항을 하기보다 헌법까지 고쳐 가면서 깨끗하게 승복한 일에 세계인들이 적잖게 놀랍다고 한다. 한국인들이었다면 비록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한다고 한들, 우리가 자랑스럽게 배우고 있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항쟁처럼 끈질기게 저항하며 버티는 민란군이 도처에서 일어났을 것임은 자명하다. 일본인들은 연합국에게 저항하는 대신 깨끗이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맥아더 사령부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경제 건설에 주력했다. 그 후 불과 몇 십 년 만에 세계 1류 국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불복과 거짓명분

‘모두 아니면 없다(All or Nothing)’ 이라는 한국의 대선 후보 결정의 역사도 깨끗한 승복보다는 더럽기 짝이 없는 불복으로 얼룩져 왔다. 한국의 정치사에 경선에 깨끗하게 승복한 예는 김영삼과 박근혜 뿐이라고 한다.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최고 엘리트층의 불복의 역사 또한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을 것임이 확실하다. 한국 근대사에서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가장 큰 악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김대중 전(前)대통령의 거듭된 대선 은퇴 번복은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불법 대북 송금을 하고서도 자기 입으로 특검을 거부한다고 주장한 일은 필부(匹夫)라도 하지 못할 낯 뜨겁고 유치한 짓이었음에 분명하다. 김대중의 경우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절대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음은 보통의 경우처럼 경선불복, 은퇴 번복으로 대중의 단죄를 받기는커녕, 그가 세속적으로는 더욱 더 출세하는 모습을 대중 앞에 시연(視演)해 주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일상에서의 불복의 심리학

한국인들의 결과에 대한 불복의 심리가 가장 적나라하게 일반인들의 생활 속에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대학입시제도다. 공정하게 주어진 기회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으로 고득점을 올려서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을 두고, 이 결과에 내심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달달달 암기만 잘하는 학생들'이라 너무나 손쉽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들도 달달달 암기를 잘해서라도 고득점을 받을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팽개치거나 거부하고 오히려 다른 학생들의 노력과 재능을 쉽게 폄하하는 방식을 취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암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일반적으로 지능지수가 높고 창의성도 뛰어나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불복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억지스러운 가짜 명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공정한 입시제도에서 고득점을 한 학생들은 그저 ‘달달달 암기만 잘하는 학생들’이란 말도 불복을 위한 일종의 그럴싸한 거짓 명분이다. ‘달달달 암기’이라고 쉽게 말하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일이 아님은 직접 해보거나 그들에게 시켜보면 단번에 안다.

기억은 상상력의 어머니

2007년 12월 21일 중앙일보는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가 발표한 '올해의 10대 과학'을 기사화 했는데, 그 9번째에 기억과 상상력에 관한 중대한 연구 성과가 나온다. 인간의 뇌, 그중에서 특히 창의력과 관계되는 해마 부위를 연구하던 중에, 기억과 창의력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규명해 낸 것이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가 상상력의 풍부한 학문과 예술의 여신 뮤즈(Muse)를 낳았다‘는 신화적 표현으로 이를 규명한 과학적 성과를 찬미했다. 기억과 상상력을 관장하는 중추는 같으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과거문제 뿐만 아니라 ‘미래를 구상하는 일‘조차도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음을 과학적으로 구명해냈다(참고 기사 '내가 무슨 병에 걸릴까' DNA는 알고 있다' ). 같은 지능지수일 경우 한 개라도 더 암기를 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창의적 사고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이치다. 필자는 이 기사가 나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십 수 년 전 우연하게도 창의적 사고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수학자들의 일생을 자세하게 묘사해 놓은 책을 읽고부터였다. 저자가 별 생각 없이 수학자들의 천재성을 재미삼아 나열해 놓은 그 책을 본 후, 필자는 그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인류 역사상 매우 뛰어난 수학자들 대부분이 가진 공통속성 중 하나가 암기와 암산에 대한 재능이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천재 수학자는 무려 1만 2 천 행이나 되는 베르질리우스의 시(詩)를 단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것도 라틴어로 암송할 줄 아는 특이한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는 학생들을 단순히 ’암기만 달달달 잘하는 사람이어서 창의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폄하하던 억지논리는 2007년에 드러난 과학적 연구 성과로 인해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이제 이들을 내심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하여간 한국의 대학입시제도는 삼세번의 원리를 반영하듯 수시입학과 정기시험, 그리고 논술까지 매우 다양한 방식을 만들어 놓고 사교육을 더욱 부채질하면서 오히려 수험생과 학부모는 더욱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촛불 시위와 불복의 심리학

이번 촛불시위를 보고 한국의 좌파세력들이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것을 승복하지 못하고 지난 10년 동안 획득한 그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강한 반발을 하고 있음이 그 원인이라는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분석은 참으로 설득력이 높고 정확한 분석이다. 사회지도층 사이에서는 더욱 더 깨끗한 승복을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이런 상황이 정말 이해할 수 없고 참으로 미개한 문화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의 웬만한 지식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법한 이 사실에 대해 필자도 십분 동의한다. 안 그렇다면 쇠고기 재협상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세세하게 밝히지 않은 채,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고 그 한계선도 없이 무조건 ‘재협상’만을 빈 구호로 내세워 온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또 그걸 빌미로 체육관 선거가 아닌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 압도적인 민의로 당선된 대통령 탄핵까지 요구하는 황당무계함은 절대로 설명할 길이 없다. 한마디로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너무나 추잡하고 비겁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지적해 두고 싶다. 필자가 이 일본 기사가 나오기 전 촛불시위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그 처음에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어플레이와 결과에 대한 승복이 없다면 민주주의가 설 땅은 없다.

불복심리와 민주주의, 그리고 국력 낭비

불복의 심리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나 그 부정적인 영향은 여기에 비할 데가 못된다. 무엇보다 불복의 심리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한다. 이점에서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한국이 1987년 민주화된 뒤, 20여년이 지났지만 대립하는 문제를 토론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폭력과 실력 행사에 호소하는 것은 민주화가 아직 정착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꼬집은 대목은 매우 타당하다. 게다가 불복과 그 불복을 정화시키는 과정에서, 다른 곳에서 더 생산적으로 활용되어야 할 사회전체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낭비되고 만다. 보통 역사는 민주적인 경선 절차나 공정한 경기에서의 불복행사는 승자 측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는 반면 패자 측에게는 더 비참한 나락으로 추락시키게 하는 결과로 귀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에너지 낭비와 출혈을 강요한다. 그 이유는 불복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권도 이를 일부러 방치하면서 국회등원을 미루면서 사태를 더 키워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식인의 경우

작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디워논쟁에서 진중권이라는 좀 덜 떨어진 논객의 행위를 목격한 적이 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억지논리를 내세우면서 이에 항의하는 대중에게 “돌머리들의 애국질‘이라는 막말까지 퍼부었다. 그러면서 “진중권에게 싸가지는 애초 기대하지도 않으니 논리라도 제대로 갖춰라!” 라며 반발하는 대중지성에게 짐짓 ‘이 진중권의 논리는 맞는데 싸가지가 없다’라는 거짓 레토릭까지 지어내며 애써 자신의 무식함을 감추고 모면해 보려는 사기술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케케묵은 골방에서 찾아낸 듣기에도 생소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진중권의 말대로 금과옥조 같은 진리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처럼 이미 대중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야만 그의 말이 타당성을 확보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중요한 걸 초중등 및 고등 교육과정에서 빠뜨리고 안 가르친 한국, 아니 전 세계 교육자들의 명백한 직무유기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카타르시스는 어느 누구나 잘 알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정확히 말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감정의 순화‘라는 카타르시스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 하위 범주다. 즉 예술작품을 접하는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만 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논리는 작품을 평가할 아무런 잣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네티즌의 지적대로, 판관 포청천에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죄인이 모든 증거가 드러나고서도 황족이라는 이유로 포청천과 공명 선생 그리고 억울한 피해자들을 비웃으면서 재판정을 유유히 빠져나갈 때, 청천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처형했다고 하자. 그런 극악무도한 범인을 하늘에서 심판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결말로 관객들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면 그건 매우 훌륭한 극(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단지 카타르시스라는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매우 지엽적인 것에 불과함을 인식이나 하고 있을까? 그의 내적한계로 볼 때 이런 지적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해 주지 않으면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카타르시스

실제로 이런 결말을 가진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가 최고의 오페라, 오페라 중의 오페라로 칭송받고 있는 까닭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론에 위배되었을지언정 예술의 최종 목적이랄 수 있는 카타르시스에 성공했기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영화 디워의 경우도 화려한 볼거리와 재미 그리고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주는데 성공한 영화였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SF 영화의 불모지인 아시아 영상 역사 전체를 둘러 보아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의의까지 가진 영화였다. 단지 진중권 류의 황당한 악다구니가 많은 잡음이 되어 제대로 관람하는 데 방해를 상당히 받긴 했지만 말이다. 잘 알다시피 진중권의 경우, 단 한 번도 자신의 패배를 승복한 적이 없다. 그의 뇌구조에는 억지, 거짓말, 비논리, 선동, 막말, 편을 갈라 기생하기 등을 관장하는 중추는 있을지언정, 민주 시민으로서의 매너, 페어플레이, 진리 탐구,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 같은 중추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승복의 효과

진중권은 이 와중에 소니(Sony) 제품이 좋으면 한국의 삼성, LG 제품 대신 그 제품을 써야 한다면서 기존의 스크린 쿼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형편없이 꾸겨야 했고(미디어 평론가 변희재씨 지적), 전혀 맞지도 않은 영상맹논리(문화평론가 윤종경씨 지적) ‘규모의 경제상 한국은 못합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시사용어에 대한 한량없는 무식함을 자랑하고,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 독일도 못한 일을 한국이 어떻게 합니까?“ 라는 식의 문화사대주의 근성까지 드러냈다. 마지막 발악으로 LA타임스 인터뷰 내용은 그의 저열한 양심의 밑바닥까지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가 논쟁의 초창기에 승복했다면 이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달으며 망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자신의 지식이 모자랐고 틀렸음을 끝까지 승복하지 않고 억지로 우기면서 버티다가 결국 그의 무식함이 온 누리에 드러나서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무수한 누리꾼들로부터 “학습능력이 모자라는 원숭이” “서울대 나온 돌대가리” “아이큐 두 자리 수에 불과한 저능아”라는 식의 평가를 스스로 한가슴 가득 얻었을 뿐이다. 대중에 의한 비난이 아니라 실제로는 대중으로 부터 연민을 자아나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승복은 민주주의적 기본양식임과 동시에 그 효과는 패자로 하여금 자신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기도 함을 잘 알 필요가 있다.

KBS 정연주 사장-새 술은 새 부대에!

전쟁이 발발하면 적군 아군에 관계없이 가장 먼저 쟁탈하고자 하는 곳이 방송국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10년 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충분히 그 기득권의 이익을 반영해 왔던 방송국은 반드시 바뀔 필요가 있다. 국민이 기존 정권에 진저리가 나서 새 정권을 창출했으니, 그동안의 정권에 충성했던 사람들은 자진 사퇴하는 것이 책임 있고 양식 있는 행동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그 공간과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하지 아니하고 광우병 같은 지엽적인 문제를 왜곡편집해서 국민들을 선동한 후, 그걸 방패막이로 활용하겠다는 심보는 매우 비겁하고 소인배적인 사고방식이다. 유권자들에게 고작 저런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중요 직책을 맡겼었나 하는 자괴감이 절로 들게 하는 행동이다. 특히 자기 자식의 이중국적 문제는 뒤로하고 그걸로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을 공격하면서 김대중 정권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한 KBS 정연주 사장은 더욱 그렇다. 자기 스스로 임기가 보장된 공채출신이 아니라 정치적인 낙하산이었던 것이다. KBS 사장인 정연주의 처신은 한국 사회에서 선비의 기개나 책임의식이 사라졌음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필자가 정연주의 입장에 있었다면 누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자진 사퇴했을 것이다. 속으로 “내가 물러나는 대신 당신들이 잘 해 주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잘못하면 나부터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라는 생각은 얼마든지 해도 정당하다. 하지만 결과에 승복하면서 새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책임감 있고 올바른 사고방식이 아닐까?

PD수첩은 왜곡 편파방송의 책임을 져야

또한 이번 광우병관련 보도에서 명백하게 왜곡편파적인 보도로 국민을 기만한 MBC PD 수첩진의 대응태도에 대한민국 국민은 너무 황당해서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것이 실수였다고 해도 너무 심각한 상황을 만들면서 국가 에너지를 낭비시켰다. 그들이 진정으로 PD수첩을 보호하고 싶다면, 일단 관련 책임자들의 자진 사퇴로 도마뱀꼬리를 자르는 전략이라도 써야 함이 정상이다. 그런 방식으로라도 본체인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을 지키려 해야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확장시켜 물귀신작전으로 방송국의 전 PD들로 하여금 성명서를 발표하게 하고, 또 미모의 아나운서인 손정은씨를 1인 시위에 나서도록 분위기를 조장해서 방패막이로 내세운 건 지극히 비겁한 행위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어른들의 이렇게도 무책임하고 비겁한 처세방식을 보고 배울까 심히 걱정스럽다.

한국처럼 이념차이로 노선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이 활동하는 나라에서 공영방송국에서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과 다른 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서 일마다 어깃장을 놓는다면 어떤 대통령인들 제대로 일을 하겠는가? 공영방송의 책임을 우습게 여기면서 굳이 그런 사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싶다면 공영방송국을 사퇴하고 나서 스스로 신문이나 방송국을 만들어서 하는 방법이 올바르다. 이런 상태를 지속하는 건 자신들을 속이고 주변을 속이면서 모든 국민에게 큰 피해를 줄 것이 명약관화하다. 하여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진 사퇴함이 사내대장부다운 처신임을 알기 바란다. 이제는 당신들이 물러나 주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이며 또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길이다.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삼세번의 원칙에 따른다 하더라도 대선과 총선의 패배 그리고 촛불시위에서도 모두 패했지 않은가? / 김휘영(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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