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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내 메일을 해킹하고 표절했는가?

<디워>에도 분명 개선해야할 약점은 있다


* 편집자주: 이 글에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있으나, 단정적인 표현이 아닌 의혹제기하는 선을 넘지 않고, 필자로부터, 모든 책임은 필자 스스로 지겠다는 약속이 있어, 필자의 양심과 판단을 믿고 게재합니다.

내 메일은 진정 해킹 당했는가?!?

필자는 19일 저녁 9시 부근 인터넷신문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가 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이라는 “군중이냐. 다수냐?” 에서 주장한 핵심적인 내용 때문이었다. 그 글에는 바로 9월 19일 새벽 4시에 내가 뉴욕에 있는 교포독자에게 이메일로 보낸 두 가지 테마가 그 표현조차도 그대로, 고스란히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두가지 내용은 영화 디워의 작품성에 대한 결정적인 약점을 지적한 나의 비평 글임과 동시에 또한 후속 편 ‘디워 II‘ 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디워 II 에서 이런 결정적인 약점만 극복한다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ET가 거둔 흥행을 초월하는 대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이 E-mail을 보내면서 뉴욕에 계신 교포에게 절대로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부탁을 함께 해두었다. 진중권의 글을 보고 난 후, 필자는 급히 교포에게 메일을 보내서 메일의 내용이 드러나는 글을 다른 게시판 같은 곳에 올려 대중앞에 공개한 적이 있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이 영화가 마쵸영화로 공격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내가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던 약점이었지만 필자는 절대로 이 이야기를 대중 앞에 밝힐 수가 없었음을 하늘과 내 양심 앞에 고백한다.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을 바라는 한 지식인으로서, 단지 내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디워에 있는 이 약점들을 구체적으로 밝혀, 무려 300억원에서 700억 원 되는 거금이 투자된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해서 대한민국 영상문화 전체와 또 한국의 미래 자체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내 양심을 밝히는 글이 그 E-Mail 내용의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다. ( E-Mail 내용은 기사 말미에 밝힌다 -시간 날짜와 내용에 단 한자라도 손을 댄 점을 의심한다면 검찰에 고소를 해도 좋음을 미리 밝혀둔다 )

평론가로서 오늘에서야 말할 수 있는 부분

이제 한국에서의 흥행이 끝나가고 있는 이 마당에 그 동안 말할 수 없었던 이 부분을 기사로 올려서 진정한 비평가로서의 책임, 즉 정당한 피드백 기능을 다해서 후속편에서 더 나은 명화가 나오게 해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마지막 책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오늘 오후에 외국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그 분을 뵙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간 9부까지 올린 디워 시리즈 연재물에서 10부 글에서 이 내용을 올려 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이렇게 까지 늦어지고 만 것은 아직 디워가 세계시장에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미국시장에서 한창 상영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한글로 국내에서만 이 비평을 낸다고 해도, 디워의 역사적 의미조차 모르고 오로지 예술성의 잣대로만 재단하면서 의도적으로 까 내리는 세력들이, 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읽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발췌 영작해서 미국 사이트에 올려놓지 않을 까닭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10부 글은 계속 늦어지고 차라리 다른 주제로 10부를 올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진중권의 글에서 바로 내가 보자마자 기절초풍할 만한 내용이 나왔던 것이다.

내가 이메일에 보낸 그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디워 영화는 심형래 감독께서 지향했던 온전한 가족영화에 이르지 못한 가부장적 이데올르기가 반영된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고 남성영화 즉 마쵸 영화라는 점이다. (E-메일 내용)

이 약점은 너무나 커서 ‘왕의 남자’에서 수 십 번 씩을 보았다는 광팬들의 대부분이었던 20대 여성들의 발길을 디워에게서 돌려놓게 만들었다. 또 그만큼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게 있었다. 이 점은 내가 극장에서 관객의 연령별, 성별 분포를 보고서도 확인 바 있다. 의외로 아이들도 적었고 문화의 가장 큰 소비계층인 20대 여성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고 거의가 30대 이상의 남성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디워를 정확히 표현하면 가족영화와 마쵸영화의 중간지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 동생이 함께 보는 가족영화라기 보다는 아버지 엄마, 형 동생이 보는 불완전한 가족 영화와 마쵸 영화의 중간점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관객이 빠진 점에 유의할 것) 내가 영화관을 두 번째 찾았을 때는, 한 20대 여성관객은 디워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를 보겠다고 남자친구를 조르고 있었다.

희생(犧牲)과 가부장적 코드 -- 디워의 약점

필자가 이런 가부장적 남성 영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밝혀 온 일은 이제서야 새삼스럽게 나온 일이 아니다. 아주 옛날에 쓴 글 중에, “가족 동반자살과 에밀레종 설화--진보누리“를 읽어보면 너무나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동반자살은 실은 동반자살이 아니라 ‘무능하고 사악한 생각을 가진 가부장에 의한 명백한 살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 의식의 원류에는 에밀레 종 설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혔고, 또한 임권택 감독의 명화 ‘서편제’를 언급한다. 현재의 멀티플렉스 시절이라면 가히 1,300 만 명도 넘을 만한 수치인 그 당시 120 만명이 감동한 서편제 신드롬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지적했다.

서편제와 디워의 가부장적 코드

영화 서편제에서 필자가 비판한 대목은 아버지가 딸을 명창으로 만들겠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딸에게 약을 먹여서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이다. 나는 이런 구조는 반휴머니즘적이며 반인권적이라서 이에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는 일은 가족동반자살 문화를 양산하는 의식의 원형과 그 문화적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내가 서편제를 마음 놓고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건, 서편제가 이미 상영이 끝난 영화라서 흥행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 무엇보다 영화 디워와는 다르게 이게 국내 마켓에 머물고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 글 뿐 만아니라 ‘요재지이와 구미호 전설에 나타난 의식의 원형--월간<인물과 사상>( 2006. 1월)’ 그리고 영화 ‘영화 클리프 행어에 나타난 희생의 의미’라는 짧은 리뷰 글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 글에서 보다시피 필자가 너무나도 오래 전부터 이런 시각을 갖추고 있었기에 영화 디워가 가진 서사구조에서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세계시장에 진출한다는 점과 또 디워가 작품성이나 예술성을 떠나서 특 A급 CG의 기술력을 선보였음을 높이 샀다.

인문학적 소양은 남에게서 빌리면 되지만 고도의 CG 기술력의 국산화는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이 점으로 인한 한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와 신화와 전설상의 이무기와 용을 영상미로 살려냄으로 해서, 아시아 전체 국가 중에서 동양 용(龍)에 대한 영상적 이미지에 대한 표준(標準)을 한국에서 확립해 버린 그 위대한 업적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인으로서 대중 앞에서 거짓말은 할 수없는 노릇이기에 가능한 영화 디워의 작품성이나 예술성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사실 디워의 스토리라인이 엉성하고 연기가 어색하다는 점은 열성 디워팬들까지 너무나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바다. 이런 마당에 나까지 굳이 이 부분을 이야기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내용은 디워가 가지는 한국영화적 의의를 모르는 사람들의 비난글로도 너무나 넘쳐 흘렀으니까. 다만 필자는 작품성과 예술성과는 별개로, 디워의 서사구조의 장대성 등 작품성과 예술적인 측면 이상의 것이 있음을 충분히 볼 수 있는 시각(Eye)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보다 더 큰 의의를 점하는 한국과 아시아 영화사에서 가지는 디워의 역사적 의의와 인류 발달상에 있어서의 기술의 중요성을 증기기관차의 예나 CG와 안료 등의 소제목으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피력했다. 사실 이것은 디워에 대한 일방적인 폄훼 공작에 대항하여 균형을 찾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억울하게 난도질 당하고 있는 영화 디워를 향해 객관적인 조명을 비춰주어서 비로소 형평성을 유지해 주는 길이기도 했다.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디워의 최대 약점

만약, 필자가 영화 디워를 제작하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었다면 절대로(NEVER) 연약한 여성인 사라가 여의주의 운명 때문에 희생되는 서사구조를 갖고서 대중 앞에 선보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으리라고 하늘 앞에 맹세한다. 심형래 감독님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을 해서라도, 차라리 사라를 사랑하게 된 이든이 사라의 운명을 대신해서 희생되는 구조로 만들도록 조언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영화 디워는 필연적으로 20대 여성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을 것이며, 그 극적 효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최소한 지금 수익의 10배 정도는 능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 CG의 화려함과 함께 세계적인 명화(名畵)의 반열에 확실하게 올랐을 것으로 확신한다.

E-메일에 대한 두 번째 핵심적인 내용은 디워가 왜 흥행에도 지극히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여성의 희생시키는 서사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점인데, 죄송하게도 그건 심형래 감독님의 인문학에 대한 소양의 부족 때문일 것이라고 밝혔다. 영화 클리프 행어에도 여성의 희생이 나오는데 이때는 그 여자를 희생시키는 놈을 사악한 악당으로 그려 냄으로써 관객, 특히 여성관객들의 반감을 사지 않는다. 하지만 디워는 어쨌든 간에 이조시대의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절해야 하는 이조시대의 여인상을 그려 놓은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디워는 절대로 비평가의 눈을 피해갈 수 없다.

다음은 필자의 글을 어떤 분이 2006년 4월 10일 진보누리 쟁토방에 퍼온 글인데, 특히 영화나 소설 등 예술에 종사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 읽어 둘 필요가 있다.

클리프 행어(Cliff Hanger)에서의 희생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한 가지 확실하게 터득한 진리가 있다면 남보고 희생(犧牲)하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악마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희생은 남한테 말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솔선수범해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 클리프 행어(Cliff Hanger)에는 이 희생(犧牲)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현금수송 비행기를 납치한 일당들이 하얀 설원으로 덮인 로키 산맥을 지나면서 식량부족인가 하여튼 일행 중 한 명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이때 그 두목이 가장 친한 여자 동료의 머리에 총구을 겨눈다. 그녀가 설마 하는 두려움의 눈초리로 응시할 때, 그는 비정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면서 싸늘하게 내뱉는다. 희생!(Sacrifice)! 필자는 이 세상에서 남보고 희생(犧牲)하라고 말할 때의 모습이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그 단어를 메아리로 몇 번이고 증폭시켰을 것이다. 필자 생각엔 남에게 희생하라는 말을 내뱉는 인간치고 사이비 교주나 악당이 아닌 경우는 없다. 내가 북한의 인권법안에 반대하는 무리들이나 김정일을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민족주체강성대국을 위해서 인민들이 희생하고 참아라고? 그런 말을 하는 인사들을 볼 때 마다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웃기지 마라! 네가 먼저 굶고 네가 먼저 희생해라. 김정일이 솔선수범해서 희생하고 북한 인권 법안 통과를 반대하는 너희들이 수용소에 갇혀서 인권 유린을 당해봐라.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비수같이 차가운 위선과 사악한 악마성을 발견한다. --- 2006년 4월 10일 / 문화평론가 김휘영

물론 디워에서의 사라의 희생은 전 인류를 부라퀴의 마수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고귀한 희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 희생이라는 점에서 이조시대 열녀가문을 위한 수절과부의 강요된 희생과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디워에서는 사라가 왜 꽃다운 나이 20세에 왜 자신이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가 하는 테마에 대한 내적 갈등부분이 전혀 묘사되지 못했다. 특히 같은 나이 또래의 20대 여성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이를 보는 관객들은 왜 사라가 희생되어야 하는가 하는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은유적으로 장대한 서사(Epic), 억압된 서정(Lyrics) 표현해 두고 디워의 상영이 끝난 후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해서 생산적인 담론을 하려고 했다.

클리프 행어와 디워에서의 여성의 희생, 그리고 이조시대의 수절과부의 희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충분히 디워에 비우호적인 비평가들이 악용할 수 있다. 아니 이는 심형래 감독이 비판을 들어도 별로 할 말이 없는 부분이다. 사실상 심감독은 영화를 출품하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해서 인문학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셨어야 했다. 실제로 헐리웃 블록버스터 <매트릭스>에는 영화 제작자뿐 만아니라 예일대, 하버드대 등에 재직하는 수 십 명의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이 동원되어 브레인스토밍을 한 후에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다. 그 결과 매트릭스에 나오는 오라클이 왜 흑인 여성이 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인종적 성별의 안배까지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300억 이상 투자되는 영화라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심형래 감독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며 또 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건 심형래 감독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영화산업관련자 전체의 문제이자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필자도 영화 <디워>를 보는 그 즉시 이 문제점을 충분히 파악했다. 그래서 필자가 쓴 글에서 ‘디워에는 서사구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풍부한 서사구조를 갖고도 이 정도 밖에 못만들었느냐는 비난을 받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다고 했다.’고 말했다.(6부-8월 20일 빅뉴스)

이런 주장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중권은 자신이 가진 그 내적한계로 인해, ‘서사구조(narrative structure)에 대한 정확한 뜻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확신이 섰었고, 또 필자의 시각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필자는 처음부터 디워의 약점은 진중권이 엉터리로 비난한 ’서사구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풍부한 서사구조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 밖에 못 살려내었는가를 비평해야 하는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 평단에서도 디워의 플롯(Plot)상의 문제점을 말하는 비평가는 나왔지만 그 서사구조(narrative structure)에 대한 비판을 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왜냐하면 그건 평론가로서의 자격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무식하기 짝이없는 발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겠기 때문이다.

만일 진중권이 TV토론에서 디워에 서사구조가 아예 없다느니 하는 상상도 못할 무식함을 드러내지 않고 이 부분을 집중 공략했다면 나도 특별히 진중권을 비판할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내가 먼저 또 함께 느낀 부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지점에서 내 E-Mail에 있는 내용이 진중권이나 진중권 팀에게 어떤 경로로든 노출된 후, 그 내용이 도둑질 당했으리라는 강한 의구심이 심증으로 굳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만약 진중권이 이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더라면, 굳이 만인이 보는 TV에 나와서 “내가 이렇게나 무식한 사람이오“ 라는 광고를 하는 방식으로 영화 디워를 비판할 이유가 있었을까? 마쵸 영화, 그리고 감독의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 이것 둘이면 가장 핵심적인 디워 비판이 되고도 너무나 충분한데도 말이다. 정말 디워를 비판할려면 바로 위 두 부분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진중권이 이 부분을 알고서도 자신의 무식을 한량없이 드러내는 내용으로 전 시간을 할애한 점은 진중권이 진짜 바보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 기사) 디워의 서사구조 ---디워(D-war)와 H-war, 용과 드래곤의 신화,후속편을 기대하며 (4부-2007-08-20 빅뉴스)디워를 비평하면서 ‘디워에 서사구조가 없다’ 란 주장을 하면 자신이 정말 무식한 사람이라는 걸 온천지에 광고하는 꼴이다. 아무리 그가 영화 디워가 싫고 이 영화의 흥행이 못마땅해서 의도적으로 흠을 잡으려고 해도 그 서사구조를 문제 삼다니 정말 황당하다. 진중권은 영화나 문학 더 나아가 변희재의 지적대로 미학 자체에 대한 기본기가 안 갖춰진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백번 지당하다. 미학이야 그의 전공으로 공부는 한국 사람들 중 많이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런 무식한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고 있는 걸 보면, 이게 진중권 자체의 내적 한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즉 심미안이 없거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야 아무리 어떤 목적의식으로 TV에 출연했다고 해도 자신의 내적한계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지혜 정도는 가지고 있으리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디워는 진중권의 무식에서 나온 지적대로 서사구조가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훌륭한 서사구조를 갖고도 그 정도로 밖에 못 살려내었는가 하는 비평이 오히려 어울리는 영화다.”>>

바로 위에 << >>로 표시된 부분이 절대로 사후에 교정된 부분이 아님은 온 넷 상에 떠돌아다니는 필자의 글을 검색해서 그 날짜를 직접 확인해 보면 안다. 필자가 그 많은 글을,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까페나 블로그, 그리고 미디어 다음 아고라 광장 같은 게시판에 있는 글을 다 수정한다는 일은 불가능할 것임을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인간의 감동이라는 서정(抒情 또는 敍情)의 억압

이것이 바로 디워 시리즈에서 필자가 장대한 서사가 미학적인 숭고미나 우아미에서 나오는 장엄함에 이르지 못한 그 간격이라고 지극히 은유적으로 밝힐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다.

이 대목을 자세히 보자.

(참고기사)심형래 감독의 한계는 대한민국의 문화 자체의 한계-- 영화 디워의 스케일이나 서사구조가 너무나 장대해서 그 자체로 어떤 미학의 경지를 압도할 정도였고 가 장엄함을 압도한 부분도 많고 또 CG 기술의 현란함과 정교함이 감탄을 넘어 그 자체로서도 감동의 경지까지 닿아 있을 만큼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한다.심형래감독의 디워는 그 스케일이 장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엄함이라는 숭고미나 비장미를 만드는 데에는 말 그대로 1% 부족했고, 헐리우드를 넘어선 한국의 독자적인 CG 기술은 관객에게 경이와 감탄을 유발시켰지만 그것이 섬세한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부분적인 흠이 분명히 있다. (별로 도와 준 것도 없이 이 부분을 벌써 밝혀서 심감독께 심히 미안함을 밝힌다) :: 이상 빅뉴스 기사--(5부)디워, 성공한 영화에는 분명 무엇이 있다- 디워현상과 사육제 신화 코드 2007.8.24

아는 것, 그리고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

솔직히 필자는 이런 걸 현미경으로 보듯이 전부 다 보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세세한 내용을구체적으로 밝혀서 디워의 흥행에 해를 끼치는 일은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절대로 할 수 없었던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 모두에게로부터, 이런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두분의 가르침은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갖기 위해서 지식을 쌓고 정신적 수련을 해야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다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셨다. 막대한 투자로 만들어 진 디워가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이 시점에서, 아무리 필자가 이런 약점들을 송두리째 다 알고 있었다 한들, 절대로 말할 수 없었던 부분이다. 적어도 그 상영을 끝내기도 전에 이런 비평을 쏟아 낼 수는 없는 일로 판단했다. 솔직히 이 일로 마음고생도 심하게 했다.

내가 보낸 메일함에는 이 뉴욕의 교포에게 디워의 성공을 위하여 내가 직접 번역한 용과 드래곤의 신화에 대한 영역본도 들어 있다. 나는 그 분이 그 영역본을 미국의 유명 사이트에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올려 주기를 요청했음도 밝힌다. 난 이 해외 교포의 한국에 대한 애정을 믿었으며, 또한 메일 말미에 절대로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는 단서를 달아 놓았다.

내 메일해킹과 표절 여부에 관한 의심이 들게 하는 제(諸) 사항들

1)내가 뉴욕에 메일을 보낸 시간은 정확히 9월 19일 새벽 04시 22분이다.
2)진중권의 기고글이 공개된 시각은 09월 19일 17:44:16 (정확하게 13시간 22분의 시차가 있다)
3)내 메일에 나와 있는 내용이 그 표현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일치한다.

a) ‘마쵸영화’,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 여기서 마쵸영화는 내가 급하게 메일을 휘갈기듯 쓰느라 '가부장적 세계관의 영화'라고 쓰야 할 용어였는데 그러면 설명이 너무 길어질 것 같고 또 사(私)적인 E-Mail이라서 누가 볼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냥 급하게 쓴 용어에 불과하다.

위 본 글에서 보듯이 사라의 희생과 조선시대 열녀의 희생은 전혀 다른 의미다. 하나는 전 세계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온 고귀하고 자발적인 희생인데 반해, 또 하나는 유교사상에서 오는 반봉건적, 강제적 희생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흥행의 측면이나 작품의 예술성의 측면 모두에서 중요한 건, 이 구조에서 한 아리따운 여성이 20세 생일 맞는 일이 축복이 되지 못하고 마치 티벳이나 인도나 네팔의 여자 성모(聖母)로서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 미화시키는 영화에 여성들이 반감을 가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는 것을 심형래 감독이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 심감독께서 가진 천부적 직관력에 필자가 말한 이런 점을 미리 파악 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디워에 나오는 사라의 희생은 비록 그 내용은 다를 지언정, 표면적으로는 이조시대 정절이나 열녀라는 유교적 가치로 포장된 폭력에 희생되는 가여운 수절과부를 그린 모습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이 차이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설명할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지성인들 밖에 없다.

단지 이 나이 또래의 여성관객들은 이에 대한 거부감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해도 그냥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항의할 뿐이며 이는 흥행에도 작품성에도 커다란 암초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마쵸영화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의 코난 시리즈(이걸 서양에서는 ‘Saga’라 표현한다)같은 영화를 말한다. 그런데 진중권의 글에서는 전혀 여과 없이 고스란히 나왔다는 점도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이상하다.

b) 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라는 말은 철학의 부재나 다른 용어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인데 진중권이 기고한 글에도 정확하게 단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는 점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c) 다음 진중권을 기고 글이 나온 신문기사에 나온 알리바이성 글이 더욱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진씨의 글에 대해 ‘문예중앙’ 측은 “논란의 소지가 있어 게재 여부를 고민하기는 했지만 ‘디 워’ 논쟁 초기에 받았던 글이라서 새로운 불씨를 지피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라고 나온다.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일단 너무나 어색하다. 이는 의도적으로 누군가 질문을 한 척하면서 이 기고 글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대목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계간지를 발간하는 문예중앙 측은 어떤 글을 싣던 말던 굳이 그 이유를 대중에게 밝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없다. 즉 진중권이 19일 오전이나 오후쯤에 원고를 보내고 이를 미리 받았다고 말해 달라는 언질을 주었다면 충분히 나올 만한 알리바이성 해명으로 충분히 의심해 볼만한 대목이다.

그리고 새로운 불씨를 지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속단이다. 이 글은 디시갤러리에 올라 간 후 많은 사람들이 관련자들 즉, 김정란 교수와, 김규항 그리고 강준만 교수를 조롱하는 글로 악용되고 있다. 여기서도 필자가 검색해서 확인 한 내용은 이 기고 글이 디씨갤러리에 올라온 최초의 시각이다. 마초로 검색하여 이 글을 찾아 추적하니 역시 2007-09-19 18:47:46으로 13시간 22분의 시차 이후(14시간 27분)다. 다음 레디앙에 진중권이 올린 시각은 09월 20일 (목) 11:11:29이다. 이렇게 온 사방에 올리는 사람이 이 내용을 어떻게 참고 기다렸을까도 진정으로 불가사의다. 필자야 디워에서 보호해야할 소중한 빛 같은 걸 미리 본 사람이라서 이 점을 속속들이 알면서도 참을 수 있었지만 진중권이야 자신의 명예와 무식함까지 깍여가면서 디워를 비평 아닌 비난했던 사람이 아닌가?

<필자의 확인과정>
이 신문기사 글을 본 후 기절초풍할 것만 같았던 필자는 일단 일련의 확인과정을 거쳐야 했다.

가장먼저,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 YES24와 영풍 교보문고의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보니 어느 한 곳도 문예중앙 가을호(119호)가 비치되어 있는 서점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알라딘은 일시품절, YES24는 Yes24-상품준비(09월28일)출고완료(09월28일)배송완료(09월29일)로 나온다. 나머지 교보문고 영풍문고 인터넷 서점에는 검색조차 안됐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 문예중앙(랜덤하우스코리아) 측에 직접 전화를 해 보니 처음 전화를 받으신 홍*연님은 가을호는 아직 인쇄도 안들어 갔으면 추석 이후에 나온다고 했다. 더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 내선으로 들어가 보니(TEL:3466-88**)에서 김*정 씨와 통화가 되어서 이 책이 언제 나오고 지금도 기고를 받느냐고 하니까, 이 분께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을호가 벌써 9월 5일 날 나와서 시중 서점에 배포되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필자가 괜한 의심과 쓸데없는 상상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맥이 빠졌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진중권이 이 글을 기고한 시각은 적어도 필자가 메일을 쓴 19일 새벽 4시 이전으로 소급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결코 풀리지 않는 묘한 의구심을 결코 떨칠 수 없었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진중권이 그동안 “평론가적 자질이나 미학적 지식 전반에 대한 기본기조차 의심당할 정도로 무식한 말들을 대중앞에 쏟아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마지막 의문은 결코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그의 후배 변희재의 지적대로 미디어에서 네임밸류를 올리기 위해서 나가지 말아야 할 곳까지 나서면서 온갖 짓까지 다해온 진중권의 그간 행적으로 보아서도 절대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마지막으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 직접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두 서점 담당자 모두 문예춘추 가을호(199호)는 아직 입고되지 않았고 10월 이후에야 나올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

필자가 랜덤하우스 측에 전화로 확인한 바로는 9월 5일 날 발간되어 시중에 이미 배포되었다(김*정사원)고 하는데 혹 착오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재고파악을 부탁한다고 더 자세히 요청하니까, 서점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 물류센터인데 아직 물류센터에도 입고되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랜덤하우스 측으로 전화 문의를 해 보니 점심시간이라 한 시간 정도 전화가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1시 40분 즈음에 다시 전화를 거니 이번에는 남자 분이 받으셨는데 백** 편집자라고 하셨다. 여기 직원은 9월 5일 인쇄되고 시중 서점에 다 배포되었다고 하는데 교보 영풍문고에는 전혀 입고도 안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 아까 전화 받은 그 사원의 성함을 물으니 김**이라 가르켜 주었고 백편집자께서는 문예중앙은 전국 서점에 다 배포된다고 했다. 그래서 교보 영풍문고 그리고 유명 인터넷 서점에도 이 책이 아직 나온 데가 없다고 말하고 나서 다시 영풍문고에 전화를 걸어서 직원 이*희씨게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해서 다음과 같은 요청을 했다. “출판사 랜덤하우스 측에서는 시중에 이미 배포되었다고 했는데 대한민국 최고의 서점인 교보문고,영풍문고(가나다순)에도 없다고 하니 어찌된 일이냐, 혹시 광화문점에는 없더라도 다른 지점에 책이 있는 것 아니야?” 라는 질문을 하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전산망으로 다 연결되어서 전국 지점의 상태가 한꺼번에 다 나옵니다” 필자가 “출판사에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줄 수 없느냐?” 고 요청하자, 담당자는 친절하게도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면서 직접 랜덤하우스 측으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방금 백편집자님과 통화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15 분 정도 동안 출판사측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고객님, 지금 전화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또 전화한 후에 ” 이번에도 전화를 안 받네요“ 하는 전갈이 내 수화기로 들렸고 ”고객님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확인전화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전화문의는 그만두었다. 약 10여분 후 전화를 받고 보니 내일 21일에 입고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라고 했다. 이것이 내 확인과정의 전말이다.

시점(時點)의 문제

이 시점이 왜 이렇게 중요한 논점인가? 내가 뉴욕 교포에게 이메일을 발신한 시각이 정확하게 19일 4시 22분이었으므로 만일에 진중권의 저 표현이 이 시각 이전에 대중에게 공표되었다면 내가 오히려 표절의혹에 휩싸여야 하는 시간적인 문제가 발생하기에 하는 말이다. 다 알다시피, 이메일에 이미 발신된 내용은 그 날짜나 내용을 임의로 바꿀 수 없다. 삭제나 보관만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약간이라도 바꿔서 다시 발신하면 새로운 시각이 찍히고 만다. 고로 내 쪽의 시간적 알리바이는 확실하다. 만약 이 일이 불거져서 필자가 검찰에 소환된다 하더라도 명확한 증거로 제출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랜덤하우스측 사원인 김*정씨는 왜 한참 뜸을 들이다가 9월 5일날 인쇄완료되고 시중에 배포되었다고 하셨을까? 교보 영풍문고 강남점에도 샅샅이 문의한 결과 확인된, 아직 입고조차 되지 않은 이 책의 배포시기에 대한 고의나 어떤 착오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필자의 의구심은 진중권이 랜덤하우스측으로 원고를 보낸 이메일이나 팩스에 나온 날짜와 시각에 대한 확인이 있기 전에는 쉽게 풀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만약 이 일로 진중권이나 랜덤하우스 측에서 소송을 걸어온다면 필자는 언제든지 응할 자세가 되어 있다. 물론 공교롭게도 우연의 일치가 일어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왜 여태까지 디워를 비난하기 위해서 그렇게 혈안이 되어 막말까지 퍼부어가면서 그의 한량없는 무식함을 자랑하던 진중권이 왜 이렇게 ‘진정으로 내용이 있는 비평’은 알면서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영원히 미궁에 남는 셈이다.

십계와 벤허, 그리고 디워에서 보는 그레이트 스펙타클

다시 말하지만 심형래 감독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모세의 일대기와 유대인들의 탈애굽기를 그린 영화인 십계 (The Ten Commandments, 1923)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일까? 율브리너와 찰튼 헤스톤이 열연한 이 영화에서 수십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장면을 뽑으라면, 누가 뭐래도 그건 “홍해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장면”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왜 휼브리너와 찰튼 헤스톤의 멋진 연기가 전혀 지목되지 않을까? 이건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두고 기억에 저장하고 부를 때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통일시키는 원리가 작용되기 때문이다.

“오 신이여, 이 영화를 진정으로 내가 만들었나이까?”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말로 유명한 세계적인 명화, 벤허 (Ben-Hur, 1959)를 보자. 이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물어보자? 한결같이 벤허와 멧살라의 전차 결투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걸 두고 그레이트 스펙타클(Great Spectacle)이라고 표현해 왔다. 보통 그레이트 스펙타클이라는 명칭이 붙으려면 그 영화를 본 후 평생을 두고 잊혀 지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어야 한다.

이제 심감독이 만든 영화인 디워를 보자. 디워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장면을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꼽는다. 생각해 보라. 대한민국이 존재한 이래로 무수한 영화가 만들어져 왔지만, 디워의 이 장면만큼 충격 그 자체를 던져 준 영화가 있었는가? 필자는 단 한 개도 없었노라고 단언한다. 이것이 디워가 다른 영화와 비교해서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차이점과 힘이다.

필자가 알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은유적으로만 말해왔던 서사구조상의 취약점(사실은 서정상의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레이트 스펙타클이 한국에서 무려 830만 명에 이르는 관객의 발길을 모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한 판단이다. 필자의 이 시각은 디워의 미국개봉 후에 뉴욕 타임즈 기자가 “Who Needs Plot When You’ve Got Dragons?-용이 나오는데 플롯이 왜 필요한가?” 라고 설파한 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적어도 이 기자는 영화의 핵심을 꽤뚫어 볼 줄 아는 고도의 직관을 갖춘 천재임에 분명하다. 심형래 감독이 플롯보다 CG에 주력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했음에 분명하다. 이런 직관과 천재성은 심형래 감독이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했고 그 결과 오늘의 디워가 탄생했다. 다만 여기서 필자가 아쉬워 하는 점은 이런 직관에 인문학적 세계관이 조금만 더 가미시켜, 20대 처녀를 희생시키는 구도만 피했더라면 이번 흥행의 수십배에 달하는 흥행을 올렸을 것임에 틀림없고 또 세상에서 올해의 영화로 디워가 뽑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판단한다.


영화 십계를 보러 가는 사람들 치고 ‘홍해바다가 실제로 갈라지는 장면’을 보겠다는 목적이 없이 영화관을 찾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벤허에서도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달리는 전투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영화관을 찾아간 사람이 있었을까?

흥행요소

벤허에서 보인 그 전차결투 장면은 그 영화의 주제와 별 연관성도 없는 단순한 볼거리였음에 주목하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막대한 돈을 들여서 그 장면을 흥행을 위한 안전장치로 넣었음에 틀림없고 감독의 의도는 정확히 달성되었다. 디워를 보러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에게 애국심 코드를 말하는 비평가들은 제발 공부를 다시 하기 바란다. 관련 전공공부도 공부지만 무엇보다 ’관객(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부터 선행하기 바란다. 디워가 가진 이런 ’그레이트 스펙타클’을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 애국심 코드를 내세우는 건, 매년 진도 부근으로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보려고, 그 외진 곳까지 몰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두고 애국심코드 때문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가, 아니 정확하게 바닷물이 빠져 그 가운데 땅이 잠깐 드러나는 일에 서사구조가 있어서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작품성이나 예술성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신기한 볼거리를 보러 가는 것
뿐이다. 이를 흥행요소로 진도시가 매년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을 생각해 보라.

영화 십계(十戒)에 나오는 '바닷물이 위로 솟구치며 갈라지는 장관’도 아니다. 짧은 시간동안 아주 초라하게나마 육지가 배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러, 거의 하루를 걸려서 불편한 교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먼 곳으로 찾아 가는 관객들이, 그것보다 훨씬 대단한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장관‘을 보기 위해서 ’아주 가까운‘ 영화관을 찾은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손쉬운 일이다. 더구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장면‘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수 천 년 역사이래로 축적되어 온 ’집단 무의식의 원형(archetype)‘을 형상화한 일임을 알면 더욱 그렇다.

필자는 대한민국에서 출품된 모든 영화를 모아놓고 가장 충격적이고 인상적인 한 장면을 꼽으라면 당연히 영화 디워에서 선보인 이 장면이 뽑힐 것으로 확신한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평론가가 단지 자신이 이런 엄청난 흥행요소를 못 찾아냈다는 이유로 애국심코드를 거론한 일은 작품과 관중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나아가 나는 ‘평론가가 아니라 불치의 색맹증세를 가진 바보천치요‘라고 고백하는 일에 다름없다. / 김휘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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