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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논란⑥] “어떻게 이런 일을 날조해서 썼을까”… 일본 주민들의 한탄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억(軍艦島に耳を澄ませば -端島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中国人の記憶)’의 오류 지적



한국에서도 2017년도에 번역발간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억(軍艦島に耳を澄ませば -端島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中国人の記憶)’(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 저).

이 책은 군함도(정식명칭 하시마섬)의 조선인 노무동원 노동자들과 관련 앞서 검증했던 일본에서 출간된 책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와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즉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과 중국인 노무동원 노동자들이 고된 노동과 차별에 시달리며 노예와 같은 상태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이에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 회원들은 일본 산업유산국민회의(産業遺産国民会議, https://www.gunkanjima-truth.com/l/ko-KR/index.html 이하 산유국)와 함께 이 책에 대해서도 검증의 날을 세웠다.  (해당영상 바로가기 :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국인의 기억 –” 을 검증한다)




1. -굴착 자세에 대해서-

“굴착장은 엎드려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좁고, 숨 막힐 듯이 더우며, 피로가 쌓여 졸리고, 가스도 가득하고 낙반의 위험이 있어서, 이대로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서정우, 28 페이지) 

노동은 매우 힘든 데다가, 이렇게 웅크려서 채굴을 합니다. 4년간 그렇게 했더니, 이렇게 등이 구부러져 버렸습니다. 탄광 내부는 덥고 공기도 나쁜데, 8시간 이상 앉아서 작업을 합니다. 나도 한 번, 산소 결핍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김선옥, 36 페이지) 

“일본인은 탄층이 높은, 채탄하기 쉬운 곳을 담당하고, 우리 조선인은 50, 60센티의 낮고 좁은 곳에 들어가서, 몸을 옆으로 누인채 곡괭이와 손으로 파야했다.”(유희긍, 75 페이지)

주민1 증언 - “높이가 약 2.4m에서 3.6m 정도인데 굳이 엎드려서 일할 필요가 없죠.”

주민2 증언 - “대체로 엎드려서 일하는 경우는 없어요. 포복 자세를 취한다는게 이상하단 겁니다. 만약 그게 맞다고 하면 상자를 어떻게 했는지, 어떤 상자에 석탄을 실었는지, 어떤 방법으로 날랐는지 물어보세요. 그걸 물어봐요.”

2. -굴착 복장에 대해서- 

“그들은 이곳에서 훈도시(들고) 한 장만을 몸에 걸치고, 서있지도 못한 채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석탄을 캐야만 했다.” <KBS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65 페이지)

“훈도시를 한 달에 한 벌만 주었는데, 갱내에서는 훈도시 한 장만 입고 일을 했고, 때로는 알몸 상태로 일을 해, 마치 원시 사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4 페이지) 

“일본인 광부는 작업복을 지급받았으나, 중국인은 지급받지 못해, 훈도시 한 장만 걸치고, 짚신을 신고 있거나, 맨발이었다.” (이지창,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4 페이지)


주민1 증언 - “갱내는 위험해서 맨몸으로 작업할 수 없어요. 석탄 가루 같은게 몸에 떨어지면 다치거든요. 반 소매는 있었을거 같아요. 작업복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다치니까 맨몸으로는 못해요. 맨몸도 괜찮다고 하면 그건 의무 위반이죠.”


주민2 증언 - “그러면 일 못해요. 지하에서 작업하는데 지하 수 백미터 밑에서 작업을 한다고요.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마찬가지죠.



3. -갱내의 안전확보에 대해서- 

“회사는 중국인의 목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갱내에서의 신변의 안전을 지켜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늘 부상과 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는데도 방치했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8 페이지)


주민1 증언 - “석탄 채굴 작업은 정말 힘들어요. 그래서 기술이 없으면 할 수가 없죠.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에요. 아무리 강제로 시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주민2 증언 - “중국인에게는 절대로 작업을 안 맡겼어요. 단순 노동만 시켰죠.”


주민3 증언 - “조선인에게 위험한 작업은 안시켰을거로 생각해요. 아무래도 기술이 없으니까. 탄광에 대한 기술을 배우질 않았기 때문에.”


주민4 증언 - “의외로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죠. 특히 갱내 지보 작업은 아무래도 경력이 수십년된 사람이 하는 것과 초보자가 한 거랑은 완전히 다르니까요. 갑자기 무거운 암반이 떨어지면 경력자가 만든 지보는 그 무게를 견디지만 초보자가 만든 지보는 부서지거든요.”


주민5 증언 - “예를 들면 막장 하나에 길이가 45m에서 50m정도 되는데 채굴 작업에 조선인만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숙련 갱부랑 같이 가죠. 일본인인 경우에도 숙련 갱부가 동행해 작업 지시를 내립니다. 작업 방법을 설명하긴 했지만 전부 조선인에게만 맡겼다는 건 말이 안돼요. 갱내 작업에서는요.”


4.- 부상 시 처지에 대하여- 

“낙반으로 인해 한 달에 4, 5명은 사망했어요. 지금과 같은 안전을 고려한 탄광이 전혀 아니었어요.” (서정우, 28 페이지)


주민1 증언 - “1944년에 막장 붕괴가 한 번 있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전혀 없었어요. 차별이고 뭐고 올라올 때는 갱도에 나오면 보통은 전차가 기다리고 있죠. 전차가 있으면 들것을 준비해요. 들것의 길이가 1m 20cm밖에 안되니까 두 개를 사용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옆에서 계속 줄을 잡아당겨요. 갱도에 가려면 승강기를 이용해야 하니까, 그리고 밖으로 나오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요. 무엇보다 검사를 해야 하니까요.”


주민2 증언 - “의사가 돈을 내는게 아니니 당연히 치료를 하죠. 회사 병원이니까 돈은 낼 필요가 없어요. 입원을 해도 식사는 제대로 나와요.”


주민3 증언 - “조선인 통역사한테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이 치료를 받았다고요.”


5. -작업 동료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국인의 작업장은 일본인과 별도였으며, 갱 밖에서도 거의 접촉이 없었는데, 어느날, 사소한 일로 징벌형을 받은 일본인들과 만났을 때 ‘일본 정부가 빨리 망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전영식, 51 페이지) 

“일본도를 장비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이것저것 명령을 했다.” (서정우, 28 페이지) 

“일본인 감독이 구타와 학대를 가해서,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른 중국인도 적지 않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8 페이지)


주민1 증언 - “갱내에 내려가면 국적이 어디든 결국 같은 작업장 안에 있으니까 서로 인사하거나 했죠. 저희가 ‘아버지’라고 하면 조선인들이 좋아했죠. 내려갈때도 승강기를 타고 같이 내려가요. 그러니까 차별은 전혀 없었죠.”

주민2 증언 - “하나의 작업마다 숙련 갱부가 한 명씩 있어요. 그 사람이 중심이 돼서 지시를 내리고 작업이 진행되도록 지휘를 해요.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조선인이 쉬는 날에 자기 집으로 부르죠. 조선인은 혼자고 일본인 갱부는 아내가 있으니까. 자기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어요. 숙련 갱부로 인해 하나가 되어 작업을 완성하는 거죠. 그 협력체제를 갖춰나가면서 팀워크를 만들어가는 풍습은 하시마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돕는 거죠. 공동 작업이란게 상당히 번성했었어요. 다른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워했죠.”




6. -가스 유출 사고에 대해서- 

“어느날, 갱내에 가스가 누출되었는데, 일본인 주임 감독은 안에 있는 중국인 노동자의 생사는 개의치 않은 채, 서둘러 갱도의 입구를 막으려고 했다. 탄광장이 어떠한 구명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한을 품은 채 이국 타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90 페이지)


주민1 증언 -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부하를 버리진 않아요. 그만큼 인간미가 있단 거죠. 그게 하시마 특유의 인정론이에요. 왜 그 부하를 버리고 먼저 도망쳤냐, 그에 대한 책임은 추후에 지게 돼요.”


주민2 증언 - “그건 거짓말입니다. 결국 가스에 대해 말하자면 가스란 그런 게 아니에요. 갱도에 있는 풍관을 통해 바람을 보냅니다. 예를 들면 바람을 보내고 담당자가 가스를 측정하죠. 사람이 쓰러질 정도면 불도 붙어요. 불을 붙이면 불탄다고요. 그 정도에 어지러움을 느끼면 밖으로 나오면 되니까 좀 어지러울 뿐이지 그런일은 없었어요.”


7. -갱내의 작업 분담에 대해서- 

“일본인은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본인들이 들지 않고, 중국인에게 모두 들게 했다. 그러나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감독이 달라고 하는 도구가 어떤 것인지 몰라서, 도구를 재빨리 건네지 않으면, 감독은 우리를 마구 때렸다. 손 닫는 곳에 곡괭이가 있으면 곡괭이로 때렸고, 삽이 있으면 삽으로 때렸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맞고 살았다.” (이지창,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3 페이지)


주민1 증언 - “우리는 그런 얘긴 들어 본 적 없어요.”


주민2 증언 - “한 팀이 작업할 경우에 그런 개인적인 압제를 행사하면 일단 그 시점에서 팀워크는 깨져요. 완벽한 책굴 작업을 지시해도 분열이 일어나면 불가능해요. 숙련 갱부가 책임지고 담당하는 현장에서 작업 공정을 정하면서 협력하면서 작업합니다. 그런 작업 실태 안에서 생겨나는 인간애. 함께 작업을 완수하자는 책임감이 생기니까 숙련 갱부 집에 가기도 하고 그런 일체감이 섬에서 느껴지죠.”


8. -조선인의 주거에 대해서- 

“우리 조선인은, 이 모퉁이의 구석의 2층 건물과 4층 건물에 살았습니다. 1인당 다다미 한 장 넓이도 안될 좁은 방에 7, 8명이 같이 살았습니다. 겉은 모르타르와 철근이었지만, 건물 안은 아주 허름했습니다.” (서정우, 28 페이지)

“9층 건물의 가장 아래층인 반지하였다. 일본인들은 거기에 없었다. 별도의 환경이 좋은 곳에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 항상 습기가 찼고, 통풍도 안되어 항상 불쾌했다.” (전영식, 49 페이지)

“거친 파도가 제방을 넘어올 때는, 숙소 안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자고 있는 사이에 다다미 위의 옷이 젖어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박준구, 54 페이지) 

“숙소의 창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는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창으로 되어 있었고, 근처에 감시소도 있었다.” <KBS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64 페이지)


주민1 증언 - 이건 16호라고 하는데, 이 앞에 사각형 집이 있어요. 건물이 있는 거죠. 2층짜리 목조 건물 판잣집이요. 그곳에서 조선인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죠. 처음에는 이 2층짜리 목조 건물에서 살았어요.“


주민2 증언 - “새로 들어온 신입이나 조선인들은 탄광이 번창했던 시절이라 가족들을 데리고 왔었어요. 가족과 동행한 순서대로 조금 좁은 16호에 들어갔고, 17~20호까지 있었어요.”


주민3 증언 -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서 뭔가하고, 1층 반지하인 곳에 사람이 있었어요. 그곳에 가 보니까 저고리라고 하죠? 남자가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더라고요.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고 재미있어 보였어요. 오늘은 좋은일이 있었나하면서 구경했어요. 강제로 끌려왔다면 그런 옷은 못갖고 왔겠죠. 왜 강제연행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들어요.”


주민4 증언 - “징인지 뭔지 두들기더라고요. ‘쾌지나 칭칭나네’라고 하면서. 그리고 동급생이 한 명 있었지.”


주민5 증언- “하시마 졸업생 중에 한국인이 13명 정도 있었지. 1928년인가”


주민6 증언- “안도 씨가 기숙사에서 사감을 했었잖아.”


주민7 증언- “나중에 경사가 생겼지만 그 위에 2층 건물이었잖아. 미야와키 아줌마가 임신을 해서 우유 배달은 힘들다면 ‘사카에 씨, 미안한데 우유 배달좀 도와줘’라고 소학교 6학년 때 그 조선인 기숙사에 배달한 적이 있어.”


9. -조선인 차별에 대해서- 

“틈만 나면 ‘제2국민’이라 불리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 (최장섭, 44 페이지)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 ‘개, 고양이, 돼지, 짱꼴라(중국인), 조센징(조선인)’ 등의 멸칭으로 불리며 ‘인간다운’ 취급을 받지 못했다.” <미지를 향한 조사, “하시마 자료”(하시마, 조선인들의 사망 실태)와 그 해명. 130 페이지)


주민1 증언 - “전쟁 중에 젊은이들을 전부 군대에서 데려갔죠. 보통은 학교에 선배가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 군대에 끌려가니까. 전기 교환 반장이 조선인이었는데 우린 그 조선인에게 일을 배웠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택에 살았고, 일본인과 똑같이 나가사키에도 가고 일본인과 잘 어울려 지냈어요. 조선인이라고 차별하진 않았어요.”

주민2 증언 - “괴롭힌 적이 전혀 없었어요. 의사로 일하던 사람도 꽤 있었죠. 내과 의사랑 간호사도 있었고, 그러니까 차별은 없었을 거로 생각해요.”

주민3 증언 - “하시마에서는 사이 좋았어요.”

주민4 증언 - “이사무 씨랑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18호 2층에 있었던 친구... 검도하던 친구”

주민5 증언 - “김치 만드는 것도 알려주고 일본어도 점점 능숙해졌죠.”

주민6 증언 - “저도 동급생 중에 조선인이 있었는데 6학년때 짝이 된 적이 있어요. 같이 앉아서 공부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면서 등하교도 같이 했죠. 그리고 30호동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옆집 조선인과 왕래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주민7 증언 - “김 씨, 조 씨, 이 씨, 이 씨란 사람이 목조 주택에 살았어요. 그래서 겨울이 되면 조선에서 밤을 보내줬는데, 2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이 40분 정도 있는데, 꼭 집에 가서 그걸 구워 먹더라고요.”

주민8 증언 -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친구였어요. 차별한 적 없습니다. 구두도 배급했었잖아요. 이번에 두 켤레 왔으니 이 사람이랑 저 사람이랑 그리고 다음에는 누구랑 누구라고 신발 사이즈를 물으면 ‘여덟문반(21.5cm)’이라고 했어요. ‘팔문반’을 ‘여덟문반’이라고 그 기억이 나네요. 그러니까 차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주민9 증언 - “누가 일본인이고 아닌지 어린애들은 모른다고요.”

주민10 증언 - “중학교에서는 동급생이었어요. 아버지가 하시마에서 유곽을 운영했었죠. 그것도 조선인 전용 유곽을요. 미혼인 남자들이 대부분이라 그 당시 군함도에도 유곽이 3~4개 정도 있었어요. ‘혼다야’나 ‘모리모토야’라든가. 그래서 성범죄라는 걸 전혀 들어 본적이 없어요. 유곽에서 일하는 여자도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결혼하기도 했어요. 광부랑 결혼한 사람도 있고요.”



10. -노동시간과 초라한 식사에 대해서- 


“하루 12~16시간의 탄광 노동을 하면서, 식사는 콩깻묵으로 만든 주먹밥 두 개가 전부였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다. 배가 고파 움직이지 못해, 탄차 사이에 끼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 <KBS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64 페이지) 


“이러한 중노동에, 식사는 콩깻묵 80%, 현미 20%로 된 밥과, 정어리를 통째 삶아 부순 것이 반찬이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 설사를 했고, 심하게 쇠약해져갔다.” (서정우, 28 페이지) 


“식사는 ‘콩깻묵’, ‘납작보리’가 대부분으로 양도 매우 적어서 늘 배가 고팠지만, 4년 동안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김선옥, 37 페이지) 


“딸랑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장시간 노동을 했기 때문에, 다들 영양실조 상태였다.” (최장섭, 43 페이지)


“쌀은 반도 들어있지 않은, 거의 콩을 섞은 밥이었다. 게다가 양도 적어서, 늘 배가 고팠다.” (박준구, 85 페이지) 


“가축용 사료인 콩깻묵을 우리에게 먹였다. 죽은, 200명이나 되는 인원에 겨우 냄비 하나로, 작은 종지 한 그릇밖에 먹지 못했다.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귤껍질을 주워 먹거나, 들풀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도 일본인 감독한테 들키면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6 페이지) 


“일터로 오가는 길에 귤껍질이 떨어져 있으면, 몰래 주워 가져가서, 씻어서 먹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들키면 반드시 맞았다.” (이지창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5 페이지)


주민1 증언 - “12시간~ 16시간이나 일을 했다고 적혀있지만, 일본인도 마찬가지였어요. 노동조합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우리 누나들도 8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했습니다. 8시간 노동이 아니었어요. 10시간, 12시간 일을 했습니다. 일본인도 함께 일을 시켰던 거죠.”


주민2 증언 - “전쟁 중에는 일본인도 마찬가지죠. 식량 배급이 뻔한데 어떻게 쌀밥만 먹나요. 일본인도 그랬어요.”


주민3 증언 - “못 먹었다고 하는데, 우리도 못 먹었으니까요. 먹을게 없었어요. 그 시절에는 다들 배급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인만 못먹진 않았어요. 일본인도 못 먹었어요. 우리도요. 결국 죽을 먹었죠. 밥이 아니라, 모두 같은 음식이니까. 일본인이라서 더 좋은 걸 주거나 하진 않았어요.


11. -임금에 대해서- 


 “임금을 받은 적이 없다.” (박준구, 43 페이지)


“회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정해진 식사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술집과 식당에 갈 수도 없었다. 월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준구, 56 페이지)


“임금은 60~90엔입니다. 점점 숙련공이 되어 가기 때문에, 임금도 올랐습니다. 송금도 했습니다. (송금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김선옥, 37 페이지) 


“임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얼마인지 잊어버렸지만, 매월 푼돈 정도의 돈만 주었다.” (전영식, 50 페이지) 


“하시마를 떠나기로 결정이 되어, 미쓰비시는 중국인에게 귀국비용을 지급한다며 수표를 건넸다. 한 장의 종이 위에 무언가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내 것은 800위안 정도의 수표였다.” (이지창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106 페이지)


주민1 증언 - “그 당시 일본도 정책상 석탄이 중요했고 어쨌든 생산을 중시해서 10시간, 12시간 가혹한 노동을 했죠. 일본인 종업원과 함께요.”


주민2 증언 - “혼자 온 조선인도 기숙사 생활을 했죠. 그리고 사택에는 가족을 데려온 사람도 있었는데, 가족이 있는 사람도 반드시 월급날에는 도장을 가지고 줄을 서서 받으러 왔어요. 그리고 기숙사에 있는 조선인들은 한 사람씩 받는 게 아니라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감이 월급을 전부 받아와서 기숙사에서 나눠줬어요.”


주민3 증언 - “월급을 직접 받진 않았어요. 기숙사에 돌아가면 기숙사를 관리하는 사감에게 회사에서 받은 월급을 개개인에 공제해서 주거나 그 잔금을 전해준 거죠.”


주민4 증언 - “나 어릴 적에 아침에 우유배달을 했는데 수금은 우유를 신청받은 미야케 아줌마가 헀어요. 돈이 없으면 우유를 못 마셨어요. 공짜가 아니니까. 미야와키 아줌마가 부탁해서 내가 우유 배달을 했으니까. ‘임신해서 힘드니까 사카에 씨 미안하지만 등교 전에 배달좀 해줘 나한테 부탁을 했어요’ 그러니 내가 증명할 수 있죠.”


12. -학대에 대해서- 


“일본인 감독이 구타와 학대를 가해서,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른 중국인도 적지 않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88 페이지) 


“총 20명의 대부분이, 일본인 노동자와 감독들이 가한 폭력, 린치, 학대, 폭행에 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미지를 향한 조사, “하시마 자료”(하시마, 조선인들의 사망 실태)와 그 해명. 130 페이지)


주민1 증언 - “부분적으로 괴롭힌 적이 있었을 거예요. 대신 집단으로 린치를 하거나 하는 건 없었을 거에요. 잘은 모르겠네요. 섬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소문이 퍼져요. 좁은 곳에 사람이 모여 있으니까. 근데 그런 일은 들어 본 적이 없네요.”


주민2 증언 - “하시마에서 학대나 강제노역 같은 건 들어본적 없었지만. 왜냐하면 하시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돌아왔거든요.”


주민3 증언 - “1947년 하시마에 갔었을 때도 한국인이 몇 명 있었어요. 거기서 ‘호우라이테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했었죠.”


주민4 증언 - “남편이 귀하해서 하시마에서 짬뽕 가게를, ‘하오라이테이’라는 짬뽕 가게를 했어요. 남편이 전기 담당이었는데 잔무 정리 때문에 끝까지 남아서 일을 마무리해줬어요. 열심히 해주니까 ‘힘내’라고 했죠. 남편이 좀 고위 감독관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니 ‘고바야시 씨도요, 저희도 오랫동안 일하게 해 주셔서’라고. 그리고 폐산 후에는 역 앞에다 짬뽕 가게를 또 냈더라고요. 나가사키에 집도 크게 짓고 가끔 전화도 했어요. 오늘 가게 쉬니까 집으로 놀러오라고요. 돼지고기라든가 그때는 먹을게 귀했잖아요. 돼지고기랑 게랑 중국은 게를 주잖아요. 그런걸 주곤 했어요. 저랑 꽤 친하게 지냈죠. 한번도 중국인이나 조선인이라고 느낀 적도 없고.


13. -경찰에 대해서- 


탄광장은 경찰서에 전화해서, 우리의 폭동을 알리고 경관을 불렀다. 7명은 모두 포박당한 채 난타당하였고, 그대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한 경관이 내 머리를 칼로 치려고 노리며 다가왔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숙여 피하려고 했으나, 목 뒤쪽에 칼을 맞아 선혈이 솟구쳤고,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이경운, 제소 원고 중국인의 진술 중. 90 페이지)


주민1 증언 - “갱내의 일은 경찰관이 관여하지 않으니 거짓말이죠. 보안 감독의 감독소가 했어요. 경찰이 아니에요. 우선 그 부분이 틀리단 거예요. 경찰은 갱외의 일을 담당했어요.”


주민2 증언 - “영화도 아니고, 영화에서는 경찰이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하시마의 일개 주민이 하시마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부장이랑 순경이 두 명 있었는데 나랑 아주 친해서 잘 알고 있어요. 두 명 뿐이었어요. 부장이랑 순경이랑. 나가사키의 오우라라는 곳이 있는데 오우라 경찰서에서 하시마로 파견 근무를 나와요. 오우라 경찰서예요. 오우라 경찰서에는 있었습니다. 하시마 파출소에서 두 명 뿐이었습니다. 하시마의 현장을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을 날조해서 썼을까 감탄할 정도예요.”


주민3 증언 - “30호 동 여기 지하에 감옥이... 형무소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들어갔는데 거의 비어있었죠. 옛날로 따지면 감옥인데 싸워서 들어간 건 봤어요. 폭력으로 인한 부상은 들어본 적도 없고, 경찰도 나가사키에서 교대로 왔으니까요. 감옥이란 곳이 우리도 신기하니까 누가 들어갔나 이렇게 보곤 했는데 격자문이 있고 이쪽에 경찰관이 있었어요. 누가 있는지 어린 마음에 봤는데, 우리도 싸우면 집어넣는다고. 가끔 술 취한 일본인이 있었고, 조선인이 싸워서 들어갔단 얘긴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일본인이 사소한 일로 잡아가진 않았어요.”



14. -섬 탈출에 대해서- 

“실제로 많은 조선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헤엄치는 도중에 바다에서 익사하거나, 도중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거나 했다.” <KBS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지옥의 섬, 군함도”> (66 페이지) 

"나는 도망칠 생각도 안 들었습니다. 붙잡히면, 거의 반죽음을 당합니다. 벌거벗겨진 채로 사정없이 맞았거든요. 밴드(끈)로 무지막지하게 맞거나 했습니다. 칼로 찔리기도 한 상처도 있습니다.“ (김선옥, 37 페이지)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통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려고 했으나, 도중에 힘이 빠져 붙잡히거나, 육지에 도착해서 붙잡힌 사람도 있는데, 고무끈으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았다.” (최장섭, 44 페이지) 

“비명을 듣고 달려온 우리 앞에서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했다. 대략 11명 정도로, 그들은 투옥되었는지, 섬에서 사라졌다.” (최장섭, 44 페이지) 

“동료들 중에는 자살한 사람이나, 다카하마에 헤엄쳐서 도망치다 익사한 사람 등이, 40~50명 정도 있습니다.” (서정우, 29 페이지)


주민1 증언 - “유곽에서 놀게 한 후 데려오는 거죠. 그게 다 본인들이 진 빚이 된 거죠.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섬에서 못나가는 거 같았어요. 그 기억은 있어요. 그 안에 조선인이 섞여 있진 않았어요. 전혀 다른 얘기죠. 그런 일당이 한 번 섬에서 탈출한 적이 있어요. 정면에 다카하마가 보이니까요. 도망칠 때 통나무를 갱목이라고 하는데 그걸 바다에 던져 갱목에 매달려서 밀고 헤엄치고를 반복해 다카하마까지 도망갔어요. 하지만 다카하마에서 나가사키까지 외길이라 나가사키에서 반드시 잡히는 거죠. 그때 조선인은 없었어요. 일본인만 있었지.”

주민2 증언 - “일본인도 일이 힘드니까 다들 꾀를 부렸어요. 그러면 또 설교 들으니까 짜증나서 도망치자 그런 거죠. 갱목을 이어서 뗏목을 만들어요. 그걸 타고 도망치는 건 좋은데 파도를 읽을 줄 모르니 다시 돌아오는 거죠.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죽도를 들고 다니는건 확실히 본 적이 있어요. 그 이상의 것은 없었어요. 있을 수 없죠. 일본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한국 사람한테만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주민3 증언 - “무단 결근을 하면 종업원이든 조선인이든 당연히 벌을 받았어. 그걸 못 견디는 사람들이 도망을 치는거지. 완전히 도망친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기 제방이 있잖아요. 제방 옆에 구멍이 있어요. 수도관, 전기가 통과했지. 오래된 갱목을 여기에서 버렸어요. 섬 주민들만 아는 구멍인데 여기에서 갱목을 부여잡고 도망쳤다고 해요. 성실하게 일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얘기를 들어보면 농땡이 부리거나 한 사람들이 벌을 받은 거예요.”

15. -조선인의 인양에 대해서-

 “원폭이 있은 후 20일 정도 지나, 8월 말에 귀국했습니다. 나가사키에서 배가 온다고 했으나, 전혀 오지 않아 발동선에 나무배를 끌게 하여, 3일 걸려 부산에 귀국했습니다.” (김선옥, 38페이지) 

“회사는 우리를 귀국시킬 준비를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음력 8월에, 가족이 있는 동포가 준비한 암선을 타고 귀국한 것이다. 마치 거지 꼴을 하고... 지붕이 없는 작은 배로,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30~40명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냈다.” (전영식, 52 페이지) 

“어쨌든 빨리 귀국하고 싶었다. 시간이 얼마지나, 암선도 상관없다며 동료들과 얘기해서 목조선을 발견했으나, 너무 작아서 불안했다. 누가 알선해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선장은 러시아에도 왔다갔다고 해서, 돈을 조금씩 모아서 빌리기로 했다. 희망자가 모두 승선하지는 못했다. 선장한테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회사가 준비해 주지도 않았고, 돈을 받은 적도 없다.” (박준구, 58 페이지) 

“일본인이 통통배 같은 것을 준비해 주어서, 고토를 경유해서 마산에 도착했다. 1945년 11월 5일이었다. 도중에 고토 부근 바다의 파도가 높아 위험했기 때문에, 고토에서 1박 했다. 귀국 시에 탄광 측이 50엔을 주었으나, 마산에서 도둑을 만나, 무일푼이 되었다.” (최장섭, 46 페이지)


주민1 증언 - “(이 책에는) 하시마에서 조선으로 인양될 때 하시마 주민들이 해안으로 나와 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는 기록이 전혀 적혀있지 않아요. 제 형제도 해안에 가 잘가라고 손을 흔들며 사람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고 했거든요.”

주민2 증언 - “하시마 소학교에 다 불러서 한국인들도 다 불렀죠. 날짜는 달랐지만 전부 돌려보내고 아침 6시부터 모여서 전부 배웅했어요. 정말 슬픈 이별이었죠. 배에서 이별을 할 땐든 나카노시마에 배가 들어갈 때까지 가지 않고 서로 손을 흔들었어요. 배가 안보이면 그때 집으로 돌아갔어요. 한국인이 돌아갈때도 운동장에 모였어요. 소학생이 오백 명 정도 있었는데 아침 6시부터 다 모여서 배가 떠나는 걸 봤어요. 전부 돌아갔죠.”

주민3 증언 - “전쟁이 끝나고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적도 없어요. 심한 학대를 받았다면 한 번쯤은 폭동을 일으켰지 않았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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