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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3)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1월 23일판, 번역 : 황호민).


본 항목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재일조선인 귀환사업(在日朝鮮人の帰還事業)’(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未遂事件)’이란, 일본 주고쿠(中国) 지방 각지에서의 한국 공작원에 의한 밀출입국과, 1959년 12월 4일 한국 대표부(영사관, 당시는 수교 이전이었음)의 김영환(金永煥) 3등 서기관 등에 의해 기획된 니가타 현에서의 암살·폭탄 테러 미수 사건을 말한다.




목차


1 사건의 배경


2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의 결성


3 한국 공작원의 테러 계획


4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계획 발각


5 사건 후

  5.1 중의원 법무위원회

  5.2 한국

  5.3 미디어에 의한 보도


6 출전

 



1 사건의 배경(事件の背景)


조선전쟁(한국전쟁)이 교착 상태가 되어,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한국대통령・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에 ‘이승만 라인’을 선언해 다케시마를 점거했다. 또한 쓰시마(対馬)가 한국령이라면서 일본에 ‘반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의 어민 수천 명을 억류하고, ‘제1 다이호마루 사건(第一大邦丸事件)’과 같은 일본인 살해 사건도 일으켰다.


뒤에 언급하는 이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 당시에도 일본인은 한국에 억류되어있는 상태였다. 한국은 휴전 후에도 계속 국토가 황폐상태였고, 경제 활동은 쇠퇴하고, 세계 최빈국이었다. 또,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 중에는 공산주의자와의 관계가 의심되는 한국민을 재판 없이 수십만 명 학살했다(보도연맹학살, 거창 사건 등).






- 1945년 9월 2일-1952년 4월 28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지령에 의해 많은 밀입국자나 범죄자 재일조선인이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다(오무라(大村) 수용소만으로도 3,633명). 스스로 귀환을 희망하는 재일조선인 140만 명은 일본 정부의 주선으로 귀환한다.


-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에 의해 일본국은 주권을 회복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일한(日韓) 정부간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다며 재일조선인의 수용을 거부했다.


- 1956년, 북조선의 김일성 국가주석이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재일조선인학생을 의식주·학비 전부를 무상 조건으로 북조선에 받아들인다고 발표하며 재일조선인의 귀국을 호소했다. 성명을 받아, 일본국내에서는 조총련이 귀국촉진운동을 벌였다.


- 1959년 2월 13일, 이시바시(石橋) 내각은 “재일조선인의 북조선 귀환문제는 기본적 인권을 기반으로, 거주지 선택의 자유라는 국제 통념에 따라 처리한다”며 각의 양해를 했다.


- 1959년 8월,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은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북조선 괴뢰정권의 공산주의 건설을 도우려 하고 있다”고 비난, 예정되어있던 일한 회담의 중단을 지시했다.


- 1959년 8월, 캘커타에서 일조(日朝) 적십자사 간에서 귀환 협정을 체결했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在日本大韓民国居留民団)은 한국 정부의 의향으로 북송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 1959년 8월 25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단원들이 일본적십자 본사에 난입.


- 1959년 12월 14일, 북조선에로의 귀국선 제1진이 출발한다. 북조선에 귀국한 조선인에는, 한국 정부에 의한 제주도 4 · 3 사건이나 여순 사건 등의 학살을 피해서 일본에 밀입국한 한국인 등이 있었다.



2 북한 송환 저지 공작원의 결성(北韓送還阻止工作員の結成)


위기감을 느낀 한국 정부는 일본에 대량의 공작원을 보내는 것을 결정했다. 1959년 9월, 한국 정부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으로 귀환한 상태였던 재일의용병(재일조선인 한국군 지원자)들에게, 재일조선인의 북조선에로의 귀환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 잠입해 방해 공작 활동을 하는 공작원이 되도록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재일의용군 41명 • 한국군 예비역 장교 • 한국 경찰 시험 합격자 24명으로 구성된 ‘북조선 송환 저지 공작원(北韓送還阻止工作員)’을 결성했다. 또, 한국 정부가 일본 국내에서 조직한 공작원도 방해 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 1959년 9월 말, 서울 강북구 우이동 훈련소에서 ‘파괴반’ ‘설득반’ ‘요인납치반’으로 나누어 훈련을 했다.


- 1959년 12월 초순, 잠입 아지트를 마련하기 위해 선발대가 경북 경주시 감포(甘浦)항에서 선원으로 위장하여 무역선을 타고, 보트를 갈아타고 고쿠라(小倉)와 간토(関東)에서 활동하는 부대별로 해안에 상륙했다. 공작 사건의 무대가 되는 니가타(新潟) 현에 인접한 도야마(富山) 현에 테러 부대의 본부가 설립 되었다.



3 한국 공작원의 테러 계획(韓国工作員のテロ計画)


・재일조선인 귀국 사업 담당의 일본 측 요원의 암살.


・일본 적십자사의 파괴.


・니가타 항으로 통하는 철도선을 파괴.


・한국 민단에 KCIA 공작원을 위장 입회시켜, 일본 측의 경계를 받지 않고 정재계에 침투한다.






4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계획 발각(新潟日赤センター爆破計画発覚)


- 1959년 12월 4일, 일본 경시청(警視庁) 외사과(外事課)는 니가타(新潟) - 현 시바타(新発田) 시내의 바에서 밀담을 하던 공작원 2명의 임의동행을 요구, 시바타 경찰서에서 조사를 했다. 공작원의 가방 속에서 뇌관을 장전한 4개 세트 다이너마이트 3다발, 총 12개가 발견되고,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또, 니가타 역에서는 공작원이 역에 맡긴 휘발유 1L 캔 4 개를 감춘 위스키 상자가 발견되고, 공작원들이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를 폭파하려고 했던 것이 밝혀졌다. 또, 이 공작 사건은 한국 대표부(영사관)의 김영환 3등 서기관과 방일중인 한국 특무기관 간부들이 지휘를 했던 것도 밝혀졌다. 이때 체포된 공작원은, 일본 국적을 취득한 재일한국인과 재일의용병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한 한국 치안국 소속의 재일조선인이다.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재일한국인은 이 사건 이전에는, 신문기자라고 칭하고 일본 적십자사 본부 주변에 계속 머물러 있었으며, 일본 적십자사에서는 출입금지가 되어 있었다. 사건 발각 후, 경찰은 잇달아 한국의 공작원을 적발했다. 이 폭파 미수 사건은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고, 한국 정부나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에 대한 일본 여론이 경직되게 했다. 1959년 12월 7일에는 부산항에서 고베항에 상륙하려고 했던 공작원을 태운 대영호(大栄号)가 간몬(関門) 해협에서 해상 보안관에 임검되어 강제 정박 당한 후, 한국에 되돌아갔다.


- 1959년 12월 12일에는 거제도를 출발한 한국 공작원을 태운 명성호(明星号)가 시모노세키(下関) 앞바다에서 폭풍을 맞아 침몰하고 12명이 사망했다. 


- 1959년 12월 13일, 앞서 12월 12일의 명성호처럼 거제도를 출항한 공작선이 히로시마 현 구레(呉)항에서 공작원을 잠입시켰다.


- 1959년 12월 하순에는 재일의용병(在日義勇兵, 한국전쟁 당시 참전한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으로 조선(한국)전쟁에 참가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도항(渡航)하여 오사카에 살고 있던 한 남성 앞에, 한국으로 귀환한 상태였던 재일의용병 친구가 8명의 또 다른 남성들을 데리고 나타나 거기서 같이 거주하기 시작하고, 밤에는 라디오에서 한국에서 보내오는 암호를 수신하는 등 공작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공작 자금 2000달러도 송부되어 왔다.


- 1960년 4월 19일 4 월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실각하면서 공작활동은 쇠퇴한다.


- 1960년 5월 3일, 야마구치(山口) 현 시모노세키 히코시마(彦島) 에노우라(江ノ浦) 부두에서 생어(鮮魚) 운반선으로 한국에 밀출국 하려고 했던 한국 공작원 24명이 체포되었다. 공작원들은 먼저 고베(神戸), 나가사키(長崎), 시모노세키 부근에서 밀입국했다.


- 1960년 5월 10일, 경시청 외사과가 한국 공작원을 출입국 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공작원은 이승만 대통령 직속의 경무대 기관 출신으로 ‘재일동포의 북조선 귀국 저지 결사대 대원(在日同胞の北朝鮮帰国阻止決死隊)’이었다. 공작원은 일본 적십자센터나 배나 열차를 파괴하는 임무가 있었다.



5 사건 후(事件後)


중의원 법무위원회(衆議院法務委員会)


1959년 12월 8일,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사회당 이노마타 고조(猪俣浩三) 의원은, 자신은 이 사건 발각 이전에 이미 니가타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계획과 사건 실행범인 공작원이 니가타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귀환 촉진 단체로부터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이노마타는 안두희(安斗煕), 장두권(張斗権), 한구(韓九), 유일희(柳日熙), 이주호(李周浩) 등 한국군의 특무기관원들이 일본에 잠입하고 있으며, 한국 대표부(영사관)의 김영환이 준비한, 한국은행 앞으로 된 수표 800만 엔이 한국인을 통해 12월 4일 오후 두시 반, 한국 요리점에서 안두희 등에게 전달되었다는 정보도 공개했다.


이노마타는 김구(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암살 실행범인 안두희(安斗熙)가 강두희(姜斗熙)라는 가명으로 미국 공군 다치카와(立川) 기지를 경유해서 잠입했다고도 전했다. 또, 한국의 공작활동은 세 가지로 나뉘어, 첫째는,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계획, 둘째는, 수송 열차 폭파, 셋째는, 이 모두가 실패로 끝났을 때 조총련 간부와 북조선 측의 귀환 책임자에 대한 테러를 행한다고 하는 것임도 밝혔다. 그러면서 이노마타는 “무엇 때문에 도대체, 북선(北鮮, 호쿠센)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조선인을 모처럼 일본 정부가 북선에 귀환시킨다는 것에 대해, 그들이 반대하는 것일까”라고 물었다.


2011년 4월 30일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노마타 고조가 일본 의회에서 밝힌 한국의 테러 계획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韓国)




- 1959년 12월 8일, 주일 대표부 유태하(柳泰夏) 대사가 신아통신(新亜通信)과의 인터뷰에서 사건과의 관계를 부정했다는 것이 보도된다.


- 2009년 5월 19일, 공작 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 12명이 “재일 동포 북송 국가 임무 참석자 순직자”로서 전몰자 등이 모셔져 있는 국립 서울 현충원에 현창(顕彰)되었다.


- 2011년 4월 29일, 한국 국회 본회의에서 재일조선인의 북송을 저지하는 경찰 특수 임무 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이 승인된다. 공작원과 그 후손들에게 위로금 등 104억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미디어에 의한 보도(メディアによる報道)


- 2002년에는 한국 SBS에서는 ‘뉴스 추적 - 잊혀진 비밀 공작원 - 재일 동포 북송 저지조 71명’이라는 인터뷰 방송이 보도되었다.


- 2009년 9월 26일에는 일본 TBS에서 ‘어둠의 부대 ‘북송 저지대’(闇の部隊「北送阻止隊」)”라는 공작원의 인터뷰 방송이 보도되었다.


- 2011년 4월 30일, 전 테러 공작원 김홍윤(キム・ホンユン), 조승배(チョ・スンベ)가 조선일보에 실명을 공표하고 테러 작전의 증언을 했다.



6 출전(出典)


-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1959년 12월 5일 ‘북조선 귀환 저지 계획의 배후 추궁 폭발물 가진 공작원 억류 두 명 가택 수색(北朝鮮帰還 阻止計画の背後追及 爆薬持った工作員抑留の二人家宅捜索)’


-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1959년 12월 5일 석간 ‘일본 적십자센터 폭파 도모? 한국인 두 명을 체포(日赤センター爆破図る? 韓国人ら二人を逮捕)’


-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 1959년 12월 5일 ‘한국이 ‘특무 공작대’ 경찰청, 귀환 열차 등에 경계 체제(韓国が「特務工作隊」 警察庁、帰還列車などに厳戒体制)’


-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 1960년 5월 12일 석간 ‘한국 테러단을 체포 ‘귀환'방해 도모해서 밀입국(韓国テロ団ら逮捕 "帰還"妨害はかり密入国)’


- 김찬정(金賛汀), 2007 ‘재일의용병 귀환하지 않음 - 한국 전쟁 비사(在日義勇兵帰還せず―朝鮮戦争秘史)’,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ISBN 4000230182


- ‘중의원(衆議院)’ 제33회 국회 법무위원회 제6호(第33回国会法務委員会第6号) 쇼와34년 12월 8일 (화요일) 오전 10시 55분 개의


- ‘TBS’ ‘어둠의 부대 ‘북송 저지대’(闇の部隊「北送阻止隊」)’ (2009년 9월 26일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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