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이용수(李容洙)’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42)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2.10.02 13:08:09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이용수(李容洙)’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2년 10월 2일판, 번역 : 요시다 켄지).

일본 위키의 ‘이용수(李容洙)’ 항목 내용은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출처가 충실한 편이다. 다만 오래되어 사라진 몇몇 출처(링크)는 미디어워치가 한국어로 옮기면서 다른 출처로 대치하였으며 사소한 일부 사실관계 오류나 표현 등은 수정하였다. 

이용수 증언의 변천 문제는 미디어워치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 등도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있는 문제로, 일본 위키와는 별도로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역시 참고해주기 바란다.






이용수(李容洙, 영문명 Lee Yong Soo, 1928년 12월 13일)는 옛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주장하는 여성이다. 위안부 문제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약칭 정대협(현재의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약칭 정의연)의 지원 아래 한국내는 물론, 미국 하원 121호 결의와 여성국제전범법정 등 국제사회에 대한 발신 활동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금의 배분를 둘러싸고 정의연과 대립했다. 2020년 5월, 전 정대협 대표 윤미향은 이용수가 옛 위안부가 아니라고 시사하기도 했다.


목차


1 인물


2 경력


3 주장

  3.1 미국 하원 121호 결의

  3.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비판


4 활동 이력


5 ‘증언’의 변천


6 주장에 대한 지적

  6.1 증언의 모순

      6.1.1 연령의 불일치

      6.1.2 연행된 상황의 변화


7 저서

 




출생(生誕)

1928년 12월 13일 (93세)

대일본제국기 일본통치하 조선 경상북도 대구부




1 인물(人物)

자신의 신상이야기를 목적에 따라 바꾸는 재주가 있는 이로, 2007년 미 하원 증언 이전에는 “민간업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가출한 아가씨”를 연출했지만, 미 하원 증언 2주 뒤 일본에 가서는 의원회관과 외국특파원협회에서 “군인이 밤중에 칼날을 들이댔고 연행됐다”라고 말했다. 이를 방청하고 있던 현대사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이용수의 곁에 있던 중년 여성이 무언가를 속삭인 후 이용수가 도중에 미 하원 증언 이전의 줄거리로 이야기를 전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밝히기도 했다.(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위안부 문제의 결산 – 현대사의 심연(慰安婦問題の決算 ― 現代史の深淵)’(PHP연구소, 2016))*

[* 편집자주 : 하타 이쿠히코는 이용수의 미국 하원 증언이 ‘가출’, ‘사기유인이었고 이 직후부터 증언이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바뀐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용수는 이미 미국 하원 증언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증언을 뒤집고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증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본문 내용은 이용수의 실제 증언 기록에 맞춰 일부 수정을 하였다.]

위안부 문제로 “나는 위안부다. 그 위안부가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라고 호언해 온 이 씨는, 2020년 5월 7일 기자회견에서 “학생들이 (수요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귀한 돈과 시간을 쓰지만 집회는 증오와 상처만 가르친다”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 “참가한 학생들이 낸 성금이 어디에 쓰였는지도 모른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는 정의연 전 이사장이자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된 윤미향이 “(이용수가) 당선을 지지하고 덕담을 나눴다”라고 한국 언론에 밝힌 내용에 대해,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며 부정했다. 이어 “윤미향이 국회의원은 하면 안 된다” “성금·기금 등이 모이면 할머니들에게 써야 하는데 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라고 하는 등 그녀를 지명하여 비난했다.

이에 대해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이자 국회의원은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로 박근혜 정부가 받은 10억 엔에 대해서) 오늘 오전에 우리 이용수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 중에 할머니의 기억이 달라져 있음을 알았다. 저와 다른 할머니들은 박근혜 정부가 10억엔을 받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 당신만 몰랐다(고 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30년 전) 이 할머니 첫 전화는 ’내가 아니고 내 친구가…‘였다”며 이 씨의 중대한 경력사칭을 고발, 사실상 이용수 비난에 나섰다.

1992년 이후 두 사람은 활동을 함께해 왔으며 윤미향은 이를 지렛대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까지 되었던 반면에, 이용수는 금전 불만을 토로하고 동료들을 비난하고 나섰고, 그 과정에서 서로 “성노예 위안부” 조작을 폭로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92년부터 30년 가까이 “성노예 위안부”역을 훌륭히 맡아 한국이라는 국가에 현재까지 큰 공헌을 했다고도 할 수 있는 이용수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의심받고 그 경력과 증언의 모순 등을 지적받으면서도 일체 흔들리지 않았다. 한때 정부 고위층까지 꾸짖고 나섰을 정도로 “‘성노예 위안부’를 잘 연기해 온 이 명여배우에게 만약 ‘명연기상’과 함께 금일봉을 문재인 대통령이 증정했다면, 세상에 이렇게 치욕적인 결과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어떻든 “성노예 위안부”를 세계적으로 추진한 사람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샀다.

2020년 5월 16일, 오랫동안 위안부 역사왜곡을 고발해온 한국의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고문이 한국 서울 종로의 위안부상 앞에서 이용수의 허위 증언과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의 위안부 장사를 동시에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의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과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인 정안기 박사도 참석했다. 이날 김병헌 소장은 ‘가짜 위안부 이용수’와 ‘거짓의 위안부상’ 문제와 관련해 특별연설을 하기도 했다.(‘변희재 “윤미향은 거짓말쟁이 위안부 이용수의 정체를 밝혀라”’, 미디어워치, 2020년 5월 16일자)


2 경력(経歴)

일본통치시대의 조선 경상북도 대구부 출생. 1944년 위안부로 끌려가 “1947년까지 위안소에서 고문도 당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992년 6월 25일, 본인이 피해자임을 공표했다.

한때는 경기도 광주시의 나눔의 집에 터를 잡고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 등의 초청을 받아 정치운동 퍼포먼스를 벌여왔다. 1992년부터 오카자키 토미코(岡崎トミ子) 중의원 의원 등의 지원을 받아 일본 총리대신과 천황에 대해 사과와 배상 요구, 한국에서 사드(THAAD) 배치 결정 이후에는 이의 철회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을 벌였다. 

2012년 3월 11일, “국회의원이 되면 일본 천황으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반드시 받겠다”며 제19대 대한민국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에 비례대표 후보로 신청을 했는가 하면, 무라오카 타카미쓰(村岡崇光),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 등 일본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등의 활동도 했다.

2015년에는 한국 최대의 여성 법조 단체인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이용수 등 옛 위안부 출신을 자처한 한국 여성 53명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2020년 5월 7일 “나는 정대협에 이용당했다” “성금이 피해자에게 사용된 적이 없다” “28년간 지속돼 온 수요집회(옛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정기 시위)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우희종 대표는 동월 8일, “할머니의 주변에 있는 분에 의해 조금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020년 5월 9일에 윤미향이 직접 이용수의 경력사칭을 공표하고 나섰다. “이용수 할머니가 1992년에 신고 전화를 했을 때에 제가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고,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로 떨면서 ‘저는 피해자가 아니고, 제 친구가요...’하던 그 때의 그 상황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윤미향은 이날 페이스북에 이렇게 쓴 뒤 “그리고 거의 30여 년을 함께 걸어 왔다”라고 덧붙였다.



3 주장(主張)

이용수는 “일본총리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공식 사죄하고 배상해야만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후손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해주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증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본인에 대해서는 “이 개 같은 놈아 난 조선의 딸이다. 너희가 짓밟고도 사죄 안하는 이유가 뭐냐” “할머니들 죽기만을 기다리는 더러운 인간들 앞에서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200년 살아가지고 즈그가 먼저 디지는 걸 내가 볼 겁니다”라고 비난했다.(‘일본아 듣거라…강제위안부 할머니 절규’, 뉴시스, 2007년 6월 8일자)

일한위안부합의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며, “위안부상을 도쿄 한복판에도 세워 그 앞을 오가는 일본인들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게 할 것”이라며 일본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호소했다.(조선신보(朝鮮新報, 조총련 기관지), 2016년 11월 20일자, ‘아시아 피해자들 일본 방문 집회(アジアの被害者らが来日集会)  “사죄와 배상 쟁취하겠다(謝罪と賠償、勝ち取ってみせる)” “남-일 정부는 합의 파기를(南・日政府は『合意』の破棄を)”’)

3.1 미국 하원 121호 결의(アメリカ合衆国下院121号決議)

미 하원 121호 결의에 관한 심의에서 “일본이 1994년 이후 여러차례 총리 발언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사과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를 하라는 것이냐” “현재의 일본이 앞선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처벌받아서는 안될 것”(다나 로라바허(Dana Rohrabacher) 의원) “위안부 가운데 283명이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돈을 받았다”(스티브 샤보트(Steve Chabot) 의원) 등의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용수는 5분간 허용된 발언시간을 무시하고 1시간 넘게 발언을 계속했다고 한다.(‘“부르튼 발로 뛰어 미국인 10만명 지지서명 받아내”’, 조선일보, 2007년 8월 13일자) 그러면서 “일본의 돈을 전부 긁어모아 준다 해도 나는 받지 않을 것“이라며 울부짖는 퍼포먼스로 미국 의원들을 압도했고, 이는 동 법안 통과에 일조했다고 알려졌다.(‘“사과 할만큼 했다” 일부의원 日 두둔’, 서울신문, 2007년 2월 17일자) 한국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다.(‘'용기를 내 말해줘서 감사해요'…영화 '아이 캔 스피크'’, 연합뉴스, 2017년 9월 6일자)

3.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비판(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批判)

이용수는 2015년 한국 주간지 ‘미래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정대협을 비롯한 위안부 단체들이 우리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일본과의) 회담을 거부했다” “일본이 협상을 하자는데 왜 안 해요? 문제 해결을 하려면 만나야죠. 만나지 않고 어떻게 해결이 되겠습니까” “왜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비판했다.(‘이용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내 소원은 한국과 일본이 원수 지지 않는 것”’, 미래한국, 2015년 6월 24일자)

‘미래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이용수는 정대협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진행하는 수요시위에 대해서도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무조건 ‘사죄하라’, ‘배상하라’고 하면서 집회 횟수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에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죄해라’, ‘배상해라’ 외칠 때 마음이 편치 않고, 시위에 나가면 다들 악을 쓰게 돼요. 매주 그러다 보면 성격도 그렇고, 태도도 나빠져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정대협 사람들은 투쟁가 쪽인 것 같아요”라고 비판했다. 

자신의 증언에 대해서도 “증언은 내 생명과도 같아요. 그런데 정대협 담당자들이 본인한테 확인도 하지 않고 사실과 다르게 증언집을 내고 6500원에 판매까지 하더라고요” “증언을 들으려면 따로 조용한 곳에서 정식으로 해야지 식사하면서 ‘할머니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질문하고 대답한 게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증언들이 뒤죽박죽 된 게 많아요”라고 비판했다. 이어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일본에게 원조 받아서 포항제철을 짓고 경부고속도로 건설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라고 봐요. 제 얘기는 그때 그 돈으로 경제 발전을 했으면, 이제는 정부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나서달라는 겁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위안부 단체와 피해자들을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하고 의견을 들어야 해요. 그래야 피해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해결책이 나옵니다”라고 말했다.


4 활동 이력(活動履歴)

 ·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자칭 위안부로서 김군자 등과 함께 증언.

 · 2004년 12월 3일, 오카자키 토미코(岡崎トミ子) 중의원 의원과 카미모토 미에코(神本美恵子) 참의원 의원의 소개로 쓰노다 기이치(角田義一) 참의원 부의장과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관방장관과 면담했다. 이용수는 “나의 청춘을 빼앗은 일본군, 일본 정부를 용서할 수 없다”라는 등 격렬하게 규탄을 했다.

 · 2006년 10월 3일, “고금동서 위안부는 있어도,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라고 발언한 우에다 키요시(上田清司) 사이타마 현 지사에게 항의하기 위해 지원자들과 사이타마 현청을 방문했다. 애초 지사와 면회 약속을 잡지 않았기에 현 의회 의사당으로 향하던 지사를 둘러싸고 항의를 실시했다. 이어 기자회견에서 이용수는 “나는 당사자다. 지사의 눈앞에서 분명히 증언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 2007년 11월 17일,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등이 시작한 연대 네트워크 ‘위안부문제 해결 올 연대 네트워크(慰安婦問題解決オール連帯ネットワーク)’의 설립 집회에서 강연을 실시했다.

 · 2007년 2월 23일, 일조협회(日朝協会) 주최의 ‘이용수 씨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イ・ヨンスさんのお話を聞く会)’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다. 해당 집회에는 여성국제전범재판소에서 “위안소는 유료이지만 강간이라면 무료라는 이유로 중국 여성을 강간했다”라고 증언한 중국귀환자연락회의 카네코 야스지(金子安次)도 참석해 이용수의 발언을 지지했다. (집회 후 이용수는 가네코 야스지와 악수하며 사이좋게 기념촬영을 했다.)(미 공청회에서도 증언한 이용수 씨가 사이타마에서 다시 ‘증언·고발‘(米公聴会でも証言した李容洙さんが、埼玉で再び「証言・告発」), JANJAN, 2007년 2월 26일자)

 · 2007년 3월 1일, 우에다 키요시(上田清司) 사이타마 현 지사와 면담하며, “저는 확실한 피해자입니다. 16세(세는 나이)에 대만의 특공대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1946년 귀국했는데 그때는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셨었습니다. 지사님은 부모님도 죽인 겁니다”라고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우에다 키요시 지사는 “종군은 있었지만 (종군)위안부는 없었다. 전쟁 때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는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 이웃나라이니까 우호관계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

 · 2007년 3월 2일에는 일본외국특파원협회(日本外国特派員協会)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강제는 없었다거나 위안부는 없었다고 일본은 말하지만, 내가 위안부로 강제연행된 당사자이고 증인이다”라고 비판했다.

 · 2007년 4월 27일, 아베 신조 총리대신이 워싱턴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 전몰자 기념비에 헌화를 하기 위해 방문하자 그에 맞춰 워싱턴 시내에서 한국계 시민단체와 함께 항의 시위를 벌였다.

 · 2007년 4월 28일,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1944년 강제연행된 후 반복적으로 무차별 폭행, 강간 및 고문을 당했다”라고 증언하며, 미 하원 121호 결의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 2007년 4월 29일, 보스턴 도심 관광 명소인 퀸시마켓 인근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일본의 만행을 선전하고, 미 하원 ‘군대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

 · 2007년 6월 14일, 일본 참의원회관 앞에서 열린 ‘구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국회 앞 스탠딩(旧日本軍の性暴力被害者に謝罪と賠償を求める国会前スタンディング)’에 참가차 일본을 방문했다.

 · 2007년 7월 30일, 미 하원 121호 결의가 통과되자 기자회견에서 “결의안은 진실과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양심의 승리였다” “미국 의회가 내 한을 풀어줬다. 일본은 내 앞에서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라고 절규했다.

 · 2007년 11월 1일에 사이타마 현 평화 자료관이 상설 중인 전시의 연표에서 ‘종군 위안부’의 표기를 ‘위안부’로 변경한 것을 놓고, 이를 원 표기대로 복원을 요구하는 일본의 시민단체에 (2009년 3월 1일) 초빙되어 “‘종군’ 없이는 강제였다는 사실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시시도 노부토시(宍戸信敏) 관장 등에 복원을 호소했다. 시시도 노부토시 관장은 “검토한 결과, 바꿀 생각이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쳤다.(‘현 평화자료관 : “‘종군’ 표기 부활을” 옛 위안부 이씨의 호소(県平和資料館:「『従軍』表記復活を」 元慰安婦・李さん訴え)‘,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2009년 3월 2일 지방판)

 · 2009년 3월 4일,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일한조약으로 해결되었다”라고 주장하였기에, 일본 정부에 ‘일한회담 문서’의 전면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재판에 참가하여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증언을 했다. 그 후 기자회견에서 “왜 피해자인 내가 일본까지 와서 법정에 호소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라고 말했다.

 · 2009년 10월 28일, 일본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전시 성폭력 문제 연락협의회(戦時性暴力問題連絡協議会) 주최로 열린 원내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 2011년 07월 1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조기 해결을 목표로 하는 미야기의 모임(日本軍『慰安婦』問題の早期解決をめざす宮城の会)’(이치노헤 요코(一戸葉子) 사무국장, 센다이(仙台) 시 아오바(青葉) 구가 주최하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 방문.

 · 2011년 8월 31일, 한국의 김성환(金星煥)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및 법적 책임을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즉각 이행하라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 2011년 12월 11일, 뉴욕의 유엔 주재 일본 대표부에 한국인 지원 단체 등을 데리고 방문했다. 그들을 맞이한 기무라(木村) 공사에게 “일본은 하루빨리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 일왕(천황)이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한다”는 등의 요구를 했지만, 기무라 공사는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만을 되풀이했다.

 · 2011년 12월 15일, 미국 뉴저지 주 팰리세이즈파크 시 한인유권자센터가 해당 시의 시립도서관에 건립한 “일본인이 20만 명의 여성을 납치했다”고 쓰인 ‘위안부의비’를 옛 위안부 이옥선(李玉善)과 함께 방문해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통곡했다.

 · 2015년 4월, 아베 일본 총리의 방미 및 상하원 합동회의에서의 연설이 확정되자, 종군위안부에 대한 사죄를 연설에 넣도록 요청했다. 아울러 미 의회 앞에서 항의 활동을 벌였다.

 · 2015년 5월, 아사히신문에서 김학순 관련 첫 특종 보도를 했던 기자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와 로스앤젤레스에서 합동 강연을 하면서, 우에무라 다카시와 이용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울 것을 선언했다.

 · 2016년 3월, 위안부문제일한합의(慰安婦問題日韓合意)를 무효화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 맞춰 방미해 캠페인을 벌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 2016년 7월 1일에 북조선의 또 한 번의 성공적인 핵실험 위협에 따라 한국 내 사드 사드(THAAD) 미사일 배치를 승인한 박근혜 정권의 결정을 두고, 한국 정부로부터 위안부로 인정받은 고령자 2명을 더한 옛 위안부 6명이 한국 국회에서 반대의사를 표명 했다. 그러면서 "사드를 청와대에 배치하여 박근혜 대통령이 안전성을 증명하라"라고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정권 규탄을 했다.(‘위안부 이용수 할머니, 국회회견서 "대통령 자기 마음대로다. XX하고 있네"’, 중앙일보, 2016년 7월 21일자)





 · 2019년 2월 1일, 김복동의 노제(길거리에서 열리는 장례)에서 서울광장부터 종로구의 구 주한일본대사관까지 관을 운구한 뒤, 소녀상 앞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우리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어린 나이 열다섯, 열여섯 때 그 폭탄이 빗발치는 데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때는 조선이었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의 죄는 모르고, 망언만 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너무너무 서럽고 안타깝습니다.” (‘“훨훨 날아 행복 누리소서” 김복동 할머니 눈물의 영결식’, 한겨레, 2019년 2월 1일자)

 · 2022년 8월 4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아시아 순방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지원단체와 함께 국회를 찾아 국회 경호원의 지시에 따라 펠로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경호원들이 펠로시가 지나가는 길 바깥으로 이용수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이동시키려 했고, 이 씨가 이에 저항하자 경비원들이 무리하게 이동시키려 했고 이 씨는 의자에서 떨어져 손을 다쳤다.


5 ‘증언’의 변천(『証言』の変遷)

이용수의 증언은 애초 “국민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에게서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받고 좋아서 따라갔다”라는 내용이 “일본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그들이 무언가 뾰족한 것을 등에 찌르면서 배로 끌고 갔다”라는 군에 의한 ‘강제연행’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변경돼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이 지적한 바 있다.(‘한국의 옛 위안부 격정 토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하토야마 씨뿐” “아베 총리는 우리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라. 이어지는 총리도 대를 이어 똑같이...”(韓国の元慰安婦が激白「信じられるのは鳩山さんだけ」「安倍首相は私たちに直接許しを請え。続く首相も代々同じ…」), 산케이신문(産経新聞), 2015년 11월 8일자)

아래는 1993년 당시 이용수의 증언으로, 1993년 7월의 ‘사진기록 깨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写真記録 破られた沈黙 アジアの「従軍慰安婦」たち)’(후바이샤(風媒社), 1993년 10월의 ‘증언・강제연행된 조선인 군위안부들(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아카시쇼텐(明石書店))(한국어판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한울출판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1944년 여름 어느 날, 술집을 하던 친구(김분순)의 어머니가 ‘지금처럼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 내가 말하는 곳에 가면 밥도 많이 먹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라고 했죠. 하지만 저는 ‘싫다’며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난 어느 새벽 날, 김분순이 우리 집 창문을 두드리며 ‘조용히 따라 나오거라’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발소리를 죽이고 슬슬 분순이가 시킨 대로 나갔습니다. 어머니께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분순이를 따라갔습니다. (중략) 가보니 강가에서 본 일본인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40이 좀 안 되게 보였어요.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죠. 그 사람은 저에게 보따리를 건네주면서 안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들어있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그것을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바로 따라가기로 했어요. 대구에서 우리를 데려온 남자가 위안소 경영자였습니다.”


 · ‘증언・강제연행된 조선인 군위안부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아카시쇼텐, 1993)에서의 이용수 증언을 토대로 열기한다.
- 1944년 가을(만16세) 가난한 모습에 아주머니로부터 가서 일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군복 같은 옷을 입은 남자”(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 남자)에게 옷과 구두로 낚여서는 다른 이들과 함께 그를 따라갔다. 다롄에서 배를 탔다.
- 1945년(17세) 양력 정월, 폭격이 이어지는 선상에서 강간당했다. 대만 신주(新竹)에 도착하였으나 사타구니에 종기가 생겨 피가 끈적끈적 붙어 걸을 수 없었다. 싫다고 말하자 위안소 경영자에게 전화선 코드로 전기고문을 당했다. ‘도시코’라는 이름으로 주로 특공대를 상대하다가 성병을 옮기기도 했다.
- 1945년 8월(17세), 한 조선인이 종전 소식을 전해줬고, 경영자는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부두에 있는 수용소로 갔다. 보리가 푸른 싹을 틔울 무렵(11월경) 집으로 돌아갔다.

 · 2002년 6월 26일자 일본 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しんぶん赤旗)’에서는 “14세에 총검으로 위협받고 끌려왔다” “거부하면 맞고 전기로 고문을 당해 죽을 뻔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 2004년 12월 4일에 개최된 ‘12·4 전국 동시개최 ‘지울 수 없는 기억’(12・4全国同開催「消せない記憶」)‘(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초대하여(日本軍「慰安婦」被害女性を招いて) - 교토 실행위원회(京都実行委員会)에서는 “1944년, 16세의 나이에 ’군복 같은 옷을 입은 남자‘에게 연행되어 대만으로 갔다. 이동중인 배 안에서 일본 병사들에게 반복적으로 강간당했다. 대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3년간 강요당했다. 위안소에서는 하루에 여러 명의 병사를 상대하게 하고 저항하면 전선 같은 것으로 전류를 흘려보내거나 통나무로 얻어맞는 등의 폭행을 당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 2006년 10월 13일, ’우에다 지사의 ‘종군위안부’ 부정 발언을 묻는 현민 연락회(上田知事の「従軍慰安婦」否定発言を問う県民連絡会)‘의 집회 후 기자회견에서 “15세에 한국 대구의 집에서 군인들에게 납치돼 대만까지 끌려갔고, 패전으로 풀려날 때까지 3년간이나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라고 말했다.

 · 2007년 2월 23일, 일조협회(日朝協会) 주최의 ‘이용수 씨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イ・ヨンスさんのお話を聞く会)’에서는 “15세 때 소총으로 위협받아 다롄에서 대만으로 끌려가 신주 해군위안소에서 특공대원의 위안부로 취급됐다”라고 증언했다.

 · 2007년 3월 1일, 우에다 키요시 사이타마 현 지사와 면담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16세대만에서 특공대원이 입을 막고 끌고 갔다”라고 말한 바 있다.*

(* 편집자주 : 일본 위키는 이용수 씨가 여러 증언들에서 ‘특공대원’과 ‘특고대원(특별고등경찰)’에 대해서도 혼선을 빚고 발언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 모두 특공대원으로 표기했다.)

 · 2007년 4월 27일 ‘asahi.com’ 기사(‘위안부 문제 한국인 항의시위 화이트하우스 앞에서(慰安婦問題で在米韓国人ら抗議デモホワイトハウス前で)‘에서는 “나는 15세 때 납치됐다. 주변 여성들은 아무도 매춘부처럼 돈을 받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 2007년 4월 28일에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는 “16세에 강제연행되어 2년간 일본병의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일본병에게 발이 묶여 전기고문을 당했다”라고 증언했다.

 · 2007년 6월 14일 개최된 ‘구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국회 앞 스탠딩(旧日本軍の性暴力被害者に謝罪と賠償を求める国会前スタンディング)’에서 “15세 때 부모님 품에서 끌려가 대만 특공대 위안소로 보내졌다“ “대만 위안소에서 나는 구타당하거나 걷어차였다. 말을 잘 들으면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여 시키는 대로 했다. 심한 일을 당해서 복막염에 걸렸다”라고 증언했다.

 · 2007년 방영된 한국 EBS TV ‘시대의 초상’에서는 “1944년 10월 당시 16세이던  저녁에 집 밖에 나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타이완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까지 끌려갔다” “대만으로 끌려가는 배에 일본 해군 300명과 조선 처녀 5명이 타고 있었으며 배 위에서 이미 순결을 잃고 처참하게 몸을 유린당했다” “강요에 못 이겨 ‘하루에 적게는 20명 많게는 70명의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리 중에도 일본군을 받아야’ 했다”라고 했다. “요구를 거부하기라도 하면 ‘칼로 쭉쭉 째는’ 잔인한 폭력과 죽임까지 당해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자의로 몸을 팔았다는 뜻을 지닌 ‘위안부’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다”라고 증언했다.(‘일본아 듣거라…강제위안부 할머니 절규’, 뉴시스, 2007년 6월 8일자)

 · 2011년 12월 13일, 뉴욕의 한인유권자센터와 퀸즈보로 커뮤니티 컬리지(Queensborough Community College)의 홀로코스트센터(나치의 유태인 학살기념관)가 마련한 기념강연에서 “15세 때 대만 가미카제 부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해 거의 죽을 뻔했다. 함께 끌려간 다른 여성 2명은 죽었다”라고 증언했다.

 · 2012년 9월 12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의 모임(日本軍「慰安婦」問題の解決を求める市民の会)’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15세 때 자택에서 자고 있던 나를 일본군이 연행했습니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군화와 몽둥이로 얼굴과 몸에 폭력을 당했습니다. 전국 각지를 일본군과 함께 전전하다 17세에 부모 품으로 돌아갔으나 또 잡힐까 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 2012년 9월에 위안부 관련 행사에서 초청받았을 때는 “1944년 16세 때 대만 신주에 있는 위안소로. 생리 중에도 강간당했다”며 프로필이 갱신됐다.(긴급 집회 고노 담화 재검토론에 반격한다! ―김복동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를 둘러싸고―(緊急集会 河野談話見直し論に反撃する!―金福童ハルモニ、李容洙ハルモニを囲んで―), 와세다 봉사원 리버티홀(早稲田奉仕園 リバティホール), 2012년 9월 21일)


6 주장에 대한 지적(主張への指摘)

 · 1993년에 서울대의 안병직 교수 등 정신대연구회는 옛 위안부 출신이라고 자칭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청취조사를 진행했다. 안 씨는 옛 위안부라고 주장한 사람 중에 사실을 왜곡한 사람도 있었음을 적시하고 반면에 조사 대상 40명 중 19명은 그렇지 않아 증언의 신뢰성이 높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증언・강제연행된 조선인 군위안부들(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아카시쇼텐(明石書店), 1993)(한국어판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한울출판사))

“조사를 검토함에 있어서 매우 어려웠던 점은 증언자의 진술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이미 근 50년 전의 일이므로 기억의 착오에서 올 수도 있었으며, 증언하고 싶지 않은 점을 생략한다거나 적당하게 얼버무리는 데서 올 수도 있었으며, 또 시대의 사정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올 수도 있었다. (중략) 우리가 조사를 마친 19명의 증언은 우리가 자신 있게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중략) 증언의 논리적 신빙성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증언 중 기록 자료에서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을 대부분 확인했다.”


훗날(2006년 MBC '뉴스현장'의 ‘뉴스초점’ 코너 황헌 앵커와의 대담) 안병직은 “강제 동원했다는 일부 위안부 참여자의 증언은 있으나 종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 “현재 한국에도 소위 사창굴이라 부르는 위안부가 많지 않느냐. '무조건 강제에 의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면 강제만 없으면 그런 현상이 없어져야 되지 않느냐”며, 일본에서의 주된 사례인 ‘자발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사창굴 위안부를 없애기 위한 연구를 진행해야 하며,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대해서는 “내가 3년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협의회)에서 활동하다 그만뒀다. 그 사람들(정대협)이 위안부 문제를 반일운동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빠졌다”라고 비판했다. (‘안병직 교수 "위안부는 매춘부다" 과거 발언 살펴보니…’, 머니투데이, 2014년 1월 27일자)

 ·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는 “이 조사(안병직에 의한 위안부 청취조사)에서 ‘강제’였다고 증언한 여성은 4명뿐이며, 그 중 2명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한 재판의 소장에서 “‘기생’ 등으로 ‘팔렸다’”라고 쓰고 있다고 말했다.(‘모든 것은 아사히 신문의 조작에서 비롯되었다(すべては朝日新聞の捏造から始まった)’, ‘위루(WILL)’, 2007년 5월호)

 · 하타 이쿠히코는 한 잡지 기사를 통해, 이용수의 1992년 정신대대책협의회 증언과 2007년 미국 하원 공청회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위안부가 된 경위는 민간업자의 감언 및 조선인에 의한 속임에 의한 것으로,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이 아니라 ‘가출(家出)’이 맞다고 밝혔다.(‘환상의 ’종군위안부‘를 조작한 고노 담화는 이렇게 고쳐라!(幻の「従軍慰安婦」を捏造した河野談話はこう直せ!)’, ‘쇼쿤!(諸君!)’, 2007년 5월호)

 · 하타 이쿠히코는 또한 2007년에 ‘슈칸신초(週刊新潮)’의 취재에 응하며 말하길 “그녀(이용수)가 처음으로 위안부로서 공식석상에 나선 것은 92년이다. 당시는 위안부가 된 경위를 ‘만 16세 가을, 국민복에 전투모 차림의 일본인 남성이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보여 주길래 기뻤다.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집을 나섰다’라고 말했고 미국의 공청회 직전까지도 동일한 말을 했었는데, 지금껏 몇 번이나 일본에 온 그녀는 올해도 일본에서 몇 차례 회견을 열었으며 2월부터는 ‘일본병이 집에 침입해 목을 잡아 끌고갔다’라고 했고, 3월에는 ‘군인이 여자에게 칼을 들이밀어 입을 막고 끌고 갔다’ 등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요컨대 가출과 강제연행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 셈이다”라고 했다. 또한 “연행됐을 때의 나이가 14, 15, 16세로 무려 '세 가지'나 있다. 때로는 ‘44년, 16세에 대만으로 끌려가 3년간(1944년-1947년) 위안부의 생활을 강요당했다’라고 말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종전 후에도 위안부로 일했던 것이 되고 만다”며 그녀의 증언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슈칸신초(週刊新潮)’ 2007년 4월 5일호)*

[* 편집자주 : 하타 이쿠히코는 이용수가 미국 의회 공청회에서의 증언도 ‘가출’, ‘사기유인이었고 그 직후에 증언이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으로 바뀐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용수는 미국 의회 공청회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증언을 뒤집고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증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본문 내용은 이용수의 실제 증언 기록에 맞춰 일부 수정을 하였다.]

 · 위안부 연구로 히토쓰바시(一橋)대학 대학원 사회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윤명숙(尹明淑)은 옛 조선인 위안부 43명분의 증언을 조사했다. 해당 연구에서는 이용수와 같은 사례는 ‘사기 유인’으로 취급되어 자신의 의지에 반한 유괴로 정립하고 있다.(‘일본의 군대위안소 제도와 조선인 군대 위안부(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아카시쇼텐(明石書店), 2003))

 · 2004년의 증언에서는 “1944년, 16세에 연행되어 3년간 강요당했다(일본의 패전 후까지)”였으나, 2007년의 증언에서는 “1944년 15세에 연행되었고 1945년에 해방되었다”라고 수정 신고했다. 2004년 증언과 2007년 증언이 다른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그녀는 “나는 둘 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말한 게 매번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집회마다 발언 시간도 다르고, 무엇보다 내 경험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그때그때 선택에 따라 말투가 바뀐 것을 갖고서 왜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하는가?”라고 말했다.(2007년 6월 15일, 도쿄,남오츠카 지역문화창조회관(東京・南大塚 地域文化創造会館)  주최 일조협회(日朝協会)에서)

 · 2015년 미국 강연에서는 “만 열여섯 살 때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에 끌려간 곳이 대만에 있는 일본군 가미카제 부대였습니다. 거기서 일본 군인 방에 안 들어간다고 매를 맞고 전기고문까지 받았어요”라고 증언했다.(‘[訪美 일정 시작한 아베] 아베 사과없이 "마음 아프다"… 위안부 할머니 "日 사과 듣는게 소원"’, 조선일보, 2015년 4월 28일자)

 · 2020년 수요집회를 비판한 이용수에 대해 집회를 주도해 온 윤미향은 반론을 하면서 "(30년 전) 이 할머니 첫 전화는 '내가 아니고 내 친구가…'였다"면서 마치 이 할머니가 위안부 출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정의연과 더불어시민당(더불어민주당의 비례정당)도 “할머니의 기억이 왜곡돼 있다” “심신이 취약한 상태”라고 했다.(‘[사설]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니 '위안부 단체' 문제 모두 밝히라’, 조선일보, 2020년 5월 9일자)

6.1 증언의 모순(証言の矛盾)

6.1.1 연령의 불일치(年齢の不一致)

1928년 12월 13일생으로 한국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 1944년 여름, 증언연령 16세  ‘사진기록 깨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写真記録 破られた沈黙 アジアの「従軍慰安婦」たち)’
만 15세 = 한국 나이 17세

 · 1943년 10월, 증언연령 14세 ‘증언・강제연행된 조선인 군위안부들(証言 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軍慰安婦たち)’
만 14세 = 한국 나이 16세

 · 1944년, 증언연령 나이 16세 영문 ‘중국일보(中国日報)’
만 15세 = 한국 나이 17세

 · 1944년 가을, 증언연령 14세 프랑스 ‘르몽드(LeMonde)’ 지(紙)
만 15세 = 한국 나이 17세

6.1.2 연행된 상황의 변화(連行された状況の変化)

 · 1993년 7월, ‘사진기록 깨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
“1944년 여름, 군복 같은 옷을 입은 일본인에게 원피스와 구두를 받고 따라갔다.”

 · 1993년 10월, ‘증언・강제연행된 조선인 군위안부들’
“1944년 가을, 국민복을 입은 일본인에게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받아 따라갔다.”
- 여름 ⇒ 가을
- 군복 같은 ⇒ 국민복
 
 · 1996년 8월, ‘우리들과 전쟁 책임私たちと戦争責任)’
“1943년 10월, 어떤 여자가 집에 들어와 제방(堤防)까지 끌고 갔고, 거기서 군복을 입은 남자가 먼저 와 있던 친한 친구에게 붉은 보자기를 건네주었다. 안에는 신발이 들어 있었다.”
- 1944년 ⇒ 1943년
- 국민복의 일본인 ⇒ 군복을 입은 남자
- 여자가 등장

 · 2005년 4월, ‘증언집회(証言集会),(도시샤(同志社)대학 개최)’
“1944년, 군인과 목에 뭔가 들이대어진 여성이 집에 들어왔다. 자신도 입막음을 당해 등에 무언가로 들이밀리면서 끌려갔다.”
- 1943년 ⇒ 1944년
- 옥외 ⇒ 직접 가옥내로
- 협력한 여성 ⇒ 여성도 피해자
- 구두를 받고 따라갔다 ⇒ 끌려갔다

 · 2007년 3월 25일, 프랑스 ‘르몽드’ 지
“1944년 가을, 당시 14세 때 집에서 자고 있는데 여자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나가자 한 일본병이 자신을 붙잡아 연행했다.”
- 위협받고 있던 여성 ⇒ 유인한 여성
- 무언가로 들이밀리다 ⇒ 잡혀서 강제로 끌려갔다


7 저서(著書)

 ·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일본에도 전쟁이 있었다3(わたしは日本軍「慰安婦」だった 日本にも戦争があった 3 )‘ 이용수, 타카야나기 미치코(高柳美知子) 지음, 신니혼슈판샤(新日本出版社),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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