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폴리틱스워치 (정치/사회)


배너

[돌직구 청춘투쟁기④] 포털과의 전쟁, 내가 미친것인가 세상이 미친것인가

외로운 투쟁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미친것 같진 않았다”

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고문은 자신의 주장이 대세인지, 소수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신은 타고 났다거나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이는 열병과도 같았던 젊은날 고뇌의 산물이다. 의욕 넘치던 사회 초년병 시절, 변 대표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일관된 소신을 지키다보면, 한 때 자신을 향해 박수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등을 돌리고 비난하는 순간들과 수없이 마추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는 어떤 해답을 구했을까. 본지는 변 대표의 자서전 ‘변희재의 청춘투쟁’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선정, 매달 일부를 연재하고 있다. 물론, 변 대표의 기타 과거 저서와 기고 중에서도 '인간 변희재'를 설명하는 좋은 소재가 있으면 발굴해 소개할 예정이다. ‘변희재의 청춘투쟁’은 현재 미디어워치 홈페이지를 통해 절찬 판매 중이다. - 편집자주





포털과 타협을 택한 언론노조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내가 포털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한 건 2005년 1월 이른바 ‘연예인X파일’ 유출 사건부터다. 당시 제일기획이 의뢰해 만든 100여 명 연예인들의 사생활 정보파일이 인터넷에서 유출되면서 수백여 개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들은 이런 기사들을 모조리 뉴스메인에 띄우고 심지어 파일 링크까지 걸어놓아 수천만 명의 국민들이 이 ‘연예인X 파일’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포털권력의 실체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언론사들은 이 사건을 제일기획과 연예인들 간 대립과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었고, 포털들은 이런 뉴스 또한 연일 메인에 올리고 있었다. 내 눈으로 볼 때 이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포털이었다. 포털들은 당시 약 30%의 추가 클릭수를 확보, 돈으로 환산한다면 수백억 원가량의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나와 김지룡 문화평론가 등 소수 논객들이 포털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당시로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연예인X파일’ 관련 기사들을 박스로 묶어 메인에 내걸던 포털들이 자사 책임론을 묻는 칼럼만큼은 한적한 구석에 처박아놓고 있단 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각 포털들은 마치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양 철저히 위장하고 있었기에 내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루 1만 여개 기사를 다루는 포털에서 자사에 불리한 기사를 철저히 은폐하기 시작하면 포털비판론은 여론에서 차단돼버리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나는 긴급히 당시 언론계 영향력 다섯 손가락 안에 들던 신학림 언론노조위원장(현 미디어오늘 대표)에 전화를 걸어 포털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학림 위원장은 버럭 화를 내면서 “포털 비판 같은 것을 왜 언론노조에 설명하느냐”, “싸우려면 혼자 싸우라”고 오히려 나를 공격했다.

당시 나는 전화를 끊고 약 10여분 간 멍했던 기억이다. 그때만 해도 언론노조라면 언론사와 언론인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거대한 자본으로 언론을 장악하려 하는 포털의 문제점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대응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런 게 언론노조가 명분으로 내세운 게 아니었던가.

포털 비판, 활동공간조차 없는 고군분투

그런데 이 같은 엽기적 사건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2005년 2월16일 민언련 주최 ‘연예인X파일’ 사건 관련 토론회에서 민언련 김은주 협동사무처장이 발제를 하는데, 포털책임론을 거론하는 김지룡 평론가 등 극소수 논객들을 비판한 것이다. 더 황당한 일은 포털을 비판하러 참여한 당시 문화평론가이자 현 미디어워치 편집장 이문원의 토론에 대해, 미디어오늘 측은 토론자 소개는 물론 사진에서도 그를 제외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미디어오늘 기사만 보면 이문원이란 사람이 토론회에 참여한 사실조차 독자가 알 수 없도록 조작해놓은 것이었다.
 
친노종북언론세력 양대 단체인 언론노조와 민언련, 그리고 그들의 기관지인 미디어오늘이 보인 친(親)포털 행각은 너무나 명확한 메시지를 보냈다. 친노종북세력은 절대 포털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포털을 찬양할 것이며, 포털을 비판하는 자들을 음해해서라도 포털의 권력을 지키려 할 것이란 점이다.

이런 흐름은 인터넷언론을 포함하는 신문법 개정안과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친노종북세력은 듣기에도 역겨운 수준 궤변을 늘어놓으며 포털에 언론으로서 책임을 면제해줬다. 결국 포털은 법 테두리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언론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언론으로서의 책임은 지지 않는 최고의 특혜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정치적 거래 이후, 포털들은 노무현 정권 찬양에 나서면서 정경유착과 권언유착에 나섰다.

나는 2005년 내내 한겨레, 경향신문, 언론노조, 민언련, 미디어오늘 등을 찾아다니며, 포털 권력을 방기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 경고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브레이크뉴스 편집장을 사임하고 일본에서 ‘겨울연가’ 윤석호 감독 관련 책을 출판한 뒤 현업 복귀를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포털의 위력에 다들 굴복하는 시기라 포털과 싸우는 내가 몸담을 언론사를 찾는단 것은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 화끈하게 포털과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5년 내내, 친노종북세력에선 미디어오늘 주도로 포털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는 보도를 쏟아냈다. 그때마다 나는 미디어오늘에 반박글을 보냈지만 대부분 게재거부 당했다. 포털 싸움 초기만 해도 나를 도와주겠다던 좌파진영 인사들도 속속 백기를 투항, 2005년 말에 이르면 친노종북진영에서의 포털 비판담론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면서 나는 더 이상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세상은 외면하더라

나는 이 시기에 “과연 나는 누구인가”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포털과 같은 거대자본이 언론을 장악하면 안 된단 내 주장에 대해 안티조선과 좌파진영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정당한 주장은 거대권력에 의해 계속 은폐되고 음해됐다.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내 말이 맞는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말을 모른 체 하는 것이다.

나는 거의 같은 시기 내가 좋아했던 혹은 실수했던 한 여성을 대상으로 유사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크게 잘못한 게 없는데, 상대는 계속 나를 피하고 있었다. 아마도 3년 가까이 이 문제로 고민했던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알려달란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내가 미쳤든지 혹은 세상이 미쳤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미친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멀쩡히 정확한 논리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이 미쳤단 결론을 내릴 수도 없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제3의 결론을 내렸다. 내가 보통사람들과 크게 다른 사람이란 잠정 결론이었다. 그 결론이 맞든 틀리든 그렇게 결론을 내려야 내가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 전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려다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천재들과 달리 평범한 콘텐츠 기획자가 돼 평범하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살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기인식은 겸손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겐 어느 순간 칼이 되는 수도 있었다. 평범하단 것은 남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란 기대감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내 기대와는 너무나 달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보통사람과 다르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때는 동료들이었던 안티조선 학자들과 운동가들이 나를 음해하고, 포털 관련 토론회 때 내가 참석하는 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는 모습을 보더라도, 더 분노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나와 다르게 갈 수도 있단 점만 인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짝꿍에 관한 가슴 아픈 추억

내가 그토록 진실을 따지자고 덤볐던 그 여성을 마음속에서 내려놓게 된 것도 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점을 스스로 받아들인 이후였다. 그런데 그러다 또 나중엔 ‘나는 평범하지 않다’는 점을 내세우다 또 다른 여성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있다. 이래저래 나는 30대 시절 연애 측면에선 최악의 인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대만 해도 난 내가 내조형 남편이 될 것이라 믿었다. 대외활동 없이 주로 사무실과 집에서 기획과 집필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내조형 남편이 의외로 배우자에겐 엄청난 억압을 줄 수 있단 점을 깨달았다. 자꾸 “내가 내조를 할 테니 더 큰 일을 하라”고 주문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와서야 내조형 남편이 되기는커녕 내조형 부인이 없으면 하루도 가정생활을 못할 것이란 점을 깨닫고 있다.

잘못된 판단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성을 괴롭힌 경험은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다. 반포초등학교 6학년 시절, 담임이 특정 여학생만 너무 편애한다는 불만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여학생이 2학기 때 내 짝이 돼버렸다. 안 그래도 반포초등학교의 신분계급사회에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던 나는 발끈했다. 이에 뜻을 함께 하는 10여명 남학생들과 ‘독신자 클럽’을 만들었다. 여학생 짝과 절대 말하지 않는 것이 우리 규칙이었다. 실제로 2학기 내내 한마디도 한 기억이 없다. 우리 목표는 오직 독서와 공부였다. 실제로 여학생 짝이 말을 걸어올 때 묵묵히 책만 보고 공부하고 있으면 우리들은 박수를 치며 격려하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봐도 놀라운 점은, 그런 나를 대하는 내 짝의 태도였다.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감정을 내세운 적이 없다. 학기가 끝나는 크리스마스 무렵, 조용히 내게 크리스마스카드와 선물을 보내왔다. 애정표현이라기보다 연민이나 동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드를 받고, 나는 뭔지 모를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밤새 카드를 만들어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최근 여의도 증권가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야, 변희재 너 나 알아볼 수 있어?”라고 묻는 어느 커리어우먼을 만나게 됐다. 여의도 바닥에서 나에게 반말로 말을 거는 여자가 누구인지 깜짝 놀랐다.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 그 짝이었다. 어렸을 땐 통통했다고 기억하는데 몰라볼 정도로 날씬한 모습이었다. 명함을 받고 보니 금융회사에 다니는 듯했다. 나는 그날 바로 30여 년 전 일을 사과하는 메일을 보냈다. 한번 식사라도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어찌됐건 이런 내 과거를 되새기면서 나는 “내가 평범하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그 뒤론 세상이 내 주장을 외면해도 그리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이런 태도 덕에 이명박 정권에서 친노종북세력의 역겨운 거짓선동을 보더라도 성질을 최대한 죽이며 방어 및 역공할 수 있었다.

'변희재의 청춘투쟁' 201~207 페이지



관련기사 :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