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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봉준호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영화

봉감독은 브랜드에 안주말고 초심으로 돌아가 거듭나야

【빅뉴스=서울】김휘영의 문화칼럼 = (경고) 본 평론은 아마도 대한민국 영화감독들 중 가장 많은 매니아를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봉준호 감독의 영상 화법의 한계를 신랄하게 지적한 비평입니다. 그러므로 봉준호 감독 매니아님들께서는 혹시 심장마비가 올 지도 모르니 걱정되는 분들은 사람들은 신속하게 <뒤로가기>를 클릭하기를 정중히 권합니다. - 필자

흔히 영화를 감상함에 있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한국 영화의 현실에 언제나 부합하는 말일까? 곧 누적 관객수 500만을 돌파할 것이 확실시되며 한국 문화계를 뜨거운 불판으로 달구고 있는 영화 <설국열차>에 관해서는 30% 정도는 맞고 70%는 틀린 것 같다. 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일단 재미있는 예부터 보자!

민수와 요나- 한국인 배역 송강호와 고아성

봉준호 감독이 시사회에 나와서 왜 하필이면 그 많은 한국이름 중에서 남궁민수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부르기 어렵고 독특해서 지은 이름이라 했다. 하지만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봉준호 감독의 명백한 트릭일 뿐이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이 두개의 이름짓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성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름이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대한 리더 모세(Moses :정확한 영어 발음은 모이제스)의 영도하에 애굽(이집트)를 탈출하는 스토리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는 (성서, 민수) 그리고 (성서, 요나)로 네이버에 통합검색해보면 우수수 쏟아진다.

민수기 - 제목 :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다

여기서 계수(計數)란 ‘숫자를 세다’는 의미다. 성서를 펼쳐보면 "00의 아들 00를 전투에 포함시켜라!" 이런 내용이 길게 열거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모세가 여호수와에게 전투에 나갈 자를 소개하고 지정해주는 부분으로 <설국열차>속 성자(聖者) 길리엄이 커티스에게 투쟁, 즉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보안 설계자를 소개해 주는데 하필이면 민수다. 봉테일이라는 닉네임이 있을 정도로 디테일한 측면까지 세심한 신경을 쓴다는 봉감독이 시사회에서 설명한 대로 ‘독특하고 어렵다’고 해서 발음도 정말 어려운 남궁민수를 선택했을 리가 없다.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를 가르키는 이런 수법은 가히 오마주(hommage)라 부를만 하다.

요나서 – 제목 : 요나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다

이제 영화를 본 사람이든 예고편만 본 사람이든 간에 왜 고아성의 극중 이름이 요나가 되었는지 알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까지는 스포일러성이라 필자가 상세히 밝힐 수는 없다. 하여간 이 영화의 줄거리와 '요나'라는 이름은 형태상으로 매우 잘 어울리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필자가 이 점을 밝히는 건 봉감독이 시사회에서 관객을 속이는 트릭을 쓴 것을 비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사실 영화감독에게 이 정도는 전혀 비판할 내용에 속하지도 않는다.

노래의 날개위에 그대를 보내오리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음악이 한곡 나오는데 바이올린 곡이다. 조금 연주하다 중단한다. 클래식 성악곡 부르기가 필자의 오랜 취미고 한때 참 즐겨 불렀던 곡이라 본인도 모르게 같이 따라 독일어로 흥얼거리게 되었는데 이 노래는 독일 시인 하이네의 시(詩)에 멘델스존이 작곡한 참 아름다운 노래다. 그런데 한국에는 ‘노래의 날개위에(Auf Flugeln des Gesanges)로 잘 알려져 있다. 노래 가사를 음미해 보면 대부분 “노래의 날개 위에 그대를 보내오리” 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시작한다. 이를 극의 전개에 대입하면 절묘한 알레고리임을 잘 알 수 있다. 이 알레고리는 봉감독의 대단한 점이기도 하다. 한데 필자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다. 그 시선이 닿는 곳은 봉준호 감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이는 봉준호 감독에게나 한국 영화계 전체를 위해서도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함은 이제 한국 영화도 구태의연한 틀을 확실히 깨야 할 때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 2부에서 계속)

글 : 김휘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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