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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논란⑤] 일본 군함도 주민들이 경험한 ‘판이한’ 사실들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写真記録> 筑豊・軍艦島 朝鮮人強制連行、その後)’의 오류 지적 (2)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의 명예회장 마츠모토 사카에 씨에 이어, 군함도(정식명칭 하시마섬)의 주민이었던 도민회 회원 10명도 일본 산업유산국민회의(産業遺産国民会議, https://www.gunkanjima-truth.com/l/ko-KR/index.html  이하 산유국)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진기록> 지쿠호・군함도 조선인 강제연행, 그후(<写真記録> 筑豊・軍艦島 朝鮮人強制連行、その後)’와 관련된 반박 증언들을 내놨다. 

도민회 회원은 타다 토모히로, 카지 히데오, 이노우에 히데시, 혼마 히로야스, 츠보우치 미츠오키, 코바야시 하루에, 마츠모토 사카에, 사사야마 이사무, 모리 야스히로, 아다치 키요코다. 다들 실명을 밝혔지만 이하에서는 주민 1, 주민 2, 주민 3 등으로 명시했다. (해당영상 바로가기 : “<사진기록>지쿠호 군함도 조선인 강제 연행, 그 후” 를 검증한다2)


1. -“평생 나오지 못한다”라는 표현에 대하여- 

“정면에는 통칭 지옥문이라고 불리는 노무담당자의 근무소가 있었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한 갱부들은, 평생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158 페이지)


주민1 증언 - “다리 정면에 지옥문이라 불리는 담당자 근무소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주민2 증언 - “하시마에 상륙하자마자 터널을 통과해서 숙소인 9층 건물의 가장 아래까지 내려가는 거죠. 1층이라고 해도 반지하이니까 거의 감금되는 거나 마찬가지지. 이 사람들이 증언헀다는 내용을 읽어 봤는데 낙하하듯이 지하 갱내로 떨어진다는 표현이 있어요. 그건 그 사람들이 처음이라 조선에서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광경에 깜짝 놀란거지, 그래서 그렇게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민3 증언 - “예를 들어 빚을 많이 진 사람이 나가사키로 도망가서 결국 빚을 뗴어먹거나 했지. 그러니 무허가로 섬을 못나가게 했어요. 본인도 마찬가지로 허가가 없으면 섬을 못나가. 결국 그런 얘기지. ‘타항 증명’이라고하는 허가서를 받아야 했어요. 나가사키로 나갈 수 있는 ‘타항 증명’을 해안에서 제시해야 돼요.”



2. -총에 의한 진압과 감시에 관하여- 

“총을 든 오무라연대가 경비를 했는데 회사가 소유한 아사가오마루라는 배에서 정연하게 하선했다고 한다. 중국인에 대한 취급은 특히 엄격했다. 조선인이 말을 걸면 총을 든 노무담당자가 ‘가까이 가지 마’라며 조선인과 중국인을 둘 다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162 페이지)

“한 명은 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한 명은 목도를 들고 머리에 장착한 캡랩프의 빛이 교차했다. 하시마 탄광의 폭동진압을 위해 출동한 오무라 연대와 격심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한다.” (187~188 페이지)


주민1 증언 - “총이라고요? 그런건 안가지고 있었는데. 그런건 없었어요. 내가 6학년 때까지 있었는데, 그런건 보질 못했어요. 전혀 기억이 없네요.”

주민2 증언 - “진짜 군인은 2명 정도로, 2명. 그것도 헌병이에요. 감시를 한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주민3 증언 - “하시마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경찰이 말할 정도였거든. 총은 무슨...”

주민4 증언 - “하시마뿐만 아니라, 경찰이 총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건 당시의 일본 형편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3. -탄갱 내의 노동에 대해서- 

“높이 1미터의 탄층에서 조선인 광부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곡괭이로 파고 있었다.”(192 페이지) 

“요시다 함바 담당의 채굴장을 찾은 ‘유’는 놀랐다. 2척층이라고 불리는 탄층은 약 60센티, 짧은 곡괭이로 누워서 석탄을 캤다. 캡램프의 코드가 목과 발에 말려있고, 머리가 천장의 암반에 닿았다. 단 10분 채굴했는데도 하반신이 저렸다.”(185 페이지)


주민1 증언 - “누워서 캐거나하는 그런 가혹한 곳은 없었는데.”


주민2 증언 - “마을 한가운데를 파는데 에어툴을 사용했어요. 결국 전기를 못쓰니까 강풍으로 석탄을 떨어뜨리지. 탄층에서 튀어나온 석탄을 캘 때나 곡괭이로 캤지, 갱목을 세우거나 수리할 때 말고는 곡괭이를 쓸 일이 없어요. 곡괭이로 채굴은 절대로 안했어.”


주민3 증언- “생존자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요. 전쟁 중에 조선인이 갱내에서 어떻게 일을 했는지, 숙련공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조선인을 쓰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하더군요. 왜냐면 막장이 드러날때까지 막무가내로 석탄을 캐버리니까 조선인한테는 그런 일을 안 맡겼다고 했어요. 뒤쪽의 안전한 곳에서 탄차를 밀거나 일본인이 캔 석탄을 탄차로 여기저기 운반하는 후방 쪽 일을 맡겼다고해요.”




4. -조선인 노동자의 차별에 대해서- 

“운명 공동체로서 일본인끼리 연대감은 생겨났으나, 조선인, 중국인에 대한 차별은 한층 심해졌다.”(162 페이지)


주민1 증언 - “조선인을 딱히 특별 취급을 한적도 없고 학대하는 걸 본 적도 없어요. 조선인도 영화보러 오고 그랬어요. 영화관이 있었는데 싸게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주민2 증언 - “종전이 되고 나서 각자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조선인인걸 알았을 정도로 국적에 개의치 않고 사이좋게 지냈어요.”


주민3 증언 - “일본인 청년들이 모두 군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기술자가 없어진 거에요. 그래서 갱 밖에 있었던 소위 공장의 반장 역할인데, ‘보신’이라고하는 통솔자를 조선인이 맡게 됐어요. 일본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기 공장의 공작과에 들어가면 조선인이 반장이었던 거지. 즉 일본인이 조선인한테서 기술을 배웠다고.”


주민4 증언 -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이 씨의 형이 병원 통역이었어요. 일본어와 조선어 통역을 하는 심부름꾼인데, 젊은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어요. 그런 차별이니 뭐니 없었어요. 하시마는 좋은 곳이었어요.”


5.- 조선인 노동자 학대에 대해서- 

“노무담당자는 조선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하등하다고 생각해 명령만 하며 윽박질렀다. 그리고 말투와 태도가 나쁘다며 때렸다.”(167 페이지) 

“일본인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특히 조선인은 감기에 걸려도 병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외근 노무담당자에게 심하게 맞았다. 사무실의 전봇대에 전실을 묶고 앞을 지나는 갱부들에게 몽둥이로 때리게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66 페이지)


주민1 증언 - “학대라고 하기에는 좀, 당시에 일을 제대로 안하고 자리를 벗어난 사람이 있거나 하면 뺨을 서너대 때리거나 물을 끼얹거나 하는 그 정도밖에 기억이 없어요. 우리 아버지한테 들었죠. 몽둥이로 때리거나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주민2 증언 - “학대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 짓을 하면 바로 소문이 나죠. 작은 섬이니까. 갱내에서도 학대라고 할 만한 행위는 없었어요. 그런짓을 하면 소문이 쫙 퍼져서 섬 주민들이 모두 알게 되는데,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6. -조선인 노무담당자에 대해서- 

“하시마 탄광의 외근 노무담당자는 모두 조선인이었으며 동포에게는 특히 엄격했다. 조선인 광부를 몇 명 갱에 넣는가에 따라 실력을 평가 받았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강제로 갱에 넣었다. 그것이 노무담당자의 실력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195 페이지)

주민1 증언 - “이 9층 건물 아래쪽에 한국인 미혼 남성이 있었어요. 이와모토 씨라고 하는데 실제 이름은 이 씨야. 일본성으로 개명은 한 이와모토 씨가 근로과에서 근무를 했지. 근로과가 뭐냐면 외근이라고 해서 감독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검도가 4단이어서 검도를 하곤 했지. 형제도 3명인가 4명인가. 그 사람이 숙소장을 했어요. 다른 조선인은 일본어를 못하니까, 일본어가 되는 이 씨가 숙소 책임자를 맡았지.”

주민2 증언 - “조선인을 관리했던 사람중에 안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랑 친했어요. 내 기억으로는 우리 집에 바둑을 두러 몇 번 왔었어요. 안도 씨는 조선인이 살고 있는 기숙사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조선인만 살고 있었어요. 그곳의 대장이라할까, 경영자였어요.”

주민3 증언 -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한테는 엄하게 대했지. 그런 벌을 주는 사람은 모두 조선인이었어. 일본인은 거의 없었어요. 가끔 죽도를 들고 설교하는 모습을 몇 번 보기는 했어도 학대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에요.”

7. -식량 사정에 대해서- 

“조선인 기숙사에 배급된 식량의 절반을 노무담당자가 빼돌려 집에 가지고 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반밖에 먹지 못했다. 힘든 노동을 견뎌야 하는 조선인 갱부는 식량마저 노무담당자에게 빼앗겼다.”(169 페이지) 

“도착한 날의 식사를 입에 넣은 순간 다들 얼굴이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탈지 대두가 8할, 현미가 2할, 이상한 냄새가 나고 푸슬푸슬해서 젓가락에 집히지도 않았다. 탈지 대두는 몸에 맞지 않았는지 먹은 후부터 복통이 일어나 화장실 앞에 긴 행렬이 생겼다.”(192 페이지)


주민1 증언 - “우리도 콩기름을 짜낸 찌꺼기를 먹었어요. 그거밖에 배급이 안나오니까. 조선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도 설사하고 그랬어요. 일본인만 특별히 쌀을 배급받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 탈지 대두라도 먹으면 다행이었지. 식량 사정은 모두 똑같았어요.”

주민2 증언 - “탈지 대두라고해서 대두에서 기름을 짜낸 찌꺼기지. 그거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설사하고 그랬어.”


주민3 증언 - “한국인도 일본인도 식량 배급은 평등했어요.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경험을 했겠지만 배급 식량이라는게 배불리 먹을만큼 안나와요. 더구나 갱내에서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이 아침에 목욕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에 콩비지가 이렇게 쌓여있는 걸 발견하죠. 그 사람들이 그걸 좀 나눠 달라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돈은 필요 없으니까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어요. 이후에 종전이 되고 다들 본국으로 돌아가잖아요. 귀국하면서 사과 상자 가득히... 지금은 모르겠는데 당시 조선의 사과는 작았어요. 나무로 된 사과 상자인데 조선인을 본국에 송환하는 사람 편에 사과를 보내왔어. 그동안 신세졌다고 우리 아버지한테 전해달라면서. 그런일이 있었어요. 깜짝 놀랐지.”



8. -탈주에 대해서- 

“노예와 같은 노동에 견디지 못하고 최후 수단으로 섬으로부터의 도주를 시도했다. 바다에 던진 갱목을 부여잡고 바다 건너 노모반도로 향하지만, 격류에 휩쓸려 대부분 힘이 빠져 익사했다. 또는 탄광 측의 노무담당자 및 경찰에 체포되어 섬으로 끌려온 후, 일벌백계로서 고문을 당했다. 일본인의 경우는 자살(목을 매어)이 많았는데 조선인은 탈주를 시도하여 익사했다.” (174 페이지) 

“이 섬에 와서 깨달은 것은 탈주는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탈주에 성공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체포되면 노무담당자에게 고문을 당해, 시체는 바다로 던져질 뿐이었다.”(185 페이지) 

“탄광 측의 광부 탈주 대책은 철저했다. 하시마 주위를 모터보트가 돌았고 공습이 없는 야간은 서치라이트로 제방을 비추었다.”(186 페이지)


주민1 증언 - “일본인 중에도 몇 명 헤엄쳐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었어.”


주민2 증언 - “조선인 3명이 탈주에 성공해서 헤엄쳐서 다카하마에 도착했다고. 거기까진 나도 인정해요. 다카하마라고하는 농촌에 도착해서 빨아서 널려있던 작업복과 작업화를 몰래 가져갔어요. 그리고 헤엄을 쳤으니 배도 고팠겠지. 토마토 같은 농작물을 몰래 훔쳐 먹었다고 해요. 조선인이 그런 범죄를 일으켰어도 다카하마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를 안했어요. 따뜻하게 감싸줬다고 표현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9. -장례에 대해서- 

“동료가 사고사를 당해 화장이 끝나면 감시하러 온 노무담당자의 명령으로 유골을 삽으로 퍼서 폐갱에 던져 넣었다.”(158 페이지)


주민1 증언 - “아마도 1938년인데 내가 소학교 1학년인가 그랬어요. 중일 전쟁이 일어나 아버지는 전쟁에 끌려가고 그 당시 여동생이 있고 그 밑에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남동생이 3살 때 죽었어요. 장례식은 각자 집에서 하는데 단, 나카노시마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어요. 땔감으로 갱목을 같이 가져갔어요. 해안가에서 배에 실은 다음에 몇몇 정해진 사람만 싣고 나카노시마로 향해요. 그리고 섬에 올라서 화장장으로 갑니다. 화장장에 큰 땔감을 쫙 놓은 다음에, 그 위에 시체를 놓고 다시 그 위에 땔감을 놓아요. 자잘한 땔감을 놓은 후에 태우는 거지. 지금처럼 석유나 전기가 아니니까. 불이 붙어 타기 시작하면 집에 갑니다. 다음날, 그런데 뼈를 전부 수거를 못하고 뼈가 남게 돼요. 그래서 화장장에서 떨어진 곳에 구멍이 있었어요. 뼈 항아리에 다 안들어가니까 보통 다들 뼈가 남아요. 그러면 남은 뼈를 모두 그 구멍에 매장하고 오는 거지.”


주민2 증언 - “일본식이죠. 우리 아버지는 불교 선종이었는데, 선종의 불경을 읊었어요. 조선인에게도 선종의 불경을 읊었습니다. 장례행렬의 선두에 대신 곡을 하는 여자를 세웠어요. 절에서 나와서 화장장까지 가는 동안 돈을 받고 대신 곡하는 거죠. 그 곡하는 조선인 여자가 선두에 섰어요. 화장하러 갈 때 뼈 항아리를 같이 가져가요. 가져가서 불이 붙은 걸 확인하고 일단 집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 다시 갑니다. 묘 자체가 아예 없었어요. 화장한 뼈를 절의 납골당에 모시거나 가족들이 집에 가져갔어요. 폐광이 되고 나서는 납골을 나가사키의 어느 절로 옮겼을 겁니다. 유골에 계명은 안 적혀 있었지만 위패는 쭉 있었다고 해요.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은 절에 계속 놓여 있었어요. 그것을 폐광된 후에 나가사키의 어느 절에 가져갔는지는 나는 몰라요. 하지만 절대로 함부로 다루진 않았어요.”


주민3 증언 - “죽은 조선인의 유골도 절에 모셨다고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다카시마에 살았던 여동생 친구에게 그 후를 물어봤더니, 다카시마에 공양탑을 세워 공양을 했대요. 마지막까지 혼을 기렸어요.”


주민4 증언 - “센닌즈카(무연고자 묘지)‘라고 있어요. 다카시마에 간 적이 있는데 섬 위쪽에 큰 무덤이 있어서, 뭔지 몰라서 물어봤더니 센닌즈카(무연고자 묘지)‘라고 하더군요.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 중에 유족이 없는 사람들의 유골을 묻은 무덤이라고. 일본인 무덤이냐고 물으니까, 일본인도 한국인도 모두 여기에 묻혀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차별 같은건 없었어요.”


주민5 증언 - “유골을 어떻게 할 것인지 회사 측과 상의를 했어요. 당시에 절에 몇 구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다카시마에 가져가서 정중하게 매장했습니다. 그중에는 조선인의 유골도 한 구 있었고요. 아마도 유골 수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금 있었어요. 그래서 정중하게 다카시마에 매장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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