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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2)

일본군 장교를 위해서 영혼결혼식까지 치러준 이용수, 심지어 나이, 결혼, 직업까지 전부 허위 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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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1)

- 이용수와 정대협에 의해 결국 국제사기극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 우리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2)
- 일본군 장교를 위해서 영혼결혼식까지 치러준 이용수, 심지어 나이, 결혼, 직업까지 전부 허위 혐의

-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까지 신청하며 ‘종북’ 문재인, ‘종북’ 정대협과 함께 반미활동에 여념없는 이용수

* 본 기획 기사들은 진실성이 있고 공공성이 있어 위법성 조각 사유는 완전히 충족시키고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와 이용수를 추종하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명백한 비하(명예훼손) 내용을 담고 있음을 고지합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 윤미향)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용수의 경우는 단지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경위와 관련 증언만 모호한 것이 아니다. 


대만에서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생활과 관련한 증언, 그리고 본인의 현재 나이와 결혼, 과거 직업과 관련된 내용도 역시 전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4~5명의 군인 상대했다더니 하루 최소 20명, 많을 때는 70명?


이용수는 1993년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 증언집’(한울)에서의 최초 증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서 하루 평균 4~5명의 군인을 상대했다는 내용(해당 책 129쪽)을 전하고 있다.


하루 평균 네다섯 명의 군인을 받았다. 군인들이 들어오면 금방금방 하고 갔다. 자고 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월경을 할 때는 헌 옷을 빨아서 사용했다. 월경을 해도 군인들을 받아야 했다. 돈은 구경도 못했다. 공습이 심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피난을 가야 할 때도 있었다. 폭격이 있으면 산에도 숨고 굴속에도 숨었다. 그러다가 잠시 잠잠해지면 밭이고 논이고 아무데나 포장을 쳐놓고 군인을 받기도 했다. 바람이 불어 포장친 것이 후닥닥 넘어져도 군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다 마쳐야 돌아갔다. 개, 돼지만도 못했다. 밖에 나가서 진단을 받아본 기억은 없다. 삿쿠라는 것도 몰랐다.


앞서 인용했던 ‘한겨레’ 1997년 9월 6일자 기사 ‘위안부 할머니 울지 마세요! -  대만 신죽기지앞/치욕의 현장 찾은 할머니들 눈물 … 통곡’ 제하 기사에서도 이 내용은 반복된다.


지난 8월 30일 새벽 5시30분 대만 타이베이에서 1시간여 떨어진 신죽(新竹) 공군기지 앞. 이용수(72·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비둘기 아파트 107동 113호) 할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했는데…, 여기가 정말로.”


‘신죽’이라는 어렴풋한 기억 하나만으로 찾아나선 몸서리쳐지는 50여년 전 위안부 삶은 공군기지와 기지 옆을 흐르는 개천, 부대 주변의 방공호, 전쟁 때 20여명의 여자들이 있었다는 기지 주변 70대 노인의 증언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부대 안쪽인 것 같아. 처음에는 건물이었는데 폭격으로 무너져 판자로 가건물을 세웠지.”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45년 1월 이곳으로 끌려온 이 할머니는 어디인지조차 모른 채로 일본 패전일까지 하루 5~6명의 일본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이용수가 2007년도 6월 12일에 방영된 EBS ‘시대의 초상 - 위안부라 하지마라'에서는 또 무엇이라고 증언했는지 보자.(관련기사 : "내가 왜 위안부냐,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지“)


"강요에 못 이겨 하루 적게는 20명, 많게는 70명의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생리 중에도 일본군을 받아야 했다. 요구를 거부키라도 하면 칼을 가지고 쭉쭉 째는 잔인한 폭력과 죽임까지 당해야 했다. 이런 피해자들에게 자의로 몸을 팔았다는 뜻을 지닌 위안부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다.


하루에 적게 상대한 일본군이 20명이라고 한다. 갑자기 4배나 수치가 늘어난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 것인가. 


5명이건, 20명이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든 그게 ‘강간’ 성격, ‘학대’ 성격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따지지 말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단, 그런 항변은 어떻든 ‘강제연행’이라는 성격이 중요하지 1940년이건 1945년이건 중요치 않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지금 일본이라는 한 국가에 공식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문제다. 그 누가 봐도 내용이 엄정해야 하는데, 국제사회가 봤을 때 장난을 넘어서 중상모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자칫 역으로 공식선전포고를 당해도 싸다는 지탄을 안 받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혼인신고까지 했다더니 결혼도 안하고 그냥 독신으로 생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이 끝난 이후의 이용수의 생활상도 어딘지 이상하게 들리기는 마찬가지다. ‘한겨레’의 1993년 1월 20일자 ‘’참담한 기억‘ 치떨며 자학과 눈물’ 제하 기사를 보자. 


위안부 출신 여성들은 이렇게 대다수가 과거 사실 때문에 스스로 결혼을 피해 혼자 살거나 설혹 결혼했거나 이혼하거나 자식을 낳지 못해 남편의 작은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을 기르기도 하고 아예 후처로 들어가 전처 소생의 아이들을 양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도 성공보다 실패의 사례가 더 많다.


대만에서 2년 동안 있었던 이용수(66) 씨는 귀국 뒤 술집종업원, 가정부 등 밑바닥 생활을 떠돌다가 가족들의 끈질긴 권유로 지난 87년 60살의 나이로 8남매를 둔 75살 된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 때늦었지만 면사포도 써보고 싶고 혼인신고를 하는 것도 처음이고 또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5년 동안 살면서 돌아온 것은 치매에 걸린 남편의 행패와 폭력, 가족들의 냉대뿐으로 지난해 3월에 위자료 한푼받지 못한 채 이혼하고 말았다.


술집종원, 가정부 등 밑바닥 생활에다가 60살에 75살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고 그나마도 이혼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헌데, 저 내용은 1999년도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갑자기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고 보험회사 등에 다녔다는 내용으로 바뀐다. (관련기사 : <화제>정신대 할머니 명예대학생 과정 수료)


일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에서 한문 등을 배운 이할머니는 지난 43년 만 16세의 나이에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대만으로 끌려가 고생을 하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할머니는 결혼을 하지 않고 보험회사 등에 다니며 홀로 지내다 지난 92년 일본군 정신대 피해자로 신고한 뒤 매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지역의 피해 할머니를 만나는 등 일본정부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7년도 6월 12일에 방영된 EBS ‘시대의 초상 - 위안부라 하지마라'에서도 이용수는 역시 결혼한 적이 없다고 그런다.(관련기사 : "내가 왜 위안부냐,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지“)


그는 모친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45년 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난 1991년, 현재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을 했고, 이를 본 그도 피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신고를 했다.


분명 그냥 결혼도 아니고 혼인신고까지 했던 결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결혼 관련 내용이 두 번 부정된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매사 증언이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뒤집어진다면 그런 증언을 하는 사람이 하는 얘기를 제3자가 믿어줄 수는 없다.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는 도대체 정확한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이용수는 애초 1993년도 증언에서 1928년생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언론도 이용수의 정확한 나이를 도대체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뉴욕중앙일보’의 다음 기사를 보자. 이용수의 나이를 2011년도에 86세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용수는 1925년생(2011-86=1925)이 맞다. 1944년에는 그렇다면 19세다.(관련기사 : 역사의 증인 만났다, 위안부 할머니들 뉴욕 방문…홀로코스트 생존자와 해후)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생존자 에델 캐츠(89)는 13일 퀸즈보로커뮤니티칼리지(QCC)에서 만난 위안부 할머니 이용수(86)씨와 이옥선(88)씨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프레시안’에서는 2005년도에 이용수의 나이를 78세라고 표기했다. 그렇다면 1927년생(2005-78=1927)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1944년에는 17세다.(관련기사 : "일본은 지금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


이용수 할머니(78)는 "속이 터져 못 참겠다"며 "너희들 마음대로 위안부라며 잡아가서 성노예를 시킨 후 나는 지금까지 혼자서 힘들게 살아왔다. 


‘중앙일보’에서는 1998년도에 이용수의 나이를 69세로 표기했다. 그렇다면 1929년생(1998-69=1929)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1944년에는 15세다.(관련기사 : 위안부 출신 할머니 일본군 장교와 '영혼결혼식')


69세의 위안부 할머니가 전쟁터에서 만난 일본군 장교와 뒤늦게 '영혼결혼식' 을 올렸다. 1944년 16세의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대만 (臺灣) 으로 끌려갔던 이용수 (李容洙.대구시달서구상인동) 할머니는 지난 20일 54년 만에 지옥 같았던 대만 종군위안소를 다시 찾았다.”


‘통일뉴스’라는 정대협에 우호적인 극좌 민족주의 계열의 매체를 보자. 이용수의 나이를 2004년도에 70세로 표기했다. 그렇다면 1934년생(2004-70=1934)이라는 얘기다. 1944년이면 10세에 불과하다.(관련기사 : 김희선의원, "정부 부끄럽다")


한편, 대구에서 수요시위에 참가해온 위안부피해자 이용수 할머니(70)는 600차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할머니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가, 수요시위가 600차나 오도록 해결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격분하고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이렇게 이용수의 나이가 언론매체마다 다 다른 것은 이용수 본인의 오락가락하는 증언도 한 몫 하겠지만, 위안부 문제로 어떻든 국민적 감정을 쥐어짜내야 하는 정대협과 주류 언론들의 탓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 위안부 할머니들 나이는 좌우간 많게 보여야 하고, 그 위안부 할머니들이 젊은 시절에 위안부로 끌려간 나이는 최대한 적게 보여야 한다는 유인을 정대협과 주류 언론들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더 불쌍해 보일테니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초자연적인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의 증언으로 반박되고 있는 ‘14세 위안부 소녀설’


물론 이용수의 증언이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이용수의 증언 중에서 믿을만한 것들 중에는 우리 국민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크게 교정하게 하는 것도 있다.


이하는 그런 문제를 따져보고 한편으로는 그런 교정이 또 어떻게 정대협이 내세우고 있는 이용수의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대표성을 완전히 갉아먹고 있는지도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 증언집’(한울)에 실린 이용수의 1993년도 증언 내용(해당 책 12쪽) 중 일부다.


대구에서 우리를 데려간 남자가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우리들은 그를 ‘오야지’라고 불렀다. 여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다. 분순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고, 다른 여자들도 열여덟, 열아홉, 스무 살 정도 되었다.


처음에는 “김분순”이 동갑내기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자기보다 한 살이 더 많다고 한다. 그건 그냥 동갑내기로 지냈다는 얘기로 이해한다 치고서, 이 증언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만16세인 자신이 위안소에서 가장 어렸다는 내용이다. 다른 위안부들은 다 18세 이상, 당시 기준으로 모두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용수의 이런 증언 내용은 정대협의 입장과 배치된다. 정대협은 현재 외교공관 보호와 관련 빈 협약을 무시하고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少女像)’을 세우고서, 초경(初經)도 멀어 보이는 13~14세 소녀를 일본군이 대거 끌고 간 것처럼 연일 큰 소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내세운 일본군 위안부의 ‘대표’라고 할 만한 사람이 위안소에는 자기보다 어린 여성은 없었다고 하는데 정대협은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정대협이 응당 관련 무슨 입장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용수에게 전기고문을 가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위안부 업자’


한편, 이용수는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전기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을 1993년도부터 하고 있다. 이는 한 번도 번복된 적 없는 일관된 증언이므로 역시 믿어볼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전기고문의 사실 여부가 아니다. 문제는 전기고문의 주체가 누구였냐는 것이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 증언집’(한울)에서 이용수의 1993년도 증언 내용(해당 책 127~128쪽)을 들어보면 전기고문의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분명 ‘위안소 업자’(속칭 ‘포주’)다. 


방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안 들어가려고 하니까 주인이 내 머리끄댕이를 잡아끌고 어느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에서 전기 고문을 당했다. 주인은 지독하게 독한 놈이었다. 그는 전화 코드를 잡아 빼서 그 줄로 나의 손목, 발목에 감았다. 그리고는 “고노야로” 하며 전화통 손잡이를 마구 돌렸다. 나는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울부짖으며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그리고 또 한번 전화기를 돌릴 때 나는 견디지 못해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물을 끼어 얹었는지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위안소는 일본식으로 지은 2층집이었는데 방이 20개나 있었다.


전기고문의 주체가 위안부 업자였다는 내용은 앞서 거론한 2014년도 ‘아시아경제’가 기획한 ‘위안부 보고서 55’에도 거듭 확인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정대협은 지금껏 위안소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학대의 주체도 ‘일본군’이었다는 식으로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용수는 그 주체가 저렇게 ‘위안부 업자’라고 증언한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도 정대협이 당연히 무슨 입장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닐까. 이용수가 과연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취지에 맞는 일본군 위안부인가.


자신을 구해준 일본군 장교 '하야까와 기꾸쇼니'를 위해 위령제까지 지내줘


놀랍게도 이용수는 ‘일본군’으로부터는 학대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입었다고 증언을 하기까지 한다.


‘한겨레’ 1998년 8월 27일자 ‘군 위안부할머니의 일본군 장교 위령 “생명의 은인 … 증오하는건 일본인 아닌 일본”’의 기사 내용을 보자.


26일 정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 일본군 위안부 출신인 이용수(69)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는 ‘수요집회’에 참석했다.


할머니는 지난 22일 대만 국회의원과 일본 역사가들의 도움으로 대만을 방문해 옛날 위안소가 있던 자리를 찾았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미리 준비해간 두 개의 인형으로 이름도 모르는 젊은 일본군 장교의 ‘영혼 결혼식’을 올려줬다. 일본군 장교를 나타낸 인형에는 ‘하세가와’라 이름 붙이고 다른 인형에는 ‘무명씨’라고 적었다. 두 인형을 바다로 띄워보내는 것으로 결혼식을 마쳤다.


할머니는 1944년 16살 때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가 이 장교를 만났다. 일본군 막사에 들어가지 않으려다 두들겨맞고 초주검이 돼 있는데, 당시 21살 된 이 장교가 “야산에 뭍어주겠다”고 데려가 보살펴줘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이 장교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죽으러 간다’며 떠났다고 한다.


할머니는 “생명의 은인이고 나를 첫사랑으로 생각한 일본군 장교의 위령제를 꼭 지내주고 싶었다”며 “내가 증오하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진실을 외면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태도”라고 말했다.


자신이 누구한테 두들겨 맞아서 초주검이 됐는지 얘기는 안하고, 좌우간 한 21살 짜리 일본군 장교가 당시에 자기 목숨을 구해줬다고 한다. 이에 “생명의 은인”인 그를 위해서 나중에 ‘영혼결혼식’도 올려줬다고 한다.


관련해 2015년도 3월 12일, 인문학 모임인 '두:목회'가 주최한 '이용수 할머니의 역사의 증언'에서의 이용수 증언도 들어보자.(관련기사 : "난 가미카제 성노예, 생각만 해도...나쁜놈들")


당시 열일곱살의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 가미카제 부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가 어린 일본 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위안소에서 맞고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이용수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군인은 할머니에게 '도시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벤또(도시락)와 단무지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1998년 일본에서 당시 자신을 도와준 일본 군인의 이름이 '하야까와 기꾸쇼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야까와는 어느 날 저녁 이용수 할머니에게 "내일 죽으러 가야 된다"고 하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하야까와는 "도시꼬, 너의 부모별도 있고 나의 부모별도 있어. 내가 내일 죽으면 별이 하나 떨어질 거야"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야까와는 다음날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용수가 영혼결혼식때 새로이 ‘하세가와’라고 불러줬다는 21살 일본군 장교가 저 ‘하야까와 기꾸쇼니’로 짐작된다. 일본군 장교는 이용수를 ‘도시꼬(年子)’라고 불러줬다고 한다.


이번에도 누구한테 맞고 고문을 당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앞서 이용수가 위안부 업자에게 전기고문을 당한 사실을 고백한 만큼 이는 일본군이 아니라 결국 위안부 업자의 소행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정황이다.




여기서 이용수는 오히려 일본군 장교, 물론 한 특정한 개인의 경우이겠지만 그로부터 큰 배려를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내용은 일관된 증언인 만큼 진실로 들린다. 수십 여년이 지나고도 잊혀 지지 않을 정도라니 어쨌든 진정성 있는 배려였었던 모양이고 군인 본인은 오히려 죽고 말았다니 그 군인이 태평양 전쟁 시기에 사실 미군을 살해하고 다닌 일본군 장교였다는 요소만 배제한다면 어쩐지 숙연해지기 까지 한다.


문제는, 이용수의 위와 같은 증언이 현재 정대협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 관련 근본 취지를 흔들리게 한다는 것이다. 


정대협은 위안부를 강제연행을 하고 가혹행위를 일삼은 주체가 ‘일본군’이라고 주장한다. 이용수는 비록 오락가락하는 증언일망정 강제연행을 한 것도 가혹행위를 일삼은 것도 그 주체가 ‘위안부 업자’라고 한다. 그냥 한 사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오히려 자기 생명을 구해줬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학대는 없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관련해 정대협의 입장과 이용수의 입장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대협이 다른 생존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이용수를 ‘대표’로 내세우고서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사과와 배상을 받아낼 수가 있나.


이용수의 증언 중에서 그나마 일관성이 있고 정황상 믿어볼만한 증언 내용은 정대협 주도 위안부 운동의 취지를 기저부터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기사 :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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