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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심형래와 미국의 스티븐 스필버그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한국의 이무기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1989)

(어차피 말이 나와 버린 김에 한 걸음만 더 논의해 보자. 이건 심감독님께 김휘영이라는 일개 비평가로서 드리는 일종의 조언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어드벤쳐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영화는 제 3번-마지막 성배(Last Crusade-1989년)다. 물론 이 시리즈물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화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평생을 두고 못 잊을 게 확실하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위대성을 절감한 한 장면을 소개하겠다. (이건 문제의 E-Mail에도 함께 쓰여진 대목이며 필자는 기독교인이 아님을 먼저 밝힌다)

스티븐 스필버그

목숨을 건 기나긴 모험의 대가로, 기독교적 종교관으로 볼 때, 최고의 가치를 가진 성배(聖杯)를 마침내 손에 쥔 채, 해리슨 포드는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이 성배를 계속 쥐고 있다가는 틀림없이 성배와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할 상황이다. 이때, 근엄한 목소리가 들여온다. “아들아, 놓아라!“ 나에게 이 목소리는 결코 배우 손 코너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얀 날개를 단 천사가 나팔을 불며 구원(救援)을 알리는 목소리였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묶어놓고 곧 죽여서 하늘에 제사지내려 할 때, 하늘에서 들려 왔다는 바로 그 아버지(FATHER)의 목소리였다.

스티븐 스필버그에게는 기독교에서 최고의 보물인 성배(聖杯)의 향방보다 한 인간으로서,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위험에 처한 자식을 살려야겠다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이 점을 잘 살려낸 스필버그의 시각(Eye)이야말로 필자가 앞에서부터 언급해 왔던, 바로 그 ‘인문학적 소양’의 실체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이 결코 넘볼 수 없었던, 스필버그 감독만의 그 무엇이다. 스필버그 감독이 기독교적 종교관에만 침잠된 사람이었다면, 굳이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필요가 없었다. 다른 평범한 기독교 영화처럼 모험을 즐기면서 성배(聖杯)도 얻은 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축배를 들면서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끝냈어도 충분하다. 모험 중에 선보인 긴장감과 스릴만으로도 관객들은 충분히 만족했을 테니까. 하지만 스필버그는 형식적인 기독교윤리와 더 본질적인 휴머니즘을 대립시키는 구도를 기꺼이 택했고, 이로 인해 종교의 본질적인 모습, 즉 휴머니티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생각해 보라. 혹시라도 구약성서가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희생시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후에,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에게 새 생명을 주어 부활시키는 구조를 가졌다고 해 보자. 인간의 지성이 우매했던 중세 암흑기를 거쳐 오면서, 선희생-후구원(先犧牲-後救援)이라는 교리의 창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해야 했을까를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장대함과 장엄함, 감탄과 감동의 차이

스필버그가 이런 점을 잘 살려내서,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대성공을 거둔 영화가 ET ( The Extra-Terrestrial, 1982)다. ET에서 서사되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와 우정(友情)이야말로 스필버그 감독이 보여준 인문학적 소양이었고 그만이 가진 독보적 경지다. 우리에게 외계인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할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편견을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통해, 여지없이 부서져 버린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에서 여자와 어린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순번을 양보하던 기사도 정신을 보여준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인문주의의 핵심이 무엇인가? 바로 르네상스기에 태동한 휴머니즘이 아닌가? ET나 이무기, 둘 다 소재는 비슷하다. 하지만 D-War가 ET보다 CG 등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 손, 감독이나 예술가가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는 시각(Eye)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가 만들어 내는 영화는 잘해야 영원히 B+급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기술과 인문학적 소양의 결합', 이것이야말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전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역량(力量) 그 자체다. 스필버그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시선을 견지해 온 심형래감독이 지향해야 할 목표다. 이는 또 필자가 전편에서 말했던 장대함과 장엄함 사이의 미세한 간격, 그리고 감탄과 감동 사이의 미묘한 떨림의 차이를 보완하는 길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이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감독으로 심형래 감독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서극(徐克)의 천녀유혼

서극과 스필버그는 미국의 영화아카데미 출신 동문으로 알고 있다. 동양의 서극은 사실 스필버그보다 특수효과 측면에서는 훨씬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적어도 초창기에는 그랬다. 서극이 정소추 임청하 주연의 촉산(蜀山- 신촉산검협 1983년)과 장국영- 왕조현 주연으로 선보였던 천녀유혼(倩女幽魂: A Chinese Ghost Story, 1987)은 너무나 센세이셔널 했고 적어도 SF 영화 분야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토록 신비하고 몽환적인 영상미가 80년대에 나왔다니! 그 중 천녀유혼은 지금 다시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헐리우드 형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매우 적은 자금으로도 매우 환상적인 영상미를 구현해냈던 그의 역량은 당대 최고였다. SF 기법으로만 본다면, 훨씬 높은 기술력을 선보였던 촉산(蜀山)이, 영채신과 섭소천의 애절한 사랑을 그려낸 천녀유혼의 흥행에 그 절반도 못 미쳤음은 반드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영화 천녀유혼과 촉산의 간격(間隔)도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 얼마나 스며들어 있는가 하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심형래 감독이 이무기 전설을 소재로 했듯이 서극의 천녀유혼도 중국 송대 포송령이 지은 요재지이라는 귀녀 설화를 소재로 한 점도 음미해 보자.

서극-심형래-스필버그--3 S Directors

기술은 그 자체로 너무나 중요하여 증기기관차의 등장처럼 한 시대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힘을 가졌지만, 당시대의 흥행요소인 인간의 감정을 움직여야 하는 절대 명제 앞에서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점은 영화를 찍는 제작자라면 누구라도 기억해야 할 점이다. 동양의 명감독이었던 서극(徐克)의 비극은 그가 너무 동양적인 것에만 심취했음과 지나치게 성인무협물에 집착했다는 데 있다. 그렇게 아까운 재주를 갖췄던 서극(徐克)이 스필버그나 심형래 감독처럼 가족영화로 시선을 돌렸다면, 우리 인류는 훨씬 풍부한 문화자산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가족영화에의 시선의 견지라는 점에서 심형래 감독이 서극 감독보다는 적어도 두어 걸음 쯤 앞서 있다. 심형래 감독의 디워는 이무기가 용으로 변신하는 대장관(大壯觀)을 연출하여 관객들의 동공을 한껏 확장시켰지만, 얼마 전 서극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칠검(七劍)은 ‘참혹‘ 그 자체였다. 칠검(七劍)이 서늘하게 찔러간 곳은 한국의 여배우 김소연이 아니라 감독 서극의 가슴이었다. 이로 인해서 서극은 더 이상 회복하기 힘들만큼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빨리 재기해서 세계 3대 ’S' 감독(스티븐 스필버그, 심형래, 서극)으로 부활하기를 빈다. 단 조건이 있다. 이젠 성인 무술영화에의 집착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다. 홍콩 영화에서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은 ‘쿵푸허슬‘로 퓨전쿵푸를 선보인 주성치감독이다. 희극배우 출신 주성치의 성공은 여러모로 심형래감독의 성공을 닮았다. 필자가 왜 서극보다 심형래 감독을 앞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가 서극보다 더 전향적인 자세로 응시하고 있는 가족영화에 대한 시선에 있다. 명감독 서극이 그의 섬세한 재능과 기술력을 가족영화의 완성에 사용했다면 그는 현재 전혀 다른 위치에 올라 있으리라.

가족영화

디워가 ‘가족이 함께 볼 만한 영화‘라는 말을 하면서 은근히 그 가치를 평가절하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영화이며 이 부분은 심형래 감독의 영화문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세계인 흥행에 성공한 ’ET‘가 바로 가족영화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감동의 하모니를 메아리쳐 줄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 1965)‘이 또한 대표적인 가족영화다. 세계 시장을 겨냥하면서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건, 어찌 보면 인류의 절반 에 이르는 관객을 미리 포기하고 들어가는 일에 다름없다. 충무로도 심형래 감독이 평생을 통해 시선을 두었던 가족영화에 더욱 많은 노력을 할애했으면 한다. 그리고 가장 힘든 장르가 바로 가족영화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모든 세대의 취향을 다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뛰어난 가족영화를 만들려면 인간애, 아름다움, 휴머니즘, 예술성, 환상적인 볼거리, 아름다운 언어, 이런 것으로 구성해야 하지만 특정 연령대를 위한 비(非)가족영화에는 위한 영화는 에로티즘(아름다움의 한갈래), 외설, 참혹함, 잔혹한 리얼리즘 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어느 부분이 더 뛰어난 요소임과 동시에 또 어려운 요소인가는 물음을 듣는 즉시 판단할 수 있다. 앨범영화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면 우리는 으레 앨범을 보여 주곤 한다. 그 친구는 앨범의 파노라마가 끝날 때까지 시선을 놓지 않는다. ‘친구(광경택감독)‘와 ‘’포레스트 검프‘ 등의 영화 유형을 두고, 필자는 ‘앨범영화(Album Films)‘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가족영화와 함께 '앨범영화'는 흥행몰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유리한 장점을 갖고 있다. 그 사회에서 주로 30-40대 이후의 사회 중추세력들이 일종의 연대감을 갖고 강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앨범영화다. 다만 앨범영화는 한 사회 내에서 진한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하기 쉬워도 가족영화처럼 전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데는 한계를 노출하기 쉽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는 미국의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차례로 펼쳐진다. 미소 냉전시대, 핑퐁 외교로 시작된 데당트 시대 등의 주요 사건들의 전개는 포레스트 검트라는 한 소년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한다.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에게 지능이 약간 모자라지만 지극히 순수한 마음씨를 부여한 감독의 의도는 뻔하다. 관객에게 이데올르그 같은 부담을 떨쳐내고,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앨범을 보면서 그 시절에 빠져들라는 의도적인 장치다.

추억과 상흔(傷痕)-친구와 화려한 휴가

아련한 흑백사진 시절의 추억들을 마치 잘 꾸민 앨범처럼 관객들의 눈앞에 선보였던 영화, 친구(곽경택)의 성공도 이런 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좀 더 시야를 확대시키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인 배트맨, 스파이더맨, 슈퍼맨 등도 일종의 앨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어릴 적에 만화를 통해 매우 익숙한 캐릭터들을 화려한 CG의 도움으로서 좀 더 업그레이드시킨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은 아이들의 취향에도 맞추고 중장년층의 향수도 자극해서 그들 모두를 ‘시네마 천국’으로 불러들이는 마력이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화려한 휴가(김기훈 감독)‘ 또한 앨범영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출발에서부터 최소한 500만명 이상의 관객동원은 보장된 영화라고 판단된다. 다만 <친구>가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하는 영화라면, ‘화려한 휴가‘는 ’아픈 상흔(傷痕)‘을 되살리는 영화라는 데 차이가 있다.

심형래감독이 충무로에 던진 숙제

필자가 영화 제작자라면 앨범영화이자 가족영화의 공통분모를 갖는 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하겠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충무로의 흥행공식인 조폭 코메디 영화보다 훨씬 안전한 흥행공식으로 판단된다. 또 예술성과 작품성도 두루 갖출 수 있는 무한한 장점을 갖춘 영화를 만드는 공식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심형래 감독이 만든 디워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한국의 관객들의 눈에 들어 찰 충무로의 영화가 몇이나 될까? 한국 관객들은 이미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장면을 보아 버렸는데 이 눈높이를 어느 영화가 맞출 수 있을까? 이것이 심감독의 디워가 충무로에 던진 숙제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뻔한 조폭 코메디 영화로 한껏 높아져 버린 관객의 눈에 들기에는 이젠 어림도 없어졌다는 점이다.

심형래의 300억

네티즌과의 함께 한 맞짱 토론에서 진중권은 디워가 300억씩이나 투자된 영화라서 충무로 전체가 어쩌고저쩌고 하든데 그 논리가 참 황당하다. 디워에 투자된 300억 이상의 자본은 충무로에 갈 돈을 심감독이 뺏아 온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 산업에 심감독이 그만큼 플러스 시킨 자금이다. 즉 심감독에게 안 갔다면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 갈 돈이었지, 그게 다른 영화 제작자에게 투자될 성질의 자금이 아니다. 김조광수나 이송희일 감독이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이처럼 자본의 눈은 매우 냉정하다. 사실 심감독이 충무로의 부가가치를 증가시켰으면 시켰지 감소시켰다는 증거도, 까닭도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여전히 구시대적 버릇을 못 버리고 있다. 일단 충무로와 심감독을 편을 가른 후 자신은 충무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듯 포지션을 잡고 충무로라는 기득권에 기생해 보겠다는 논리를 여지없이 펼친다. <반지의 제왕>을 제작한 피터 잭슨 감독은, 단 5분짜리 데모 버전을 멋지게 만든 후, 헐리우드에서 막대한 자금을 모집했다. 심감독도 데모버전을 잘 만드는 데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김조광수 감독이나 이송희일 감독도 김치국 먼저 마시지 마시고, 좋은 시나리오나 멋진 데모버전을 만드는 노력을 하시는 게 옳다. 그러면 300억이 아니라 1,000억도 모을 수 있다. 자본의 눈은 너무나 냉정해서 이렇게 비전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는 구름처럼 모여들지만 통상의 경우에는 엑스레이 찍을 정도의 투자에도 인색하다. 이런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열심히 수준높은 영화를 만드시는 이송희일이나 김조광수 감독님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음을 알아 주셨음 한다. 현실이 그렇게 냉정하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기 바란다는 뜻이다. 물론 두 분의 블로그에 가서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은 분명히 잘못했다. 그런 일에 대해서 내가 사과드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되지만 가능하다면 “죄송합니다”라고 대신 사과를 올립니다. 대신 심감독은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으로 이무기와 용을 잘 만들어서 그 비전으로 투자자를 모집하는 데 성공했음을 같은 동료로서 기뻐해 주시실 희망한다. 투자자들은 데모버전을 보고 투자금을 충분히 회수하고도 이익까지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기에 투자했을 따름인데, 이에 묘한 박탈감이나 피해의식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의외다.

창피한 건 한국의 평론계

300억이든 700억이든, 그 정도의 자금으로 디워 정도의 그레이트 스펙타클(대장관-大壯觀)을 만든 건 너무나 남는, 즉 투자대비 고효율의 장사다. 이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투여된 자금을 비교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 정도의 영화에도 최소한 5배 이상의 돈을 투자하고 있다. 진중권은 디워가 세계에 내놓기 창피하다고 했던가? 필자가 보기에는 세계가 한국이 선보인 CG기술에 감탄하고 있다. 이는 과거 70년대 메이드 인 코리아 자동차나 삼성 휴대폰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이상의 효과를 낼 것임에 확실하다. 프로는 프로를 즉각 알아챈다. 헐리우드는 더 이상 특수효과에 바탕한 블록버스트가 헐리우드 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을 앞에 두고 기분이 씁쓰레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헐리웃만이 가졌던 비교우위를 진중권이 말한 독일도 아니고 프랑스도 아닌, 바로 한국의 심형래 감독이 허물어뜨려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창피한 건, 진중권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평론가, 즉 전문가 행세씩이나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성계다. 외국에서 서사구조의 뜻도 모르는 사람이 한국평단에서 버젓이 평론을 하며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킬킬댈 것인가?

진중권의 언어개그 (규모의 경제, 공공재, 외부효과)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맞장토론을 하면서 마치 상대 패널에게 강의를 하듯이 말한 대목은 절로 폭소를 자아낸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6부로 나눠진 동영상 중 2부 중간 즈음에 진중권 영화평론가이자 중앙대 겸임교수의 입에서 어쩌다 ‘툭’ 튀어나와 버린 용어, ‘규모의 이코노미(The economy of scale)’부터 개그가 시작된다. 요즘 뉘앙스나 언어적 구조나 장치를 이용해서 풍자 또는 해학, 그리고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던 고도의 ‘언어개그‘가 시들해지고 즉흥적이고 단발적인 ’몸 개그’가 유행하고 있음에 분개했음인가? 스스로 미학자 지망생임을 내세우고 있는 진중권씨는 몸소 그 언어개그의 진수를 대중들 앞에 화려하게 선보인다. 나는 이 대목을 보면서 족히 3-4분은 웃었으리라. 필자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일단 ‘규모의 경제’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기 바란다.

‘규모의 경제’란 절대로 진중권이 말한 그런 경우에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이 용어는 ‘생산량을 늘림에 따라 그 비용이 상대적으로 절감된다’는 경제용어다. 그런데 진중권은 3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디워는 한국 시장의 규모에는 안 맞으며 헐리우드 같은 미국 시장에나 맞는 영화라고 거침없이 말하면서 그의 무식을 한없이 드러낸다. 진중권이 ‘영구없다’에 있는 복합적이고 치밀한 구조를 분석하지 못하고 ‘없다’라는 자구적 해석에만 집착했던 불치의 색맹증상이 이번에는 ‘경제’는 모르고 ‘규모‘라는 자구에만 초점을 고정시켜 버린 현상이다. 사실 그때 진중권 겸임교수가 한 말은 논리적으로도 엉터리지만 현실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이를 한국과 세계 시장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자랑스러운 영화 ‘디워’에 적용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보자.

규모의 경제와 ‘디워 II’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 또는 ‘캐러비안의 해적’ 등을 보면 첫 편을 제작하는 데 걸린 기간이 가령 3-5년이라면, 그 후속편은 통상 1-2년이면 충분히 나온다. 왜냐하면 이미 되어 있는 캐스팅이나 촬영장, 그리고 의상 등을 그대로 활용하면 되기 때문에 그 경제적, 시간적 비용이 한결 줄어들기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란 말은 이럴 때 사용된다. 즉 1편을 제작하기보다 2-3편을 제작하면 상대적으로 그 비용이 절감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디워 II를 만들 때에도 이 규모의 경제는 어김없이 작동된다. 이미 획득되어진 스탭과 기술력,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이무기와 용, 불코, 샤콘 등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좀 더 업그레이드시켜 쓰면 되는 잇점(advantage)이 있기에 작용하는 원리다. 즉 ‘규모의 경제상’ 이란 용어를 쓸려면 진교수 말처럼 한국시장에서는 포기하고 헐리우드에서나 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에서 2-3편 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뜻도 모른 채, ‘300억원이라는 자금은 ‘규모의 경제상‘ 시장규모가 작은 한국시장에는 안 맞고 헐리우드에나 맞다’는 황당한 말을 아주 자신만만하게 해대는 진교수의 내적한계(內的限界)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발원하는 것일까? 신문기사라면 나중에 사과문과 정정기사를 내면 되겠지만, 방송의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이런 경우를 만회할 수 있을까? 그 토론을 본 수많은 학생들이 단지 겸임교수(실제로는 과거의 시간강사에 불과하지만)라는 직함과 영화평론가란 어울리지도 않은 타이틀을 믿고, 그가 사용한 ‘규모의 경제’란 말을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서, 혹여나 나중에 논술시험에라도 잘못 사용되어 대학시험에서 낙방한다면 이 일은 누가 배상해 줄 것인가?

심형래 감독이 설파한 대로, 영화 한편이 최고의 대기업 몇 개 또는 중소기업 수 천 개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서의 의의를 함께 갖게 된 시대로 접어든 지 이미 오래다. 아니 모든 문화 상품들 중에서 이런 의의를 갖는 분야로는 가히 영화에 필적할 대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평론가가 기본적인 경제 용어의 뜻도 모른 채, 공중파에서 그 용어를 몇 번이나 오용하다니, 도대체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려고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식 장사꾼과 지식 사기꾼의 차이

그의 표현을 고스란히 빌리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의 수식을 받아야 하는 말은 바로 서사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규모의 경제’란 말이다. 요즘은 고2 정도만 되어도 규모의 경제와 외부효과, 그리고 공공재 등의 용어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사실 서사구조는 진교수 자신부터 그 정의를 잘못하고 있지 않았는가?

진중권 겸임교수가 서사구조와 제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너무나 어이없다. 이무기 전설이 서사구조가 아니라 제재(소재)라니? 피상적으로만 들으면 진교수의 말에 자칫 속아 넘어 갈 수도 있겠다. 한데 이 부분은 진교수의 특기인 트릭, 즉 명백한 사기술이 작동된 부분이다. 이무기 전설을 제재(또는 소재)한 영화 ‘디워‘란 표현에는, 사실상 앞부분에 매우 중요한 내용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즉 <500년 묵은 이무기가 여의주를 어쩌고저쩌고,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서사구조를 가진> 이무기전설을 소재(제재)로 하는 영화 ‘디워‘가 본뜻이자 완전한 뜻이기에 하는 말이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하는 말이 맞기 위해서 굳이 제재를 따지자면 ’이무기 전설’도 아니라 ’이무기‘ 자체만 말해야 옳다. 이를테면, 이때의 이무기는 전설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플라스틱 캐릭터 정도 되겠다. 그래야 애들이 거대한 이무기 캐릭터를 배경으로 디카도 찍고, 미니어쳐인 경우에는 책상 위에 올려다 놓고 요리조리 만져보면서 놀 것 아닌가? 네티즌과의 맞짱 토론은 “진중권이 시사평론을 하기에는 경제에 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고 확언했던 몇 년 전 변희재의 인터뷰가 너무나 정확한 인식이었음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미디어가 주는 권력의 허상(虛像)

고 2 정도만 해도 아는 시사상식도 모를 정도로 공부가 덜 된 사람이, 자기 저서로 된 ’첩첩상식 : 진중권의 시사 키워드 사전’이란 책을 팔아먹고 있으니 정말 코메디다. 이 지점에서 미디어가 만들어 주는 허상의 위력을 절로 실감한다. 미디어에 나와 얼굴을 팔고 유명세를 올려서 이런 부수입을 챙기는 건 영업행위라 방해하면 나쁜 놈이 되겠다. 하지만 만일 이 과정에서 불량지식상품을 내어 놓으면서 틀린 주장을 쏟아내면 그건 장사술에서 사기술로 전락하게 되니 이를 보는 대중들의 저항은 너무나 정당하다. 진중권은 방송에 나올 시간에 실력을 좀 쌓아 보는 것은 어떨까?

한가지 의문

진중권이 용어나 개념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여러번 확인한 필자는 오랫동안 강하게 떠오르는 한가지 의문을 억누를 길이 없다. 이런 현상이 진중권의 주전공인 미학분야에서는 안전할까라는 의문이다. 미학이라면 천부적 직관과 더불어 개념이나 용어에 대한 정확한 상(想)을 잡고, 그 미묘한 차이까지도 핀셋처럼 꺼집어 내는 능력이 너무나 중요한 파트가 아닌가? 필자의 대답은 아니오(No!)다. 여태까지 보여준 진중권이 가진 내적한계로 판단할 때, 진중권이 집필한 미학서적들이 엉망진창일 것으로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다만 국내에 소개되지 아니한 외국 석학들의 이론이나 의견을 단순번역하는 수준이라면 그나마 다소 안전할 수도 있으리라 판단한다.

홍원탁교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한가지 분야에 뛰어난 사람이 다른 분야에도 뛰어난 게 특수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이 두 부분 다 예리한 시각 못지않게 언어적 감각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필자가 대학 다닐 때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던 홍원탁 교수님은 그 전공이 경제학(국제무역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동북아시아의 고대사 서술에 혁혁한 성과물을 내 보이고 계시다. 검색해서 확인해보라. 홍원탁교수가 얼마나 방대한 양(量)의 동아시아 고대사를 저술해 가고 있는가를? 그분은 모교에서 강의하실 때에도 자신이 직접 영어로 쓰신 책으로 강의를 하셨는데. 필자가 학생시절 직접 들었던 강의도 매우 감동적이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노쇠해졌을 몸으로 지금 현재 동아시의 고대사를 영어로도 집필해 내고 계신 모습은 실로 장엄함 그 자체다.

디워의 약점은 디워 II 의 강점-흥행대박을 위해 남겨진 신화코드

물론 필자 또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300억원이나 들여서 이 정도 영화밖에 못 만들다니 하는 한탄을 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의 한탄은 300억원을 들여서 이정도 CG밖에 못만드냐가 결코 아니다. 영화 디워에서 돈이 거의 안 들어가도 되는 부분, 즉 기술적 요소가 아닌 인문학적 요소였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서정성(抒情性)의 부재나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로 이 정도에 그치게 만든 한국의 척박한 환경이 너무 한탄스러웠다. 당연히 후속작인 디워 II 에서는 풍부한 서정(抒情)의 가미로 원작에서 나왔던 감탄이 관객들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면 된다. 이런 시점으로 본다면 원작 디워의 약점은 <디워II>가 전 세계적인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장점을 고스란히 남겨주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이런 가능성을 읽었기에 디워의 약점을 속속들이 다 알면서도 대중 앞에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디워가 보여준 기술력이 워낙 뛰어나고 또 원작에서 이무기의 전설이라는 문화콘텐츠를 응시한 심형래 감독의 직관이 너무나 뛰어났기에, 필자는 적어도 제작비의 2/3정도라도 건지면, 그 가능성으로 다시 투자자를 모아서 디워II에서 충분히 전 세계적인 대박으로 이어질 ‘신화적 코드’를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된 현실에만 집착하는 아마추어들이 미래가치를 읽어낼 눈을 가진 프로들을 따라잡기란 요원하다.

사고(思考)의 지평선

입이 떡 벌어지게 했던 CG기술은 이미 300억원 아니 700억원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고도 남았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 얻은 가치보다 미래가치가 더 높기에 더욱 고무적이다. 현실적으로는 OSMU(원소스멀티유스) 전략의 일환으로 DVD나 캐릭터 판매 등으로 얻을 부가가치가 얼마나 높은지는 영화 라이언 킹의 경우를 보면 된다. 잘 알다시피 <라이언 킹>은 영화 자체보다도 DVD와 테마음악을 팔아서 벌어들인 돈이 더 많은 영화다. 디워에서 선보인 이무기라는 환상적인 아이템은 캐릭터 판매 수입도 기대할 만하다. 물론 디워II에서 좀 더 높은 작품성만 보여준다면 여주인공이 사용하게 될 목걸이 등도 철저한 마케팅의 시각으로 영화에 장치할 만하다. 헐리우드에서 한국영화가 2,2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상영되었다는 사실 자체만 해도 한국 사회에 던져 줄 파장은 매우 크다. 이 점에서 미디어평론가 변희재씨가 ‘신 마케팅 시대의 기원을 열었다'는 지적은 새겨둘 만하다. 또 디워가 무엇보다 한국의 정신사회에 미친 무형의 자산은 경제적으로 다 산정하기도 힘든다(이 부분은 다음 시리즈-'디워와 시대정신'에서 자세히 논하겠다). 이 영화로 인해 한국은 앞으로 어떠한 상상력도 영상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많은 한계가 타파되고 영화산업관계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지평선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메이저리그와 영화산업

전편 디워시리즈에서 필자는 메이저리그에 전성기 때의 박찬호를 10명이상 한국에서 배출한다고 해도 흑자를 얻기 어렵고,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게임일지도 모른다고 한 필자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이저리그를 많이 배출할수록 위성통신비용 등 한국에서 지불할 부대비용도 덩달아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상품은 심감독의 디워처럼 잘만 만들면, 헐리우드 즉 미국의 배급사와 멀티플렉스 등 미국 내의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국 최초로 미국 전역에서 한국의 이무기가 기다란 몸을 비틀며 승천하게 만든 심형래 감독의 노고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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