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보도를 찾아 약 90분간 읽었다. 그로부터 내가 알게 된 사실은 다음.1. 6명의 시신을 찍은 19초의 동영상이 미국국가기록원(NARA)에 소장되어 있다.2. 미중 연합군은 1944년 9월 14일에 텅충을 점령하였고, 미군이 15일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함락 하루 전 "13일 밤, 그 도시에서 일본군은 한국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는 기록이 있다.3. 텅충 점령과 함께 포로가 된 사람 속에는 조선인 위안부 23명이 있었다.강성현`정진성 교수는 이 세 가지 사실을 한 데 묶어 '당시 텅충에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가 7~80여 명 있었는데, 일본군은 옥쇄를 명령하였다. 이에 불응한 30여명은 학살되었고, 23명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고 한 모양이다.
이우연 위원은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이 제시한 근거들은 애초 단일한 자료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며 어떤 역사적 사건을 보여줄 수도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학자로서 일단 품을 수 밖에 없는 다음 세 가지 의문사항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번에 나온 ‘위안부 학살’ 주장은) 강성현`정진성 교수가 상상력을 과도하게 발휘, 엮어 만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이 사진은, 산(山)사면이고 더구나 매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학살이 아니라 폭격으로 희생된 것이라고 20년 전 ‘아시아여성기금(アジア女性基金)’ 보고서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http://www.awf.or.jp/pdf/0062_p061_088.pdf ).늦었지만 이 문제가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어서 감개무량하다. 이 보고서는 이후 많이 수정 보완되어 이와나미(岩波)에서 발간하는 ‘세계(世界)’ 99년 11월호 논문과 ‘군사사학(軍事史学)’ 2008년호 중일전쟁재론(日中戦争再論)에 게재한 논문이 되었다.버마인이 증언한, 30명을 일본군이 쏴 죽였다는 자료가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옥쇄가 북동성벽 구석에서 이루어진 점, 바깥에 성벽을 지키기 위한 진지는 있었지만 수비대가 30명을 데리고 나가서 바깥에서 학살할 만큼의 여유를(수류탄/총알도 다 떨어졌다고 한다-번역자 주) 갖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 시체가 성벽 바깥에 있다는 것을 사진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 성벽 안에 몰려 고립되기 이전 단계에서 성벽 바깥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면 시체부패가 꽤 심했을 것이라는 점, 대만인/조선인/일본인 위안부가 살아남아 중국의 군포로가 되어 사진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조선인 위안부의 시체 사진은 성벽 안에서 마지막날 밤에 집단으로 대만인/조선인/일본인 위안부들이 탈출했을 때 박격포탄을 맞고 흩어졌을 때 희생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탈출과정 혼란 속에서 사살된 위안부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일본군 수비대들이 옥쇄하는 과정에서 당한 일이 아닐까.탈출 혹은 옥쇄가 교차되는 혼란 속에서 같이 죽음을 선택하도록 사살된 위안부가 있고, 그 현장을 빠져 나온 이들이, 포로가 된 대만인/조선인/일본인 위안부들이었는지도 모른다.아무튼 무엇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본에서 1970년대에 고도 성장기가 일단락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전쟁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났을 때, 여러 곳에서의 옥쇄와 그에 동반되었던 강제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문제시되었던 일이 생각난다.하지만 전투과정의 역학을 프로세스로서 이해해나가는 일에 의해서, 소모적인 대립을 넘어서서 국민감정이 동반된 진실된 주체적 사죄와 용서, 그리고 자연스러운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싶다.(편집자주: 위 아사노 토요미 교수의 글은 원 번역을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하였으며 ‘미디어워치 편집부’가 추가로 일부 교열교정을 하였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2016년에 “수집”한 사진의 실체와 이번에 미국국가기록원에서 ‘발굴’한 19초 분량의 동영상의 대상이 같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맞다. 그런데 그들은 2016년의 사진이 마치 자신들이 이번에 새로이 ‘발굴’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아사노 교수는 그 사진을 20년 전 [아시아여성기금]의 보고서( http://www.awf.or.jp/pdf/0062_p061_088.pdf )에서 소개하였고, 1999년과 2008년에 발표한 두 논문에도 게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새로이 찾아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그들이 주장하듯이 이번에 '발굴'한 동영상이 2016년의 사진과 같은 내용이므로, 그 동영상은 오히려 별 가치가 없다). 위안부 문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다.둘째, 아사노 교수에 따르면 미군의 “30명 사살”은 버마(현재 미얀마)인의 증언이다. 다시 말하지만, 미군의 체계적 조사 결과가 아니다. 여하튼 이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조사해야 할 지극히 중요한 역사적`외교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은 고작 이미 20년 전에 일본 연구자가 소개한 자료와 같은 자료(19초 분량의 동영상)를 들이대면서, 새로운 자료나 논리 없이 “한국인 위안부 30명 학살”을 주장하였다. 학자로서 이렇게 비약할 수 있는 무모한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나?셋째, 아사노 교수는 옥쇄가 성벽 내 북서쪽 모퉁이에서 행해졌다는 점, 미중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바로 전날 밤에 일본군들이 위안부들(아사노 교수에 따르면 사진과 동영상에 나오는 그들 6명 모두가 한국 여성들이라고 볼 수도 없다)을 시신이 발견된 성 밖의 山斜面 으로 데려나가 학살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 성벽 내로 몰리기 전 단계에서 성벽 바깥에서 학살되었다면 시체는 상당히 부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 대만인`조선인`일본인 위안부가 생존하여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사진까지 찍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학살”로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그들은 지난 2년여 시간동안 이러한 점을 검토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사노 교수는 이러한 점을 지난 보고서와 2편의 논문에서 분명하게 지적했다고 말한다. 그것을 읽지 않았는가? 읽었다면 그에 대한 하등 반론 없이 "학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장을 감행하는 그 오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연구자로서 게으르거나, 상식적인 사고능력조차 없는 것인가?
서울대 연구팀은 이러한 상식적인 질문이 널리 퍼져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 주장에 합당한 티끌만한 근거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제시하든지, 그것이 아니라면 오류를 고백하거나, 최소한 논리적 연쇄에서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단절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 다시 ‘무시’로 일관하면, 우리는 연구자라는 저들의 가면에 침을 뱉어야 한다. 검찰 또한 이 오점으로 가득한 ‘연구발표’와 신문 기사를 그대로 가져가서 이 나라 최고 법정인 상고심에 제출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저들과 마찬가지로 침을 뱉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후손들은 이 기록을 보면서 제 조상들의 몰지성과 반이성에 대해 부끄러고 참담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편집자수첩] 위안부 학살론은 잘못된 추론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 최덕효, 이우연 등)은 이 사안과 관련하여 재조사를 진행해 2020년 9월 23일 아래 내용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예야마닛포’의 관련 보도 역시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만큼, 이 사안과 관련해서는 아래 조사 내용이 정확성과 객관성 등에 있어서 최신의 내용이니 참고하기 바란다.(2020년 10월 9일) * * * [42차] 기자회견문: 반일감정 부추기는 위안부 집단학살론은 왜곡된 추론이다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강성현 교수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 조사 등을 거쳐 공개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군 패전 직전 30명 조선인 ‘위안부’ 피해 여성들 집단 학살에 대한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의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G-3 작전일지(미중연합군 보고서) 9월 14일 보고서의 한국인 위안부 30명 사살설은 전언 형식의 소문을 언론에서 보도한 내용일 뿐이다. 텅충(騰越) 일본군의 마지막 옥쇄직전 탈출한 요시히로 타카히로(吉野孝公, Yoshino Takahiro) 의 수기 ‘텅충옥쇄기(騰越玉砕記)’와 역시 같은 장소에서 탈출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쿤밍에서 수용된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종군위안부 속편(従軍慰安婦〈続編〉)’을 보면, 일본인 위안부들은 승홍(昇汞, mercuric chloride)이라는 극약을 먹고 자결을 택한 반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기의 의지로 대부분 이 지역을 탈출하였다는 증언이 보인다. 둘째, 정진성과 강성현 등 한국학자들은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의 학살보고를 NARA에서 발견된 당시 동영상 및 시체사진의 증거로 연관시키고 있으나, 양자가 동일한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아무런 논증 과정이 생략된 무리한 추론일 뿐이다. 셋째. 정진성, 강성현 등 한국학자들은 당시 텅충지역에 70~80명의 위안부가 존재했으며, 미중연합군 보고서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에서 보고된 희생자 30명을 이들 중 일부라고 단언하고 있으나, 여러 증언자료 및 G-3 9월 9일자의 보고에 따르면, 텅충지역에는 30명 안팎의 위안부들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텅충은 연대단위임을 감안할 때 애초에 70~80명의 대규모 위안부를 수용할만한 건물이 존재하지 않았고, 버마지역에서 이런 대규모의 위안부를 고용한 위안소 시설은 없었다. 아사노 토요미(浅野豊美, Asano Toyomi)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중화민국 제198사단 제592단 단장 도달강(陶達綱)의 저서를 인용, 텅충 전투가 종료된 후 중국군에게 체포된 위안부는 모두 18명으로 대만인 3명, 조선인 2명,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을 제시하였다.
한편 쿤밍포로수용소의 미군 심문기록에 따르면, 한국인 포로 25명중 여성 23명은 이중 13명이 텅충지역에 주둔한 56사단 113연대 소속 위안부라는 것을 밝혔다. 텅충지역의 위안부 총수가 30명인데,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의 학살보고를 신뢰한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9월 13일 모두 전멸했어야 맞다. 그렇다면 종전후 생존한 위안부들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정진성, 강성현 등 한국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거도 없이 텅충지역의 위안부 총수를 70~80명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견된 이 동영상에 등장하는 사체들이 위안부 사체들인지, 조선인 사체인지 확언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아사노 토요미의 논문 ‘운남과 버마 최전선 종군위안부(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 에 따르면, 이 사체들은 9월 13일 일본군이 옥쇄했던 마지막 전투지가 아닌, 성 밖의 내봉산 기슭에서 발견된 사체들이다. 내봉산 지역의 방어전투는 한 달 반 정도 전에 있었던 일이며, 당시 후퇴할 때 수습하지 못하고 유기한 사체들이고, 사망한 지 오래되어 이미 부패가 심하게 진척된 상태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사체는 내봉산 지역에서 후퇴할 당시에 폭사하거나 자결한 사체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 사체들이 G-3 9월14일 작전일지상의 희생된 위안부들의 물증으로 본다는 것은 무리한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근거가 불확실한 위안부 ‘집단 학살론’은 국민들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유발케 하며, 따라서 반일감정을 선전 선동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잘못된 정치적 연구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2020.9.23.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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