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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봉준호가 450억 들여만든 B급 영화

'국뽕'도 사대주의도 뛰어넘어야만 한국 문화가 산다


【빅뉴스=서울】김휘영의 문화평론 = 오랜 기다림 끝에 <설국열차>가 막상 개봉되고 며칠 지나자 초반의 기대에 비해 열기가 시들어 가고 네티즌 평점이 7.7 정도에서 머물렀다. 다른 감독이라면 상당히 후한 평점이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가진 감독 중에 한 명인 '봉준호 영화'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평치고는 상당히 저조한 편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450억 원이 투여된 작품이라면 감독이나 배급사 측에서는 상당히 초조했을 것 같다. 의외로 '기대에 비해선 실망'이라는 관객들의 평이 많이 나왔다. 이에 따라 자연히 설국열차의 동력이 상당히 떨어져 가는 추세였다. 제작사나 배급사를 위해서는 특별한 반전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곧 뭔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라고 필자가 예상하면서 기다린 건 뭘까? 그놈의 시건방진 외국 반응이다. 한국 영화에서, 특히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한국 영화에서 이런 패턴의 광고수법은 하도 자주 반복되어 이제 신물이 날 것 같다.

국뽕과 외국 반응 – 동전의 양면

모 외국 잡지에 이런 저런 평가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하니까 어김없이 나온다.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양, 모든 신문 잡지에서 일제히 터져 나와 포털을 뒤엎는다. 사실상 한국 영화에 이보다 좋은 광고는 없다. 아직까지 서구 문화 사대주의에 빠져 한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 언론의 호의적 반응은 매우 좋은 광고 꺼리다. 그리고 2013년 8월 1일 개봉된 한국 영화 <설국열차> 역시 이 효과를 대단히 많이 보았다. 외국 반응이 나오고서 네티즌 평점이 서서히 반등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꼭 보아야 할 영화‘ 쯤으로 담론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영화 밖에서 이런 논쟁이 붙는다면 일단 흥행은 절반 이상 성공한 셈이다. 필자 또한 소위 '국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인 건 아니다. 이런 문제를 다 알면서도 또 이 영화의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는 줄 알면서도 이 평론을 이처럼 늦게 내 놓은 건 가급적 흥행에 지장을 주기 않기 위해서니까. 그야말로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무려 450억 원이 투자된 영화가 아닌가? 또 외국에 수출되는 문화상품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반드시 짚어 주어야 할 말은 해야 겠다는 건 외국에 나가는 한국 영화가 이 작품에서 그칠 것이 아니고 또 그런 작품이 이 정도 수준에서 답보해서는 더욱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이 영화는 광고의 홍수와 압도적인 스크린 점유율에도 힘입어 8월2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기준 누적 관객수 879만명을 기록, 900만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이제 제법 냉정한 비평을 대중 앞에 내 놓아도 될 것 같다.

2013년 까지의 봉준호 감독이 한국 영화사에 가지는 의의

필자가 봉준호 감독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작품 영화 또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보기에는 김기덕, 이준익, 이창동 감독에 못 미치고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의 반열로 보기에는 강제규의 <쉬리>처럼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 작품 같은 의의를 아직은 못 가진 감독이다. 그렇다고 한국 영화 발전사에 기술적 혁명을 이룩한 첨단기술의 혁신으로 보기에는 심형래, 김지운, 김용화 감독에 못 미치고 예술영화감독으로 보면 ‘왕의 남자’의 거장 이준익 감독에 여전히 못 미친다.

사실 비평가로서 한국 감독의 작품을 두고 냉정한 비평을 하는 건 참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 거대한 자본을 들여 외국 시장에 나가는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인이 언제까지 소위 ‘국뽕’에 취해 한국 문화의 미래를 저당잡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대가(大家, Maestro)의 조건

최소한 대가(大家, Maestro) 또는 역사적 인물이 되려면 적어도 특정한 표준이 될 만한 것이나 기술상의 진보를 이룩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봉준호 감독은 여태 세계 영화사에 남긴 봉준호만의 표준이나 기술상의 진보를 이룩한 적은 없다. 그 기법이 독특하여 소위 ‘봉준호 기법(Bong's technics)’이라 불릴 만한 것을 남긴 적도 없다. 봉준호가 한국에서 매우 유명하고 성공한 감독이긴 하지만 헐리우드에서도 그 수법을 모방했던 이웃 일본의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 정도는 아니다. 또 애니메이션에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정도의 레벨도 아니다. 게다가 왕가위 (王家卫 | 왕자웨이, Wong Karwai)감독의 탐미주의적 세련성도 봉준호 감독 작품에서는 찾기 힘들다. 다만 봉준호표 영화에서 <괴물>의 성공 이후에 붙여진 '봉테일'이라는 명칭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소설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에 비견될 만한 봉준호식 <삑사리 기법>이 봉준호가 디테일에 강하다는 인식을 주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것 같다.

세계 영화사가 아니라 국내(domestic)에서도 봉준호가 여태까지 필모그래피로 남긴 영향력은 마찬가지다. 적어도 여태까지 한국 영화사에서 봉준호 감독이 남긴 족적은 아직은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봉준호가 구축한 브랜드에 비하면 그 실상과 업적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고 볼 정도로 ‘특별난 게‘ 없없기 때문이다. 한가지 봉준호 감독을 보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봉감독의 상업적 후각이 그 어떤 감독보다 예민하게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걸 돈이 될 문화 아이콘과 적절하게 버무려 내는 데 매우 뛰어나다. 물론 한국인의 문화 수준, 즉 입맛에 딱 맞게 버무려 낸다. 이게 괴물에서 효과를 본 반미 정서이든 뭐든 간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영화 감독으로서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은 매우 젊고 앞으로 기대할 것이 많이 남은 인물이기에 차후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적어도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여태까지의 방식으로는 태부족임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건 한국 최고의 흥행에 성공했던 <괴물>의 초라한 외국 흥행으로도 증명된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에 부족하기에 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더 보완되었으면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한국 관객 수준?! - 피카소의 그림과 봉준호의 영상화법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이해가 안된다고 혹평한다면 전람회에 온 그 관객의 수준이 어떻니 저떻니 하는 말이 나올 개연성이 조금은 있다. 오해하지 마라. 이건 피카소의 권위가 대단하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기껏해야 가로 세로 몇 센티, 그것도 단 한 점의 평면으로 제 3자와 소통해야 하는 그림이란 예술 장르가 가진 속성이 원천적으로 너무 모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작품 하나를 두고서 ‘관객의 지적 수준’이라는 말이 나왔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를 냉정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외국 잡지에서 봉준호의 영화 <설국열차>를 두고 나왔는데 이게 이 작품에 대한 호평일까 악평일까? 봉준호 감독 스스로 잘 알고 ‘뜨끔’하게 여기고 있을 테지만 전문가적 견지에서는 분명한 악평이다. 그것도 ‘대단한 악평’에 속한다. 일반 관객들도 이를 두고 매우 심한 악평임을 깨달으려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알기 쉬운 예로 아카데미상을 휩쓴 명작으로 손꼽히는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나 전 세계적 흥행에 성공했던 (이티< E.T>)에 관객수준을 운운한 적이 있었던가? 영상 기법이라면 세계 영화사에 손꼽히는 히치콕의 명화들 어디에서도 관객 수준이 논의된 적이 없다.

최고의 예술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아마데우스, 1984년>를 두고서도 왜 ‘관객의 지적 수준’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단 영화가 품질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려면 무엇보다 ‘관객 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일반 예술이 아니라 ‘대중’ 예술로 불리는 건 여기에 이유가 있다.

대표적인 대중예술인 영화에서의 소통력은 관객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감독의 연출력 등 오로지 감독의 역량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역량에 문제가 없는 데도 소통에 실패하여 ‘관객의 지적수준’이란 말이 튀어 나온다면 그건 분명 역량을 가졌다고 평가 받는 그 감독의 ‘나태함’이 원인일 것이다. 역량의 부족에서 왔든 나태함에서 왔든 간에,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 영화는 명작이냐 범작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과락을 받아 '형편없는 졸작'으로 분류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라는 장르- 소통에 가장 유리한 예술

영화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 장르 중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자본이 가장 많이 드는 장르이기도 하지만 제 3 자인 상대방과 소통하기에 가장 유리한 장르이다. 유치원생들에게 수학 아닌 산수를 가르칠 때를 상기해 보자. 예를 들어 3+ 4 = 7 을 이해시키기 위해 3과 4, 그리고 7이라는 숫자를 표기해 놓고서 동시에 ‘과일 세 개 + 과일 네 개 = 과일 일곱 개’ 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흔히 동원된다. 한데 이런 방식보다 더 쉽고 더 다양한 방식을 동원할 수 있는 게 바로 영화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영화에는 이런 이미지를 이용한 시각적인 설명을 넘어 직접적인 대사 및 구체적인 동작까지 가미한 온갖 다양한 표현방식을 동원할 수 있다. 이 뿐인가? 그 방식을 더욱 효과적으로 해주기 위해 각종 음향효과, 음영효과(조명), 배경음악, 의상, 미술 등 온갖 전문가들과 전문 기술이 다 동원되는 예술장르다. 동작도 때로는 소통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슬로 비디오 또는 고속 촬영 후 슬로비디오로, 카메라도 줌인이나 롱- 숏 등을 참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게다가 작품 이해에 주어지는 시간과 장면이라는 측면에 보아서도 그렇다. 영화는 미술 작품 한 점 보다 훨씬 많은, 그림으로 치면 수 십 만 장 이상에 해당하는 씬으로 이루어지고 소통을 위해 감독에게 주어지는 시간도 길다. 요즘은 CG 등 특수효과의 발달로 그야말로 표현방식과 소통에는 진정 꿈의 예술 장르가 영화다. 이런 마술같은 장점을 가진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한 영화를 두고 ‘관객의 지적 수준’을 전제해야만 이해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면 그건 분명코 감독의 소통력, 즉 연출력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흔히 ‘강사가 어떤 대상을 어렵게 설명하는 건 수강생들의 지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강사 본인이 설명하려는 사항을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강의 기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영화와 관객의 이해도를 설명하는 함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명언에 해당한다.

영화는 발레나 오페라가 아니다. 고전음악은 청중의 지적 수준에 따라 그 이해도가 달라진다. 이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객들도 일정한 교양을 쌓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까닭에 이들 장르를 감히 ‘대중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야말로 '대중' 예술이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드러나는 엉성한 서사 구조나 인과관계상의 황당한 모순들을 드러내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는 인터넷에도 늘려 있으므로 굳이 논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설국열차>가 작품성의 측면에서도 현격히 문제가 있는 건 예술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감동, 즉 카타르시스가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시네마 컨설팅 차원에서 대안과 함께 다음 호에 자세히 밝히겠다.

마지막 엔딩 처리의 미숙함- 작품의 밀도를 한없이 떨어뜨린 연출

그리고 단적으로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말이 많은 엔딩의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의 봉감독의 미숙함 또는 나태함은 영상 이미지로 전달하는 또는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의 밀도를 한없이 또 결정적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폐쇄공간인 열차를 벗어난 요나와 어린 흑인 아이 앞에 등장한 곰으로 관객에게 봉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 ‘기차 바깥 세상에도 삶(life)이 존재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이 메시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고민했어야 한다. 그건 분명 ‘그냥’ 삶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건강한 생태계’여야 했다. 이 중요한 메시지를 <설국열차>의 경우처럼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시각적 이미지로 그것도 미학적으로 전달하려면 어떤 형식이 동원되었어야 했을까?

정답은 당연히 그 곰 한 마리 곁에 귀여운 새끼 곰 한 마리가 더 연출되었어야 했다. 봉준호 감독이 관객 앞에 내보인 동일한 씬에 ‘귀여운 새끼 한 녀석’ 더 등장시킨다고 해서 러닝타임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 한 컷이라도 성체가 된 어른 곰 한 마리가 전달하는 메시지와 ‘어미 곰, 그리고 귀여운 새끼’로 구성된 이미지로 주는 메시지의 ‘폭과 밀도’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적어도 후자는 그냥 삶이 아니라 ‘건강한 삶’이고 ‘지속가능한 삶’임을 관객들에게 즉각적으로 본능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시간적 메시지로도 전자, 즉 곰 한마리는 단순히 ‘현재’를 말하지만 어미와 새끼는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가진 영속성과 지속성을 의미한다. 새끼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가까운 과거인 1~3년 전에 건강한 수컷과의 결합(교미: mating)이 있었음을 관객들은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봉준호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특이한 기법인 ‘버스 떠난 후’인 영화 밖에서 이를테면, “북극 곰은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고 곰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곰의 먹이인 다른 생명체도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라는 식의 불필요한 설명으로 보충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사실 영화가 이미 개봉된 후에 이런 부연 설명을 영화 밖에서 하는 일은 엄밀히 말해 반칙에 해당한다. 불완전한 상품을 내놓고서 구매한 고객에게 없어도 될 A/S를 하기 보다는 처음부터 좀 더 완전한 상품을 내 놓아야하는 게 감독의 의무다. 고객은 왕이고 또 매우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관객들에게 이런 설명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대뜸 곰 한 마리를 씬에 담는 것보다는 어미곰-새끼곰 한 컷이 더 뛰어나고 더 효율적이고 또 미학적으로도 한층 아름답다는 걸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연출력의 한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끌리세- 영화 밖의 구차한 설명

봉준호의 영화에는 거의 대부분 영화 밖에서의 부자연스러운 설명이 따른다. <괴물>에서 괴물의 정체를 두고 정작 영화 안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못한 채 출품했다가 나중에 영화 밖에서 <양서류와 파충류의 돌연변이>라고 언론 플레이를 했던 일이 있었다. 그것도 외국 언론을 빌어서 관객에 설명했고 이번 <설국열차>에서도 외국 언론을 빌어서 감히(?) 한국 관객들의 지적 수준 운운하는 시건방진 말을 한 일과도 정확하게 동일한 궤를 달리고 있다. 이는 버스를 놓치고 난 후의 구차한 변명이자 봉준호 감독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일이 연속하여 일어나고 있는 지점이다. 사실 마지막 장면에서 곰 한 마리 덩그러니 나오는 걸 보는 즉시, 필자는 옆 좌석의 동료에게 말했다. “저게 바로 봉준호 감독의 한계지” 라고. 더 나아가 속으로는 “저 정도 수준의 감독이 대한민국 최고 감독이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한국 영화계다‘ 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그 장면을 본 직후, 그런 생각을 했던 건 봉감독이 마지막 엔딩처리로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필자가 정확히 읽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의 평가는 봉감독이 전하려고 한 메시지가 잘못되었음에 대한 실망이 아니었다. 분명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혀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봉감독의 연출적 한계’에 대한 실망이었다.

과연 봉준호 감독이 이 대목을 동원해서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원했는가를 확인해 보자. 다음은 봉준호 감독이 경향신문에서 관객들과 직접 소통한 내용이다.

영화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 봉준호 감독 인터뷰, 경향신문, 2013년 08월 03일

봉준호가 의도한 ‘100%의 희망‘은 제대로 소통되었는가? 못했다면 그 책임은 과연?

자, 여기서 '100% 희망적인 엔딩'을 위해 등장한 캐릭터는 사람이 아닌 ‘곰’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곰(Bear)은 말을 할 수 없으니 대사로 감독의 의중을 전달할 수는 없다. 그러면 화면에 등장하는 동물의 동작과 이미지 자체로 감독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그것도 ‘그냥 희망적‘이 아니라 ‘100% 희망적인’ 엔딩을 의도했으니 정말 효율적인 대안으로서의 가치(value)를 가져야 하는 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요건이다.

우리는 제시된 방법이 비용이나 희생이 과다하거나 또 새로운 시도로 거두게 될 기대가치가 적다면 그걸 대안(代案)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만족스럽더라도 기존의 방식에 더 안주하게 된다. 극 중 길리엄이 커티스에게 "여기서 멈추면 안될까? " 하는 권유가 단순한 유혹 이상의 중차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한데 불과 몇 초 동안 관객의 동공에 등장한 곰 한 마리로 과연 감독의 의중인 ‘100% 희망적인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될까? 대답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그랬다면 이 부분의 해석을 놓고 “북극 곰은 생태계의 최고 위치에 있는 육식 동물이라서 어쩌고 저쩌고~“라는 식의 구차한 설명이 가해져야 ’아하~!’라는 식의 설명이나 설득하는 해설이 나올 리가 없다. 또 이를 두고 봉준호 감독의 ‘냉소적 허무주의‘라는 평도 나올 리가 없다. '100% 희망적 메시지'와 ’냉소주의‘ ’허무주의‘는 극과 극의 개념이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진정한 의중을 좀 더 읽어보자.

Q. 동물원이 있었다면 정말 ‘노아의 방주’ 같은 느낌이 들었겠다.
봉준호: 그랬을 거다. 하지만 ‘영화 라스트에 중요한 장면이 있기에’ 동물 이미지를 미리 소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동물들은 그냥 도살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 2013년 08월 06일, 경향 신문.

일단 ‘영화 라스트에 중요한 장면이 있기에’ 라는 봉감독 자신의 말로 보건대, 이 라스트 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봉준호 감독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봉준호 감독이 이 중요한 라스트 장면으로 무엇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는가가 중요하다. 이 점도 봉준호 감독의 진정한 의중을 은유가 아닌 직접 화법으로 드러냈다. 다시 확인해 보자.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 경향신문, [인터뷰]봉준호 ‘‘완전히 다른 세계’에 열 받는 감정…‘ - 2013년 08월 03일, 경향 신문

그러면 마지막으로 비평가와 관객이 함께 확인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그건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가늠해 주고 상징해 주는 연출력이다. 즉 감독이 의도한 ‘100% 희망적인’ 메시지를 누구나 인정하는 이 중요한 라스트 신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게 ‘제대로’ 전달하는 방식이고 형식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보면 실패했다고 본다. 오히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가진 역량의 한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디테일에 강하다고 하는 봉준호 감독이 이런 걸 포착하지 못한 건 참 안타깝다. 사실 친구와 함께 이 대목을 접하면서 ‘저것이 바로 봉준호의 한계다’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필자가 말한 대로 덩그라니 ‘곰 한 마리’가 아니라 ‘어미 곰과 새끼 곰이 정답게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면 이 영화가 노리는 극적 효과는 훨씬 증폭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건강한 제 3의 방식(The Third Way)이 있는데 기차 안 사람들은 그저 기존의 체제에 길들여지고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서도 곰 한 마리보다는 어미-새끼가 나오는 게 훨씬 나았다. 아직 외국에 이 작품이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이 부분을 필자가 말한대로 약간 수정하여 내보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 부 끝- 3 부에서 계속)

글 : 김휘영 문화평론가 wepa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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