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7)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1.05.12 21:56:40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1년 5월 11일판, 번역 : 황철수).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와 더불어 이미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진상규명에 혁혁한 공을 세운 논객 중 한 사람으로, 비단 위안부 문제 뿐만이 아니라 난징사건 등 여러 토픽과 관련하여 일본 근현대사와 관련 실증사학의 대가로 보편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 항목과 관련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1932년 12월 12일 -)는 일본의 역사가이며 오쿠라(大蔵, 재무부) 관료를 역임했다. 역사가로서 타쿠쇼쿠(拓殖)대학 교수·지바(千葉)대학 교수·니혼(日本)대학 교수를 맡았다. 법학박사(도쿄대학, 1974년)이기도 하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인물정보(人物情報)


출생(生誕) : 1932년 12월 12일 (88세), 일본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교(出身校) : 도쿄대학


학문(学問)


연구분야(研究分野) : 일본의 근현대사, 제 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군사 역사


연구기관(研究機関) : 방위청 방위연구소, 방위대학교, 오쿠라쇼(大蔵省, 재무부) 재정사실(財政史室), 프린스턴대학원, 타쿠쇼쿠대학 정경학부, 지바대학 법경학부, 니혼대학 법학부


학위(学位) : 법학박사(도쿄대학)


주요수상력(主な受賞歴) : 


- 기쿠치 간 상(菊池寛賞, 일본 문학 진흥회가 주최하고 문예·영화 등 문화 분야에서 업적을 올린 개인이나 단체를 표창하는 상)


-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주최하는 가장 뛰어난 출판물, 출판 활동에게 표창하는 상)

 



목차 


1 약력 


2 연구·주장 

  2.1 난징사건 

  2.2 위안부 

  2.3 기타 


3 평가 


4 수상력


5 기타 


6 저서 

  6.1 단저 

  6.2 공저 

  6.3 편저 

  6.4 공편저 

  6.5 감수 

  6.6 공감수·공저 

  6.7 역서 




1 약력(略歴)

야마구치(山口) 현 호후(防府) 시 출생. 부친이 히로시마(広島) 현 히로시마 시 출신으로, 소학생(초등학생)까지 하타 이쿠히코의 본적지도 히로시마의 폭심지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히로시마 출신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부친이 철도성(鉄道省)의 기술 관료로서, 큐슈(九州) 미야자키(宮崎) 현, 이즈미(出水, 가고시마(鹿児島) 현), 와카마쓰(若松, 후쿠오카(福岡) 현 기타큐슈(北九州) 시) 순으로 기관구장(機関区長)을 했었기 때문에, 소학교를 5번이나 옮겼다. 태평양전쟁 중에 히로시마 시로 이사했지만, 원폭 투하 1년 전에는 어머니의 친가가 있는 야마구치 현 호후 시에 이주했다. 부친은 전쟁 중에는 육군사정관(陸軍司政官)으로 필리핀 북부 카가얀(Cagayan) 주의 철도 건설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종전 1개월 전에 전사했다.

1951년 야마구치 현 타타라게이센(多々良学園) 고등학교를 졸업 후, 1951년 도쿄대학 문과 일류(一類)에 입학했다(후에 법학부에 진급).  재학 중에는 전사(戦史)나, 키요우라 케이고(清浦奎吾) 등 정치인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당초 지도교수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였지만, 후술하는 휴학으로 인해 마루야마 마사오의 세미나에 참가하지 못하고 오카 요시타케(岡義武)로부터 배웠다. 2학년 때 결핵 진단을 받고(후에 오진으로 판명) 1년 휴학을 했으며, 이때 일본 스가모(巣鴨) 수용소에 수감 중인 A급 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군 육해군 군인 백 수십 명에 대한 청취조사를 하기도 했다.

1955년 국가공무원 6급직 채용시험(경제)에 합격하고, 도쿄대학은 1956년에 졸업했다. 통상산업성(通商産業省) 및 자치기관의 내정을 사퇴하고, 미래의 전직도 생각하여 오쿠라쇼(大蔵省, 대장성-재무부)에 입성했다. 아사히신문 입사 시험에 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오쿠라쇼 입성(入省) 동기로는 코가유 마사미(小粥正巳, 대장차관-재무차관), 오하시 무네오(大橋宗夫, 관세국장) 등이 있다. 입성 초기에는 대학 시절의 전사(戦史) 연구의 연장으로 출판사 일도 했고, ‘별책 지성·감춰진 쇼와사(別冊知性・秘められた昭和史)’(카와대쇼보(河出書房), 1956년) 간행 등에 종사했다. 

오쿠라쇼에서는 환율국, 중국재무국, 나고야 국세청에서 근무했으며, 경제기획청에 파견됐다. 하타 이쿠히코는 오쿠라쇼와 경제기획청에서 반쯤 공인(公認)을 받고서 일본 국제정치학회 등에서 연구 활동과 두 작업을 겸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963년에는 하버드대학, 1964년에는 컬럼비아대학에 각각 유학하기도 했다. 1965년 방위청 방위국에 파견되었고, 방위연수원(방위연구소) 강사, 방위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1969년 8월에 오쿠라쇼로 복귀했고, 국유재산 총괄과장 보좌로 오키나와 반환 사무를 담당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오쿠라쇼 재정사(財政史)실장을 역임, 총서 ‘쇼와 재정사(昭和財政史)’(‘오쿠라쇼 재정사실(大蔵省財政史室)’ 편(編)으로, 도요게이자이(東洋経済) 신보사에서 출판됨)의 편찬 책임자가 되었고, 자신도 그 중에 한 책인 ‘미국의 대일점령정책(アメリカの対日占領政策)’을 집필했다. 재정사실장을 마지막으로 오쿠라쇼를 퇴임했다. 



오쿠라쇼를 퇴직한 후 5년간 요미우리신문사의 촉탁으로, 공개된 외교 문서의 분석 등에 협력하기도 했다. 1977년에 프린스턴대학 대학원 객원교수, 1980년 타쿠쇼쿠(拓殖)대학 정경학부 교수가 되었고 1994년에 의원(依願)퇴직했으며, 1994년 지바(千葉)대학 법경학부(법정경학부) 교수가 됐고 1997년에 정년퇴직했다. 1997년부터는 니혼(日本)대학 법학부 교수, 2002년에 퇴직 후에는 니혼대학 대학원 법학 연구과 비상근 강사를 2010년까지 맡았다.


2 연구·주장(研究・主張)

전공은 일본의 근현대사, 제 2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군사사(軍事史)다. 그밖에, 쇼와사(昭和史)에 관한 저작이 있다.

일본국제정치학회(日本国際政治学会) 태평양전쟁 원인규명부에 의한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연구 성과는 후에 ‘태평양전쟁에로의 길(太平洋戦争への道)’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개전에 이르는 일본 외교를 그리고 있다.

존 W·다우어(John W. Dower)의 책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앨빈 D·쿡스(Alvin David Coox)의 책 ‘노몬한(Nomonhan : Japan Against Russia, 1939)’에 공동연구자로서 헌사에도 이름이 실렸다.

2.1 난징사건(南京事件)

난징사건에 대해 자신의 저서 ‘난징사건(南京事件)’에서 일본군의 불법행위로 인한 희생자 숫자를 “3.8만 - 4.2만 명”으로 기술했고, 이후에도 피학살자 숫자를 약 4만 명 정도로 추정했다. 2007년에 낸 같은 책의 증보판에서는 “4만이라는 숫자는 최고한도인 것, 실제 숫자는 그것을 밑돈다는 것을 부언해두고 싶다”고 덧붙였으며 ‘슈칸신초(週刊新潮)’ 2007년 12월 27일호에서는 “약 4만 명”이라고 코멘트했다.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과 관련해서는 이를 실시했다고 여겨지는 구 일본군 육군 소위가 고향 가고시마(鹿児島) 현에 돌아와 현지 소학교나 중학교에서 ‘투항한 적’을 베었다고 스스로 공언하고 다녔었다는 사실을 해당 학교 구성원들 명단을 확인해서 문의한 4명으로부터 회답을 얻어서 확인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를 1991년 니혼대학 법학회 ‘정경연구(政経研究)’ 42권 1호·4호에서 발표했다. 여기서 시시메 아키라(志々目彰)의 증언은 “전의를 잃고 ‘투항’한 적을 참수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 단순히 개개의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적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투항(投降)’이고, 사령관 사이에 정식의 ‘항복규약’을 맺어, 병사 등의 인도, 무장 해제 등을 결정하는 것은 항복(降伏)이다. 야마모토 나나미(山本七平) 소위는 특사로서 미군과의 교섭에 응해 수십명 규모로 항복하여서 재필리핀미군에 포로가 됐다.]

하타 이쿠히코 자신이 말하고 있는 포로(捕虜)의 요건은 “일단 리더가 있어야 하며, 표지(標識)를 제복에 달고 있고, 모두의 눈에 띄도록 무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이 조건이며, 그래야만 국제법상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 키타노소노 하루노리(北之園陽徳)는 중국 병사는 면복(綿服, 전시국제법을 위반한 게릴라병이었다는 뜻)을 입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2.2 위안부(慰安婦) 

‘일본군이 조선반도에서 부녀자를 강제연행하여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1999년에 당시까지의 논의와 각종 자료를 널리 참조하여 주로 시대 배경과 그 변화 등에서 위안소 제도와 위안부의 실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을 시도한 저서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을 간행했다. 제주도에서 위안부 사냥을 했다고 하는 요시다 증언에 대해서, 1992년 3월에 현지 조사를 실시해 요시다 증언에 따른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또한 필리핀인에 대해서도 강요를 인정하지 않고서 여성을 위안부로 모집했던 사례를 기술했다.

2007년 3월 5일, 수상인 아베 신조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모집과 관련해) 협의(좁은 의미)의 강제성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없었다는 것은 지난해 국회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 답변에 대해 “현실에서는 모집 단계에서 강제를 한 예도 비록 적기는 했지만 있었기 때문에, 아베 수상의 말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협의의 강제는, 극히 적었다’고 말하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괜한 지식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투른 표현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쓴웃음)”라고 코멘트했다.*

[* 편집자주 : 여기서 하타 이쿠히코가 지적하는 위안부 모집의 ‘협의의 강제’ 사례는 한반도(조선반도)의 사례가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과 네덜란드군의 전투가 있었던 인도네시아 스마랑섬에 있었던 사례로서 일부 일본군들의 일탈에 의해 자행된  ‘스마랑 위안소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2014년,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팀의 일원이 됐다.

2015년 2월 23일, 산케이신문 조간 ‘정론(正論)’란에서 ‘대규모 변호인단이 있는 우에무라 소송의 쟁점(大弁護団抱える植村訴訟の争点)’이라는 논고를 발표하고, 논고 내용 중에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편집자주 : 우에무라 기자는 위안부 첫 증언자 김학순 씨에 대한 특종 보도를 내면서 그녀가 애초 기생 출신이었다는 점은 숨겼음은 물론,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연행됐었다는 허위 내용까지 덧붙여서 나중에 큰 논란이 벌어졌다.)에 대해 “우에무라 씨는 소송까지 약 1년, 피고(被告) 뿐만 아니라 일본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고, 수기(手記)도 공표하고 있지 않다”면서, 사실이 아닌 설명을 했다.

산케이신문은 2015년 6월 8일자 조간 7면에서 이러한 기재는 오류라며 “우에무라 씨는 여러 일본 언론의 취재에 응했고, 수기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다만 산케이 신문 인터뷰 신청에 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정하고 사과합니다”라고 오보를 인정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 영어판을 미국의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 편집자주 : 이후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의 영어판 ‘Comfort Women and Sex in the Battle Zone’은 2018년에 미국 해밀턴북스(Hamilton Books) 출판사에서 발간됐다.]



2.3 기타(その他) 

 • 하타 이쿠히코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 대해서, 만일 도쿄재판 대신에 일본인에 의한 재판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당시 법률에 준거해 차하르 작전(チャハル作戦, 과거 차하르성(현재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서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의 전투 중 하나)에서의 포로 살해, 헌병을 이용한 탄압 등을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저작 ‘현대사의 쟁점(現代史の争点)’에서 주장했다. 또한, 하타 이쿠히코는 쇼와 천황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게 된 이유는 ‘A급 전범 합사’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 일본 수상인 미키 다케오(三木武)의 ‘사적 참배 발언’이 원인이라는 설을 주창하는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등을 ‘쇼쿤!(諸君!)’이나 산케이신문 ‘정론(正論)’란을 통해 비판했다.

 • ‘장쭤린 폭살 사건(張作霖爆殺事)’에 관해서는, 1차 사료에 근거한 선행연구에 의거하여 코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대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육군에 의한 범행인 것이 명백하다고 하면서 “장쭤린 폭살은 코민테른의 소행”이라는 설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설은 윤 츄안(ユン・チュアン, Jung Chang)과 존 할리데이(ジャン・ハリディ, Jon Haliday)의 공저 ‘마오 아무도 몰랐던 모택동(マオー誰も知らなかった毛沢東, MAO The Unkonown Story)’의 제 16장 본문에서의 주석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소련 정보 기관의 자료에서 최근 밝혀진 것에 의하면”이라는 식으로 일본에 알려졌다. 관련 전거(典拠)는 그 주석에 대한 주석으로서 GRU(Generalnogo Shtaba, 소련 적군 정보 총국)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알렉산드르 코루빠키디아(Aleksandr Kolpakidi)와 드미트리 뽀루호로후(Dmítrij Prochorov)의 공저 ‘GRU 제국(Imperiya GRU)’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비록 ‘마오 아무도 몰랐던 모택동’에서는 간략하게 취급되어있던 기술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20세기 국제관계사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 마쓰바라 류이치로(松原隆一郎) (아사히신문 2006/1/15 서평), “일본인 독자가 깜짝 놀랄 만한 문서 ...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의 근대사도 다소 수정해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노키 타케노리(猪木武徳) (‘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6년 2월호 서평), “만약 ‘마오’의 논증대로라면 ― 즉 장쭤린을 폭살한 것이 일본군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 점만으로 매우 큰 역사의 재작성이 필요하다” -나카니시 테루마사(中西輝政) (‘쇼쿤!(諸君!)’ 2006년 3월호)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산케이신문 모스크바 지국장 나이토 야스아키(内藤泰明)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이 설을 최초로 주장한 드미트리 뿌로호로후는 “구소련 공산당과 특무 기관에 보관된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어떤 비밀문서를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글은 관계자의 회고록이나 공개 문서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쓴 글이며 “소련의 특무 기관이 실시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 했다. 산케이신문의 기사에 대해서 코멘트를 한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는 “실패한 첫 번째 전략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반해서, ‘성공’한 두 번째 실행 행위에 관해서는 매우 추상적이다”라고 평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장본인이 간단히 소문과 추론의 산물이라고 자인한 만큼, 소란은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에 대해서, 하타 이쿠히코는 저서 ‘쇼와사의 비화를 추궁한다(昭和史の秘話を追う)’에서 전전(戦前) 쇼와 시기(특히 일본군)에 대한 시바의 담론을 ‘신 시바 사관’, ‘시바 신화’ 등이라는 용어로서 비판·부정하고 있다. 또 전후에는 구 일본군을 비판하는 일이 압도적인 명분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시바 료타로의 담론을 맹신한 언론이나 비평가가 인용·재인용을 하고서 세상에 전파한 결과로 ‘신 시바 사관’이 큰 권위를 갖고 수용되었고, 구 일본군은 전차, 참모, 장군이 모두 열악했다는 식의 자학적인 이미지가 널리 정착되어 역사학자들도 이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다.



 •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가인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에 대해서는 ‘변절조(変節組)’라고 비판하였으며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家永教科書裁判)’에서도 국가측 증인으로 출석했다. 

 • 1990년 12월호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서 공표된 ‘쇼와 천황 독백록(昭和天皇独白録)’에 관해서, 다음달호 좌담회에서 이토 다카시(伊藤隆), 코지마 노보루(児島襄),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와 이 문서에 대해서 평가를 실시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독백록’은 쇼와 천황의 전범 기소를 피하기 위해 GHQ에 제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변명서로서 영어 버전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독백록’은 정치적 배경이 없는 솔직한 집안 이야기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토 다카시, 코지마 노보루와 대립했다. 이토 다카시는 “하타 이쿠히코 씨가 말하는 영어 버전이 나오면 항복합니다(웃음)”, 코지마 노보루는 “가능한 한 하타 이쿠히코 씨에게 그것을 찾아내는 노력도 부탁합시다(웃음)”라고 코멘트했다. 후에 영어 버전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 2006년 7월에 니혼게이자이(日本経済)신문을 통해 쇼와 천황이 A급 전범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낸 기술이 포함된 ‘토미타 메모(富田メモ)’의 존재가 보도되었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 진위를 평가하는 연구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이 메모가 진짜라고 인정했다. 

 • 하타 이쿠히코는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도입에 부정적이다.


3 평가(評価)

긍정(肯定)

 • 일본의 법철학자이자 법철학회 이사장인 시마즈 이타루(嶋津格)는 하타 이쿠히코의 저서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의 뒷표지에서 “이와 같이 결론짓는데 있어서, 하타 이쿠히코는 스스로 국내외에서 수집, 조사한 자료를 활용하는 역사학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이 책은 종합성에 있어서 기존의 유사한 책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위안부’ 및 ‘위안부 문제’의 백과전서(百科全書)라고 말할 만한 역작이 되었다. 이제야 냉정한 원근법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토양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면서 찬사를 보냈다.

 • 일본 극동국제관계사 학자인 이케이 마사루(池井優)는 하타 이쿠히코의 저서 ‘일중전쟁사(日中戦争史)’ 및 ‘군파시즘운동사(軍ファシズム運動史)’를 이 분야의 고전적 명저로 평가했다. 

 • 미국의 정치학자로 캘리포니아대학(샌디에이고) 교수인 차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은 하타 이쿠히코의 ‘일중전쟁사’를 “1930년대 일본의 대중국 정책에 관한 가장 철저한 연구”라고 평했다. 

 • 일본 세이신(聖心)여자대학 교수인 사사키 타카시(佐々木隆)는 도쿄대학출판회가 간행한 하타 이쿠히코의 ‘일본 육해군 종합 사전(日本陸海軍総合事典)’을 일본 근대사·군사사 연구에 있어서 필휴(必携)의 사전이라고 평가했다.

 • 미국의 군사역사가인 에드워드 J·드레아(Edward J. Drea)는 “일본 군사사 연구의 장로(長老)”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하타 이쿠히코의 저서를 연구 및 정도(精度, 정밀도), 해석의 모델이라고 했다. 

 • 중국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캐나다 요크대학(York University)의 조슈아 A·포겔(Joshua A. Fogel)은 하타 이쿠히코를 “40년 동안 일본의 전쟁에 관한 우수한 연구를 발표해 온 저명한 학자”라고 평가했다. 

 • 전 와이오밍대학(University of Wyoming) 강사 야마모토 마사히로(山本昌弘)는 하타 이쿠히코를 “일본 근대사 연구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라고 평가했다.



 • 일본 교토대학 명예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伊藤之雄)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가 내각이 일치해서 결정한 것에는 헌법상 천황이 거부권이 없고 자동적으로 재가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도 1989년의 연구수준으로 볼 때는 무리가 없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높은 검증 능력을 가진 역사연구자인 하타 이쿠히코조차 1984년에 발간된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토 유키오는 또한 “태평양 전쟁의 종결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 중 (또는 둘 다) 어느 쪽이 주요 요인인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둘 다 없었다면 종전이 이뤄질 수가 없었다고 하는 하타 이쿠히코의 청취조사는 합당하다”라고도 말했다.

 • 일본 교토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나라오카 소우치(奈良岡聰智)는 “내가 좋아하는 츄코신쇼 3권, 현대 고전을 읽는다(私の好きな中公新書3冊 現代の古典を読む)’라는 기획물에서, 하타 이쿠히코의 ‘난징사건 증보판 ‘학살’의 구조(南京事件 増補版「虐殺」の構造)’(츄코신쇼(中公新書))를 추천하면서 “방대한 1차 사료에 기초하여 실증적으로 학살의 배경에 육박하고 있으며, 그 강력한 검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떤 입장에 설 경우에도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평했다.

 • 유엔차석대사를 역임한 일본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키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는 자신이 일본 측 좌장을 맡은 바 있는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 보고서에 대해서 하타 이쿠히코가 “전체적으로 페어(공정)하다”라고 코멘트해준데 대해서 “역시 일본 근대사 연구의 1인자”라고 화답했다.

부정(否定)

 •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 사무총장인 하야시 히로후미(林博史)는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의 자료 인용에 대해서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것이 있다”, “수치가 틀렸다”, “증언의 일부만을 뽑아 유리하게 인용하고 있다” 등의 비판을 했다.

 • 교토타치바나(京都橘)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나가이 카즈(永井和)는 1998년에 이르러 ‘자유주의 사관’을 교재(教材) 대상으로 삼을 때 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이른바 ‘광의(廣義)의 강제’에 대한 책임 문제였다면서, 이 위안부 분제를 “항상 ‘강제연행’이 있었는지 없는지를 다투는 것”에 한정하려고 했던 자유주의 사관파와의 대립이 바로 논란의 원인이었고 이에 대해서 실증적인 입장의 학자(하타 이쿠히코)가 협력적으로 나왔다고 비판했다. 나가이 카즈는 또한 자신의 블로그에서 하타 이쿠히코의 책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과 관련, 하타 이쿠히코가 내렸던 “아마도 (중략) 위안부 중 대다수 차지하는 것은 앞서 가불금 명목으로 부모에 의해 팔린 딸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이를 완전히 규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결론에 대해서 지지를 하면서도,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논증의 절차가 실증사학자로서 문제가 있다” 등의 비판을 했다.

[* 편집자주 : 여기서 언급되는 ‘자유주의 사관’은 일본의 교육학자인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가 주창한 역사관으로 좌익적 사관, 또 자학 사관이 지배적이었던 일본의 전후 역사학이나 전후 교육학에서의 ‘자유’를 지향하는 사관이다. 한국에서는 통상 ‘역사수정주의’로 비판받고 있다.]

 • 도쿄조케이(東京造形) 대학 국제형법 교수인 마에다 아키라(前田朗)는 하타 이쿠히코의 책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戦場の性)’에는 유엔 조직에 대한 초보적인 오류나 억측을 기반으로 한 설명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하타 이쿠히코의 분석에 대해서 방법론적인 의문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하타 이쿠히코의 반론문이 바로 ‘마에다 아키라 씨에 대한 반론(前田朗氏への反論)’이다(‘전쟁책임연구(戦争責任研究)’ 2000년 하기(夏季)).

 • 일본 교토대 경제학부 교수인 호리 카즈오(堀和生)는 하타 이쿠히코의 발언인 “(위안부는) 일본 군인의 월급의 75 배” “군사령관이나 총리대신보다도 높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는 평가는 “과도한 단순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실인식으로서 완전히 틀렸다”고 비판했다.

기타(その他)

하타 이쿠히코가 아시아여성기금 자료위원회 위원을 맡았을 때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와 논쟁이 있었다.


4 수상력(受賞歴) 

 • 1993년 -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昭和史の謎を追う)’ 제 41회 키쿠치칸(菊池寛) 상
 • 2014년 - ‘명과 암의 노몬한 전사(明と暗のノモンハン戦史)’ 제68회 마이니치(毎日)출판문화상
 • 2014년 - 제 30회 세이론(正論) 대상 


5 기타(その他)

캔으로 포장해 판매하는 Peace(일본 JTI사의 담배상표)를 애호하는 흡연자이다. ‘애연가 통신(愛煙家通信)’에 기고를 하는 등 금연과 흡연규제 문제에 대한 비판·항의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6 저서(著書)

6.1 단저(単著)

- ‘일중전쟁사(日中戦争史)' (카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1961년, 증정판 1972년, 복각신판 2011년/하라쇼보(原書房)(신장판(新装版)), 1979년) 

- ‘군 파시즘 운동사--3월 사건에서 2·26 이후까지(軍ファシズム運動史――3月事件から2・26後まで)’(카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1962년, 증정판(増訂版) 1972년, 복각신판(復刻新版) 2012년 / 하라쇼보(原書房)(신장판(新装版), 1980 년)

- ‘실록 제 2차 세계대전 - 운명의 순간(実録第二次世界大戦――運命の瞬間)’(토겐샤(桃源社), 1968년)

- ‘태평양 국제관계사 – 일미 및 일러 위기의 계보 1900-1935(太平洋国際関係史―日米および日露危機の系譜 1900-1935)’(후쿠무라슈판(福村出版), 1972년)

- ‘쇼와재정사 종전부터 강화까지 (3) 미국의 대일 점령 정책’(오쿠라쇼(大蔵省) 재정사실(財政史室) 편(編), 도요케이자이신포샤(東洋経済新報社), 1976년)

- ‘태평양전쟁 6대 결전 - 왜 일본은 패배했는가(太平洋戦争六大決戦―なぜ日本は敗れたか)’(요미우리신문사, 1976 년)

- ‘실록 태평양전쟁 - 6대 결전, 왜 일본은 패배했는가(実録太平洋戦争―六大決戦、なぜ日本は敗れたか)’(코후샤출판(光風社出版), 1984년 / 코후샤선서(光風社選書), 1995년) 

- ‘태평양전쟁 6대 결전(太平洋戦争六大決戦)’(주코문고(中公文庫)(전 2권), 1998년)

- ‘사록 일본 재군비(史録日本再軍備)’(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76년)

- ‘8월 15일의 하늘 - 일본 공군의 최후(八月十五日の空―日本空軍の最後)’(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78년 / 분슌문고(文春文庫) 1995년)

- ‘태평양전쟁 항공 사화(太平洋戦争航空史話)’(각 : 전 2 권, 토쥬샤(冬樹社), 1980년 / 코후샤출판(光風社出版), 1984년 / 주코문고, 1995 년) 

- ‘쇼와사의 군인들(昭和史の軍人たち)’(분게이슌주, 1982년 / 분슌문고, 1987년 / 분슌학예라이브러리(文春学藝ライブラリー), 2016년)

- ‘관료연구 - 불멸의 파워 1868-1983(官僚の研究―不滅のパワー・1868-1983)’(코단샤(講談社), 1983년)

- ‘히로히토 천황 다섯 가지 결단(裕仁天皇 五つの決断)’(코단샤(講談社), 1984년) / ‘쇼와 천황 다섯 가지 결단(『昭和天皇 五つの決断)’(분슌문고, 1994년)


- ‘실록 제 2차 세계대전 - 운명을 바꾼, 6대 결전(『実録第二次世界大戦―運命を変えた、六大決戦)’(코후샤출판, 1984년 / 코후샤선서, 1995 년)

- ‘제 2차 세계대전 - 강철의 격돌(第二次世界大戦―鋼鉄の激突)’(주코문고, 1998년) 

- ‘쇼와사를 종주하다 - 만주사건에서 교과서 문제까지(昭和史を縦走する―柳条溝事件から教科書問題まで)’(그래프사(グラフ社), 1984년) 

-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주코신서, 1986년, 증보판 2007년)

- ‘제 2차 대전 항공 사화(第二次大戦航空史話)’(각 : 전 3권, 코후샤출판, 1986년 / 주코문고, 1996 년)

-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昭和史の謎を追う)’ (각 : 전 2권, 분게이슌주, 1993년 / 분슌문고, 1999년)

- ‘루거우차오 사건 연구(盧溝橋事件の研究)’(도쿄대학출판회, 1996년)

- ‘일본인 포로 - 백촌강에서 시베리아 억류까지(日本人捕虜―白村江からシベリア抑留まで)’(하라쇼보(原書房), 1998년 / 주코문고(상하(上下)), 2014년)

- ‘현대사의 쟁점(現代史の争点)’(분게이슌주, 1998년 / 분슌문고, 2001년) 

-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 - 난징사건에서 혐연권 논쟁까지(現代史の光と影―南京事件から嫌煙権論争まで)’(그래프사(グラフ社), 1998년)

-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신초센쇼(新潮選書), 1999년) 

- ‘왜 일본은 패배했는가 - 태평양전쟁 6대 결전을 검증한다(なぜ日本は敗れたのか―太平洋戦争六大決戦を検証する)’(요센샤신서y(洋泉社新書y), 2001년)

- ‘현대사의 대결(現代史の対決)’(분게이슌주, 2003년 / 분슌문고, 2005년)

- ‘구 고등학교 이야기(旧制高校物語)’(분슌신서, 2003년)

- ‘소세키 문학의 모델들(漱石文学のモデルたち)’(코단샤, 2004년 / 주코문고, 2013년)

- ‘왜곡된 일본현대사(歪められる日本現代史)’(PHP연구소, 2006년)

- ‘통수권과 제국 육해군의 시대(統帥権と帝国陸海軍の時代)’(헤이본샤신서(平凡社新書), 2006년)

- ‘현대사의 허실 - 오키나와오에재판·야스쿠니·위안부·난징·페미니즘(現代史の虚実―沖縄大江裁判・靖国・慰安婦・南京・フェミニズム)’(분게이슌주, 2008년) 

-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들(靖国神社の祭神たち)’(신초센쇼, 2010년) 

- ‘질병의 일본근대사  에도 막부 말기부터 헤이세이까지(病気の日本近代史 幕末から平成まで)’(분게이슌주, 2011년)

- ‘쇼와사의 비화를 쫓는다(昭和史の秘話を追う)’(PHP연구소, 2012년)

- ‘음모사관(陰謀史観)’(신초신서(新潮新書), 2012년)

- ‘명과 암의 노몬한 전사(明と暗のノモンハン戦史)’(PHP 연구소, 2014년) 

- ‘구일본육해군의 생태학 조직·전투·사건’(주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주코센쇼(中公選書), 2014년)

- ‘위안부 문제의 결산 현대사의 심연(慰安婦問題の決算 現代史の深淵)’(PHP 연구소, 2016년)

6.2 공저(共著)

- (소대이 린지로(袖井林二郎)) ‘일본점령비사 하(日本占領秘史 下)’ (아사히신문사, 1977년, 하야카와 문고(ハヤカワ文庫), 1986년)

- (사카모토 타카오(坂本多加雄)·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쇼와사의 논점(昭和史の論点)’(분슌신서(文春新書), 2000년)

-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요코야마 케이이치(横山恵一)) ‘태평양 전쟁 - 일본 해군 전장의 교훈(太平洋戦争―日本海軍戦場の教訓)’(PHP연구소, 2001년, PHP문고, 2003년)

- (한도 카즈토시·요코야마 케이이치·토다카 카즈시게(戸高一成)) ‘역대 해군 대장 전람(歴代海軍大将全覧)’(주코신서라쿠레(中公新書ラクレ), 2005년)

- (한도 카즈토시·하라 다케시(原剛), 요코야마 케이이치) ‘역대육군대장전람  메이지 편(歴代陸軍大将全覧 明治編)’(주코신서라쿠레, 2009년)

- (한도 카즈토시·하라 다케시·요코야마 케이이치) ‘역대육군대장전람 다이쇼 편(歴代陸軍大将全覧 大正編)’(주코신서라쿠레, 2009년) 

- (한도 카즈토시·하라 다케시·요코야마 케이이치) ‘역대육군대장전람 쇼와 편 만주사변·지나사변기(歴代陸軍大将全覧 昭和篇 満州事変・支那事変期)’(주코신서라쿠레, 2010년) 

- (한도 카즈토시·하라 다케시·요코야마 케이이치) ‘역대육군대장전람  쇼와 편  태평양전쟁기(歴代陸軍大将全覧 昭和篇 太平洋戦争期)’(주코신서라쿠레, 2010년)

- (이자와 야스호(伊沢保穂)) ‘일본해군전투기대 - 전력과 항공대 사화(日本海軍戦闘機隊-戦歴と航空隊史話)’(다이닛폰카이가(大日本絵画), 2010년)

- (한도 카즈토시·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이노우에 마코토(井上亮)) ‘‘BC급 재판’을 읽는다(「BC級裁判」を読む)’(니혼게이자이신분슈판샤(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10년, 닛케이비즈니스인문고(日経ビジネス人文庫), 2015년)

- (한도 카즈토시·하라 다케시·마쓰모토 켄이치(松本健一)·토다카 카즈시게(戸高一成)) ‘철저검증 일청·일러전쟁(徹底検証 日清・日露戦争)’(분슌신서, 2011년)

- (한도 카즈토시(半藤一利)·토다카 카즈시게(戸高一成)) ‘연합함대·전함 12척을 탐정하다(連合艦隊・戦艦12隻を探偵する)’(PHP연구소, 2011년)

- (듣는 이 : 사사모리 하루키(笹森春樹)) ‘실증사학으로 가는 길   한 역사가의 회상(実証史学への道 一歴史家の回想)’(주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2018 년)

6.3 편저(編著)

- ‘전쟁기 일본 관료제의 제도·조직·인사(戦前期日本官僚制の制度・組織・人事)’ (전쟁기관료제연구회(戦前期官僚制研究会) 편(編), 도쿄대학출판회, 1981년) 

- ‘세계 제국의 제도·조직·인사 1840-1987(世界諸国の制度・組織・人事 1840-1987)’(도쿄대학출판회, 1988년. 증보판 2001년) - 2000년까지 추가

- ‘진주만 불타다(상·하)(真珠湾燃える(上・下))’(하라쇼보(原書房), 1988년)

-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日本陸海軍総合事典)’(도쿄대학출판회, 1991년. 제2판 2005년)

- ‘제로전 20번 승부(ゼロ戦20番勝負)’(PHP연구소(PHP研究所)[PHP문고(PHP文庫)], 1999년)

- ‘일본 관료제 종합사전 1868-2000(日本官僚制総合事典 1868-2000)’(도쿄대학출판회, 2001년) 

- ‘검증·진주만의 신비와 진실 - 루즈벨트는 알고 있었는가(検証・真珠湾の謎と真実-ルーズベルトは知っていたか)’(PHP연구소, 2001년)



- ‘태평양 전쟁의 if  ‘이프’ - 절대 불패는 가능 했나?(太平洋戦争のif「イフ」-絶対不敗は可能だったか?)’ (그래프사(グラフ社), 2002년 / 주코문고(中公文庫), 2010 년)

- ‘일본 근현대 인물 이력 사전(日本近現代人物履歴事典)’(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2002년)

- ‘쇼와사 20개 쟁점 일본인의 상식(昭和史20の争点 日本人の常識)’(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3년 / 분슌문고(文春文庫), 2006년)

- ‘오키나와전 ‘집단 자결’의 수수께끼와 진실(沖縄戦「集団自決」の謎と真実)’(PHP 연구소, 2009년)

6.4 공편저(共編著) 

- 일본국제정치학회 태평양전쟁 원인규명부(日本国際政治学会太平洋戦争原因究明部) 편(編) ‘태평양 전쟁에로의 길 제 4 권 일중전쟁 하(太平洋戦争への道 第4巻 日中戦争 下)’(아사히신문사, 1963년)

- 일본 국제정치학회 태평양전쟁 원인규명부 편 ‘태평양전쟁에로의 길 제 6권  남방 진출(太平洋戦争への道 第6巻 南方進出)’(아사히신문사, 1963년)

- (미야케 마사키(三宅正樹)·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요시이 히로시(義井博)) ‘쇼와사 군부와 정치(전 5권)(昭和史の軍部と政治(全5巻))’(다이이치호키슈판(第一法規出版), 1983년)

6.5 감수(監修)

- ‘연합함대 해공전 전투상보(連合艦隊海空戦戦闘詳報)(전 18권・별권 2권)’(아테네 쇼보(アテネ書房), 1996년)

- ‘별책타카라지마, 일본사 재검증 진주만 공격(別冊宝島 日本史再検証真珠湾攻撃)’(책임편집 : 타카라지마샤(宝島社), 2016년)

6.6 공감수·공저(共監修・共著)

- (사세 마사모리(佐瀬昌盛)·쓰네이시 케이이치(常石敬一)) ‘세계 전쟁범죄 사전(世界戦争犯罪事典)’(분게이슌주(文藝春秋), 2002년) ISBN 4-16-358560-5 ISBN 978-4-16-358560-4

6.7 역서(訳書)

- 데이비드 칸(David Kahn), ‘암호 전쟁(暗号戦争, The Codebreakers)’ (공역, 하야카와 쇼보(早川書房), 1968년 / 하야카와 문고(ハヤカワ文庫), 1978년) 

- 월터 로드(Walter Lord) ‘남태평양의 용사들 - 솔로몬 첩보전(太平洋の勇者たち――ソロモン諜報戦, Lonely Vigil: Coastwatchers of the Solomons)’(하야카와 쇼보,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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