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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다케시마(竹島), 시마네 현(島根県)’ (3)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그 세번째 사업




4 한국에 의한 점령 상황

   4.1 섬의 현황
   4.2 관광지화
   4.3 사격 훈련 실시

5 러시아 중국의 주변 해역에서의 활동

6 다케시마에 관한 사회 정세
   6.1 한국 사회의 상황
        6.1.1 한국의 영토 교육
        6.1.2 “독도의 달”· “대마도의 날”
        6.1.3 학술계에서의 활동
   6.2 일본 사회 상황
        6.2.1 일본의 영토교육
        6.2.2 일본 정부에 의한 자료 데이터베이스화
        6.2.3 오자와 이치로 비서의 발언
        6.2.4 홋카이도 교직원 조합에 의한 자료 배포
        6.2.5 도로치바의 일본 정부 규탄
   6.3 우표 발행
        6.3.1 “다케시마 우표”
   6.4 지도 등의 명칭 · 위치 표기
        6.4.1 '다케시마 박물관'의 릴리프
        6.4.2 Xbox Live
        6.4.3 오레곤 자동차 관리국 한국어판 설명서
        6.4.4 한국 지폐의 지도 표기
        6.4.5 Google 지도 등의 기술
   6.5 기타 견해

7 연표
   7.1 에도 시대
   7.2 메이지 이후
   7.3 포츠담 선언 수락 후
   7.4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서명 후
   7.5 일한 국교 정상화 후

8 다케시마에 상륙한 유명인
 


다케시마(竹島), 시마네 현(島根県)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다케시마(竹島), 시마네 현(島根県)’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다케시마(竹島), 시마네 현(島根県)’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다케시마(竹島), 시마네 현(島根県)’ (3)

 



4 한국에 의한 점령 상황(韓国による占領の状況)

4.1 섬의 현황(島内の現況)

다케시마는 현재도 한국에 의한 실효지배가 계속되어서, 해양경찰청을 산하로 둔 대한민국 해양수산부의 관리 하에 놓여있다. 다케시마에는 군대에 준하는 장비를 가진 한국의 국가경찰인 경북경찰청의 독도경비대 무장경찰관 40명과, 등대 관리를 위해 해양수산부 직원 3명이 상주하고 있다. 또한 한국 해군과 해양경찰청은 한국이 주장하는 영해 해역을 상시 무장 감시하고 있으며 일본 측의 접근을 엄중하게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해상보안청 선박과 어선이 한국이 주장하는 섬의 영해 내에 들어설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일본 정부의 거듭된 항의에도 불구하고 등대, 헬기 선착장, 레이더, 선박의 접안 시설, 경비대 숙소 등이 한국 측에 의해 설치되었다. 니시시마(西島)에는 다케시마(독도)의 한국 영유를 주장하는 어민 2명이 기숙사를 건설하여 거주하고 있다.
 
· 이미 건설 된 주요 시설

  히가시시마(東島) ··· 경비대 숙소, 등대, 헬기 선착장, 기상 관측대, 선박 접안 시설, 송수신 탑, 레이더
  니시시마(西島) ··· 어민 숙소

한국은 1991년부터는 김성도, 김신열 부부의 거주를 인정하고서 주소를 독도 리(里) 산(山) 20번지로 하고있다. 2005년 4월에는 한국인의 결혼식이 다케시마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그 밖에 다케시마 방위(防衛)에 992명의 한국인이 다케시마 호적으로 올라가 있다. 

2014년 11월 한국 정부는 다케시마에 대해서 기존에 계획하고 있던, 재해 발생시 등을 위한 피난 시설의 건설을 중단하고 입찰 공고를 취소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관계 각료회의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아베 정권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해야 한다”라고 의견을 내어 중단이 결정됐다고 한다. 한국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국회 답변을 통해 건설 예정이었던 시설의 입찰을 취소한 것과 관련, “독도는 명백한 우리나라 영토이며, 일본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여도 우리 방식으로 영유권 행사를 한다”면서 외교적 배려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4.2 관광지화(観光地化)

2005년도에 시마네 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에 반발한 한국 정부가 그간 한국인 관광객들이 섬을 찾는 일을 막아온 것을 해금(解禁)했다. 이에 동년 3월 28일에 일반 관광객이 처음으로 다케시마에 상륙했다. 2013년 9월 현재, 1일 평균 805명의 사람들이 섬에 상륙하고 있다. 다케시마는 울릉도에서 부정기 운항하는 유람선으로 2시간 정도면 갈 수있다. 울릉도와의 사이에 수륙 양용기에 의한 항공로를 개설할 계획도 있다 . 

일본 외무성은 일본인의 다케시마 도항에 대해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한국의 출입국 절차에 따라 다케시마에 상륙하는 것은 그 국민이 다케시마에 대해서 한국 측의 관할권을 복종하고 인정했다, 또는 다케시마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했다는 식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출입국 절차에 따라) 해당 지역에 가지 않도록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협력을 부탁합니다”라고 하고있다.


4.3 사격훈련 실시(射撃訓練の実施) 

한국은 2014년 6월 20일에 다케시마 남서 연안의 일본 영해를 포함한 해역에서 사격 훈련을 실시한다고 일본 측에 통보했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주한 대사관을 통해 항의하며 훈련 중지를 요청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한국 해군이 다케시마 앞바다 해역에서 사격훈련을 시작한 것에 대해 “다케시마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입장에 비추어 절대로 받아 들일 수 없고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

한국 국방부 부대변인은 한국군이 2014년 11월에 다케시마 주변 해상에서 ‘외부 세력’에 의한 기습 상륙을 저지하는 방어 훈련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기상 조건이 좋으면 해군에 의한 섬 상륙 훈련도 병행할 의사를 표명했다 .


5 러시아 중국의 주변 해역에서의 활동(ロシア・中国による周辺海域での活動)

2019년 2월 23일,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군용기 1대가 울릉도와 다케시마 두 섬 사이의 상공을 처음으로 비행하고 또 한국방공식별구역에 들어갔다는 사유로 한국 정부가 항의했다.

2019년 7월 23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러시아 항공 우주군 A-50 공중경보통제기가 다케시마 주변 해역에서 영공을 침범했다는 사유로 18대의 한국군 전투기 F-15 와 F-16 이 출동하여 360발의 경고 사격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중국군기도 러시아군기와 행동을 같이 하는 듯한 비행을 하고 한국의 방공식별권 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일본 항공 자위대도 10대의 F-15J 와 F-2 가 출격했다. 러시아 국방부와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는 러시아 군의 Tu-95MP 폭격기 2대와 중국군의 H-6K 전신(戰神) 폭격기 2대에 공동 경계 감시 활동을 벌였다고 밝혔으며 영공 침범은 부정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와 중국에 항의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과 러시아에 항의했다 .

6 다케시마에 관한 사회 정세(竹島に関する社会情勢)

6.1 한국 사회의 상황(韓国社会における状況)

한국에서 다케시마가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한 김완섭 씨에 대해 비방을 한 사람이 불기소 처분이 된 사례가 있었다. 

1999년에 설립된, 한국에 관한 정보 선전 공작 활동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의 민간 조직 VANK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이 조직의 인터넷상의 행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도에 5,000만 원(약328만엔)의 예산을 공표하고 있다.

VANK 는, “세계에 일본의 '역사 왜곡'을 알리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디스카운트 재팬 운동’을 시행, 사이버 시위라고 칭하는 항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 수법은, 세계 각 기관에 한국의 주장을 대량 전송, 또 영어판 wikipedia 의 조직적 편집 등이다.*

[* 위키피디아 일본판 VANK 항목의 ‘최근의 주요 활동’을 참조하라.]

또한 VANK 는 한국관광공사와 공동 사업으로서, 한국의 역사 인식에 근거한 “한국 관광 홍보책자”를 발행하여 전 세계의 관광 단체나 학교 등에 발송하고, 경상북도와 공동 사업으로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 조직적·계획적으로 정보 홍보 공작을 하는 ‘사이버 독도 사관학교’를 설립, 2009년 현재 학생 수가 1만 명을 돌파했다.
 
6.1.1 한국의 영토 교육(韓国における領土教育)

한국의 중고등 역사 교과서에는 17세기 말 한국의 어민 안용복이 마쓰시마(松島, 지금의 다케시마)를 조선 영토임을 인정시키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초등학교, 유치원에서도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교육하고 있으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영토 의식 교육은, 한국 영유의 정당성을 어려서부터 정착시키려는 정부 정책의 일환이다.
 
6.1.2 "독도의 달"·"대마도의 날"(「独島の月」・「対馬島の日」)

시마네 현 의회에서 2005년 “다케시마의 날 조례(竹島の日条例)”가 가결되어 일본 정부에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을 촉구했다. 하지만, 한국 경상남도 마산시가 “독도의 달”, 그리고 쓰시마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대마도의 날”을 제정하고 나섰다.
 
6.1.3 학술계에서의 활동(学術界における活動)

‘독도’ 호칭의 국제 인지도 확대를 목적으로 한 한국의 캠페인은 여러 방면에서 실시되어, 예를 들어 학계에서도 새로 발견된 생물 종에 학명(学名)으로 ‘독도’를 등록하는 일 등이 계속되고 있다. 다케시마에서는 많은 신종 미생물이 발견된 바 있는데, 2005년경부터 한국계 생물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학명으로 ‘독도’가 포함케 되었다. 새로운 속(属)으로는 Dokdonia donghaensis (Yoon et al. 2005) 외 6종, 새로운 종(種)으로는 Maribacter dokdonensis (Yoon et al. 2005) 외 11종이 ‘독도’라는 명칭을 포함한 학명으로 제창되었다.

6.2 일본 사회의 상황(日本社会における状況)

6.2.1 일본의 영토교육(日本における領土教育)

2014년 1월 개정 ‘교사를 위한 학습지도 요령 해설서(教員向けの学習指導要領解説書)’에 다케시마 관련 기술이 포함되었으며, 2018년 3월 고시된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지리 종합, 역사 종합 공공 교과에서 다케시마를 다루고 있다.

6.2.2 일본 정부에 의한 자료 데이터베이스화(日本政府による資料のデータベース化)

일본 정부는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과거의 행정 문서나 현지 신문 기사 등의 역사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인터넷에 공개하고, 영토에 관한 논문을 영역(英譯)하여 발신하고 있다.

향토사 등의 역사 자료를 모아 전자화한 후 편찬하여, 영어 번역도 덧붙이는 등 홍보 활동을 하고, 자료가 학교 교육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으며, 또 교원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할 방침이다.

2015년에 일본 정부는 이전년도부터 민간에 위탁하여 150여 점의 자료를 조사하고서 (다케시마를) 실효 지배해 온 것을 나타내는 자료를 정리한 보고서를, 내각관방영토・주권대책기획조정실 홈페이지에서 공표했다.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중의원 의원은 “일본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자료는 국가가 제대로 관리하는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면서, 국가가 자료 보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6.2.3 오자와 이치로 비서의 발언(小沢一郎秘書の発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수상의 국제 담당 비서인 한국인 김숙현(金淑賢)은 자민당 정부 시대에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했던 것은 지지율 저하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언급했다.

6.2.4 홋카이도 교직원 조합에 의한 자료 배포(北海道教職員組合による資料配布)

일본교원노동조합(日本教職員組合) 산하 홋카이도 교직원 조합이 2008년 11월, 다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 주장이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일본의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아이누 민족’과 ‘전쟁’의 관계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라는 자료를 각 학교에 배포한 바가 있다.
 
6.2.5 도로치바의 일본 정부 규탄(動労千葉による日本政府弾劾)

일본 신좌익 핵심세력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동일본여객철도(東日本旅客鉄道, JR 동일본) 노동조합의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国鉄千葉動力車労働組合)’은, 2008년 일본 정부가 신학습지도 요령해설서를 통해 다케시마를 “일본 고유 영토”로 가르치도록 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제국주의적인 영토 약탈과 국익주의·배외주의 선동으로서 위기를 돌파하려는, 허용할 수 없는 공격”이라고 비판했으며, “일한 노동자 연대 입장에서, 분노를 담아 규탄한다. 일본 정부는 해설서를 철회하고, 이후 일체의 독도 강탈 책동을 중단하라”라고 선언했다.
 
6.3 우표 발행(切手の発行)

대한민국 우정사업본부는, ‘독도’를 소재로 하는 우표를 1954년과 2002년, 2004년에 3번 발행했다. 1954년의 우표는 보통 우표로서, 당시 일본 우정성은 한국에서 보낸 이 우표를 붙인 국제 우편물의 수취를 거부했다.

[* 실제로는 많은 것이 일본에서 배달되었다는 지적도 있다.(実際には多くが日本で配達されたとの指摘もある) ]

2002년의 경우는 우표 세트의 일부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 ‘한국 방문의 해’ 기념우표의 하나로 발표됐다.  유명한 관광지와 민족 무용 등이 도안으로 포함되어있는 20종에 달하는 대형세트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국 우표 수집가 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2004년 1월 16일에 발행된 우표는 ‘독도의 자연’이라는 제목으로서, 일본의 매스컴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때, 일본 우정사업청은 국제 우편 수취 거부 등 강경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또한 북조선도 2004년과 2005년에 ‘독도 우표’를 발행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국이 주장하는 영역은 북조선의 영토”라는 주장, 그리고 대남 유화적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표 도안에는 멸종된 것이 분명한 니홍아시카(일본 강치)가 등장하고, 북조선의 판도(版図)로 한국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가 그려져 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의한 ‘독도’ 우표 발행을 만국우편연합 헌장에 저촉된다고 항의하고 있다.


6.3.1 “다케시마 우표”( 「竹島切手」)

2004년 1월 한국에서 “독도의 자연” 우표를 발행한 것이 발단이 되어, 신주쿠 우체국(新宿郵便局)이 취급하던 ‘사진 첨부 우표(写真付き切手)’ 제작서비스(얼굴이나 풍경 등이 들어간 우표를 고객의 주문을 받아 발행해 주는 서비스)를 활용, 한 일본 시민이 대량의 ‘사진 첨부 우표’로서 수만 장의 '다케시마 우표'를 신청했다. 애초에는 우정사업청이 이를 접수했지만, 같은 해 2월 17일 일본우정공사는 “외교상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국제우호를 내건 만국우편연합 헌장의 정신에도 위배한다”며 거부, 동 서비스도 결국 중지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통신 판매에 의한 '다케시마 우표'는 접수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어, 수많은 ‘다케시마 우표’가 ‘사진 첨부 우표’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본 우정 당국은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2005년에 “최북단 자연・홋카이도(最北の自然・北海道)”라며 에토로후(択捉) 섬에 현존하는 구(旧) 샤나(紗那) 우체국 등을 소재로 하는 우표를 발행하고 있다.

하지만 다케시마 우표에 대해서는 시마네 현에서 요청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미 한국에 의한 독도 우표 발행을 만국우편연합 헌장에 저촉한다고 항의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발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6.4 지도 등의 명칭·위치 표기(地図等での名称・位置の表記)

6.4.1 “독도 박물관”의 릴리프(「独島博物館」のレリーフ)

한국 정부가 울릉도에 건설한 ‘독도 박물관’의 ‘팔도총도(八道総図)’ 부조(浮彫, 릴리프)의 우산도 위치가 본래 팔도총도 지도상의 위치(울릉도의 서쪽으로 기록되어 있음)와는 반대로, 울릉도의 동쪽(지금의 다케시마 위치)에 있는 것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우산도가 독도’라고 하는 한국의 주장에 맞게 날조된 것이라고 다쿠쇼쿠(拓殖) 대학 국제학부 교수이자 다케시마 문제 연구회 좌장인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는 “박물관이라는 공적 기관에 의한 허위 전시의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이 부조는 다케시마가 한국령이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2007년 산케이(産経) 신문의 취재에 따르면 당시 박물관 연구원은 우산도의 위치가 다른 이유에 대해서 “방문객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면서, "일본 연구자로부터 항의가 많고, 분쟁 불씨가 되는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철거할 예정이다. 연내에는 다른 전시로 바꾼다”라고 밝히며 박물관 잘못을 인정하고 철거예정이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그러나 2011년 일본 영화제작자이자 시민운동가인 사토루 미즈시마(水島総)가 ‘독도 박물관’을 방문해 이 부조가 당시까지도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6.4.2 Xbox Live

2007년 가을 Xbox 360 업데이트에서 사용자 프로필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때 주소 항목에는 '독도'로는 입력하여 등록할 수 있는 반면, '다케시마'로는 입력하여서는 등록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일부 이용자의 반감을 샀고 Xbox 360의 보이콧이 발생,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후일 ‘다케시마’도 입력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6.4.3 오리건 자동차 관리국 조선어판 설명서(オレゴン州自動車管理局朝鮮語版マニュアル)

미국 오리건(オレゴン,  Oregon) 주(州) 자동차 관리국 홈페이지 조선어판의 운전 매뉴얼에, 번역자인 한국계 미국인이 “독도는 한국의 영토다”라는 기술을 몇 페이지에 걸쳐 추가했다. 일본 외무성은 오리건 주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오리건 정부는 유감을 표명하며 이런 표현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당국은 즉시 열람을 중지시켰고 해당 파일을 웹 사이트에서 삭제했다. 번역자인 한국계 미국인은 “한국계 주민이 보는 것이니까 문제가 없다”라고 말했다.*

[* ‘다케시마 : ‘한국 영토’, 미국 오리건 주 면허 취득 홈페이지에 게재(竹島:「韓国領土」と免許取得HPに 米国オレゴン州)’ 마이니치(毎日) 신문, 2007-12-28. “미국 오리건 주가 공식적으로 개설한, 운전 면허 취득 방법을 기재한 홈페이지의 조선어판에 독도(다케시마)는 한국 영토라고 한글로 기록된 자동차의 일러스트 등이 게재된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에 관한 부적절한 표기”라며 주(州)에 유감을 전했고, 주에서는 열람 중지를 조치했다”]

6.4.4 한국 지폐 지도 표기(韓国紙幣上の地図表記)

한국은행이 2007년에 100,000원 지폐 도안으로, 앞면에는 김구의 초상을 채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뒷면에 한국의 국보이자 옛 지도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図)’에다가 원본에는 없는 다케시마를 기재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도 “문화재 변조”라고 비판받았다. 이 지폐는 2009년 1월에 발행이 중단되었는데, 이는 종래보다 10배의 고액지폐인 데다가, 김구가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사유로 보수파인 이명박 정부가 문제삼아 보류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문화재 변조”는 보류의 사유가 아니었다.

6.4.5 Google지도 등의 기술(Google マップなどでの記述)

Google이 제공하는 Google지도에서 다케시마에 대해 일본어로 ‘울릉군(ウルルン郡)’이라는 설명이 있는 것과 관련해서, 자민당의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참의원이 내각에 질문주의서(質問主意書)를 제출, 정부는 2012년 3월 17일, “열람자에게 다케시마가 한국 영토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 입장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답변서를 결정했다. 또한 시마네 현은 Google지도에서 다케시마가 한국령으로 표기되어 있다면서 Google 일본 법인에 대해, “열람자에게 한국령이라는 오해를 줄 우려가 있다”며 표기를 수정하도록 2012년 6월 15일 자로 요망서를 제출했다. 애플이 독자적으로 제공하는 iOS 용 지도 서비스는, 애초 ‘독도(独島)’만 표기했지만, 일본의 항의로 다케시마(竹島)’, 독도(独島)’, 리앙쿨 암초'’ 병기로 변경되었다.

6.5 기타 견해(その他の見解)

도쿄대 명예교수 강상중(姜尚中)은, 2010년 1월 2일, 한국 MBC 취재에서 “독도는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는 한, 독도를 실효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본이 다케시마라고 주장해도 무시하면 됩니다. 우리가 우리 영토를 실효지배하고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같은 해 3월 10일, 한국 중앙일보의 취재에서, “일본에서 다케시마 문제를 둘러싼 망언이 나오지만, 한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니까 (한국이)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라는 한국 측 입장에 선 주장을 했다. 또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관련 단체인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유학동)은,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7 연 표(年表)

7.1 에도 시대(江戸時代)

1618년 (겐나 4년) : 호키 국(伯耆国) 요나고(米子)의 상인인 오야 진키치(大谷甚吉),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가 막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당시의 “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에 도항.

1692년 (겐로쿠 5년) : 당시의 “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에 출어한 오타니(大谷)와 무라카와(村川) 일행이 조선인과 조우. 이듬해에도 조우하여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 2명을 요나고에 연행한 것을 계기로, 일본과 조선 간에 분쟁이 발생(‘다케시마 일건(竹島一件)’).

1696년 (겐로쿠 9년) : 당시의 “다케시마”(지금의 울릉도)에로의 도항 금지. 조선의 어민 안용복이, 울릉도 및 우산도(한국에서는 이 우산도를 다케시마라고 해석한다)가 조선 영토임을 호소하기 위해, 호키 국에 왔다.

1849년 (요시나가 2년) : 프랑스 포경선 Liancourt 호가 다케시마(이 다케시마는 지금의 다케시마)를 발견, 리앙쿨섬(リアンクール島)이라고 명명했다(이후, 일본에서는 량코섬(りゃんこ島), 리앙쿨 바위(リアンクール岩), 리앙콜 열암(リアンコールト列岩)이라고도 불렀다).

7.2 메이지 이후(明治以降)

1877년 (메이지 10년) 3월 29일 : “다케시마 외 1도의 건은 본방(本邦)과는 관계없다고 명심할것(竹島外一島之義本邦関係無之義ト可相心得事)”이라는 태정관 지령(太政官指令)이 내무성에 전달되었다. 

1900년 (메이지 33년) 10월 25일 : 대한제국이 칙령 41호에서 울릉도를 강원도 울도(欝島) 군으로 승격, 동시에 ‘석도(石島, 한국에서는 이 석도를 다케시마라고 해석한다)’도 한국령으로 했다.

메이지 시대, 오키(隠岐) 지역의 고카 촌(五箇村) 구미(久見) 마을에 거주하는 하시오카 유지로(橋岡友次郎)와 이케다 키치타로(池田吉太郎) 외, 지역주민들이 다케시마에 출어하여 아사카(강치)와 해산물을 채취했다.

1904년 (메이지 37년)

2월 6일 : 일러 전쟁 발발.

2월 23일 : 일한 의정서 체결.

8월 23일 : 제1차 일한 협약 체결.

9월 29일 : 시마네 현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가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에 “량코섬 영토 편입 및 대하(貸下, 빌리는 일) 의뢰(りゃんこ島領土編入並に貸下願)”를 제출.

1905년 (메이지 38년)

1월 28일 : 일본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다케시마라고 명명, 시마네 현 오키 도사(島司)의 소관으로 했다.

2월 15일 : 내무성 훈령 제87호에 의해 각의 결정 내용에 관해서 관내에 고시하도록 지시.

2월 22일 :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에 의해 각의 결정 내용을 고시.

5월 3일 : 시마네 현은 현지에서 면적 등의 조사를 시행.

5월 17일 : 시마네 현이 현지 조사 결과에 따라 총반별(総反別, 총면적) 23정(町) 3반(反) 3묘보(畝歩)로 관유지대장에 등록하여 관유지(官有地)로 편입.

5월 27일 - 5월 28일 : 일러 간에 쓰시마 해전 발발.

11월 17일 : 제2차일한협약(을사조약) 체결(사실상,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1906년 (메이지 39년)

3월 28일 : 시마네 현 관계자가 울도(欝島, 울릉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에게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를 전한다. 이튿날 심흥택은 강원도관찰사서리인 춘천군수 이명래(李明来)에게, 울도군 소속 다케시마가 일본령이 되었다고 보고한다.

4월 29일 : 이명래는 제의정부 참정대신(第議政府賛政大臣)인 박제순(朴斉純)에게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에 대해 급히 보고한다. 박제순은 5월 20일자 지령 제3호에서 “독도 영유설은 사실무근”이라며, “해도(該島)의 형편(形便)과 일본인의 행동”에 대해 조사보고를 명한다.

4월 30일 :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郎)를 대표로 하는 다케시마 어렵(漁猟) 합자 회사 설립 허가 신청(동년 7월 2일 허가).

7월 13일 : 한국의 “황성신문”에서 울도 군의 범위에 관해 통감부가 “동서가 60리(약 24km), 남북이 40리(약 16km). 합쳐서 200여 리(약 80km)”라고 회답하는 기사가 게재된다.

1910년 (메이지 43년) 8월 22일 :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에 따라,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국 병합).

1914년 (1914년) : 울릉도가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 오키(隠岐) 지역 고카 촌(五箇村)의 구미(久見) 마을 하시오카 유지로(橋岡友次郎)의 후계자 하시오카 타다시게(橋岡忠重)는, 백부인 야와타 쵸시로(八幡長四郎), 사촌인 이케다 코이치(池田幸一)와 함께 다케시마 출어를 매년 반복했다..

1935년 (쇼와 10년) : 오키(隠岐) 지역 고카 촌(五箇村)의 하시오카 타다시게(橋岡忠重)가 다케시마의 돌을 가지고 돌아와서, 조카인 와키타 시게루(脇田茂) 씨에게 선물했다.

1939년 (쇼와 14년) 4월 24일 : 행정구역에 대해 고카 촌 위원회가 다케시마를 고카 촌 지역에 편입하기로 결의.

1940년 (쇼와 15년) 8월 17일 : 해군 용지로, 다케시마가 시마네 현에서 해군성(마이즈루진수부(舞鶴鎮守府))으로 이관.


7.3 포츠담 선언 수락 후(ポツダム宣言受諾後)

1945년 (쇼와 20년)

9월 2일 : 일본 정부 대표 · 군 대표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 문서에 조인.

11월 1일 : 해군성 폐지, 다케시마는 대장성(大蔵省)으로 이관.

1946년 (쇼와 21년)

1월 29일 : SCAPIN-677을 통해, 다케시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시정권이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6월 22일 : SCAPIN-1033에 의해 맥아더 라인이 제정, 다케시마 주변 해역에서의 어업 활동에 제한이 가해졌다. 이후, 다케시마에서 13해리 이내의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1947년 (쇼와 22년)

6월 : 외무성은 “Minor Islands Adjacent Japan Proper”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다케시마를 일본 고유 영토라고 명기.

8월 20일 : 조선산악회가 다케시마를 조사.

9월 16일 : SCAPIN-1778을 발령, 다케시마를 폭격 훈련장으로 하며, 일본의 오키(隠岐)와 혼슈(本州) 서부 해안 주민들에게 사전 통지를 조건으로 했다.

1948년 (쇼와 23년)

6월 8일 : 미 극동 공군의 B-29가 다케시마를 폭격 및 기총 소사, 한국 어민 사망자 · 행방 불명자는 14명, 부상자 10명.

8월 5일 : 남한의 ‘우국노인회(憂国老人会)’가 맥아더에게 “독도, 파랑도, 울릉도, 대마도”는 한국령이라는 청원서를 제출.

8월 15일 :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을 선언, 초대 대통령에 취임.

1949년 (쇼와 24년)

11월 19일 : 시볼드 주일 정치고문 대리는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다케시마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장은 오래되고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제언.

12월 29일 :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명기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의 초안이 작성된다.

1950년 (쇼와 25년)

6월 8일 : 한국이 다케시마에서 “조난 어민 위령비”를 제막.

6월 25일 : 한국 전쟁 발발.

1951년 (쇼와 26년)

4월 5일 : 영국의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이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를 위도, 경도로 기재. 다케시마는 포기할 영토에 속하고 있었다.

6월 14일 :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섬에서 다케시마가 제외된다. (일본 보유 영토 항목은 없어졌다)

7월 6일 : SCAPIN-2160 발령, 이에 따라 SCAPIN-1778은 폐지, 계속 다케시마를 폭격 훈련장으로 하며, 오키 및 혼슈 서부 해안 주민들에게 사전 통지를 조건으로 했다.

7월 10일 : 개성에서 휴전 회담 시작.

7월 19일 : 양유찬(梁裕燦) 주미 한국대사가 덜레스(ダレス, John Foster Dulles) 미국 국무부 장관 고문과 회담, 쓰시마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 취하를 확인했다. 동시에 ‘독도’, ‘파랑도’에 대한 영유와 맥아더 라인 존속을 요구한 서한을 제출했다.

8월 3일 : 미국 국무부에서 ‘독도’, ‘파랑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인됐다.(봇구스 메모(ボッグスメモ, Memorandam from Mr. Fearey to Mr. Allison)).

8월 10일 : 딘 러스크 국무부 차관보가 한국 대사에게 보낸 ‘러스크 서한’에서, “'독도'는 조선의 영토였음이 주장된 적이 없고, ‘파랑도’ 주장은 취하된 것으로 본다”고 적시. 또한 맥아더 라인은 존속하지 않다고 답변.

9월 9일 :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49개국이 서명했으며, 다케시마는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로 명기되지 않았다.

7.4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서명 후(サンフランシスコ平和条約署名後)

1951년 (쇼와 26년)

9월 21일 : 한국의 변영태(卞栄泰) 외무부 장관은 무치오(ムチオ,  John Joseph Muccio) 미국 대사에 보낸 서한에서, SCAPIN-677 등을 근거로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주장.

11월 14일 : 신문기자 등을 태우고 11월 13일 사카이미나토(境港)를 출항한 돗토리(鳥取) 현립(県立) 사카이(境) 고등학교 수산과 연습선 ‘아사나기마루(朝凪丸)’(112톤) 일행이 14일 오전 다케시마에 상륙. 

1952년 (쇼와 27년)

1월 18일 : 한국 정부가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언, 맥아더 라인에 이어 다케시마를 자국 해역에 포함시킨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다케시마에 “영토권을 주장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구상서로 항의했다.

2월 12일 : 한국 정부는, SCAPIN-677 및 맥아더 라인을 통해 다케시마가 한국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반박. (다케시마에 관한 일한 정부의 첫 응수)

4월 25일 : 맥아더 라인이 만료, 한국은 이승만 라인을 계속 주장.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재반론.*

[*반박 내용 요약 : 1. 다케시마는 실제로 시마네 현 오키 군 고카 촌의 일부이다. 2. SCAPIN-677 자체가 여러 섬의 연합국 정책의 최종적 결정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근거가 유효하지 않다. 3. 맥아더 라인 자체가 국제적인 경계에 관한 연합국의 정책을 표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있고, 게다가 맥아더 라인은 이미 철폐되었기 때문에 논의의 의미가 없다. 4. 다케시마가 ‘독도’로서 수세기 동안 한국령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4월 28일 :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발효.

5월 20일 : 시마네 현 주민들이 미군의 다케시마 폭격 훈련 중지를 요구하는 청원서 제출.

7월 26일 : 일미 합동위원회는 다케시마를 미군의 해상 연습장으로 지정.

12월 4일 : 미군의 다케시마 폭격 훈련에 대한 한국 측 항의에 대해, 미국 정부는 “이 섬에 대한 우리 영유권 인식은 러스크 서한과 마찬가지”라고 답변.

1953년 (쇼와 28년)

1월 12일 : 한국 정부가 이승만 라인 내에 출어한 일본 어선의 철저 나포를 지시.

2월 4일 : 제주도 부근에서 일본 어선의 어로장(선장)이 한국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 (‘제1다이호오마루 사건(第一大邦丸事件)’)

2월 27일 : 한국 국방부가 “미국은 다케시마 영유권이 한국에 있음을 인정했다”라고 일방적으로 발표.

3월 : 일미 합동위원회기 다케시마를 폭격 훈련장의 범위에서 제외하기로 결정.

4월 20일 : 한국의 독도의용수비대가, 처음으로 다케시마에 주둔.

6월 27일 : 일본 해상 보안청과 시마네 현의 약 30명의 사람들이 다케시마 조사를 시행, “일본 시마네 현 오키 군 고카 촌(日本島根県隠岐郡五箇村)”이라는 영토 표지판을 세웠다. 다케시마에 정착하고 있던 한국의 어민 6명을 퇴거 시켰다.

7월 12일 : 다케시마에 상륙하고 있던 한국의 독도수비대가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헤쿠라(へくら)”에 발포. 이후 한국은 다케시마의 무장화를 추진, 일본 함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무장화에 항의했지만, 한국은 “내정 간섭”이라며 기각.

7월 13일 : 일본 정부는 발포 사건에 항의. 섬에서의 즉시 퇴거와 영유권 주장의 국제법적 근거 조회를 요청.

7월 27일 : 한국전쟁 휴전 협정 체결.

9월 9일 :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조회에 대해 ‘우산도(于山島)’, ‘심흥택(沈興澤) 보고서’ 등의 고문헌을 제공. (자국의 영유권 근거에 대한 추가 의견을 첨부한 1회차 외교문서 왕복)

1954년 (쇼와 29년)

2월 10일 : 일본 정부는, 한국이 제시한 근거에 대해 반박하는 구상서를 제출.

8월 15일 : 한국전쟁에 출정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가 대통령 특명 대사로 사절단을 이끌고 극동 각국을 순방, 밴 플리트 특명 보고서를 작성. 다케시마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미국의 의향을 비공식적으로 한국에 전달했다는 등의 내용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

9월 20일 : 한국이 다케시마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 일본 외무성이 항의.

9월 25일 : 일본 정부는 영유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한국에 제안했지만, 한국 정부는 거부, 2월에 있었던 일본의 반박에 재반박. (자국의 영유권 근거에 대한 추가 의견을 첨부한 2회차 외교문서 왕복)

11월 2일 : 한국이 다케시마의 니시시마(西島), 북서쪽 3마일 지점을 항해 중인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오키(おき)”와 “헤쿠라(へくら)”에 대해, 오전 6시 58분부터 오전 7시 사이에 5발의 포격을 추가.

11월 30일 : 포격 사건에 대해, 일본 외무성이 항의.

1956년 (쇼와 31년)

4월 : 한국 경찰, 울릉 경찰서 경찰관 8명이 섬에 상주.

9월 20일 : 일본 정부는 한국의 반박에 재반박.

12월 25일 : 독도의용수비대 해산.

1959년 (쇼와 34년) 1월 7일 : 한국 정부는, 일본의 반박에 재반박. (자국의 영유권 근거에 대한 추가 의견을 첨부한 2회차 외교문서 왕복)

1960년 (쇼와 35년) 4월 27일 : 당시 주일 미국 대사 더글러스 맥아더 2세로부터, 미국 국무부에 이승만 정권이 끝나는 시점에서 “다케시마를 일본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함”이라고 전보로 제언.

1961년 (쇼와 36년) 12월 26일 : 일본 외무성은 주일 한국 대표부에 항의 구상서를 보내며, 한국 정부에 항의. 이튿날 27일에 한국이 반박.

1962 년 (쇼와 37년)

3월 12일 : 도쿄에서 열린 일한외상회담에서,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郎) 외무대신이 최덕신(崔徳新) 외무부 장관에게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다시 제안, 한국은 거부.

7월 13일 : 일본 정부는 한국의 반박에 재반박.

1964년 (쇼와 39년) : 울릉도에 안용복(安龍福)을 표창하는 “안용복 장군 충혼비(安龍福将軍忠魂碑)”를 건립.

1965년 (쇼와 40년) 6월 22일 : 일한기본조약이 체결, 일한어업협정에 따라 이승만 라인이 폐지된다. 동시에 일한분쟁해결 교환공문이 교환되었지만 다케시마 명기는 보류, 한국은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는 분쟁 처리 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으로서,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다.

7.5 일한 국교 정상화 후(日韓国交正常化後)

1977년 (쇼와 52년) 2월 5일 :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총리가 “다케시마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발언.

1982년 (쇼와 57년) 11월 16  : 한국, 다케시마를 천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 (독도천연보호구역).

1997년 (헤이세이 9년) 11월 : 한국, 500t급 선박이 이용할 수 있는 접안시설 설치. 일본 정부는 항의.

1998년 (헤이세이 10년) 12월 : 한국, 유인 등대 설치. 일본 정부는 항의.

2004년 (헤이세이 16년)

1월 : 한국, 다케시마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 일본 정부는 항의.

2월 17일 : 일본우정공사, 다케시마 사진이 첨부된 우표 발행을 거부.

3월 1일 : “우리나라 최동단의 영토”라고 한국이 TV중계를 실시.

2005년 (헤이세이 17년)

3월 16일 : 시마네 현 의회가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지정한 조례가 통과. 2월 22일은 1905년에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 귀속을 고시한 날에 해당한다. 시마네 현과 경상북도는 자매도시 관계였지만,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사유로 관계를 철회했다. 

3월 28일 : 한국 정부가, 일반 관광객의 관광을 해금.

6월 9일 : 경상북도 의회가 시마네 현에 맞서 10월을 ‘독도의 달’이라고 하고, 일본과의 교류를 제한하는 조례를 제정.

4월 6일 : 한국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이 라디오에서 국제법상 영토분쟁화하는 전략을 발표.

5월 : 한국 SGI가 평화를 주제로 한 집회에서 다케시마 영유권 주장과 역사 교과서 문제, 일본의 군국주의 비판이 배경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슈칸신초(週刊新潮)가 "반일 집회"라고 보도.

8월 13일 : 한국, ‘독도’를 표기한 세계지도를 처음으로 제작.

2006년 (헤이세이18년)

한국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이 국제법상 영토분쟁화하겠다고 제창했다.*

[* 2006년 4월 6일 , 한국의 FM 라디오 방송국 평화방송에서 국제법상 영토분쟁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의원은 독도를 영토분쟁화할 필요성을 다음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원웅 의원의 제안은 진전되지 않았다. 실현되면 1954년부터 일본이 계속 요구했던 “국제적인 해결”을 한국이 받아들인 형태가 될 것이었다.

2008년 (헤이세이 20년)

2월 :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竹島問題を理解するための10のポイント
)”를 홍보 사이트에 게재

8월 8일 : 한국 외교통상부가 “독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홈페이지에 게재.

10월 22일 :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가 VANK의 지원 주체로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VANK에 예산 지원을 계속한다고 발표.

2009년 (헤이세이 21년)

3월 13일 : 사이버 독도 사관학교가 VANK와 경상북도에 의해서 주조 회사인 JINRO 등의 지원으로 설립.

6월 26일 : 다케시마 영유권 수호와 해양 자원 조사 활동을 할 수 있는 177톤의 ‘독도평화호’ 취항.

2010년 (헤이세이 22년)

3월 26일 :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자민당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 의원이 다케시마 문제에 대해 정부에 질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외무대신은 “비슷한 기회가 있을때마다 여러 번 설명하고 있다"며 “개별 안건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는 정부 답변서를 제출했다.

4월 14일 :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신도 요시타카 의원이 재질의.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 영토”라고 기술된 일본의 소학교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데 대해 한국 외교통상부 장관이 주한 일본 대사를 호출해서 항의하고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회의원 · 의장도 “다케시마 실효 지배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4월 22일 : 중의원 본회의에서, 신도 요시타카 의원이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당시)에게 다케시마 문제 대응에 대한 답변을 요구.

7월 7일 :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주한 일본 대사에 대해서 한국의 좌파계 단체에 속하는 사람이 콘크리트 조각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

2011년 (헤이세이 23년)

2월 27일 : 한국을 방문한 도이 류이치(土肥隆一) 민주당 윤리위원장이, 김영진 한국 국회의원과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 일본이 다케시마 영유권을 포기하는 내용의 '한일 공동 선언'에 서명. 이 서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도이는 “공동 선언은 외교 교섭 차원에서 유효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공동 선언의 철회는 하지 않았다.

6월 16일 : 대한항공이 신형기를 투입하면서 회사 회장, 언론, 부처 장관 등을 탑승시켜 다케시마 상공에서 시연 비행을 했다. 일본 외무성은 “영토 침범에 해당”한다고 판단, 전 외무성 직원이 공무로서 대한항공 항공기 이용을 동년 7월 18일부터 한 달 동안 자제하기로 결정. 한국은 철회를 요구했지만 대한항공 항공기 자제는 예정대로 시행되었다.

7월 11일 : 한국 국회의원이 다케시마에 상륙(최근 3개월간에 4번째), 주둔 경비대를 격려. 보도에서 헬기 착륙지 증축의 모습이 전해졌다.

7월 27일 : 일본 국회의원들이 울릉도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 의원들이 입국할 경우, 신변 안전상 우려가 있다”라고 일본 정부에 통보하고 협의하도록 한국 외교통상부에 지시했다.

7월 31일 : 일본 자민당 의원과 대학교수가 다케시마 조사를 위해 울릉도 방문을 계획하고 한국에 입국하려고 했지만, 한국은 공항에서 입국 거부를 했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처음있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각료인 한나라당 수뇌부 이재오 특임장관(무임소장관(無任所長官), 국무위원이지만 특정한 행정업무는 맡지 않는 장관)은, “자민당 의원의 울릉도 방문은 주권 침해”, “내가 독도를 지키겠다”라고 발언했다.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관방장관은, 합법적인 입국으로서 매우 유감이라고 비판했고,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도 한국에 항의했다.

2012년 (헤이세이 24년)

8월 10일 :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다케시마를 방문헸다. 보도에 따르면 그 배경에는 한국 국민의 민족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구심력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남은 반년 임기 동안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이었던 형과 측근들의 불상사가 계속되고 정권의 구심력 저하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일본에 대한 대응은 12월 대선에서 여당 후보의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광복절에 국민의 민족 감정이 한층 높아지는 시기를 맞이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이 피해온 다케시마 방문을 단행했다. 이로써 국민감정에 호소해서 구심력을 회복하는 것과 동시에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대항 조치로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 주한 대사(당시)를 일시 귀국시키고, 다케시마 영유권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공동 제소를 제안했으나 한국이 거부했다. 또한 이명박 회고록에서 2012년 8월 다케시마 상륙에 대해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상륙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10월 23일 : 한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 15명이 다케시마에 상륙.

2013년 (헤이세이 25년)

5월 21일 :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한국의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구보이 노리오(久保井規夫), 구로다 요시히로(黑田伊彦), 사카모토 유이치(坂本悠一), 이치노헤 쇼코(一戸彰晃) 일본인 4명. 구보이는 일본의 옛 지도 등 자료를 제시하며 “1775년에 제작된 옛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하고 있었지만, 막부가 1779년 개정판에서 그것을 바로 잡고, 한국령으로 표기했다”라고 주장. 사카모토를 제외한 3명은 5월 23일에 한국에서 다케시마에 상륙했다.

5월 23일 : 일본의 전 대학 강사 2명과 조동종(曹洞宗) 승려 1명이 다케시마에 상륙, 한국어로 “독도는 한국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들 3명은 시민단체 ‘다케시마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모임(『竹島の日』を考え直す会)’ 멤버로, 그 중 구보이 노리오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확신해서 왔다. 이 신념을 일본 국민에게도 전하고 싶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함께 상륙한 이치노헤 쇼코는 조동종 아오모리(靑森) 현 운상사(雲祥寺) 주지이며 2012년 9월 16일 일본 동국사(東国寺)의 비석 건립을 주도한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東国寺を支援する会)’ 대표다. 이치노헤의 단독 상륙 행위에 대해, 소속 종파 교단은 “본 종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또한 그 지원, 지지 등은 전혀 없었다”라는 취지의 통지를 공표했다. 일행은 애초 4명으로의 방문을 예정했지만, 그중 1명이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쓰인 티셔츠의 착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한국의 경찰 당국에 의해서 페리에서 쫓겨났다.

2014년 (헤이세이 26년)

1월 28일 :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장관이 교과서 작성이나 교원에 의한 지도 지침이 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습지도 요령 해설서를 개정했다. 이에 중학교 사회과, 고등학교 지리 역사와 공민에게, 다케시마(竹島)를 센카쿠 열도와 함께 '고유 영토'라고 명기한 후, 다케시마는 한국에 불법 점거되고 있다는 정부 견해에 따른 내용을 추가한 것을 정식으로 발표.

1월 29일 : 김관용(金寬容) 한국 경상북도 지사가 헬리콥터에서 다케시마 상륙, 전날 발표된 일본의 학습지도 요령 해설서 기재 내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

8월 : 한국 외무부가 일본의 방위 백서를 비판하는 대변인 성명을 발표.

2015년 (헤이세이 27년)

1월 : 주한 일본 대사관은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기재한 2014년판 방위백서의 한국어 번역본 50부를 한국 국방부에 인도했지만, 한국 국방부는 일본 대사관 주재 무관을 불러 항의, 전부 일본에 반환.

1월 : 한국국립해양조사원이 다케시마 북측 해역의 암초에 ‘물개바위’라는 명칭을 붙인다.

4월 : 2015년판 일본 외교청서(外交青書)에서 한국에 대해 “자유,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등의 기본적인 가치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의 확보 등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14년판에 있었던 표현을 삭제.

4월 : 일본의 2015년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에서 다케시마를 '고유 영토'라고 교과서에서 다루는 것을 요구한 국가의 지침에 따라 처음으로 사회과의 전체 교과서(20점)에 다케시마 문제가 작성되었다.

2016 년 (헤이세이 28년)

8월 15일 : 한국 국회의원 10명에 의한 국회 독도방문단(단장 : 나경원(羅卿瑗))이 헬기로 도착했다.

2018년 (헤이세이 30년)

5월 23일 : 한국의 심재권(沈載權)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상륙.

10월 22일 : 한국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이찬열(李燦烈) 등 여야 의원 13 명이 상륙.
 

8 다케시마에 상륙한 유명인(竹島に上陸した著名人)

이명박(李明博), 한승수(韓昇洙), 맹형규(孟亨奎), 이승철, 송일국, 후루야 쓰네히라(古谷経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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