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 단절 27년만에 28일 대사급 회담을 하는 란과 미국의 단교 계기는 지난 1979년 미 대사관 인질사건이다
이란은 192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팔레비 왕조의 37년에 걸친 장기 통치가 이뤄졌다.
1941년 즉위한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2세는 여성 참정권, 국영기업 민영화, 토지개혁 등 서구식 근대화인 이른 바 `백색운동'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시아파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큰 마찰을 빚었다.
이들 원리주의 세력에겐 이슬람의 전통과 교리를 버리고 친미ㆍ서구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의 근본은 흔드는 용납할 수 없는 통치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1977년 10월 팔레비 2세 암살기도 사건이 적발되면서 팔레비 2세는 비밀경찰 조직인 `사바크'를 창설, 반정부 세력은 물론 일반 국민의 자유까지 극도로 탄압한다.
미국은 친미적인 팔레비 왕조를 지원하는 데 이는 원유 대국인 이란을 석유의 안정적 공급처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팔레비 왕조를 떠나 1978년 1월 시아파 성지 콤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했으며 프랑스로 망명했던 호메이니가 귀국하면서 초당파적 반정부 전선이 형성됐다.
전국적 반정부 시위와 파업투쟁으로 견디지 못한 1979년 1월 팔레비 2세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그해 3월31일 세계에서 최초로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성공한다.
국민투표에서 98%의 지지율로 이슬람공화국을 설립한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조을 지원한 미국을 강하게 비난하며 팔레비 왕조를 깎아 내리면서 국민 단결을 도모, 혁명 후유증을 수습한다.
1979년 10월 이집트 도피 생활 중 객사한 팔레비 2세의 시신이 미국 뉴욕의 병원으로 이송되자 이란의 대학생들은 11월4일 미국 정부에 그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며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을 점거,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억류한다.
이에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란 원유 수입을 중지하는 강수를 뒀고 이란도 대미 수출을 금지하는 강경 대응을 하며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미 대사관 점거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장기화하자 미국은 1980년 4월7일 이란과 국교를 단절하고 4월25일 인질 구출작전을 폈지만 실패한다.
이 대사관 점거 사건은 1981년 1월 알제리의 중재로 미국 인질이 석방되면서 444일만에 끝난다.
이후 이란과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앙숙'으로 남게 된다.
카터 대통령이 1980년 말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선에서 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테헤란 미 대사관 점거 사건을 원만히 처리하지 못한 과오가 꼽힐 정도로 이는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다.
반미 노선을 주장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이란 대통령이 2005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은 그가 대학생 시절 미 대사관 점거사건에 참가했다는 근거가 불분명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두바이=연합뉴스) hskang@yna.co.kr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와 의견을 기다립니다.
전화 가능 시간 : 평일 10:00~18:00
(주말, 공휴일은 쉽니다)
Copyrights 2006 All Rights Reserved | 대표전화 : 02-720-8828 | FAX : 02-720-8838 | 대표이메일 : mediasilkhj@gmail.com | 사업장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4길 36, 2층 | 등록·발행연월일 2013년 3월 27일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08208 , 영등포, 라00483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58 | 사업자등록번호((주)미디어실크에이치제이) : 101-86-45323 | 대표이사 : 변희재 | 발행인 : 변희재 | 편집인 : 황의원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