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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인물탐구> 박근혜 전 대표

첫 여성대통령 도전나선 `대통령의 딸'

  • 연합
  • 등록 2007.06.11 09:17:00

박근혜(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는 `대통령의 딸'이다.
그가 아버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아니 그 정신을 이어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대통령의 자제가 대통령에 도전한 것도, 여성이 그렇게 한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박근혜에게서 `희망'을 본다는 뜻이다.
최고 권력자의 딸로, 그리고 퍼스트레이디로 `평범하지 않은 경험'을 했던 18년의 청와대 생활은 그에게 `원칙과 신념', `애국과 애족'을 핏속의 DNA처럼 체화되게 만들었다.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감당하기 힘들었던 인고의 18년을 보내면서는 강인함을 배웠다. 위기의 순간에 발휘해온 놀라운 정신력과 근성의 원천이 된 셈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딸이 `공주'라고 불릴 만큼 가부장적 권위가 남아있는 우리 사회, 부친에 대한 극단의 평가는 그가 자신이 소망하는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일지도 모른다.
◇`군인 박정희'의 딸..청와대 입성 = 박 전 대표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2월 군인인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 1남 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되던 해인 1961년 당시 소장이던 부친은 5ㆍ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2년 후인 63년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박 전 대표는 이 때 청와대에 들어가 18년간의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박 전 대표는 큰 영애로서 부친인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지도자의 모습을 몸에 익혀가게 된다.
이런 주변 분위기는 박 전 대표가 문과였지만 대학(서강대) 입학 시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자공학과(70학번)를 선택하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박 전 대표는 당시 한국 전자산업의 대부인 김완희 박사가 청와대에서 부친을 만나 `우리나라가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공계를 지원했다고 술회했었다.
◇22살의 퍼스트 레이디 = 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 전 대표는 그해 8월15일 어머니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전해듣고 급거 귀국했다.
육 여사가 8.15 경축식장에서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절명한 것.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큰 충격을 받은 박 전 대표 였지만,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있을 틈도 없이 22살의 나이에 `퍼스트 레이디' 대행을 시작했다.
이후 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그는 5년여간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대행했고, 이 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조국,민족,국가라는 단어들이 깊이 각인됐다고 한다.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유명한 퍼스트 레이디 시절의 일화 하나.
미국이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당시 카터 미국대통령이 방한했다. 퍼스트 레이디 박근혜는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여사를 만나 "먹고 살기도 빠듯한 현실에서 우리 국민에게는 인권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하다"면서 여러가지 예시를 들어 설득했고, 로잘린 여사가 이를 카터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한미 동맹의 위기 국면을 넘기는데 중요한 막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근혜 최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당시 꼼꼼히 기록하고 챙기는 습관이 유별났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직원들은 `추위가 빨리온다', `눈이 많이 온다'는 기상 예보만 나오면 긴장했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직접 담당자들을 불러 "전국을 빠짐없이 챙겨 피해가 없도록 준비하라"며 수첩속에 그들의 보고를 메모하곤 했다는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요즘 `수첩공주'로 불리게 된 시발이 된 셈이다.
◇청와대를 떠나다..18년간 `인고'의 세월 = 79년 10월26일 박 전 대표는 또 다른 슬픔을 겪는다. 바로 부친인 박 전 대통령의 `서거'.
사고가 일어난 지 몇 시간 뒤인 27일 새벽 1시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직접 관저로 올라와 잠자리에 들어있던 박근혜 영애를 급히 깨운 뒤 박 전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전했다. 이 때 그의 첫 마디는 "지금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국가안보가 DNA처럼 피 속에 박혀 나온 조건 반사적 이야기"라고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국은 격랑속으로 빨려들면서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됐고, 그 와중에서 박 전 대표는 청와대를 떠나게 된다.
이후 그가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돼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1998년까지 18년의 기간은 박 전 대표에게는 암흑기와도 같았다.
정권의 종식과 더불어 시작된 과거 청산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 근대화의 주역, 박정희 신화'는 만신창이가 됐다.
아버지 체제 아래에서 혜택을 받고 존경을 표하던 이들이 대부분 등을 돌리고 선친을 욕했으며 동생들은 양친을 잃은 충격과 표변하는 `세상 인심'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으로 방황했다.
그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자신의 심정을 담은 일기 모음집인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책 곳곳에는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배신하는 사람의 벌은 다른 것보다 자기 마음 안의 무너뜨려서는 안되는 성(城)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점, 그래서 한 번 배신을 함으로써 배신하지 않으려는 저항감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이다".
이 시기 박 전 대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학교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맡아 선친의 역사적 정당성을 외롭게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주목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신적 지평을 넓히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섭렵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고 한다.
◇정치 입문..그리고 대권도전 = 박 전 대표는 97년 11월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대선 유세 지원활동을 벌이면서 사실상 정치 활동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의 공식 정치활동은 지난 98년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97년 IMF 경제위기로 위기에 빠진 국가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정계입문의 변이었다.
박 전 대표는 2000년에는 당 총재 경선에 출마,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등을 차지하며 부총재로 당선됐지만 2001년에는 이회창 대세론에 반발, 상향식 공천, 당권.대권 분리 등 `7대 당 개혁안'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하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파로부터는 당시의 `탈당 전력'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박 전 대표는 이 기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철도연결', `금강산댐 공동 안정성 조사',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이회창 전 총재가 이후 박 전 대표가 요구한 개혁안을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 2002년 후반 한나라당에 재입당했다.
그가 `정치인 박근혜'로 거듭난 것은 공교롭게도 불법대선자금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고 나서다.
이른바 `천막당사' 시절 그는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며 개헌저지선을 확보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한나라당을 구한 `잔다르크'로 불리면서 `위기에 강한 여자 박근혜'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5차례의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40대 0의 완승을 거뒀다. 그의 재임기간 여당 대표는 8명이 바뀌었다.
박 전 대표가 처음 대표로 취임할 당시 당 지지율 7%에서 작년 6월 퇴임시에는 지지율이 50%에 육박하는 당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지난해 6월 이임사에서 "탄핵역풍 속에서 대표가 된 뒤 당의 간판을 떼어 들고 찬바람 부는 천막당사로 걸어간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 짧은 길이 천리 가시밭길 같았다"고 회고했었다.
대표 재직시절 그의 리더십에 얽힌 일화들은 수도 없이 많다.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비주류 수장격인 홍준표 의원을 당 혁신위원장에 임명해 당 개혁안을 마련하는가 하면, 여권이 2004년 말 국가보안법 폐지를 시도하고 사학법 개정을 시도했을 때 가장 앞장 선 것도 그였다.
한마디 말로 정국을 압도했던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지원 유세 당시 테러를 당했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선거 판도를 바꿨는가 하면, 금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 개헌 제안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말로 한나라당과 지지세력의 정서를 정리해 내기도 했다.
특히 최근 이 전 시장과의 경선룰 논란 과정에서는 `천표 줄테니 원칙대로 하자'거나, 경선 불참을 시사하면서까지 경선규칙 변경 불가를 고수해 결국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양보를 얻어낸 것도 고집스런 `원칙주의자'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다.
박 전 대표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자신의 선친을 꼽는다. 어느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고, 원칙을 지키는 리더십을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대통령 출마를 공식화 한 뒤 지난 2월 미국 하버드대에서 초청특강을 한 자리에서 그가 `I am in to save my country' (조국을 구하기 위해 대선에 나선다)라고 한 것은 비단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말을 인용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


(서울=연합뉴스) sou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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