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미디어워치 호남본부 (객원코너)


배너

장성민을 죽여야만, 박지원과 안철수가 산다? ①

박지원vs장성민, "사느냐 죽느냐" 러시안 룰렛 서바이벌 '대결전' ①
호남대통령론 가로막는 박지원, <장성민을 밟아라·때려라·죽여라 편>

 

본지는 최근 대권도전을 선언한 장성민 의원에 대해 호남당원이 70%이상인 국민의 당에서 전남 고흥출신 장 전 의원의 입당을 유보시킨 점에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다는 입장이다.

 

대선국면을 맞아 당의 외연을 확장하기는커녕 평당원으로 입당하겠다는 인사에 대해 당내 경선에 참여해 대권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입당을 유보시킨 사례는 극히 드물다.

 

본지는 여타 상황을 확인한 결과 이는 박지원 대표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출신인 박지원 대표와 장성민 전 의원간 얽힌 숨은 비화와 애증관계, 그에따른 당시 DJ측근간 내부 권력지형을 밝히고자 한다.

 

이 모든 게 대한민국호가 순항하기 위해선 호남의 정치지형이 변하고 아울러 호남민심을 대변한다는 국민의 당이 변해야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애국적 차원서 쓰여진 글이다. <편집자註>



 


권노갑, 정대철, 동교동계, 양패구상에 발만 동동


박지원 승리: 영원한 국무총리, 장성민 승리: 대선본선 승리

 

교동계 맏 어른 권노갑 상임고문이 지적한다.


 “장성민 입당을 막는 것은 잘못이다.”

 

당의 맏형 격 정대철 고문이 충고한다.

 

장성민 입당은 당과 대선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박지원 대표, 눈썹 한 올 깜짝하지 않는다. 국민의 당은 이미 박지원의, 박지원에 의한, 박지원을 위한유일 체제 정당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당 홍보물 사건으로 안철수 2선후퇴가 이뤄진 이후,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직에 오른 박지원의 권력 장악솜씨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국회에는 마치 박지원 의원 한 명만 있는 듯, 박근혜 정권 파국 정국에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문재인에게 버림받은 자가 2016년 최고의 국회스타로 떠올랐고, 국민의 당은 스타박지원 1인을 빛내기 무대이고, 소속 국회의원들은 박지원과는 족탈불급, 거의 조연수준에 머무른다. 왕년의 스타정동영도 새로운 권력박지원이 두려워, 벌벌 떨며, 당대표 출마조차 못한다.

 

그야말로 박지원 시대가 열린 듯하다. 박지원의 힘은 여야를 넘나드는 국회 중심권력이요, 박근혜 정권 공격 권력이요, 사실상 야권 대표 권력을 능가한다. 한마디로 정치권은 박지원 세상이다. 박지원의 꿈은 곧 정권교체요, 야권통합이요, 국가의 미래인 듯하다. 대한민국 정치권 하늘아래 박지원만 존재한다.

 

한마디로 박지원 스스로 대권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 정도 정치력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휘두르고 있으면, 대권도전은 마땅하고, 승리는 따 논 당상 아닌가 싶다. 그런데 왜, 박지원은 대권선언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이유를 너(=정치권)도 알고, (=언론)도 알고 있는데, 우리(=국민들)만 모른다.

 

2016년 말이 되자 돌연, 생물학적 연령상, 동교동의 막내랄 수 있는 장성민이 등장한다. 3만명 속에 출판기념회를 하더니, 국민의 입당하여 대권도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모르지만, 박지원으로서는 부담스럽다 못해 경기가 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물학적 나이 상으로는 분명히 19년 차이가 아래인 새까만 후배인데, 알고 보면 DJ(=김대중) 가신 정치입문은 거꾸로 10년이나 대선배이다.

 

그런데 DJ 없는 하늘을 떠 바친 권노갑, 국민의 당 산파이자 맏형 정대철은 모두 장성민을 할머니 꿀단지 감싸고 다루 듯 애지중지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이 두 원로는 지난해 4-13 총선 때 박지원이 문재인에게 버림받고, 사실상 정치생명이 벼랑 끝에 걸렸을 때, 손을 내밀어 안철수 국민의 당 전략공천을 결정해 준 정치생명의 은인들이다.

 

당 대표까지 오른 박지원으로선, 인간 도리 상으로 본다면야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앞에서는 예스라고 대답하지만, 그러나 숨긴 마음속은 전혀 다르다. 박지원의 마음은 대변인 김경진, 조직국장 이병기를 통해 행동으로 나타난다. 대변인은 ‘5.18 폄훼와 출판기념회 알바 동원 의혹보도를 내세워 서울시당 결정으로 미뤄두고, 조직국장은 서울시당의 결정, ‘문제없음을 뒤덮고 입당유보를 장성민 측에 통보했다.

 

이번에는 광주 5.18 관련단체와 출판사측이 펄펄 뛴다. “TV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출연자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진행자 장성민과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다판결에 해당하는 성명서를 낸, 광주 5.18 단체(고문 최운용, 회장 박남선)들은 당과 박지원의 처사를 비판한다.

 

동교동계 신순범 고문은 전두환에게서 동백장 훈장을 받은 사람이 DJ가 남긴 마지막 정치핏줄을 짓밟는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출판기념회 행사를 주최한 출판사는 저자이자 초빙 강연자인 장성민측 에게 거듭 사과하고, 해당언론사를 민형사 고소한 뒤 소송 전에 들어갔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으나, 우리 국민 모두 모르는 시간들


인생살이, 세상만사, (김대중과 동교동)도 알고, (박지원과 장성민)도 알고 있으나, 우리 국민들(대중과 역사)만 모르는 일과 사건과 관계들이 쌓여있기 마련이다. 사실, 장성민이라는 이름 세자는 박지원에게 싫은 정도가 아니다. 아예 경기가 일어날 정도로 충격적이고 반감의 골이 깊은 이름일 수 있다.

 

장성민이란 이름, 박지원에게는 단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높은 벽이자 상대할 수 없는 괴물과도 같다. 장성민과 박지원의 만남의 기원은 81년이다. 81년이란 숫자는 박지원으로서 지워버리고만 싶은 시간일 것이다.

 

박지원은 미국에서 만고풍상(?)을 겪은 끝에 사업가로 변모하여, 재미 한인회장으로 우뚝 섰다. 그 때 5.18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군사 쿠테타로 집권에 성공한 전두환이 대통령직에 강제 취임한 뒤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역만리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젊은 야망가로서 한국의 절대 독재 권력자 전두환을 섬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둑처럼 찾아왔던 것. 마침, 미주리대 유학중이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줄이 닿았고, 박지원은 한판 잭 팟을 터트린다. 전두환 대통령 방미 환영환송 재미동포회장이 되고, 그 공훈을 인정받아 국가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이 대목, 박지원으로선 대선후보가 될 수 없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뒤따라 다닌다.

 

그리고 김대중이 망명했다. 박지원은 이번에는 김대중에게 밀착했다. 특유의 화려한 언변과 친화력(?)으로 지나간 사건을 양해 받고, DJ 미국 망명생활의 지원 대장역을 자임했다. 마침내 김대중은 귀국했다. 그리고 박지원은 뒤따라 90년대 중반 보따리를 싸고 귀국하여 김대중 곁으로 왔다.

 

박지원은 그 곳, 동교동 DJ 집 별채에 10년 전부터 새파란 청년브레인이, 자택비서라는 이름으로 숨겨져 DJ와 함께 살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박지원의 초점은 벗어나지 못하지. 저 청년은 단순한 비서가 아니야.” 생각했음직 하다. 아니나 다를까.

 

DJ는 가장 중요시 여기는 공보담당 업무를 박지원에게 내밀면서 장성민을 붙여 합력하게 한다. 한 테이블에서 공동업무를 하면서, 박지원이 겪어본 장성민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크기의 사람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판단은 어김이 없었다.

 

 

청와대 생활, “장성민이 있는 한 박지원은 꼼짝달싹 못한다


박지원은 이 청년, 장성민에게 한방 제대로 먹는다. 1998DJDJT연합(김대중+김종필+박태준)을 성공하여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뒤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취임하고부터 곧장 사단이 일어났다. 박지원은 자신을 DJ 공보부문 최고의 실세로 여겼음 직 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김대중은 당선 다음날 김중권 비서실장, 이종찬 인수위원장 임명과 함께 유독 장성민 만을 꼽아 당선자 비서관직에 포함시켜 발표했다. DJ 정치 스타일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는 장성민을 김중권, 이종찬급으로 예우했고, 당선자 첫 출근 차량에 동승시켜 일산에서 인수위 사무실로 동반 출근했다. 그 김대중 정권의 일등 창업공신이라는 신임의 징표였다.

 

연이어 더욱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인수위 대변인직에 박지원이 아닌 김한길이 낙점되었다. 인수위가 끝난 뒤에야 박지원은 청와대 대변인직에 임명되기는 했으나, 알고 보니 속빈 강정이었다. 실질적 힘을 발휘하는 언론과 기업을 관장하는 홍보보좌역 업무는 정무비서관인 장성민의 담당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박지원은 그 때까지도 모르고 있었음 직 하다. 장성민이 모 호텔 당선자 사무실 옆방에 별도로 꾸며진 비선사무실에서 새 정부 청와대 조직도를 그려 DJ에게 보고한 숨은 브레인(hidden actor)이었다는 사실. 그 이후 백악관을 모방한 국정상황실을 창설하여 초대 상황실장에 오르고서야, 그가 DJ가 숨겨놓은 전략기획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 직 하다.

 

장성민이 있는 한, 박지원은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상황실장은 모든 부문에서 생생하고 정확한 정보를 신속히 올렸고, “박지원이 맛사지를 조금이라도 가하여 보고를 드릴 양이면, DJ가 금방 알아채 곤 질책한다는 얘기가 청와대 담벼락 밖으로 흘러나왔다.

 

놀라운 일은 34DJ의 청년 권력실세의 밤 문화이다. 패기만만한 30대 초반의 권력실세는 밤이 되면 줄을 댄 기업과 권력가들의 접대를 받으러 가지도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원에 입학하여 경제 공부로 시간을 축적하고 있는 것.

 

이 정도 되면 흠결을 잡을 수가 없다. 어린 나이에 10년 동안 DJ 자택에서 검증받은 양아들이자, 정치적 분신으로써 신임을 잃지 않았던 비법이랄 수밖에 없다.

 

장성민은 87년 대선에 김대중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대선후보의 비서로 발탁된 청년 대학생이다. 92년 대선 패배 뒤 실의에 빠진 70대 노정객 DJ3일 만에 지하서고에서 나와 수저를 들게 하고, 영국 유학을 뒷바라지 하며, 김대중 명저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기획했다.

 

귀국 뒤 마포의 한 오피스텔에서 95년 지방선거 승리와 새정치 국민연합 창당 지도의 밑그림을 함께 그리고, DJ 정계복귀를 주도한 전략통, DJ는 그를 장비서라고 하지 않고, ‘장동지라고 호칭한 것으로 확인했다.

 

너와 내가 알고 있으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정치거목 김대중은 그런 사람이었다. 장성민은 외견상 평범해 보이는 수행비서처럼 보였을 성 싶다. 이 청년 브레인을 한 집과 한 사무실에 한 자신의 몸속에 끼고 살면서, 대중과 정치권에는 감쪽같이 숨기고, 그 전략과 기획력을 정치에 활용했다.

 

장성민의 연설을 멀리서 구경하다 보면, 말투와 어조, 제스처와 표정이 마치 젊은 김대중 연설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간다. 25세 청년대학생 장성민에게 김대중이란 존재는 인간, 그 이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미치고, 닮게 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끝으로, 장성민은 박지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더니, 초선의원 그룹인 새벽 21’을 만들었다. 개혁정치를 부르짖으며 정동영을 내세워 맏형 권노갑 고문 등 동교동계의 괘씸죄에 걸리더니, 국회의원직을 내던지고 유학길에 올랐다. 박지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정치판에서도 사라졌다.

 

이제 김대중 실세는 박지원이었다. 속담에 호랑이 떠난 굴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던가. 그런데 DJ가 현충원의 비석으로 서고, 15년이 흐른 뒤 권노갑 등 동교동계들은 언제그랬냐는 듯, 장성민을 보석함 다루듯 하고, 장성민은 DJ 섬기듯 하고 있는 것. <2편에 계속>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