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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2)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6)




5 통계


6 조선의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6.1 전시 중의 유언비어(루머)

   6.2 전후

        6.2.1 1960년대

        6.2.2 1970년대

        6.2.3 1980년대

        6.2.4 1990년대


7 근년

   7.1 연구

   7.2 운동 단체


8 연표


9 참고문헌 · 관련문헌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2)




5 통계(統計)

일본 내지의 여자정신대(日本内地の女子挺身隊)

1944년 2월 말까지 일본 전국에서 여자정신대는 16만명에 달했다. 1944년 5월 일본 여자정신대의 결성율은 7%로, 정신대의 결성율이 매우 낮았다. 이 때문에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으로써 정신대 강제동원이 이뤄졌다. 

1944년 이후에는 12세 이상의 학생이 약 300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10세 이상의 아동, 청년학교 및 중등학교의 학도로 500만 명이 동원되었다.(1940년 당시 일본의 인구는 7,000 – 7,500만명이었다.)

조선여자정신대(朝鮮女子挺身隊)

아사히신문사 편(編) ‘여자들의 태평양 전쟁 2(女たちの太平洋戦争2)’(아사히문고, p120)에는 “조선여자정신대는 대략 20만 명”이 동원됐다고 쓰여 있지만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다.

일본 내지에 동원된 조선인 여자정신대의 총수와 관련,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는 기껏해야 4,000명이며 20만명 설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본 내지의 종전 시까지 동원 수는 47만 2573명이며, 인구의 차이를 고려해도 (조선인 여자정신대의 총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데, 이것은 반도에서의 동원의 어려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본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내무성 관리국 ‘1944년도 내지 가라후토(사할린) 남양에 이입된 조선인 노무자 공출 할당수 조사(昭和19年度内地樺太南洋移入朝鮮人労務者供出割当数調)’ 등에 의거하여 약 1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6 조선에서의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朝鮮での「挺身隊」と「慰安婦」の混同)

‘여자정신대’는 공장에서의 근로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을 의미하고 위안부는 전쟁터 등에서의 공창·매춘부를 의미한다. 둘은 각각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정신대에 참여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소문이 유포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한국에서는 여자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혼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는 그런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는 한국의 연구자는 없었다.

6.1 전시 중의 유언비어(루머)(戦時中の流言(デマ))

조선반도의 여자에 대해서는 일본 내지에서의 징용령도 여자정신근로령도 발령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선과 모집에 의해 정신대가 일본 내지로 향했던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혼동되어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루머·소문이 유포되면서 패닉적인 동요가 일어났다.

일중전쟁 후의 유언비어(日中戦争後の流言蜚語)

일중전쟁(日中戦争) 이후에 “전쟁을 위해, 관헌에 의해 미혼 여성의 몸이 희생되고 있다”라는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었다.

윤명숙(尹明淑)은 미야타 세츠코(宮田節子)의 ‘조선민중과 ’황민화’정책(朝鮮民衆と「皇民化」政策)’(미라이샤(未来社), 1985년)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중전쟁 후 조선민중 사이에서는 관헌이 전쟁을 위해 미혼 여성의 몸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유언(流言)’이 유포되고 있었다. 민중의 ‘유언비어’는 언론과는 거의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던 조선의 대다수 민중에게는 가장 가까운 정보원이었다. 또, ‘유언비어’ ‘조언비어(造言飛語)’ ‘불온언동(不隠言動)’이라고 불린 민중 상호간의 입소문은 생활실감(生活実感)에서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었다. 민중은 미혼 여성의 동원에 대해서 강한 불안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징집업자는 이러한 민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 윤명숙 ‘일본의 군대 위안소제도와 조선인 군위안부(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慰安婦)’(아카시서점(明石書店), 2003년), p295∼298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관한 설명 문서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관한 설명문서(朝鮮総督府官制改正に関する説明文書)

1944년 6월 27일 자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관한 내무성의 각의용 설명문서(朝鮮総督府官制改正に関する説明文書)’에도 다음과 같이 유언비어 문제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근로보국대로의 출동도 징용이라고 착각하고, 일반 노무모집에 대해서도 기피(거부) 도주하고, 혹은 (보국대 직원에) 부정한 폭행을 하는 자가 있을 뿐 아니라, 미혼 여성에 대한 징용이 불가피하며 이들을 위안부로 만든다는 황당무계한 유언비어가 퍼지고 있다. 이런 악질적인 유언비어가 있기 때문에노무사정(労務事情)은 향후 더욱 어렵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 내무장관청의 ‘조선총독부부내 임시직원설치제 중개정의 건’ 1944년 6월 27일 자


여기서 "미혼 여성에 대한 징용이 불가피하며 미혼 여성은 반드시 징용에 의해 위안부가 된다는 황당무계한 유언비어“가 확산되고 있다는 기술이 있어서 전쟁 이전부터 징용(근로보국대, 여자정신대)과 위안부가 ‘혼동’됐던 모습이 엿보인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악질적인 유언비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는 이를 단순한 루머가 아니라 일종의 반일 모략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쓰다즈쿠(津田塾) 대학 명예교수인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는,

“‘매일신보’ 1944년 10월 27일과 11월 1일에 ‘허 씨’의 이름으로 “군 위안부 급모”라는 광고가 게재됐다. 이는 같은 신문의 1945년 1월 24일에 ‘경성부’의 이름으로 나온 “여자정신대를 모집한다”는 광고와의 차이가 일목요연하다.“


라고 한 후에,

“그러나 당시부터 정신대에 참가하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어느 정도 퍼져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라고 하면서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관한 설명 문서를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유언비어의 원인(流言の原因)

루머, 유언비어의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 징용 기피(정신대 기피)

일본에서도 취직을 통해서 징용을 피하려고 한 자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정신대 기피’를 위해 일찍 결혼하는 것이 범람하였고 취직하는 여성이 증가했다. 또 조선에서는 미혼여성에 대해서 부모가 딸을 학교에서 중퇴시키거나 결혼으로써 징용을 피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정신대=위안부’라는 인식을 퍼뜨렸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 초대 대표인 윤정옥(1925년생)도 부친의 충고에 따라 1943년 4월에 입학해서 동년 9월에 퇴학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는 미혼여성에 대한 징용을 ‘처녀 공출’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피하기 위해 딸의 존재를 숨기기도 했다.

· 교사에 의한 지명 권유

윤명숙은 노동력으로서의 국민으로 등록된 조선의 여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학교 교사에 의한 권유가 진행되었지만, 이 경우에 일본 내지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루머의 불씨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관 알선에 의한 여자정신대 동원은 소학교나 여학교의 교사가 지명 권유하는 사례가 많았다.

· 독립주의자에 의한 모략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정신대를 위안부와 혼동시키는 “황당무계하고 악질한 유언비어”에 대해서 민족주의자에 의한 반일 모략으로 간주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인신매매와의 관련

위안부 증언에 따르면 ‘여자정신대’가 인신매매 사기의 명목으로 이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6.2 전후(戦後)

‘정신대’를 ‘위안부’의 의미로 사용했던 사례는 전쟁 시기 루머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현재도 한국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혼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전후에 정신대 명목으로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는 식의 기술을 많이 볼 수 있다.

정신대라고 불렸던 한국군 위안부(挺身隊と呼ばれた韓国軍慰安婦)

조선전쟁(한국전쟁) 시 한국에서는, 유엔군을 상대로 했던 한국군 위안부를 한국 경찰과 한국 공무원은 “정신대 · 유엔 정신대”라고 불렀다.

6.2.1 1960년대(1960年代)

교토대학 문학부 국사 연구실 편 ‘일본근대사사전’(京都大学文学部国史研究室編『日本近代史辞典』)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나 다른 편집위원에 의해 편찬된 이 사전에는 ‘위안부’라는 말은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대신에 정신대와 전쟁터에서의 매춘부를 결합시킨 기술이 있다.

“제2차 대전 중 매춘부는 여자정신대로 종사하며, (중략) 매춘의 비인간성을 극한으로 달하게 했다”

- 교토대학 문학부 국사연구실 편 ‘일본근대사사전(日本近代史辞典)’ 도요게에자이신보샤(東洋経済新報社), 1958년, 501 쪽


송건호(宋建鍋)

한국의 역사학자 송건호(宋建鍋)는 한국의 ‘경향신문’(1963년 8월 14일)에 게재된 ‘광복전야 일제의 발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신대=흔히 처녀공출”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소녀들을 전쟁터에 연행하고, 위안부로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의 처녀가 연행되고,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고 썼다.

박경식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朴慶植『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

재일조선인 박경식은 1965년 5월에 발간된 저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젊은 동포 여성 다수가 ‘여자정신대’, ‘전선위문대’ 등의 명목으로 끌려가고, ‘위안부’로서 전쟁 수행의 희생양이 되었다. (중략) 전체 수는 수만 명으로 생각된다.”

- 박경식(朴慶植)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朴慶植『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 미라이샤(未来社), 169쪽


일본독서신문 ‘다큐멘트 조선인’(日本読書新聞「ドキュメント 朝鮮人」)

1963년 9월 23일부터 ‘일본독서신문(日本読書新聞)’에서 연재 ‘다큐멘트 조선인(ドキュメント 朝鮮人)’이 시작되었다. 이 연재는 증보 가필 후, 1965년 6월에 후지시마 우다이 감수・일본독서신문 편 ‘다큐멘트 조선인 일본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ドキュメント 朝鮮人 日本現代史の暗い影』)’(일본독서신문 출판부)로 간행되었다.

“일본에는 현재 세계 70개국 인간이 있다고 하지만, (중략) 정신대(위안부를 의미하는 말) 따위로 끌려온 자도 있고..”

- 일본독서신문 편・후지시마 우다이(藤島宇内) 감수 ‘다큐멘트 조선인 일본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ドキュメント 朝鮮人 日本現代史の暗い影)’ 1965년 6월, 191쪽


시오타 쇼베(塩田庄兵衛)

‘아사히저널’ 1965년 9월 12일호 시오타 쇼베가 기고한 ‘‘빼앗긴’ 사람들·전시하의 조선인(“奪われた”ひとびと・戦時下の朝鮮人)’에서도 박경식을 전거로 하여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재했다.

“조선반도에서 ‘여자정신대’, ‘전선위문대’ 등의 명목으로 동원된 대략 수만 명의 여자가 ‘위안부'로 전선에 동반되었다.”

- 시오타 쇼베(塩田庄兵衛)  ‘‘빼앗긴’사람들·전시하의 조선인(“奪われた”ひとびと・戦時下の朝鮮人)’ 아사히저널(朝日ジャーナル) 1965년 9월 12일호


이 기사를 1971년 존 헌터 보일(John Hunter Boyle)이 ‘A ‘Ravaged’ People : The Koreans in World War II’ 제하의 영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것이 1972년에 간행된 ‘China and Japan at War, 1937-1945 : The Politics of Collaboration’(스탠포드대학출판회)에 전거(典拠)로 쓰였다. 

그 후에도 시오타 쇼베의 기사는 존 다우어(John Dower)의 ‘Japanese History & Culture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 Seven Basic Bibliographies’(1986년)이나 피터 리버먼(Peter Liberman)의 ‘Does Conquest Pay?’(1998년, 프린스턴대학출판국)의 전거로도 쓰였다.

한국합동통신사 Korea Annual 1966(韓国合同通信社 Korea Annual 1966)

1966년 한국의 합동통신사(현・연합뉴스)가 발행한 영문 연감에는 다음과 같은 기재가 있다. (이듬해 연감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

“Thouusands of Korean maiden were taken to Japanese military units throughout the occupied areas to serve as prostitutes in the name of "Women's Service Corps" or "Women's Consolation Corps" along with Japanese girls.”

— Korea Annual 1966, p. 111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는 1968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 초판에서 박경식(1965)을 유일한 전거(典拠)로 하여 위안부에 대해 기술했다. ‘태평양전쟁’은 1978년에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The Pacific War, Pantheon Books, 1978.).

김연한(金廷漢)

1969년, 한국의 ‘월간문학(月刊文学)’ 8월 호에 발표된 김연한(金廷漢)의 단편소설 ‘수라도(修羅道)’는, 정신대로 징용된 여자가 위안부로 되었다는 설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 가야 부인의 심부름꾼 ‘옥이’에게 소집영장(赤紙, 아카가미(あかがみ))이 오고, 연행될뻔 한다. 이 작품은 제6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6.2.2 1970년대(1970年代)

센다 가코(千田夏光)

센다 가코(千田夏光)는 저서 ‘종군위안부’(1973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정신대’의 명목으로 이들은 모집되었다 (중략) 총 이십 만 명 (한국 측 추산)이 모집된 속에서 ‘위안부'로 된 것은 ’5만 내지 7만 명‘이라고 한다.”

- 센다 가코(千田夏光)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1973년


센다 가코의 이러한 기재는, 이 저서에 앞서 1970년 8월 14일자 한국 ‘서울신문’의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정신대로 동원된 한·일 양국의 여성은 총 약 20만 명이고, 그 중 한국 여성은 5〜7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보도를 오독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당시 서울신문의 추산 근거는 여전히 불명인 채로 있다.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1974년 1월, 마쓰이 야요리가 “나는 왜 기생 관광에 반대하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군사력으로 한국여성을 ‘여자정신대원’으로 사냥하고, 일본군의 종군위안부로 중국과 동남아의 전쟁터로 보냈다.”

-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나는 왜 기생 관광에 반대하는가?(私はなぜキーセン観光に反対するか)’ ‘여자・에로스(女・エロス)’ 제2호, 샤카이효론샤(社会評論社)


사토 사나에(佐藤早苗)

1974년 10월에 간행된 사토 사나에(佐藤早苗)의 ‘아무도 쓰지 않았던 한국’(산케이신문사)에서 “여자정신근로령 등의 법령을 만들고, 일반적인 가정의 딸들을 공장 노동자이라고 속이고 징용하여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로 남양까지 원정시킨 사례도 있다”고 기술.

김대상(金大商)

1975년 김대상(金大商)의 ‘일제하 강제인력수탈사(日帝下強制人力収奪史」)’(한국)에서 수만명의 조선여성이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김일면의 ‘처녀·소녀의 강제연행'론(金一勉の「処女・少女の強制連行」論)

재일조선인작가인 김일면(金一勉)은 1976년의 저서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산이치쇼보)에서 위안부에 대해

“그 여자들은 그 전쟁 중에, 나라를 위하여, 라고 칭하면서 특별한 일을 하는 간호부, 군요원, 여자공무원 등의 명목으로서 강제로 모아진 17살부터 20살까지의 처녀들 뿐이었다.”

- 김일면(金一勉)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天皇の軍隊と朝鮮人慰安婦)’ 산이치쇼보(三一書房), 1976년, p.18


라고 적고 있으며, 이러한 ‘일본제국’에 의한 ‘국가적 대형 사기 행위’에 의해 모아진 ‘처녀’는 추정 20만 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김일면의 책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Coomaraswamy Report)가 사실인정 차원에서 거의 모든 출처로 제시하고 있는 조지 힉스(ジョージ・ヒックス, George Hicks)의 저작 ‘성노예(性奴隷, , The Comfort Women)’에도 언급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6.2.3 1980년대(1980年代)

자넷 헌터(ジャネット・ハンター)

일본 경제사를 전공한 자넷 헌터(ジャネット・ハンター, Janet Hunter)가 1984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일본 근대사 사전에서 여자정신대를 매춘과 결합시킨 기재가 있다.

“prostitution was even sponsored by the government with the enrollment of ‘women's volunteer corps’”

— Janet Hunter(1984), Concise Dictionary of Modern Japanese Hist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 172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

센다 가코의 저서를 바탕으로 조선근대사연구자인 미야타 세쓰코(宮田節子)는 ‘조선을 아는 사전(朝鮮を知る事典)’(헤이본샤(平凡社), 1986년 초판)에서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후 미야타는 “위안부 연구자를 못 찾아서, 이미 간행된 문헌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6.2.4 1990년대(1990年代)

윤정옥(尹貞玉)

1990년 1월 4일부터 24일까지 한국의 한겨레신문에서 윤정옥(尹貞玉) 이화여대교수가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를 연재하면서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썼다. 윤정옥은 동년 11월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를 결성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991년부터 1992년에 걸쳐 아사히신문은 조선반도 출신 위안부를 ‘여자정신대·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양자를 혼동해서 보도했다.
 
“일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인을 상대로 매춘 행위를 강요당했던 ‘조선인 종군위안부’ ... ”

- 아사히신문 1991년 8월 11일


“제 2차 세계대전 직전부터 ‘여자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전선에 동원됐고, 위안소에서 일본군인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했다.”

- 아사히신문 1991년 12월 10일 조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주로 조선인 여성을 정신대의 이름으로 강제연행했다. 그 수는 8만, 그리고 20만이라고도 한다.”

- 아사히신문 1992년 1월 11일 조간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이에 대해 “당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고, 기자가 참고로 한 자료 등에도 위안부와 정신대의 혼동이 있었다”면서 기자가 자료를 오용해서 보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기사를 썼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는 전쟁 당시에는 위안부를 정신대로서 두는 것이 시대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모토오카 쇼지 (일본사회당 의원)(本岡昭次(日本社会党議員))

1991년 4월 1일의 제120회 일본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일본사회당 의원 모토오카 쇼지(本岡昭次)가 “여자정신대에 조선인여자정신대라는 것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정부위원 와카바야시 유키노리(若林之矩)는,

“당시, 후생성에는 근로국 또는 국민근로동원서라는 데가 있어서 이런 곳이 동원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만, 당시 거기에 근무하고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사정을 청취한 결과, 후생성의 근로국도 국민근로동원경찰서도, 조선인종군위안부 등의 문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어서, 저희도 그 이상의 상황은 파악할 수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 제120회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 회의록 13호


라고 답변했다. 모토오카 의원은 또한

“정부와 군이 관여하여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여성을 종군위안부로서 강제로 남방으로 연행했다는 것은, 나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행을 했다는 완전히 확실한 증명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지금 (와카바야시 씨가) 저렇게 (정확히 답변을 하지 않고) 도망치고 있지만, 결국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면, 정말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 제120회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 회의록 13호


라고 발언했다. 이처럼 일본에서도 한국과 같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보는 혼동·동일시가 있었다.

이토 타카시(伊藤孝司)

포토 저널리스트 이토 타카시(伊藤孝司)는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의 ‘세카이(世界)’ 1991년 8월호 ‘군수공장에 동원된 조선인 소녀들(軍需工場に動員された朝鮮人少女たち)’에서, “20만 명의 젊은 조선인 소녀들이 여자정신대로 동원되었다. 군수공장 등의 근로동원 뿐만 아니라 그 중 8만 명이 종군위안부가 되었다”고 썼다.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소학생 정신대=위안부 보도(東亜日報・朝鮮日報の小学生挺身隊=慰安婦報道)

1992년 1월 미야자와(宮沢) 수상의 방한 시 한국의 신문은 “국민학생(초등학생)까지 정신대가 되어, 위안부를 시켰다”고 하면서 마치 정신대가 여자 초등학생을 위안부로 삼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보도를 반복했다. 동아일보는 1992년 1월 14일에 ‘정신대, 국민학생(초등학생)까지 끌고 갔다’ 조선일보는 1월 15일에 ‘일본, 국민학생(초등학생)도 정신대에 징발’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1월 15일의 사설 ‘12살의 정신대원’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2살의 국민학생(초등학생)까지 동원하여 전쟁터에서 성적 노리개로 짓밟았다는 보도에 다시 한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치 못한다. (중략) 이제까지 15살의 소녀가 정신대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알려졌으나 12살의 어린 아이까지 연행되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으로 밝혀졌다. (중략) 근로정신대라는 명목으로 동원된 후 그녀들을 종군위안부로 내보낸 사실이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입증되고 있다. (중략) 울부짓는 여성을 때려 젖먹이 아기를 빼앗아 아기 엄마를 연행한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는 1월 16일에 12,13세 전후의 소녀들이 ‘근로정신대’로 연행되어, 일부는 종군위안부로 보내졌고, 15세 이상 소녀도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보도했으며, 또 1월 17일에는 과거 전라북도의 여자근로정신대 귀국 시의 사진을 동원시의 사진인 것처럼 보여주면서 “비극적 운명도 모른 채 미소”를 짓고 있다는 설명을 달아 보도했다.

1월 14일의 ‘초등학생 정신대’ 기사를 집필한 것은 연합통신 김용수(金溶洙) 기자다.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교수가 12세 소녀가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데 왜 보도한 것이냐고 묻자, 김 기자도 도야마 현에 동원된 6명의 학생이 위안소가 아니라 공장으로 동원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며,

“6명의 아동이 위안부가 아니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우선 근로정신대로 동원하여 그 후에 위안부를 시킨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국 국내에서 들었다. 그래서 이 6명 이외에 국민학생(초등학생)인데도 위안부로 일한 자도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굳이 ‘근로정신대였고 위안부는 아니었다’는 부분을 강조하지 않고 기사를 썼다.”


라고 변명했다.

김용수 기자의 변명으로 ‘초등학생 위안부’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또 그 후에 전 정신대였던 여성이 나서서 원 보도는 오보인 것으로 판명됐다.

하지만 그 후에도 ‘초등학생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보도한 신문과 방송은 사과도 수정도 하지 않았으며 “초등학생과 젖먹이 아기의 엄마까지 연행하여 성 노리개로 삼았다”는 이미지가 한국 사회에서 되풀이되면서 드라마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0년대 미국과 한국 등의 위안부 기념비에서도 ‘소녀’상이 설치되었으며 성인여성이 아닌 ‘소녀’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韓国の国史編纂委員会)

1992년 6월,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회는 여자근로정신대의 대부분이 위안부가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유엔 보고서(国連報告書)

1996년 유엔보고서인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1942년까지 조선인 순사가 마을에 와서 ‘여자정신대’를 모집했다, 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일본 내지에서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된 것도 1944년 8월에 이르러서이며 조선에서는 아예 시행되지 않았다. 즉, 조선반도에서 여자정신대를 징용한 사실 자체가 없고, 징모(徴募)도 1944년 3월부터이며, 1942년 시점에서는 실시되지 않았다.


7 근년(近年)

7.1 연구(研究)

1999년 일본 아시아여성기금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는 연구를 통해서, 전 위안부 김복동(金福童)의 증언은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된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엇갈리는 부분이 많으며, 정신대를 통해 동원되었다면 “그것은 속은 것이지, 집단적으로 군 위안부로 충당되거나 군 위안소와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者秦郁) 교수는 1999년 6월에 간행한 ‘위안부와 전장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신쵸샤(新潮社))에서, 조선인 여자에 대해서는 징용령도 여자정신근로령도 발동되지 않았지만 관 알선이나 자유모집을 통해 정신대에 참가한 여자는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신대에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됐다고 했다. 이 루머의 존재 자체는 다카사키 소지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한국에서도 1994년에 여순주(余舜珠)가 석사논문에서 위안부를 여자근로정신대의 명목으로 동원했는지 그 사실 여부는 좀 더 검토해야 한다며, 강만길(姜万吉)과 같은 대학교수들조차 종군위안부를 여자정신대로 인식하고 있던 사실을 심각하게 보면서 사실 확인부터 해야 한다고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지적은 경시되었다.

한편, 한국정신대연구회회장이며 사회학자인 정진성(鄭鎮星)은 “여자근로정신대 제도이야말로 위안부 연행의 수단이 됐다”고 말했다.

윤명숙(尹明淑)은 2003년의 저작에서

“여자근로정신대, 여자정신대, 근로정신대, 정신대, 처녀공출이라는 말이 그대로 군대위안부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해방 이후, 군대위안부문제가 사회적문제로 표면화된 1990년대 초에도 일반민중은 ‘정신대’를 군대위안부와 동의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인의 이러한 인식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 당시 민중에게 있어서 ‘정신대’나 ‘처녀공출’은 ‘징용’과 동의어였다.”


고 말했다. 또, 윤명숙에 따르면, 당시 취업사기에 조선인·일본인 관헌이 개입하고 ‘처녀공출’을 요구했다. 윤명숙은 “국가를 위한 근로동원이나 정신대라고 협박을 받고 징집되거나, 반대로 정신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기를 당해 징집되기도 했다. 군 위안부의 징집은 정신대의 명목으로 실시되었다”고 말했다.

7.2 운동단체(運動団体)

현재도 위안부 문제를 호소하는 한국의 단체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고 칭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단체 이름이 ‘정신대'로 되어있는 것에 대하여 아직도 혼동이 남아있다며 앞서 언급된 다카사키 소지에 의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8 연표(年表)

- 1937년 (쇼와 12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国民精神総動員).

- 1938년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 제정.

- 1939년 (쇼와 14년) 7월, 국민징용령(国民徴用令) 시행 (조선에서는 1944년 8월에 시행). 같은 달에 각의 결정된 ‘쇼와 14년도 노무동원 실시 계획 강령(昭和十四年度労務動員実施計画綱領)’에는 ‘여자무업자(子無業者)’나 신규소학교 졸업자, 이주 조선인 (재일조선인) 등을 ‘급원(給源)’이라고 쓰고 있다..

1941년 (쇼와 16년)

- 1941년 (쇼와 16년) 9월의 ‘쇼와 16년도 노무동원 실시 계획에 관한 건(昭和十六年度労務動員実施計画ニ関スル件)’에서는, 미혼 여자의 동원을 강화하기로 결정되었다.

- 1941년 11월 22일, 국민근로보국협력령(国民勤労報国協力令) 공포. 14-40세의 남자 외에, 14세 이상 25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근로보국대를 편성, 원칙상 연간 30일의 봉사가 요구되었다.

- 태평양전쟁 개전 후, 국민징용령(国民徴用令)이 실시되었지만, 여성에 대한 적용은 보류되었다.

1942년 (쇼와 17년)

1943년 (쇼와 18년)

- 1943년 (쇼와 18년) 6월,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개정했다. 근로보국대는 상시 조직화 되고, 무직의 미혼 여자에 대하여 3-6 개월의 근로봉사를 요구했다.

- 1943년 7월, 후생성(厚生省)이나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 중앙협력회의(中央協力会議)에서 여자징용론이 제기됐다.

- 1943년 9월 13일, 차관회의 ‘여자근로동원의 촉진에 관한 건(女子勤労動員ノ促進ニ関スル件)’를 통해 14세 이상의 미혼 여성을 동원 대상으로 하는 여자근로정신대가 자주적으로 결성됐다.

- 1943년 10월 6일, 후생성은 “무업의 일반 여자는 가급적 정신대에 출동 할 것”을 지방장관(地方長官)에게 요청했다.

- 1943년 10월 8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毎日新報)’ 석간이 ‘유한여자 적극 동원(有閑女子積極動員)’, 일본 내지와 동일하게 여학교 출신자 중 가사 종사자를 ‘실업방면(実業方面)’에로 동원할 계획을 보도했다.

- 1943년 10월 중순, 가쿠슈인(女子学習院) 동창생이 ‘도키와회 근로정신대(常盤会勤労挺身隊)’를 결성, 최초의 여자근로정신대. 최초에 동원된 것은 야마와키(山脇) 고등여학교 졸업생 정신대이며 고니카(小西六, コニカ)에 입사했다.

- 1943년 11월 24일, 후생성은 학교 단위로 여자근로정신대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 1943년 11 월 30일, 오사카에서 정신대가 동원됐다.

- 1943년 12월, 조선총독부가 노무과를 설치하고 “여자도 결전 태세로 증산(増産) 전사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1944년 (쇼와 19년)

- 1944년 1월 23일, 도조 히데키 수상은 “여유 있는 여성의 근로 기피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발언하면서도 “여성 징용은 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 1944년 1 월 17일, 경성부(京城府) 용산(龍山)에서 관 알선에 의한 여자정신대 ‘특별여자청년정신대(特別女子青年挺身隊)’가 결성됐다(근로정신대는 아니었다).

- 1944 년 2월, 국민직업능력신고령(国民職業能力申告令) 개정에 따라 12세 이상이 노동력으로 간주된다.

- 1944년 3월 18일, ‘여자정신대 제도 강화방안 요강(女子挺身隊制度強化方策要綱)’ 각의 결정. 교장이나 여자청년 단장, 부인회장에 의해 정신대 결성을 강화하는 것이 확실하게 인정되었고, 노동성(労働省)은 “필요에 따라 정신대 조직에 의해 필요업무에 협력할 것을 명령할 수 있다”고 했다.

- 1944년 3월 20일, 조선에서 평양여자근로정신대가 군수공장에 2개월의 기간 한정으로 출동했다.

- 1944년 4월, 조선의 경남부대 100명이 처음으로 일본내지에 파견됐고, 시즈오카(静岡)의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沼津) 공장에 출동했다.

- 1944년 6월 15일, 나고야(名古屋)의 미쓰비시(三菱) 항공기 도우토쿠(道徳) 공장에 전남부대 150명, 다이코(大江) 공장에 충남의 150명의 조선반도 여자근로정신대가 동원되었다.

- 1944년 8월 22일에 칙령 제519호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労令) 공포, 즉일 시행. 학도동원령도 동시 시행. 14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으로 구성되는 여자정신대는, 근로봉사(고용관계 없음)에서 집단취업(고용관계 있음)의 형태로 이행하고, 건강보험법이나 후생연금보험법 등의 법정부조(法定扶助)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 1944년 8월 26, 27일 ‘매일신보’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조선에서도 실시된다고 보도했다.

- 1944년 9월 13일 ‘샤신슈호(写真週報)’는 “그동안 상류계급에 많다고 알려진 소위 정신대 기피”를 “일청(一掃)”한다고 쓰고, 또한 적격자라고 인정한 자에 정신근로령서를 교부한다. 이것은 남자의 징용령서와 마찬가지”이며, 그래도 출동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취업명령이 발동되고, 위반한 경우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1년 이하의 징역 또 일천엔 이하의 벌금이 처해진다고 처음으로 벌칙 규정이 쓰여 졌다.

- 1944년 10월, 조선총독부가 ‘국민징용의 해설(国民徴用の解説)’에서 여자정신근로령을 조선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답변.

1945년 (쇼와 20년)

1945년 3월 6일, 국민근로동원령(国民勤労動員令)이 내려졌다. 국민징용령, 노무조정령,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여자정신근로령을 일원화하고, 여자정신대도 국민의용대로 개조.


9 참고문헌 · 관련문헌(参考文献・関連文献)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2014년 8월 5일 13판 특집 1면, 16면과 17면 중 17면 ‘‘정신대’와 혼동  당시는 연구가 부족하고 동일시(挺身隊』との混同 当時は研究が乏しく同一視)’

- 아시아 역사자료센터(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A06031088700 ‘샤신슈호(写真週報) 292호’(쇼와18년 10월 6일)

-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반도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하여(半島女子勤労挺身隊について)’ ‘‘위안부’ 문제 조사 보고・1999(「慰安婦」問題 調査報告・1999)’,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 1999년, 41-60쪽

- 윤명숙(尹明淑) ‘일본의 군대위안소제도와 조선인군대위안부(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 아카시쇼텐(明石書店), 2003년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위안부와 전장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 신초샤(新潮社) 신초센쇼(新潮選書)’  1999년 6월. ISBN 978-4106005657

- 하타 이쿠히코(泰郁彦) ‘‘위안부와 전장의 성 일곱의 쟁점(『慰安婦と戦場の性』>七つの争点)‘, 나고야(名古屋) 미쓰비시(三菱)・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회 원고(朝鮮女子勤労挺身隊訴訟を支援する会 原告)=최종 준비 서면(最終準備書面)

- 이영훈(李榮薫) ‘대한민국 이야기(大韓民国の物語)’ 나가시마 히로키(永島広紀) 역(訳) 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9

- 이나영(李娜榮),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기지촌의 ‘양공주’(日本軍「慰安婦」と米軍基地村の「洋公主」) 리쓰메이칸(立命館) 언어문화연구(言語文化研究) 23 (2), 209-228, 2011.

- 부산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釜山従軍慰安婦・女子勤労挺身隊公式謝罪等請求訴訟)

- 정서운(鄭書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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