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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②] 우리나라 1960년대까지 성매매 종사자 ‘위안부’로 호칭

“민간 위안부, 혼란기에 무분별하게 팽창…군 위안부와 동질(同質)의 존재”

 

“1976년경 서울 창신동의 어느 집에서 가정교사를 할 때 일이다. 동대문에서는 사창가가 발달했다. 그 지역이었다. 어느 날 저녁 8시경 어둑한 골목길이었다. 한 남자가 몽둥이로 젊은 여인을 사납게 때렸다.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아 매를 맞는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었다. (추정하기로) 서울에 무작정 상경해 친구의 꼬임에 빠지거나 인신매매를 당해 사창가로 떨어진 20세 전후의 소녀였다. 저는 물끄러미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훗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됐을 때 많은 한국인이 분노했던 것은 그들이 익숙하게 보아온 이런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1930~1940년대 일본군 위안부에게도 이러한 폭력이 자행됐을까.” - 이영훈 교장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2편 강의 중

 

해방 이후에도 민간 성매매산업 종사자 위안부로 불러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두 번째 강의(217)에서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1950~1960년대 민간 위안부의 실태를 조명했다.

 

이 교장은 먼저 위안부라는 용어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다“1945년 해방 후에도 위안부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에 남아 1960년대까지 공적·사적으로 활용됐다고 밝혔다.

 

1960년대까지 민간에서도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위안부라고 불렀다는 설명이다. 실제 당시 전염병예방법시행령(1957)을 확인해보면, 위안부는 주 2회 성병 검진 대상으로 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 교장은 위안부라는 용어에는 (일제시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한국인의 집단 기억이 담겨있다그것이 오늘 강의에서 강조하고 싶은 요점이라고 강조했다.



성병 감염률, 일제시대보다 대폭 늘어초라한 보건 행정

 

이 교장은 1955년 보건사회통계연보를 인용하며 민간 위안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정부는 댄서, 위안부, 접대부, 밀창 등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성병 검진을 실시했다.

 

이는 성매매 산업에 종사한 여성의 숫자가 얼마인지 알려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1955년에는 11642, 3년 뒤인 1958년에는 119578명의 여성이 검진을 받았다. 이 가운데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위안부는 각각 61833, 65692명이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들의 성병 감염률이 평균 22~24%나 됐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일제시대인 1937년 기준 조선인 창기(娼妓)와 작부(酌婦)의 성병 감염률은 5%대에 불과했다. 이영훈 교장은 해방과 전쟁의 혼란기에 성매매 산업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팽창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한국 정부의 보건 행정이 매우 초라한 실정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간 위안부와 군 위안부 구분되지 않아생활고, 인신매매로 흘러들어

 

1950년대 당시 해당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의 연령대는 대체로 20~24세였다. 학력은 57%가 무학이었으며, 초등학교 졸업은 36%였다. 중학교 및 전문고 졸업은 6.8%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미군을 접대하는 위안부였다는 게 이영훈 교장의 설명이다.

 

이 교장은 민간 위안부의 일부는 군 위안부의 전통을 잇는 미국군 위안부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 둘이(민간 위안부와 군 위안부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는 1960년대 민간 위안부의 이력, 근속기간, 노동실태, 소득수준도 분석했다. 1961년 서울시 부녀보건소에 수용된 위안부 600, 1963년 서울 성동구 보건소에 등록된 위안부 144, 1964년 군산시 보건소에 등록된 위안부 188명을 조사한 석사학위 논문들을 참고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위안부들은 식모 또는 고아 출신이 가장 많았다. 고아원을 전전하거나, 극빈 계층의 자녀로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거나, 가정불화로 가출 또는 버려진 여인들이 식모로 들어가거나 다른 직종의 접객업에 종사하다가 위안부가 되는 경로가 가장 일반적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들의 유입 경로에 대해선 생활고에 시달려 사창가로 밀려온 경우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 꼬임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답변 중에는 남자유혹이나 팔렸다의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는 인신매매를 의미한다. (앞서 말한) ‘친구 꼬임도 따지고 보면 (사실상) 인신매매인 경우가 많다고 풀이했다.



다수의 민간 위안부, 포주와 채무 노예적 관계였을 것

 

성매매 산업 종사자들의 근속기간은 서울의 경우 평균(가중평균) 1.1, 서울 성동구 6개월, 군산 2.5년이었다. 이들 근속기간을 평균으로 계산하면 14개월이다. 이 교장은 위안부의 근속년수는 사람, 지역마다 편차가 심해서 한 달 내지 6개월에 불과하기도 했지만, 2~5년 이상 빠져나오지 못하고 침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한 가지 특징은 특정 구역에 성매매 업소가 몰려있는 집창(集娼)의 형태보다, 업소가 몰려있지 않은 산창(散娼)의 형태일수록 근속기간이 짧다는 것이다.

 

이 교장은 성동구와 같이 특정 포주에게 얽매이지 않고 개별적으로 몇 사람이 동업의 형태로 종사한 경우에는 (근속) 기간이 길지 않다“(하지만) 군산의 경우 유명한 집창촌으로 절반 이상의 사람이 2년 이상 체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군산)에서는 상당수의 위안부가 포주에게 진 빚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채무 노예적 관계에 빠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그는 군산시 개복동 텍사스촌 사진을 띄우며 “2003년 이곳에서 화재가 발생(정정:2002년에 화재 발생)해 위안부 12명이 불에 타 죽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위안부들은 불이 났지만 탈출할 수 없었다. (문이) 잠겨있었던 것이다. 포주에 의해서 방에 감금됐다. 채무 노예적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2003년까지도 (상황이) 이랬으니 1950~1960년대는 말할 것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민간 위안부 월 소득, 여성 제조업 종사자의 두 배 수준

 

이영훈 교장은 이들의 노동 강도와 월 소득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서울 성동구의 경우 하루 평균 3.7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손님을 받았다. 군산시의 경우 하루 4.43(5.51회 성교)을 맞았다.

 

이 교장은 당시 한국군 위안부는 하루 6명의 장병을, 민간 위안부는 하루 4~5명을 맞아 하루 5~6회 가량 성교를 했다. 군 위안부가 약간 많지만 큰 차이라고는 할 수 없다한국군 위안부의 공급원은 민간 위안부였으며, 노동 강도도 비슷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는 한국군 위안부와 민간 위안부는 결국 동질(同質)의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군이든, 민간이든 이 산업에 종사한 여성들 모두 동질적인 위안부로 불렸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간 위안부의 월 소득은 서울 성동구의 경우 평균 5556, 군산의 경우 3455원이었다. 이 교장은 이를 제조업 종사자의 월 소득과 비교했다. 1963년 기준 제조업 종사자의 평균 임금은 남녀 통틀어 3180, 1964년에는 3880원으로 조사됐다. 이 중 여성 종사자는 평균에 못 미치는 2000~2500원 수준이었다. 이 교장은 국졸 이하 여성은 제조업에 취직할 기회가 없었던 점까지 고려하면, 민간 위안부들의 월 평균 소득 3400~5500원은 당시로선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풀이했다.

 


민간 위안부, 정부 관리 하의 군 위안부보다 열악한 여건

 

이영훈 교장은 최빈곤 계층 저학력 여성들은 해마다 2만명 이상 성매매 산업으로, 그 중 1만명 이상은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위안부가 됐다그리고 나선 대개 1~2년 후 다른 직종으로 옮겨가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여성이 탈출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포주가 씌운 채무의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 여성들도 많았다면서도 “(하지만) 한국군 위안부 모집과 보수 지급을 관리한 군인(정부)이 그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교장은 민간 위안부의 경우 정부의 관리와 감독이 허술했다악덕 포주의 채무 노예적 지배는 (그 지역의) 경찰, 관리(공무원)와 결탁해 공공연히 자행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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