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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미학과 신화 전설의 부활, '디워'를 중심으로

이무기의 승천은 한국사회의 금기타파

왜 신화 전설인가?

해리포터와 시리즈에서 나오는 죽음의 개는 그리스 로마신화 중 헤라클레스가 12가지 난관을 극복하는 모험의 과정에서 나온 지옥의 개를 본 따왔고, 또 화장실에서 괴기스러운 모습에서 나오는 거대한 뱀(Serpent)은 자연스럽게 그리스 로마 신화 중 메두사를 떠올리게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영화 베오울프(Beowulf, 로버트 제메키스 감독)가 2007년 11월 중순에 전 세계적인 개봉을 앞두고 있다. 베오울프는 중세 유럽신화의 원형이자 대표격으로 위치하고 있는 신화전설이다. 2004년에는 니벨룽겐의 반지(울리히 에델 감독)가 선보였다. 2007년 8월 한국에서는 심형래감독에 의해 1000년에 걸친 선한 이무기와 악한 이무기의 투쟁을 그린 영화 <디 워>가 선보였다. 한국에서 영화 <디 워>를 850여 만 명이나 보았고, 미국 시장에서도 2070여개의 극장에 와이드 릴리즈로 개봉되었다. 또 반지의 제왕시리즈(총 3편)와 해리포터시리즈(총 5편 개봉), 도합 8편이 전 세계에서 초대박 흥행을 이어가고 있느니, 가히 전 세계 스크린을 신화와 전설이 점령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신화인가? 예전에도 신화 전설이 영화화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최근에 와서 스크린에서 유독 신화적 상상력이 많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컴퓨터 그래픽의 발전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쉽고 비슷한 예로 회화의 발전단계에서 안료를 담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튜브(tube)의 상용화는 인상파 화법을 낳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튜브의 발전 이전에는 화가가 밖에서 본 풍경을 스케치나 크로키로 그 골조만 담아 와서는, 화실에서 바같에서 본 느낌을 반추하면서 그려야 했다. 하지만 튜브의 등장으로 간편하게 안료를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있게 되자, 마네, 모네, 르노와르 등의 인상파 화가들은 야외에 나가 즉석에서 햇빛에 반짝거리는 나뭇잎의 모습 등에서 받은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캔버스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CG 기술의 발달은 영상미학에서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과거의 영화제작자들은 막대한 비용과 경비를 들여서 세트를 제작하고 모형을 만들고 또 오랜 시간의 분장 하는 등 매우 성가시고 비싼 대가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스럽고 허술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하면 CG 기술력의 발전은 시간과 비용의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고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신화의 나라, 그리스

신화 전설하면 그리스 로마신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늘 작은 섬 하나하나에 그 작은 암초에 부딪치는 물거품 하나에도 신화가 숨을 쉬는 나라, 그리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리스 남자들은 전부 다비드 상(像)에 나온 남자들처럼 근사하고 여자들은 그리스 여신처럼 우아할 것이라는 상상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리스 출신의 한 부부 바이어를 만나면서 이런 나의 상상은 일거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남자의 이름은 “차치아나 노스토우~ “ 하고도 매우 긴 이름이라 다 외우기에도 벅찬 이름이었는데 그분은 배가 남산만큼이나 나와 있어 다비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의 아내 되는 분은 이름도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상당히 아름답고 우아한 부인이었다.

신화의 그늘

매우 부자인 남편에 비해서 그 부인의 옷차림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수수하기 보다는 좀 남루하다고 하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였다. 또 회의 중에도 옆에 다소 곳이 앉아, 일체 말이 없었다. 영국,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네델란드, 태국 등에서 온 부부들과는 전혀 달랐다. 일을 마치고 롯데 호텔 가까이 있는 석촌 호수를 거닐 때, 여자 분이 뭐라고 하자, 남자 분이 음성을 높혀서 주의를 주었는데, 그때 그의 부인되는 분은 마치 조선시대의 여인처럼 얼어 붙었다고나 할까 하여간 움츠려드는 모습이었다.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개인적인 부부 사정이겠지 정도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색달랐다. 이에 대한 의문은 나중에 호주로 이민 간, 그리스 이민 2세 출신 여성 바이어를 만나 대화하면서 점차 풀리게 되었다. 코가 유난히 뾰족하고 높았던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의 남자들은 대부분 고리타분하고 권위적이고 매우 가부장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고 했다.

세계에서 몇 남지 않는 악습인 결혼 지참금을 남성이 당당히 요구하는 나라가 그리스(Greece)라는 말을 듣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아연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가 어떤 나라인가? 종교가 모든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 암흑기에 반기를 든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바로 그리스 로마시대로의 복귀였지 않은가? 이렇게 인류 역사를 변혁시키는 빛이 되었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가 21세기 오늘날은 마치 인도의 일부 지역에 남아 있는 결혼습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신부 측에서 지참금을 들고 시집을 가야 하는 문화 후진국이라니? 도저히 이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어서 필자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아무래도 그리스가 자랑하고 있는 신화(神話)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건 그리스 사람들이 가진 공동체적 무의식이 너무나 기다랗게 늘어진 신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거미가 된 아라크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특이하게 많이 등장하는 건 권위에 대한 도전과 좌절, 또는 터부를 어김에 대한 징벌구조다. 대표적인 예로 아라크네라는 처녀는 베를 아주 잘 짰는데 그 재주를 믿고 오만하게 굴다가 여신 아테네와 베를 짜는 내기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신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징벌을 맞는다. 그래서 아라크네는 자살을 하는데, 아테네는 그녀를 평생 베를 짜는 거미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신화 속의 신과 서사적 영웅, 또는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부분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특정한 금기사항(taboo)을 설정해 놓고 그 터부를 어길 시에는 숙명의 업(業)으로 불리울 만한 징벌이 따른다. 여신 아르테미스의 나신을 보았다는 이유로 과도한 징벌을 받아 사슴으로 변한 사냥꾼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터부(taboo)와 사회인류학

폴리네시아의 여러 언어계(言語界) 속에서 주로 ‘금지하다’ 또는 ‘금지되다’ 등의 뜻으로 쓰이던 ‘터부’는 광범위하게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등의 여러 섬에서 터푸 ·카푸 ·아푸 등으로 각각 다르게 발음되다가 1777년 영국 선장 J.쿡이 여행기에 쓴 이후 영어로 소개되고 정착되었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금지에 대해서 터부(taboo)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행동과 의례의 규칙, 추장의 명령, 손윗사람의 소지품에 손을 대지 말라는 아이들에 대한 타이름의 말,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말도 터부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후 ‘황금가지‘로 유명한 J.G. 프레이저가 1886년경 터부(taboo)의 사회적 제도를 문제 삼았을 정도로 연구가 깊게 행해졌다. 1937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사회‘인류학자였던 래드 클리프 브라운 박사는 터부에 대한 탁월한 연구업적을 내 놓으며, 터부란 용어 대신 의례적 기피 또는 의례적 금기를 말하고 있다. 터부(taboo)의 형태가 어떠하고 또 그에 대한 해석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것은 다 함께 조금은 강력한 사회적 구속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특별한 이견이 없다.

터부와 기득권

대학시절부터 문화인류학에 관심을 가졌던 필자가 신화 전설 속에 등장하는 각종 터부의 모습들을 하나 둘 읽어 보면서 그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한가지 의미에 천착하게 되었는데, 그건 왜 누구에 의해서 그런 터부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의 이 의문은 터부란 것이 어떤 계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을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필자가 확인 한 바로는, 그 공동체에 존재하는 터부란 것은 바로 그 공동체 속의 지배계층의 이익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례로 한국에는 기호품 중에서 술 보다는 담배에 관한 터부가 훨씬 강하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술은 어른 앞에서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많은데, 연령상으로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인 연장자(年長者)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는 당장 긴 곰방대에 의한 호된 응징을 각오해야 한다.

술과 담배에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하는 필자의 의문은 곧 우연히 베트남의 담배문화를 보고서 깨닫게 되었다.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에서는 담배에 관한 터부가 매우 적다. 베트남의 아이들은 할아버지 앞에서도 담배를 피워도 특별한 제재가 따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건 담배 잎을 직접 보고나서야 풀렸다. 담배 잎은 큼지막한 게 한국, 일본, 중국 같은 나라보다는 태국, 베트남 같은 아열대 지역에서 훨씬 잘 자란다. 즉 동남아시아에서는 담배라는 자원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그걸 나누어 쟁취하기 위해서 기득권층, 즉 연장자가 터부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 적용하면 술은 밀주를 담그거나 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생산해 낼 수 있지만, 담배는 일반 집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 힘든 기호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득권층이 그 배분에 있어서 우월권을 갖기 위해 금기를 만든 것으로 나름대로 해석된다. 비 기득권층으로부터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터부를 만들어야 했다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다. 이 점은 음주문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국보다 포도주 등의 생산이 훨씬 용이한 나라인 프랑스를 보면, 나이 어린 계층에 대해서 술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금제(taboo)가 훨씬 적음을 알 수 있다. 즉 프랑스에는 술의 생산이 용이하므로 한국처럼 술을 놓고 서로 다툴 필요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터부와 사회의 건강도

필자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그 문화권에 터부가 적으면 적을수록 부유하고 건강한 사회다. 반면 터부가 많으면 많은 사회일수록, 그 구성원들에게 신경증이나 정신적인 장애가 많이 나타나고 그 사회의 건강도도 낮아진다.

이런 시각으로 그리스(Greece)라는 나라를 보게 되자, 왜 터부가 매우 많은 신화를 가진 나라인 그리스가 후대에 그렇게 부강한 국가가 되지도 못하고, 또 문명국가로서의 위상에 한참이나 뒤쳐진 결혼 지참금 문화를 가진 나라로 남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하면서 지참금이 적다고 판단된 신랑은 신부 집안에 공개적으로 지참금을 더 요구한다고 하니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코가 유난히도 뾰쪽하고 높았던 여인, 바로 호주에서 온 그리스 이민 2세인 여성 바이어는 스스로 그리스에 대한 자부심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까지 말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리스는 신화가 너무 많이 존재함으로 해서 이런 문화지체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사회의 문화양식이 신화가 많이 생산되었던 고대(古代)의 의식(意識)에 짓눌리어 한없이 위축되어 있는 나라로 판단된다. 호주에 이민 온 서양인 타운 중에서도 그리스 공동체 가 가장 빈곤한 타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헤브라이즘(기독교문화)와 함께, 문학, 예술, 철학, 과학, 심지어 민주주의라는 정치문화까지 모든 서양문화의 원류 중 하나인 헬레니즘의 뿌리이자 14세기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었던 찬란한 문명국이었던 그리스. 그런 그리스가 자율과 개방의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서도 마치 조선시대처럼 여전히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우월한 지위를 행사하는 가부장적 문화공동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필자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이후 이 사실을 놓고 많은 사색과 고민을 해야 했다.

이무기

심형래 감독이 만든 <디 워>가 한국에서 무려 850 만 명이나 동원한 사실을 두고 ‘애국심 마케팅’이 주효했기 때문이라는 사람들은 공부를 좀 더 하기 바란다. 그런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화 전설에서 등장하는 이무기란 기득권에 도전하는 민중의 한(恨)을 담고 있다. 인문학적 소양 중에서도 문화인류학적 소양, 그리고 래드 클리프 브라운이 새로운 장을 개척한 사회인류학적 소양을 다소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심형래 감독의 영화<디 워>가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단순히 이무기라는 전설 속의 아이콘을 다루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무기가 용(龍)이 되어 승천(昇天)’하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도처에 나타나는 무수한 이무기 전설에서 이무기가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하는 이야기는 극히 드물다.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이무기는 거의 대부분 승천에 실패한다. 이는 천명을 받고 태어난 아기장수가 겨드랑이에 날개까지 달고 태어나지만 언제나 인간들의 금기에 의해서 죽고 마는 구조와 같다. 즉 용(龍)이라는 기득권 세력의 권위나 논리에 대항하는 이무기가 승천(昇天)에서 실패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상의 차별의식이 너무나 확고하듯이 비주류가 주류에의 진입이 그만큼 힘들었던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 사회였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재벌, 귀족, 서울대가 용이라면 이무기는 서민 또는 중류층, 평민, 비서울대의 이익을 대변해 줄 대변자가 바로 이무기다. 그런데 영화 <디 워>는 기존의 구조를 탈피해서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려다 실패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그린 게 아니라, 진짜 용으로 승천(昇天)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이건 한국 사회의 극소수 기득권 측에서 본다면 수천년 동안 내려오던 금기 사항을 깨뜨린 서사구조다. 극소수 주류계층으로부터의 심한 반발을 사겠지만 훨씬 많은 대한민국의 일반인들이 이 구조에 열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에 별 감흥이 없는 사람은 그 지적 수준이 피라미 등급 밖에 못되면서도 스스로 용(龍) 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진중권 같은 얼치기 지식인 부류 밖에 없다. 이점에서 진중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팔아먹었던 진보라는 타이틀이다. 왜냐하면 ‘진보‘ 지식인은 언제나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야 함은 타고난 숙명이자 책임이기 때문이다.

용과 드래곤

불과 며칠 전 TV에서 유명한 미드(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서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나왔다. 수잔 메이어(테리 해처 분)라는 여자가 독신남을 만나 하룻 밤 로맨스를 나눈다. 그 남자는 초호화 성(城)을 가진 신데렐라 속의 왕자와 같이 묘사된다. 실제로 네레이션은 수잔 메이어를 신데렐라 같이 동화 속에 온 기분이라고 직적접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하룻 밤 자고나니, 그 성의 나이든 시종이 그녀에게 매우 불친절하게 군다. 그러면서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남자에게는 지금 별거 중인 안주인, 즉 마나님이 있다는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준다. 그때 흘러나온 네레이션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긴, 동화 속에 처치해야할 용이 없다면 재미없지!” 여기서 말한 용은 龍(용)이 아닌 드래곤임에 유의해야 한다. 동양의 용이 권력과 신성함과 구원자, 그리고 그 자체로 초월의 상징이라면, 서양 신화에서의 드래곤은 언제나 주인공인 서사적 영웅이 죽여야 할 적(敵)이다. 서양 신화에 등장하는 용은 주인공의 용맹함을 빛나게 해주는 소품이나 조연이지만 동양의 용은 그 자체로 초월적 절대자로 주인공이거나 주인공보다도 높은 존재다. 이것을 모르면 미국인들보다 한국인들이 영화 <디 워>에 더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필자가 디워 시리즈 4 편에서 지적하고 영작까지 한 평론 "용과 드래곤의 신화"에서도 말했다 시피 동양의 용과 서양의 드래곤은 판이한 문화 아이콘이다. 특히 한국이라는 문화공동체에서 민중들의 계급적 한(恨)이 담긴 이무기라는 아이콘은 더욱 특별하다. 한국의 민중들에게는 영화 속의 1000년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5000년 동안이나 못했던 이무기의 승천을 심형래 감독의 시각을 통해 영화 속에서 이루어 낸 쾌거다. 이 점이 영화 <디 워> 가 가진 가히 혁명적인 힘이다. 필자가 그동안 쌓아 온 문화인류학적인 지식으로 판단할 때, 한국인들이 외국인들보다 수 천 수 만 배로 열광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외국인들보다 이 영화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적 무의식의 원형(archetype)‘을 발견하고 또 해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그게 마냥 ‘돌대가리들의 애국질’ 정도로 밖에 파악할 수 없는 ‘무식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문화평론가’는 스스로 자신을 미국의 드래곤 쯤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청계천(淸溪川)과 청개천(靑-川)

이런 구조를 가진 영화에 충무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어떤 감독이 ‘청계천에서 나온~ ’이라고 폄하하는 건 어쩌면 본능적인 방어기제의 작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충무로라는 기득권층에서 방어해야 할 터부(taboo)가 깨어졌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이나 위기감의 ‘무의식적인 반영’으로 읽혀지기에 충분하다. 무의식적으로 청계천을 충무로에 반대 개념으로 활용한 건 잘 알겠는데, 필자는 그 철자사용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한다. 이 경우에는 푸른 ‘계’천이 아니라 푸른 ‘개’천, 즉 청개천이 되어야 옳다. 영화감독으로서는 철저하게 비주류인 개그맨 출신인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디 워>는 수천 년 동안 억눌려 왔던 비주류 민중의 한(恨)과 염원을 담고 있는 이무기가 온갖 장애를 딛고 주류 사회로 등장하여 그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심오한 철학이 담긴 영화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나랴?> 라는 비아냥이나 자격지심이나 패배주의를 뛰어넘어 실제로 ‘푸른(淸) ’개천‘에서 용(龍)이 탄생한 영화‘인 것이다. 그것이 충무로가 아닌 청’개‘천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더 한국의 의식 있는 관객들이 극소수인 주류 기득권층들보다 먼저 가슴으로 받아들인 영화다. 단지 이 영화에서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은 선한 이무기가 불로소득을 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취약점만 제외하면 너무나 훌륭한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 혹시라도 필자가 영화 <디 워>를 지지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기에 억지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심이 만에 하나라도 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가 영화<디 워>가 개봉되기 훨씬 전에 ’인물과 사상(2006.01, 개마고원)‘에 기고했던 평론 “구미호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http://cafe.naver.com/moowee/12 ”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을 글자 한자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소개한다.

“이제 이 구미호의 스토리가 바뀔 때가 왔다. 만일 필자가 극작가나 PD 또는 영화감독이라면 전혀 다른 구조의 구미호를 선보이겠다. 그래서 그 여우가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마 천년의 한(恨)도 풀고 자아실현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 자신과 우리 이웃을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게 살게 하고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길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006년 01월 ⓒ 인물과 사상/ 김휘영(문화평론가)

필자가 영화감독이라면 구미호에게 천년을 한(恨)을 풀게 하고 인간이 되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리겠다는 갈망과 철학이 이 영화 <디 워>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즉 심형래 감독은 영화 <디 워>에서 구미호 대신 이무기가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하는 대장관(大壯觀)을 연출함으로써 필자의 갈망을 간접적으로나마 달성시켜 주었다. 만약 영화 <디 워>가 보통의 이무기 전설처럼 어떤 이유로 승천을 못하는, 그야말로 주류 기득권적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어찌 되었을까? 심형래 감독이 제 아무리 ‘눈물 마케팅’을 하고 거기다 ‘애국 마케팅’을 했다고 한들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였으리라 단언한다.

영화 <디 워>의 의의

영화 <디 워>는 세계영상산업에서 이름 없는 ’개천’에 불과한 한국이 세계 영화산업의 주류인 헐리우드에, 그것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서도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SF블록버스터에 도전장을 내민 영화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다른 것도 아닌 첨단 과학기술의 총아인 CG로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우회전략이 아니라 헐리우드의 심장을 정면으로 찔러간 영화가 바로 <디 워>다. 영화 <디 워>가 담고 있는 문화콘텐츠 조차도 세계 영화시장을 주도하는 헐리우드가 세계 각국에서 발굴해 내어 스크린에 담고 있는 신화전설이라는 점도 너무나 대단하다. 심형래 감독이 이무기 영화를 5-6 년 이상 준비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어떤 감독이 있어 21세기 초반에 세계영화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신화 전설의 세계를 보아란 듯이 세계인들 앞에 선보일 수 있었겠는가? 이런 영화에 대한 헐리우드의 시선이 고우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다. ( 참고로 고유명사인 청개천(淸溪川)이 한때 청개천(淸開川)으로 불리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 한국의 개천은 한자가 없이 개천(-川)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건 심형래 감독이 미국에 가서 한국에서 왔다니 아무도 몰라봤다는 에피소드와 비슷한 상황이다)

진중권의 수렁

진중권은 이무기 전설에 원래 선악의 이무기는 없으며 또 원작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공격한다. 정말 한심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시각이고 평론가로서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부분이다. 없는 선(善)과 악(惡)의 이무기를 창의적으로 구성하고 또 원작도 없는 일을 한 단계 건너뛰어서 심형래 감독이 독자적으로 그려냈다는 사실에 진실한 지식인이라면 더욱 칭찬을 하지는 못할 망정 이를 두고 비난을 일삼다니 도대체 진중권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 부분은 진중권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근본주의자이며 창의적 사고가 안되는 사람이며 또 얼마나 무식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이게 아니라면 진중권이 이 평론 과정에서 저질렀던 실수와 거짓말을 인정하기 싫어서 억지로 다른 거짓말로 덮어보려는 수작을 부리다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필자는 한국 관중들이 영화<디 워>에 열광하는 현상을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실용주의 정신과 실속 없는 대의명분에 집착하며 과거로 회귀하려는 성리학적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문화양식의 거대한 충돌로 파악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 대목은 ‘영화 <디 워>와 시대정신‘이란 칼럼으로 자세히 논하겠다. 사실 이 부분은 필자가 집필하고 있는 책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의 가장 큰 줄기이기도 하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디워의 플롯이 엉성하고 인과관계가 흐릿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건 진중권이라는 엉터리 영화평론가의 악성 이미지 메이킹 때문에 너무 크게 부각된 점도 절대로 무시 못한다. 그 예로 필자는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인과관계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왕자가 자신의 배필(mate)을 찾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게 무엇인가? 바로 구두 한 짝이다. 춤을 추다가 황급히 도망가다가 놓치고 간 이이 유리구두 한 짝이 없다면 신데렐라는 절대로 왕자님께 시집갈 수 없다. 당연히 세계 모든 여성의 로망도 달성될 수 없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라! 무도회에 참가한 신데렐라의 모든 분장은 요정이 만들어 준 것으로 밤 12시가 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12시가 되면 마차는 호박으로, 말은 생쥐로, 또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누더기 옷으로 바뀐다. 그런데 유독 그녀가 신은 유리구두는 왜 초라한 신발로 바뀌지 않는가? 그리고 이 점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실 말도 안 되고 좀 억지스러운 구성이라도 그걸 보는 독자나 관객이 열린 마음만 있다면 그 정도의 황당함은 눈감고 넘어가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수천년 동안 누구도 의문조차 품지 않고 그냥 무사통과되어 왔던 엉터리 인과관계다.

무뢰한의 폭언과 관객권리의 박탈

그런데 절대로 그럴 리가 없겠지만 누군가 TV에 나와서 ‘영화 신데렐라는 12시가 되면 전부 누더기로 바뀌어야 하는데 유리구두만은 안 바뀌고 있으므로 엉망진창이다.’ 이렇게 떠들어 댄다면 그 말을 들은 관객들은 어찌될까? 영화에 몰입하여 즐기기 보다는 정말로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12시가 지나도 옛날 구두로 바뀌나 안바뀌나 하는 사실에만 집착하여 그 감상 자체를 망치게 되고 감동도 형편없이 쪼그라들 수 밖에 없다. 진중권이라는 자칭 영화 평론가가 영화 <디 워>를 두고 한 짓이 바로 이런 몰상식한 짓이다. 당연히 영화 <디 워>의 주인공인 용이 울어야 하는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안 우니 용이 운다”라고 하니, 그 말을 들은 관객들은 용이 어떻게 왜 우나 하는 감정이입보다는 ‘용이 우나 안 우나?’ ‘용이 언제쯤 우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정보다는 이런 계산이 작용하게 되는 상황에서 감동이나 카타르시스를 바란다는 건, 냉장고 안에서 찜질효과를 보겠다는 일이 되고 만다. 필자가 전에도 말한 행운의 동전이야기를 보자. 악당이 심장을 겨누고 쏜 총알이 하필이면 그 행운의 동전을 맞추는 바람에 주인공이 살아나지 않고, 애석하게도 그 동전에서 불과 1 센티 떨어진 부근에 맞고 죽어 버린다면 관객들이 무엇 하려고 영화관을 찾겠는지 자문해 보라! 영화 평론가로 나와서 자신의 무식을 한없이 자랑하고 또 진지하게 황당한 개그를 하겠다는 사람에게는 결코 웃음조차 줄 수 없다. 줄 수 있는 건 한가지, 오직 ‘비웃음‘ 뿐이다. / 김휘영 (문화평론가)

이 칼럼은 영화 필자가 한국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평한 칼럼과 함께 보시면 더 좋습니다. 곧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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