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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 지식인 진중권이 퇴장해야 할 때

붉은악마와 디워팬, 억지 파시즘과 건강한 사육제


파시즘과 2002 월드컵

2002년 월드컵의 열기는 가히 광기에 가까웠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모든 감각이 월드컵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스포츠 종목보다 축구가 국가주의와 파시즘에 이용되고 동원되기 쉬운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일면에는 저런 광기가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과 폴란드 경기에서 해방 이후 월드컵 첫 승을 한 역사적인 그 날의 다음 날 새벽 무렵, 길가에서 내 앞을 지나간 두 20대 여성의 모습은 나의 이런 생각이 시대에 너무나 뒤떨어진 기우(杞憂)였음을 즉각 알아채게 했다.

키가 작고 날씬한 한 여성과 키가 훤칠하고 약간 통통하게 보이던 두 여성이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유난히 뽀얀 그녀들의 피부였다. 그 흰 얼굴에는 빨강 파랑의 둥근 태극과 검정과 흰색으로 팔괘 등의 각종 문양이 즉석 문신처럼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건강하고 싱싱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여성 다 온 몸은 대형 태극기가 그녀들이 입었어야 할 옷을 대신하여 몸매를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태극기 두 개를 박스형으로 꿰어 매어 상체를 두르고 있으면서, 미끈하게 뻗은 두 팔과 희고 탄력 있게 드러난 허벅지가 다 드러나 있었다. 어찌 보면 태극기로 중요 부분만을 살짝 가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외설스럽다거나 또는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중요한 상징을 가지는 태극기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 멋지고 건강했다.그랬다. 축구와 히틀러를 연결 시켜서 파시즘적 광기가 아닐까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대한민국의 붉은악마운동의 열기는 오히려 파시즘을 확실하게 쓰레기장으로 보내서 소각시켜 버렸다. 대한민국 역사 이래 어떤 지성인들과 문화평론가의 주장과 사상으로도 타파하지 못한 '태극기에 대한 금기'를 대중지성은 일거에 타파해 버린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의 거리 응원의 물결은 결코 특정 정치세력에 동원 것이 아니었다. 그때 보여준 거대한 응원의 파도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에의 갈망이었다.

이 희망과 건강이 넘치는 나라를 향한 몸짓은 아직도 국가주의의 망령에 벗어나지 못한, 북한 인민민주의공화국에서나 볼 수 있는 집단 매스게임이 아니었다. 북한이 세계 앞에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아리랑 축전에서의 집단 매스게임에서 필자는 그들의 약동하는 힘을 느끼기 보다는 극소수의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동원되고 의도적으로 조직되고 잘 훈련된 허수아비들의 허우적거림을 본다. 이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 3 에서나 볼 수 있는, 사막이 되어버린 거대 도시 한복판에 모인 좀비들의 허우적거림에 다름 아니다. 주체사상의 국가라는 나라에서 오히려 주체성이 박탈당해버린 유령들의 슬픈 아우성을 듣는다.

사육제(謝肉祭) 코드

인터넷을 소통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붉은악마되기 운동(Be the Reds Movement!)'은 ‘이성(理性)을 잃은 군중(群衆, crowd)’이 아니라 ‘지성(知性)을 갖춘 대중(大衆, people)’의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우리는 여실히 체험한 바 있다. 그 결과, 오히려 파시즘의 절대적인 도구이며 신성불가침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표상인 태극기가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우정의 대상이 되어 자연스럽게 대중의 품에 날아 든 혁명적인 일이 났던 것이다. 필자는 이 현상을 보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에서 발원해서 면면히 이어지던 팔관회나 연등회 등의 범 국민적인 민속 축제가 사라진 이래로, 축제다운 축제가 아예 사라져 버린 대한민국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축제의 한마당‘이 형성된 것임을 파악했다. 그래서, 이에 사육제 코드 및 한국적인 대동제 코드라고 명명했었다.

이는 과거 전두환 독재시절, 국풍(國風)운동처럼 위로부터 동원되거나 의도되지 아니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축제였다. 붉은 악마운동이 얼마나 건강하고 반(反(반))파시즘적이며 또 참다운 대중의 지성을 견지하고 있었는가는 그들이 광고비로 모은 돈 7,000 만원을 전부 연변에 있는 조선족 축구단에 기증한 아름다운 행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실제로 정치에서는 월드컵열기의 후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정몽준 후보가 변두리 정치인 노무현조차도 이기지 못한 일로도 잘 나타난다. 건강하고 약동적이며 진취적인 대중의 참여현상인 사육제코드, 즉 대동제코드는 심형래 감독과 영구아트가 제작한 영화 <디 워>에도 이어졌다.

진중권의 파시즘

엉터리 평론가들에 반발하여 대중지성을 형성한 열성 디워팬들의 반발에 진중권이 그만이 가진 미디어 권력자로서의 칼질은 진중권이라는 한 ‘무식한 평론가(김휘영)‘ 혹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 철학자(김석수 칼럼니스트)‘의 참혹한 지적 파산선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김석수님의 발언은 틀렸다. 진중권은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대중 앞에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이나 이야기를 내어 놓은 적이 없다. 그가 미디어에 기고하고 있는 글은 거의 전부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이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짜깁기한 글이다. 언제쯤 진중권의 글에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볼 수 있을까? 서구에서 나와서 이미 화석화된 파시즘 논리를 제외하고.

오현경과 박근혜

진중권이 그렇게 파시즘의 대명사로 비난을 퍼부었던 박정희의 친딸 박근혜가 경선에 깨끗이 승복하는 시대, 또 불과 10년 전만 해도 숨겨야 했던 연예인들이 공공연히 이혼을 발표하는 시대로 성숙된 오늘날의 한국 대중에게 파시즘의 잣대가 가당키나 한 짓인가? 말도 많던 도덕주의자들이 많이 사라져서 말도 많았던 탤런트 오현경씨 조차도 우리의 아름답고 순결한 비너스로 다시 TV 앞에 복귀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오현경씨에게도 축하드리지만 문화평론가로서의 나의 축하는, 놀라울 정도로 성숙해 가는 한국 사회 자체에 대한 축하도 깃들여 있다. 사실, 오현경씨를 보고 우스꽝스런 도덕주의자이자 위선자들이 손가락질을 해대던 그 시절, 필자는 대한민국이 부끄러워서 처음으로 이민가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그녀에 무슨 잘못이 눈곱만치라도 있었던가?

진중권의 매명(賣名)책략

여기서 진중권의 속마음을 여행해 보면 분명 다음과 같지 않을까? ‘내가 독일까지 가서 배워 온 지적 무기가 파시즘뿐이므로 당신들은 나 진중권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모두 파시스트가 되어 주어야겠다. 내가 당신들을 파시스트나 애국주의적 광기라고 했다고 해서 당신들이 아무리 항의하고 반론해도 당신들의 글은 기껏해야 인터넷 게시판이나 카페 정도에나 실릴 것이기 때문에 나는 전혀 무섭지 않고 개의치도 않는다. 나 진중권에게는 당신들이 갖지 않은 미디어 권력이 있으므로 언제나 승리는 내 것이다. 당신들은 논리와 진실이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겠지만 그건 세상을 모르는 듣보잡들이나 하는 소리다. 사실은 특히 이 분야는 원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거짓말도 백 번 만 하면 진실이 된다는 선전 선동술의 귀재인 레닌의 말도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당신들이 인터넷에서 하릴없이 딱총을 따콩따콩 쏘아댈 대, 나는 TV에 나가서 대포 몇 방을 펑펑 쏘아올린 후, 계속 우겨대기만 하면 된다. 당신들이 욕설을 하고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나를 칭찬하는 것으로 알고 양 손을 벌리고 받아들이겠다. 당신들의 욕설 비방은 나를 더욱 유명인사로 만들어 주는 노이즈 마케팅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어찌 생각하면 참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건 욕설이나 비방이 아니라 정교한 논리로 내 말을 반박해 오는 일이다. 내가 한 말이 얼마나 무식한 주장이었는지 또 내 논리가 왜 엉터리인지 하는 글이다. 그런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으므로 절대 논리적인 글은 올리지 마라! 나 진중권이 당신들에게 바라는 건 당신들의 욕설이나 감정적 배설이지 당신들이 날카로운 논리에 바탕한 비판 글이 아니다. 그런 글이 올라오면 그땐 나는 블로그를 닫아 버리겠다.

실제로 진중권은 누리꾼들이 특별한 준비없이 자신의 블로그로 항의하러 갔을 때는 블로그를 활짝 열어놓고 “아그야, 잘 놀다 가라, 반장 뽑아라“는 식으로 비아냥대고 배경음악까지 깔아주는 여유를 부렸다. 속으로는 악플 하나하나가 자신이 더 유명해지는 응원이고 또 그게 앞으로 굴러올 돈(money)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빅뉴스에서 필자의 논리적인 반론 글이 나오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의 엉터리 주장에 논리로 맞서기 시작하자, 그의 블로그를 닫아 버렸다. 악플을 자신이 유명세를 올리는 수단 정도로 알고 있는 진중권이 왜 자신의 블로그를 닫아야 하는 최악의 수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그가 그렇게 바란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제대로 된 논리적인 비판'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TV까지 나와서 온갖 비평 아닌 비난을 퍼부어 놓고서는 이런 식으로 블로그를 닫는 건 명백히 게임의 룰을 위반하는 짓이다. 악플이 수 만개 달린다고 한들, 거기에 제대로 된 논리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그건 단 한 개의 악플과 마찬가지라는 걸, 논쟁에서 잔뼈가 굵은 진중권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고 나서 진중권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듣보잡이나 자신에게 콤플렉스 있는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그의 속마음을 더 파고 들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내가 현재 가진 미디어 권력의 원천은 위(上)로부터 나온 것이지 당신들처럼 듣보잡 네티즌들의 인정, 즉 아래(下)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다음이다. 즉 내가 바락바락 우기면서 버틸 수 있는 점은, 나에게 미디어에 출연할 기회를 준 소위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는 논리적인 비판 글을 읽어 볼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윗사람들이 그 글을 읽는다면 정말 끔찍하지만 그 사람들이 당신들 같은 듣보잡 글을 읽을 확률이 없는 만큼, 내가 계속 우겨대기만 하면 나의 위치와 내가 가진 미디어 권력은 탄탄하다.’

그런데 진중권이 그에게 이런 권력과 기회를 주는 윗사람들과 기득권 세력에게 눈도장을 찍는 방식이 너무나 저급하다. 그가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방식은 비주류인 일반 네티즌을 말도 안되는 억지로 공격하고 모욕을 퍼붓는 방식이다. 그나마 자기 윗선의 권력자들이나 신문기자 등 지식인 사회에 노출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신의 블로그마저 닫아 놓고 있는 게 진중권의 처참한 모습이다.

자기부정의 함정에 빠진 진중권

진중권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가 이런 반지정적이고 친(親) 파시즘적 행위를 하는 동안에 보여준 그의 언행이 철저하게 위선적인 자기부정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다 알다시피 진중권은 오랫동안 주류에 대한 비주류 지식인의 글쓰기를 하면서 조금씩 주류 근방으로 이동한 지식인에 불과하다. 그가 자랑삼아 내세우는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이라는 경력이나 또한 안티조선 경력이나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줄곧 팔아온 좌파진보라는 타이틀만 보아도 그렇다. 진보의 참 정신이 무엇인가? 그 사회의 약자나 비주류 그리고 성 소수자 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지 않는 사람이 진보의 정신이 아주 조금이라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방송에 나와서 까지, 그의 행적에 비추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아니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할 수 없는 언행을 일삼았다. 그가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절대로 변모씨, 김모씨 등의 듣보잡 운운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변희재가 자기한테 콤플렉스가 있느냐는 둥 이런 말도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진중권이라는 사람의 지성의 정도와 인간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진중권의 포지션

진중권이 변희재 등에게 듣보잡 운운하는 건 다음과 같은 심리다. 첫째, 진중권, 자신은 이제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어엿한 유명인사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변희재 등은 비주류의 무명인사라서 상대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건 진중권 스스로가 듣보잡 시절에 왜 비주류로서 한국의 주류인사들을 공격해 온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진중권이 안티조선운동을 하고 비주류 아웃사이더로서의 오랫동안 글을 써온 목적이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나 비기득권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조선일보나 강준만이나 이규태 등의 주류 유명인사나 언론인을 공격한 이유가, 고작 자신의 유명세를 조금씩 쌓아가고 그걸 이용해서 글을 기고해서 원고료를 벌고 TV에 출연해서 출연료를 벌고 기타 자신이 쓴 책의 판매부수를 늘여서 개인적인 명성을 올리고 치부를 위한 게 전부라는 뜻이다.

그동안 진중권이 남을 공격해 간 글 내용이 아니라 편리하게 이용해 먹었던 ‘글을 쓰는 위치’ 즉 아웃사이더로서의 비주류, 좌파진보라는 ‘포지션’을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대한민국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진중권만은 논리나 내용에 대한 논쟁을 두고, 자신의 대항논리로 대항하지 않고, 그 ‘위치나 계급(class)상의 차이’를 이용해서 그런 식의 비아냥이나 하고 조롱을 해서는 안되는 논객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비주류나 듣보잡은 바로 몇 년 전 진중권 자신(自身)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비주류 계급에서 주류 계급사회에 진출한 사람이 비주류 사람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짓은 위선적인 자기부정이다. 이럴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행위에 대해 해 줄 말은 오직 한 단어 뿐이다. “위선자!”

이건 자신이 출세했다고 해서 그동안 자기 뒷바라지를 해준 애인을 차버리고 부자 여자랑 결혼하겠다는 식의 배신행위에 다름없다. 진중권이 그동안 이름 없는 논객이라는 비주류 신분으로 주류 기득권 사회를 공격해댔을 때, 그의 글과 행동을 지지하고 사랑한 사람들이 누구였든가? 주류 기득권층이 아니라 일반 네티즌 등 우리사회의 비주류들이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지지해주고 환호해 주지 않은가? 그는 이런 지지와 환호를 바탕으로 그가 유명인사 즉, 주류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보다 유명세 등에서 자신보다 조금 비주류 인사에게 듣보잡 운운하는 건, 자신이 주류 유명인사가 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성원 해 준 애인에게 ‘넌 천한 술집여자나 비주류 출신이라서 꼴도 보기 싫어!‘ 라는 식의 모욕을 하면서 배신의 칼을 들이대는 짓에 다름없다. 적어도 그가 진실로 인간됨이 갖춰진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과거 시절을 부정할지언정, 그 과거시절에 대해서 모욕하고 비아냥거릴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변희재가 진중권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논쟁하는 일에 대해 진중권씨는 대뜸, 변모씨와 같은 듣보잡(?)이 자신을 공격하는 일은 싸워서 지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변희재가 타이슨(진중권)과 싸워서 졌다는 걸 광고하기 위한 것이므로 순전히 변희재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한 전략일 뿐이라고 우겨댔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진중권이 타이슨 급이라고? 천부당만부당 한 말이다. 진중권과 변희재의 글을 함께 읽어본 사람에게 물어보라. 앞으로 변희재가 타이슨 급이 될 수는 있어도 진중권은 영원히 밴텀급이나 플라이급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내적한계를 가진 사람이란 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진중권이 이번에 문예중앙에 기고한 글도 읽어보라. 그의 글은 이 사람 저 사람이 입고 버린 옷자락을 가위로 잘라 와서 헝겊으로 더덕더덕 기워 붙인 누더기 글이다. ‘마초영화',‘인문학적 소양의 부재’라는 두 용어만 떼어나고 나면, 누가 봐도 전부 쓰레기 글에 불과하다.

활자문화-영상문화 논리

1년 쯤 전인가, 진중권이 월터 옹이 말한 구술문화- 활자문화 논리를 잘못 이해하고 그걸 무기로 해서 전혀 얼토당토 안되는 대중 모욕을 일삼다가 필자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진중권이 이번에 문예중앙에서 대중지성을 모욕하면서 꺼내 든 논리는 말도 안되는 '활자문화-영상문화' 라는 이분법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또 그가 얼마나 언어와 용어 사용에 대해 내적한계를 가진 미학자 지망생인가 하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문화(文化)란 무엇인가? 생활양식(way of life)이다. 활자문화란 말은 활자생활양식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지만, 영상문화라는 말을 우리가 가끔씩 쓰고는 있지만, 영상문화는 영상생활양식이라는 말로 절대로 대치될 수 없는 용어다.

즉 영상문화라는 용어는 활자문화처럼 생활양식이나 습속(習俗)의 부류에 드는 말이 아니라, 영상문화 산업(industry)이나 영상문화 상품(commodity) 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전혀 다른 부류에 포함되는 용어다. 즉 구술문화와 활자문화란 용어는 서로 대비시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지만, 구술문화와 영상문화나 활자문화와 영상문화란 말은 서도 대비시켜 논리를 전개할 수 없는 범주의 용어다. 차라리 활자문화와 모바일 문화로 대치시켰다면 나름대로 수긍할 점도 있겠다. 하지만 모바일 문화는 주체적인 생활양식의 일부지만 영상문화는 그 영화를 두고 피동적으로 수용해야하는 피동성(被動性) 때문에 또 그 범주를 달리하고 있다. 대중이 영상문화(=실제로는 상품)에 대해서 의견을 개진하는 건 대중들의 영상문화가 아니라 활자문화생활양식에 속한다.

진중권의 용어에 대한 파악 능력을 보면 너무 애처롭다. 이건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 적어도 국어(언어영역)과목에서만은 만점을 수차례 받으면서 전국 수석을 몇 번이고 해 본 사람이라서 더욱 잘 안다. 언어 논리학에서는 서울대에서 수강할 때 학점에 민감한 사범대 학생들 수 백 명과 경쟁해서 1등을 받은 적도 있다. 이런 필자가 보기에 진중권이 언어에 대한 인지능력에서 심각한 내적한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그런 그가 미학을 논하는 건 마치 “음치가 남의 노래를 놓고 음정이 틀린 것을 논하고, 색맹이 색채 디자인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다. 진중권이 다른 사람에게 했던 어법으로 정확하게 말한다면, 매우 주제넘은 짓임에 틀림없다”

진중권과 영상맹

이번에 네티즌과 대화하면서 진중권이 내던진 '영상맹'이란 신조어는 윤종경이라는 CG 전문가에 의해 따갑게 꼬집힌다. "CG프로그램을 이해못한다고 영상맹이라는 진중권은 그야말로 괘변론자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영상맹이란 CG에 깔린 프로그램(progam)을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영상이 주는 그 의미(meaning)를 이해 못하는 사람을 지칭해야 옳기 때문이다. 또 문자나 언어는 미리 주어진 사회적 약속이다. 한데 눈 앞에 펼쳐지는 영상은 아무런 약속이 없이 그냥 펼쳐진다. 그래서 문자를 이해못하는 아이들조차 만화나 영화에는 열광하고 집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진중권은 단순히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 얼도당토 안되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윤종경)가 보기엔 대한민국의 유일한 영상맹은 진중권 뿐이다"

진중권의 언어--문화와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한 사회의 언어가 비속해지면 그 사회자체가 그만큼 비속해 진다는 말은 상식이다. 이 정도 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문화평론가라면 대중들이 쓰는 언어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면서 비속해지지 않도록 바른 길을 제시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런 책임이 있는 문화비평가 타이틀을 갖고 다니는 진중권은 오히려 더 저질의 언어를 우리 사회에 퍼뜨리고 있다. “꼭지돈다”란 말도 일반인이 하는 말과 문화평론가란 타이틀을 단 사람이 하는 말의 무게가 다르다. 물론 그 파장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한 사회에는 많은 비속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는 하는데, 사회 저명인사가 사석에서도 아닌 신문이나 비평지나 TV에 출연해서 그런 말을 사용하면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그 용어에 커다란 생명력이 붙어 버리기 십상이다. 이건 우리 문화의 수준(퀄리티)을 한없이 저속하게 만드는 일에 자칭 문화평론가라는 사람이 앞장서고 있는,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과거 마광수 교수나 도올 김용옥이 좆(penis)‘ 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그런 단어의 사용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지나친 진지함이나 권위주의 타파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20년이 넘게 흘러, 그야말로 한 세대 이후의 진중권이 ’좆디비지는 소리, 파지음경’등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시대는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가 범람하여 이런 용어가 너무 흔하디 흔해서 그 폐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였다. 소위 야설(야한 소설)이 범람해서 오히려 식상할 정도였다. 또 이런 야설이 모바일에 까지 공급되고 있어서 사회지도층에서 청소년들을 이런 저질의 글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걸러주어야 할 책임이 ‘문화평론가’에게 부여되었던 시대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진중권이, 낡아빠진 구시대의 수법으로 유명세를 얻어 기득권인 주류 사회로 발돋움하려고 지난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변희재라는 탁월한 논객이 “진중권은 구시대의 막차를 타고 있는 지식인‘이라 칭한 것은 너무나 정당하다. 변희재와 진중권의 차이라면 바로 한국 사회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의 유무다.

재미있는 점은 필자가 세 사람을 두고 나름대로 평가해 본 진정성이나 순수성, 그리고 학문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열정으로 볼 때 마광수 교수가 첫째고 그 둘째가 김용옥교수고 마지막이 진중권(겸임교수)인데 이 세 사람의 쇼맨쉽은 정 반대순이다. 진중권의 경우에는 학문적 성취나 태도 등에서, 앞 두 사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이 나름대로 대중에게 인지도를 획득한 건, 그의 쇼맨쉽이 너무나 탁월했고 또 진중권이 택한 전략이 지식을 구부려서 권력층에 아부하는 것이었기에, 현 기득권과 권력층의 입맛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중동을 길들이고 박정희 신화를 잠재워야겠다는 현 기득권의 전략과 안티조선활동과 박정희의 무덤에 침을 뱃았던 진중권의 무식한 저돌성이 결합되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진중권의 권위주의

진중권이 과연 21세기 한국 사회의 평균적 민주시민의 소양에 걸맞는 사람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그가 유학했다는 독일은 유럽 여러 국가 중에서도 유달리 권위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행정학 경영학의 인사행정이나 조직이론에서도 독일하면 한국이나 일본의 권위주의와 비슷한, 어쩌면 이 부분에서만 보면 더 심한 권위주의 문화를 가진 나라의 모델로 심심찮게 소개된다. 진중권은 독일에 가서 학위라는 권위를 얻어오는 데는 실패했지만, 독일의 안 좋은 관습인 권위주의 하나만은 확실하게 익혀서 귀국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얼마 전 네티즌과의 끝장토론은 진중권 스스로가 얼마나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는 사람임을 대중 앞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 사람은 그때 진중권과 방송국에서 배치한 좌석의 배치를 생각해 보라. 5대 1 이라는 숫자는 맘만 먹으면 좀 더 평등한 라운드 테이블에서의 심도 깊은 토론이 충분히 가능한 숫자다.

요즘은 기업에서 월급을 주는 오너와 월급을 받는 회사원 사이에도 그런 좌석 배치는 좀처럼 하지 않는다. 더구나 토론 시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진중권과 나머지 5명의 좌석배치는 토론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강의하는 선생님과 그것을 받아 적는 학생을 연상시키는 좌석배치를 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이런 식의 토론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이벤트를 이미 한번 경험했었다. 그것도 TV에서 중계된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와의 토론이었다. 한데 대통령과 평검사와의 토론 때 조차도, 진중권과 5명의 네티즌이라는 맞장토론 식으로, 화면 뒷면에 노무현 대통령의 큰 사진을 걸어두고 토론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진중권 대 5명의 끝장토론에서 아예 그림이 없거나 중립적인 다른 그림을 걸지 않고, 진중권의 대형 인물사진을 뒤에 걸어두고 하는 짓은, 마치 히틀러의 대중선동수법을 전형적으로 빼다 박았다.

진중권이 스스로 민주적인 소양과 문화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맞짱토론 만큼은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토론에 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진중권은 의도적으로 그 길을 스스로 외면하고 계급장 뒤에 숨는 짓을 했다.히틀러가 대중 앞에 나타날 때가 바로 그런 식이었다. 진중권은 독일에서 정말 못된 것만 배워 와서 한국에서 써먹고 있는 셈이다. 뒤에 대형 브로마이드를 걸어 두거나 석양을 뒤로 한 채 대중 앞에 나서는 수법...., 파시즘을 연구했다는 진중권이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법한데도 진중권 스스로 그런 짓을 대중 앞에서 연출한 것은 진중권의 철학적 바탕이나 기본소양이 자유-평등에 기반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의식에 기반하는 철저한 권위주의자라는 걸 증명한다. 그때 한 분은 진중권과 똑같은 겸임교수 신분이었음을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많은 네티즌들이 진중권이 비록 박정희의 무덤에 침을 뱉는다는 글을 썼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정작 진중권이 권력을 잡았다면 박정희보다 훨씬 더 폭악적인 독재권력을 휘둘렀을 거라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엔 이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사람의 성향은 대개 일관성이 있는데, 진중권의 철저한 권위주의적 기질은 앞에서 말안 듣보잡, 타이슨 발언과도 철저하게 일치하고 있다. 끝장토론 때, 최 oo 씨라는 여자 진행자의 일방적인 진중권 편들기도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그런 권위주의적 좌석배치에도 모자라 진중권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을 대형으로 장식한 것은 토론을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처음부터 토론을 핑계로 5 명의 패널을 들러리로 세우겠다는 의도였음이 분명했다. 이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깊게 생각한 사람이라면 즉각 파악할 정도였다. 필자의 주장이 과장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면 그 인터넷에 있는 그 맞짱토론을 다시 한번 시청하기 바란다.

사실 진중권이 토론에 대한 진정성이 있고 또 보통사람 수준의 민주적 소양이라도 있는 사람이었다면 스스로 그런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이용하기보다, 스스로 낮은(?) 데로 임해서 허심탄회한 토론이 될 수 있도록 시도했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가 지성이 뛰어나다면 아무리 함께 섞여 있어도 스스로 빛났을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은 그런 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권력의 비대칭적 구도를 이용하고 즐기고 있었다. 평검사와의 토론 때,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하지 않았던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까지 장치하는 치밀함을 보이면서 말이다. 이런 게 자칭 진보라는 상품을 팔아먹었던 지식인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니 정말 어이없다.

대중가사의 저속화와 대중가요의 쇠락

'진중권 현상’을 퇴치하고 대중의 시각을 바로잡아 주는 일 정도밖에 못하는 이런 글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 우리 대중가요의 현실을 진단해 보자. 그동안 민족의 명절인 설, 추석 때면 한국 대중가수들은 너무나 행복했고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그들이 참여한 많은 연예오락프로가 선보였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의 과거와 비슷한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의 올해는 정반대로 대중가수들의 신세는 참으로 처량했다. 랩, 발라드, 댄스곡 및 성인가요라고 불리는 트로트 전부를 둘러봐도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고의 침체기다. 이는 한국인들이 향유해야 할 거대한 가요문화 자체가 침몰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필자는 이 상황에 대해서 MP3 등의 등장과 무료다운로드 현상에만 책임을 지울 정도로 대중가요 문화인들의 책임은 자유로운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필자는 대중 문화인들이 절대로 이런 상황이 초래하도록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분야는 무엇보다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트로트다. 얼마 전 한국 트롯의 중흥기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히트를 했던 대중 가수 조승구의 “꽃바람 여인”과 새로운 리듬을 가미해서 나타난 찰리 박의 “카사노바 사랑”을 한번 보자.

대중가요 작사가들의 책임

대중가요의 가사(lyrics)이 아무리 세태를 반영하고 또 반영해야 한다지만, 이 두 노래의 가사는 작사가가 스스로 그 수준을 떨어뜨려서 노래의 생명력을 형편없이 갉아 먹고 있음을 발견한다.

먼저 <카사노바 사랑>의 가사를 보자.

나는 빨간 사과 당신의 비서로/ 오직 한 사람 사랑합니다/ 일년 열두달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싱그러운 노래인가? 찰리 박이라는 중년가수의 뛰어난 율동과 함께 선보인 뮤직비디오는 신선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지는 그 노래의 가사 중 다음의 두 번째 대목을 보자.

아~! 사랑이 좋아서 오늘도 난 춤을 춘다 /아~! 이 가슴 다 바쳐, 당신만을 사랑하리~(헤이!) 카사노바사랑! 카사노바사랑! 진실로 사랑했다/카사노바사랑! 카사노바사랑! 추억의 카사노바! (생략).

아니,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일 년 열 두 달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카사노바 사랑으로 비유 아닌 비하를 하다니?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 카사노바라면 이 여자 저 여자를 울리면서 한 달에도 수없이 여자를 바꾸는 바람둥이의 대명사가 아닌가? 카사노바의 개인 생애가 어떠했다는 건 다 알려져 있다. 물론 그의 진심이 어떠했던 간에 그 이미지가 그러한데 이런 가요가 아무리 리듬감이 좋고 뛰어난 작곡이 뒷받침되어 있다 한들,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이 곡을 불러 줄 수 있을까?

그래서 필자는 노래방에 가서 혹시라도 이 노래를 부를라치면 이 대목을 언제나 이렇게 바꿔서 부른다.

원곡 카사노바 사랑!(반복) / 진실로 사랑했다 /카사노바 사랑!(반복)/ 추억의 카사노바!)

개사 아름다운 사랑! 행복했던 시절!/ 추억의 사랑이여/ 아름다운 사랑! 행복했던 시절!/ 우리의 사랑이여!

다음은 대중가수 조승구님의 ‘꽃바람여인‘을 보자! 이 노래는 리듬 박자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훌륭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가사에서 단 한 소절이 거슬린다. 그래서 위 노래 <카사노바 사랑>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선택에서 제외되고 마는 매우 아까운 노래다. 그 대목은 <한잔의 삼페인에/ ‘영혼을 팔리라’>에서 '영혼을 팔리라' 라는 부분이다. 혹시 이 노래의 음감과 박자 리듬이 너무나 좋아서, 혹은 신청곡으로 억지로라도 불러야 하는 경우라면, 이 또한 다음과 같이 개사해서 부른다.

원곡 한모금 담배연기/사랑을 그리며/ 한잔의 삼페인에/ ‘영혼을 팔리라’
개사 한모금 담배연기/사랑을 그리며/ 한잔의 삼페인에/ ‘흔들린 내~ 마음’

('ㅎ‘ 운율에도 훨씬 좋고 노래 중간에 나오는 ’나만~의 사랑‘과 묘한 댓구를 이루고 있다. 또 ’꽃바람여인‘에 나오는 꽃’바람’이라는 제목과도 연결되어 훨씬 운치 있고 매끄럽다)

필자가 바꿔 놓은 가사로 불러보니 느낌이 어떠한가? 훨씬 격조 있고 또 아름다운 노래로 탈바꿈하고 있지 않은가? 대중 앞에 노래를 내어놓은 작사가들의 언어 사용이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두 노래 다 한때 대중에게 크게 어필되고 사랑받던 곡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좀 더 깊고 영속된 사랑을 못 받는 원인에 이런 저속한 가사의 사용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트로트의 새로운 명칭, 랑가(浪歌, 朗歌)

필자의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은 “일본 엔카, 한국 트로트와 나폴리 민요-대자보/2005/10/17 ⓒ대자보 / http://cafe.naver.com/moowee/9” 이란 칼럼에서 확인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위 글은 한국 트로트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이중적 태도를 지적하고 특히 한류 등을 통한 세계시장 개척을 위한 기본자세로 그 자신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 글에서 말한 트롯에 가장 어울리는 새로운 명칭으로 ‘랑가(Ranga)‘를 소개한다.

한문으로는 浪歌, 朗歌, 어느 것을 택해도 트로트의 유래와 의미에 어울리는 깊고 좋은 뜻이 있다. 한국의 아리랑 할 때의 ’랑’자(字)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일본의 엔카(演歌)보다 훨씬 더 좋은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 용어를 대중에 내놓기 위해 필자 나름대로 무척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또 고민했다. 그런 만큼 문화평론가로서의 필자의 자부심이 깃든 명칭이다. 이 용어에 대한 더 심도 깊은 의미는 이미 글로 다 완성해 놓았다. 이는 필자가 곧 발간할 책, <겉과 속이 다른 한국인>을 통하거나 또는 다른 형식으로 발표할 작정이다.

필자가 굳이 이 부분을 밝히고자 하는 이유는 그 공동체의 문화적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문화를 소비하는 소비자의 의식도 매우 중요함과 동시에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문화예술인들과 문화평론가들이 가진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 문화의 발전에 너무나 필요한 예를 들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문화예술인과 문화평론가들은 더 큰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올바른 문화를 창달하고 선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 (Cool Head &Warm Heart)

경제학(Economics)란 용어를 처음 쓴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이 경제학도에게 요구한 자세는 다음 한 마디로 요약된다. “무릇 경제학도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 (Cool Head &Warm Heart)을 가져야 한다” 필자는 이 말이 경제학도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선생님들도 학생에게 매를 때릴 때는 노골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자를 사랑하는 ‘사랑의 매‘라는 말을 한다. 이런 ’사랑의 매’라고 해도 요즘은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이 시선은 인권의식에서 지지를 받는다. 한데 지식인이 사회현상을 논하면서 사회에 대한 이런 애정이나 따뜻한 시선이 없이, 자기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 몇 조각으로 대중을 우롱하고 단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중권에게 진짜로 필요한 건,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가 대자보에서 지적한 것처럼, 해봐야 별 성과도 못 이룰 것 같은 학문적 성취나 ‘냉철한 이성(Cool Head)’을 갈고 닦는 일이 아니라, 진중권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을 지도 모르는 ‘뜨거운 가슴(Warm Heart)’을 갖출 수 있는 깊은 자기반성이 아닐까?

붉은 악마와 디워팬들

혹자는 붉은 악마와 디워 열성팬들과의 차이로 그 공격성의 유무를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이번 디워현상을 너무 피상적으로 보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 만약 2002 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열기에 대해서, 가령, 이상한 문화평론가가 나와서 한국의 축구실력은 형편없는데 그 축구에 열광하는 붉은 악마의 열기가 애국주의의 광기에 불과하다고 TV에서 폭언을 했다고 하자.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3억 중국 인구도 못한 일이며, 한국보다 훨씬 돈을 많이 투자한 경제대국 일본도 못한 일이며, 선진국 미국, 캐나다도 못한 일을 한국이 어떻게 16강 8강을 넘어서 4강까지 넘보려고 시도하느냐는 식의 패배주의식 발언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또 거기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축구팬들(문화소비주체들)의 대한 모욕까지 감행했다면 어땠을까? 분명코 이번 디워팬들의 항의보다 더 극렬한 저항에 처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즉 자랑스런 디워팬들과 붉은 악마의 차이점은 이런 황당하고 무식한 평론가들에 반발한 그 '방어적 공격성의 존재유무'에 있지 않다. 김석수 문화비평가가 정확하게 지적한, 평론깡패이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한 철학자의 존재유무에 있을 뿐이다.

히딩크와 25명의 선수가 공연한 한국 축구는 예상을 뒤엎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폴란드를 이기고 1승을 올리는 개가를 올렸다. 이후 포르투칼 까지 물리치고 16강으로 진출하자, 전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8강 4강으로 가는 흥겨운 응원을 하는 붉은 악마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무식한 평론가들의 폭언에도 불구하고, 영화 디워가 이무기가 승천하는 모습을 너무나 뛰어난 CG로 숨막힐 듯이 훌륭하게 그려낸 대장관(大壯觀)을 연출함으로 해서,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여 주었기에 무려 850 만 명이라는 관중이 영화관으로 행렬지어 갔음도 비슷하다.

영화 <디 워>가 이송희일 감독이 말한 <미국 토스트기 모방품>수준이 아니라 적어도 CG에서만은 'CG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진중권'이 애써 '헐리우드 B급 수준'이라고 폄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토요타(Toyota)급을 넘어서 캐딜락이나 벤츠나 베엠베(BMV)급 정도는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봐야 더 정확하다. 물론 [디 워]라는 차 안의 인테리어로 쓰인 소파의 쿠션이 좀 딱딱하기는 했다. 하지만 총체적인 견지에서 한국 관객들이 영화 [디 워]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열광했던 것이다.

추천수보다 댓글이 훨씬 많은 시대의 글쓰기

과거 마광수 교수가 글을 쓰고 예술을 하는 이유로 ‘배설이론‘을 내세웠을 때, 필자는 그의 배설론에 반하여 '공감이론'을 내세웠었다. 오늘도 나(我)와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疏通)‘을 위해서 글을 쓰고 발표한다. 또 그런 사람으로서 확인하게 되는 냉정한 사실이 하나 있다. 즉 필자가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칼럼을 써서 발표해도, 그 글에 달린 추천수가 독자 스스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댓글보다도 더 적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소위 팬이라는 사람들조차 동일한 행동양상을 보인다. 이 현상은 디워팬 까페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즉, 대중의 취향은 참 까다롭고 개개인의 1 초도 너무나 아까워하는 존재라서, 비록 글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고작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할 수 있는 추천에도 인색한 사람들이 대중들인 것이다. 이런 대중들 중에서 무려 850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영화관으로 행렬을 지은 현상을 논하면서, 그게 단지 애국심 코드로 영화관으로 찾아 갔다는 억지 평론을 사실로 믿으라니? 이것이야 말로 억지 강요를 넘어선 폭력이며 미친 짓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이 현상에 애국주의적 광기라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진짜로 정신질환에서 나오는 행위에 가까운 짓임은 틀림없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와 진중권의 룰(rule)

오늘 나온 LA타임즈 기사 글을 보니, 진중권이라는 지식인(?) 논쟁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룰(rule)을 지키지 않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기본적인 룰이 있다. 아무리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도 친정집이나 시댁, 또는 처가댁에 대한 모욕은 하지 않는 법이다. 아니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김기덕의 영화 <나쁜 남자>를 미국의 백인남성들이 보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 한 깡패가 대졸 여성을 성폭행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창가로 팔아넘겼는데 나중에 그 여인이 그 흉악한 범죄자를 사랑하기까지 모습을 그린 황당한 영화를 보는 느낌은 어떠할까? 김기덕 감독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이 영화를 본 백인남성들은 왜 그녀가 <브레이브 원>에 나오는 조디 포스터처럼 하지 않느냐고 분노해 할 것이다. 그래서 저 미개한 국가인 한국에서 저렇게까지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영화<나쁜 남자>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여해야 한다는 모종의 사명감이 들어 분노하면서 자신이 문명국가에서 살아가는 미국시민이라는 자부심에 도취되고 한껏 만끽하지 않을까?

인문지리학의 최고봉이었던 <택리지>를 쓴 이중환을 몇 단계나 뚸어넘어 한국에서 존재한 최고의 문화인류학자 故 이규태님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85, 시드니 폴락감독)>를 평하면서 하신 명언(名言)이 있다. 소위 선진국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후진국에 대한 시선은 대개 두가지로 나타난다. 그 한 개는 야만이요. 또 하나는 신비다. 미국 등 서구인들의 시선에 있어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신비에 관한 영화라면 김기덕의 <나쁜 남자> 현재의 한국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야만’으로 비춰질 것임에 틀림없다. ‘신비'에는 호기심이 일어 나겠지만 ’야만‘에는 당연히 과도한 분노와 우월감의 충족에 기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10월 16일)에 나온 LA타임즈에서 미국인 기자가 쓴 기사 또한 이런 시선에서 잘못 나온 엉뚱한 자아도취에서 나온 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미국인인 그가 한국인들이 겪었던 그간의 상황을 어떻게 잘 알겠는가? 영화 [디 워] 죽이기에 한국의 권력층이 미는 영화 [화려한 휴가]와의 미묘한 경쟁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단 1% 라도 알고 있을까? 미국인 기자가 뭘 안다고 또 무슨 자격으로 건방지게 한국인들에게 충고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서 그런 편향된 자료만을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마치면서

필자는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 현상과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의 발전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진 디워팬들 같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대한민국이 훨씬 자랑스럽다. 반면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훨씬 더 얄미운 ‘미운 시누이들’이 이렇게 많은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 과정에서 엉터리 평론가들과 엉터리 언론에 대해 저항하면서 자랑스러운 영화 [디 워]를 지지해 준 많은 한국 관객들이 있어서 그나마 질식할 것 같은 한국의 오늘을 그나마 견디게 하고, 그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게 하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확인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예고) 다음 편에서는 디워II가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시놉시스의 일부를 공개합니다. 디워 II의 시나리오는 한국 영상산업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신 심형래 감독님의 성공을 위하고 한국 영상문화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무료로 제공할 것을 대중 앞에 확실하게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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