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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⑪] 한 사람의 일생을 지워버린 ‘위안부’라는 이름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의 회고 소개… 영민하고 용감한 개인적 삶을 살아온 그녀야말로 ‘반일 종족주의’의 희생자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은 위안부였던 故 문옥주 씨(1924년생, 1996년 사망)의 회고를 바탕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11회차 동영상 강의(‘방패사단의 위안부 문옥주’, 5월 5일)를 구성했다.

문옥주 씨는 사망하기 3년전, 일본의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라는 작가에게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리카와 마치코는 1996년 일본에서 이를 ‘문옥주 바마 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었나’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2005년에 우리나라에서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로 번역 출간됐다. 


영민하고 적극적인 소녀 문옥주

이 교장은 이 책을 토대로 문 씨의 위안부 생활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문옥주 씨는 7~8세 나이에 동네 이웃집에 동냥을 하러 갈 정도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살았다. 그에게는 3명의 남매가 있었는데, 나이가 12살 위인 그의 언니는 민며느리로 팔려가기도 했다. 

학교에도 다니지 못했던 문 씨는 기생이 되어서 노래와 춤을 하면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에 대구 달성에 있는 기생 양성소 권번에 나가 창밖에서 노래와 춤을 배웠다.

그가 12살 때, 일본 큐슈에서 요리집을 하는 조선인 부부가 찾아와 그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손이 부족하니 와서 아이를 봐주고 일도 거들어주면, 학교를 보내주고 좋은 곳으로 시집도 보내준다는 꾀임이었다. 

문옥주 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를 말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영훈 교장은 “아마도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큰 딸을 멀리 내보냈듯, 어머니는 작은 딸도 아마 약간의 돈을 받고 데려가게 했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고 첨언했다. 문 씨는 스스로도 가난한 집을 탈출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마음이 부풀어 일본으로 떠났다고 회고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문 씨가 일했던 요리집은 조선인나 일본인 광부를 유객으로 받아 음식을 팔고 매춘을 하는 업소였다. 업소에는 조선각지에서 온 여러 여인들이 있었다. 문 씨는 5~6개월간 생활하며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자신이 그곳의 여인들처럼 다른 곳에 팔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요리옥을 탈출해 본가로 돌아온다. 

이에 대해 이 교장은 “요리점을 도망쳐 나와 연락선을 타는 과정을 읽어보면 나이 13살의 소녀에 불과하지만, 순간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보통이 아닌, 매우 영민하고 적극적인 성품의 소녀였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녀가 갔던 만주 위안소는 대구 사람이 경영하던 곳

이후 문옥주 씨는 정식 기생은 아니지만 기생의 신분으로 술자리에 나가, 노래하고 춤을 추는 생활을 했다. 문 씨는 그 수입으로 어머니, 오빠, 남동생을 부양했다. 

그러다 1940년 가을에 어느날 만주 동안성(東安省)에 위치한 한 일본군 위안소로 가게 됐다. 문 씨는 위안소로 가게되는 경로와 관련,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오는 길에 일본인 헌병에게 끌려가 헌병의 감시를 받으며 대구역에서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동안동에 도착했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해서도 이영훈 교장은 “이건 그대로 믿기가 곤란하다. 도착한 곳의 위안소는 대구 사람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도 대구 사람이었다. 20명이 있었는데, 그 모두가 대구 사람이었다”며 “이를 보면 문옥주가 길거리에서 일본 헌병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위안부들의 유입 경로에 대해 “대구와 선을 댄 창기, 작부의 주선업이 1939년 이래 활발해진 매춘업의 만주 진출에 따라 대구의 소녀들을 그곳으로 송출했다”며 “그러한 주선업의 네트워크에 기생으로 활동하던 문옥주가 채용됐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사실 (문 씨는) 17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기생으로 활동할 나이는 아니었다”며 “1940년에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나이가 됐고, 17세를 넘겨 그곳에 갈 수 있었던 자격이 되자 대구에서 활동하던 주선업의 촉수가 자연스럽게 문옥주에 뻗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부연했다.


문옥주에서 후미와라 요시코로…

문 씨는 1년 뒤에 친구들과 위안소를 탈출해 다시 대구에 돌아왔다. 자신을 특별히 귀여워한 헌병에게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구실을 대 여행증명서를 받았던 것이다. 대구에 온 문옥주 씨는 만주에서 벌어온 돈이 바닥을 보이자 다시 기생 일에 나섰다. 

이 교장은 “문 씨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이미 술마시고 노래하고 남자와 성상대를 하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했다”며 “그는 이번에는 권번에 정식으로 입학해 스스로 뛰어난 학습능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문 씨는 기생수업을 하면서도 술자리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그때 남쪽 나라로 가자는 유혹이 들어왔다. 문옥주 씨는 어머니에게 말하지도 않고 만주 동안성에서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기화, 히토메라는 자매와 함께부산항으로 갔다. 

문 씨는 여관에 들어서니 동안성에서 위안부로 같이 생활한 대구의 다른 여성들, 하후미, 카나리아, 키미코, 하츠코, 히토미, 기와, 아카미, 히로코 등도 모두 있어서 놀랐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이름은 일본식 기생 예명으로, 위안부도 이와 같은 예명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문 씨는 1942년 7월 10일 부산항에서 군용화물선을 타고 떠났다. 사이공, 싱가포르를 거쳐 2개월 뒤, 버마(미얀마)의 랑군에 도착했다. 일행이 맨 먼저 간 곳은 만달레이라는 곳이다. 방패사단에 속한 위안소였다. 여기에서부터 문옥주 씨는 후미와라 요시코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 교장은 “위안부로 일할 때 문옥주는 ‘나는  어떤 일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같이 간 다른 여자애들은 위안부가 된다는데 기겁을 하고 울면서 항의했다’고 했다”고 부연했다. 즉 미군의 위안부 심문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버마에 온 조선인의 일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즉 매춘업에 종사하던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상당수는 가난한 집안의 출신으로 주선업자들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온 여인들이었다는 게 이영훈 교장의 설명이다.

생사 넘나드는 전장에서 병사들을 달래주던 문옥주

문옥주 씨는 만달레이 위안소의 이용요금과 관련, ‘병사는 1원 50전, 하사관은 2원, 위관급 장교는 2원 50전, 좌관급 장교는 3원’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위안부 자료집에 나와있는 만달레이 위안소의 요금 규정을 살펴보면, 문 씨의 증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게 이영훈 교장의 설명이다. 이 교장은 “문옥주라는 여인이 보통의 기억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대단히 영민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게 된다”고 부연했다. 

문 씨는 자신이 하루에 30~40원, 일요일에 70~80원을 벌었다고도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이영훈 교장은 “요금만으로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없었다”며 “그것은 문옥주를 좋아한 (군인들이), 문옥주의 위안에 넉넉히 팁을 줬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했다. 이어 “문옥주는 ‘나는 군인들이 즐겁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했다”며 “‘나를 찾아온 병사들이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면서 울 때, 그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불러줬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영훈 교장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 내몰린 병사들이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면서 울 때, 문옥주는 그들을 달래고 노래를 불러줬다고 했다”며 “그 결과 병사들 사이에서 나는 영리하고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해주는 위안부로 곧 유명해졌다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문옥주의 회고록에는 일본인 작가에게 회고담을 들려줄때까지도 30곡의 일본 노래를 가사 그대로 외우고 있음이 잘 드러나있다”며 “그 노래들은 일본 병사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전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슬픔, 사랑과 추억이 담긴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노래였다”고 강조했다.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의 가슴아픈 사랑이야기

당시 위안부들에겐 대개 일본 병사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진해진다. 문 씨에게도 사랑하는 일본인 병사가 생겼는데, 이름은 야마다 이치로 상등병이었다. 문 씨는 이치로에 대해 순수하고 세련됐고 친절했으며 익살스러웠고, 똑똑했다고 기억했다. 

문 씨는 야마다 이치로가 찾아오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며 위안부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회고록에는 이치로가 문 씨를 위해 지은 일본식의 단가 10수가 실려있다. 

“하나 해요, 사람도 좋아 좋아 수선의 꽃보다 아름다운 요시코 요시코여 둘 해요,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려니 세상이 방해해서 걸어갈 수 없어 요시코여 셋 해요, 몸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반듯해 내가 반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요시코여 넷 해요, 밤 순찰 끝나면 배웅하지 문까지 말이야 요시코여”


이에 대해 이 교장은 “전장에서 한 여인을 사랑한 어느 병사의 진심이 담긴 노래”라며 “그러나 이치로와의 사랑도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문옥주 씨가 위안소에서 생활한지 7~8개월 뒤, 문 씨가 속한 위안대는 아키압이라는 곳으로 이동하라는 명을 받았다. 아키압은 인도 전선과 마주한 최전방으로, 이들은 아키압에 가기위해 험준한 산맥을 넘었다. 

도보여행 도중, 대구에서부터 문 씨와 동행했던 한 여성은 결핵으로 도중에 병사했다. 게다가 어느 위안부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 씨가 아키압에 도착한 뒤로는 이치로는 더 이상 찾아오지 못했다. 한 병사와 위안부의 사랑이 슬픈 죽음으로 종말을 고했던 것이다. 

이 교장은 “문옥주는 1993년 당시에도 ‘나는 지금도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 않아 바보야’라며 울던 야마토 이치로의 목소리와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다”고 전했다.


죽음의 배를 피했던 문옥주, 다시 위안소 생활로 돌아가

전장에서 일본군이 괴멸되기 시작됐다. 문 씨가 있던 아키압에는 연일 영국 공군의 폭격이 떨어졌다. 문옥주 일행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랑군으로 갔다. 

랑군에는 ‘랑군회관’이라는 위안소가 있었고 30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 주인은 45세의 조선인이었다. 

이영훈 교장은 “(문 씨가) 랑군회관에서는 인기있는 위안부로 장교클럽에 자주 불려갔으며 팁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며 “문옥주는 번 돈을 저금했다. 그녀는 ‘돈을 열심히 모으는 것만이 살아가는 의미였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장은 문옥주 씨의 군사우편 저금 원장을 통해 저축액을 밝혔다. 문 씨는 1943년 8월부터 시작해 1945년 9월 29일까지 총 2만6551엔(당시 3만엔은 현재 가치로 일본돈 약 1억 3606만엔, 한국돈으로 약 15억원) 이상을 저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문 씨는) 대구에 있는 어머니와 오빠에게 5000엔을 송금했고, 이외의 개인적으로 용돈을 쓴 것도 있다”며 “랑군에서 외출을 나가 악어가죽 가방과 고급의 녹색 레인코트, 다이아몬드를 사기도 했다고 했다”고 말했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 문 씨는 대구에서 함께 간 6명의 위안부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문 씨는 자신이 폐병에 걸렸다는 가짜 진단서를 발급받아 귀국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이 교장은 “반드시 그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버마에 도착한 뒤 2년 정도가 되어서 그들은 귀국을 승낙받을 수 있는 요건이 됐지 않았나 싶다”며 “때문에 6명이 한꺼번에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문옥주 씨는 랑군에서 열차를 타고 사이공까지 갔다. 사이공 항구에 도착해선 다른 곳에서 온 위안부도 50명정도 있었다고 문 씨는 회상했다. 그런데 문 씨는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 귀국선을 타기 전날, 자신의 꿈에 죽은 아버지가 나타나 승선을 만류해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는 것.

문옥주 씨가 가지 않겠다고 하자, 기화와 히토미를 제외한 다른 3명의 위안부들은 이곳에 남았다. 기화, 히토미가 탔던 배는 미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기화는 사망하고 히토미만 구출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문옥주와 3명의 위안부는 죽음의 배를 타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다시 랑군회관으로 돌아갔다. 랑군회관에서는 그들을 환영했다. 이 교장은 “이 사건이 위안부의 성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하다”며 “다시 말해 어느정도 제약이 있긴 했지만, 위안부로서의 직업생활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일본군 병사 죽이고도 무죄받았다?

이영훈 교장은 “랑군회관 생활에서 문옥주는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건을 벌였다”고 전했다.

회고에 따르면 어느날 한 한 일본군 병사가 술에 취해 문 씨를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 씨가 이에 항의하자 병사는 칼을 들고 문 씨를 협박을 했다. 하지만 문 씨는 물러서지 않고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병사가 칼을 떨어뜨리자 칼을 빼앗아 병사의 가슴을 찔러 죽였다. 

문옥주 씨는 자신이 군새재판에 회부됐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문 씨는 우리도 일본인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천황폐하가 내린 칼을 위안부를 향해 겨눈 것은 잘한 일인가라고 항의했고 재판관이 그에 감복했다고 회고했다.  

이 교장은 “이 사실을 두고 일본의 군사 전문가들은, 그러한 해당 부대에 그러한 재판 기록이 없고, 그런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믿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인다”며 “저도 문옥주의 회고 그대로를 믿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하지만 행패부리는 일본 병사와 다투었고 중한 상처를 입혔는데 해당 부대의 지휘관의 재량으로 없었던 일로 처리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추측했다.

이어 “이 사실도 위안부의 처지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어떤 의미에서 위안부와 군인들은 최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처지였다. 그녀들은 정식 군속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현실적으로 무권리의 노예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전쟁이 끝나고 문옥주 일행은 태국 방콕에서 7~8개월간 일본인과 분리된 조선인 수용소에 있다가 1946년 봄, 귀국선을 타고 인천으로 와서 대구 본가로 돌아갔다. 4년만의 귀향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문 씨를 붙들고 울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22살 때 일이었다. 


위안부 생활 이후의 삶

이영훈 교장은 문옥주 씨의 위안소 생활 이후의 행적들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문 씨는 50세까지 28년간 대구와 부산의 요리점에서 1급 기생으로 활동했다. 미모와 노래, 춤 솜씨, 활발한 성격, 일본어를 하고 노래를 하는 것이 일본인 접객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50세 이후에도 한동안 대구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문옥주 씨는 열심히 돈을 벌어 오빠와 남동생의 집을 사주기도 했다. 그 사이 문 씨는 어떤 남자를 만나 12년간 동거를 했는데, 나중에 그 남자는 죽었다. 문 씨는 그 남자의 세 아이를 모두 데려다 키웠다. 문 씨는 이 아이들이 나중에 결혼하고 직장도 잡고 다들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이후 문 씨는 본처가 있는 다른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나중에는 본처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본처가 아이를 출산하자 문 씨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키우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문제였다. 아이가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사업도 실패하고 이혼도 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뒤를 봐주던 문 씨는 드디어 자신의 집마저 처분해야할 궁지에 몰렸다고 했다. 

문 씨는 이 아이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면서 대단히 고단한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0대 후반이었다. 바로 그 즈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터졌다. 1990년 김학순 씨가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공개한 것이다. 

뒤이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이른바 정대협이라는 단체는 방송을 통해 전국 각지에 광고를 했다. ‘정신대 할머니들 세상 밖으로 나와주세요. 일본정부에 대해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합시다’라는 취지의 광고였다. 

‘문옥주’ 아닌 ‘위안부’라는 이름

이영훈 교장은 “당시 문 씨가 30년이상 알고 지내던 이용낙이라는 퇴계 이황 가문의 남자가 문 씨를 불러내 ’난 당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생각한다. 사실을 밝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다. 스스로 전화하기 어려우면 내가 대신 걸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 말을 듣고난 문 씨는 부끄러워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고 했다”며 “문 씨가 마지못해 승낙하자 이용낙 씨는 문 씨가 보는 앞에서 정대협에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해서 문 씨는 2번째로 원 위안부였음을 고백하는 여인이됐다”고 말했다.

이 교장은 “문 씨가 방송에 나가자 많은 친지들이 그에게 전화를 해왔다”며 “’언니가 정신대 할머니였다고 왜 이름을 밝혔어 돈 때문에 신고했지? 보상금보다는 입다물고 있는 편이 더 나았어 언니와 나는 더 이상 만나지 않을래’라며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이 그를 떠나갔다”고 전했다.

그는 “문 씨는 2년뒤 귀국선이 침몰했을 때 구출됐던 히토미를 찾아간다”며 “히토미의 여동생은 1993년 당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언니 왜 지금에 와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밝혀요. 몇 천 만원 받겠다고 해도 그런 일은 할게 못돼요’라며 문옥주를 구박했다”고 말했다. 

또 “카나리아, 히로코 등도 귀국후 20년까지만 해도 서로 알고 지냈는데 더 이상 소식이 통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많은 여인들이 적어도 당시까지 생존한 수천 명의 여인들이 숨을 죽이며 그들을 과거를 숨겼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딸, 손자, 친구를 잃을 두려움에서였다”고 강조했다.

이영훈 교장은 “문옥주로 하여금 과거를 폭로하게 만든 이용낙, 정신대협의회는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은 당신 개인의 수치도 집안의 수치도, 동네의 수치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였다. 그것을 폭로함으로써 부끄러운 과거로부터 해방되고 한 인간으로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할수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위안부들의 커밍아웃을 촉구했다”며 “과연 이게 옳은 생각이었을까. 저는 반드시 그 생각에 동의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이 교장은 “당시 문옥주 씨는 고달픈 처지였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했고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타고 영구 임대 아파트와 생활비도 받았다”며 “그러나 그 일로 그녀의 전 인생은 지워졌다. 불과 3년의 위안부 생활이 그녀의 전 인생을 덮어버리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그녀는 죽는 날까지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다”

이영훈 교장은 “버마에서 돌아온 뒤 45년간 그녀는 치열하게 그녀의 인생을 살았다. 고달프지만 보람찬 인생이다.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며 “그녀의 친구, 친지, 그리고 그가 키운 네 명의 자식들 모두 그녀로부터 멀어졌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제도는 당시의 문화이기도 했던 공창제라는 제도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을 전쟁범죄로 단순화하고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였다”며 “이용낙과 같은 양반 신분의 후예들이 주체가 된 민족주의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왕조 500년간 관비, 기생의 성을 약취한 양반 나부랭이의 민족주의였다”며 “그 민족주의가 기생의 계보를 잇는 문옥주를 다시 동원하고 발가벗긴 것”이라고 질타했다. 아울러 “정대협이라는 사회단체는 자기들의 공명심을 충족하기 위해, 직업적 일거리를 개발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파탄낼 요량으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원 위안부들을 앞세워 국내에 걸쳐 시위를 벌이고 일본 정부를 공격했다"고 꼬집었다.

이 교장은 “그들은 1996년 문옥주가 사망하자 그녀를 민족의 성녀로 부추기면서 해마다 추모제를 거행했다”며 “과연 문옥주는 민족의 성녀였던가. 자신의 인생과 가족을 사랑했던 그녀는 비천했던 집안이 자신에게 강요한 기생이란 직업에 충실했고, 나아가 남의 자식을 네명이나 키웠던 성실하고 영민하며 용감한 여성이었다. 민족의 성녀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성녀)은 정치가들이 즐겨붙인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며 “그녀는 죽기전 자신을 찾아온 일본작가에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위안부 생활했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어. 대구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가족을 얼마나 보살폈는데, 필사적으로 돈을 모았어. 남자들은 왜 그런지 나를 좋아했어. 사람들은 말했어. '당신은 눈이 동그란 것이 아주 예뻐'. 내목소리는 맑고 예뻐서 높은음도 잘 낼 수 있었어. 내 노래는 일본 군인들을 즐겁게 했어. 나는 군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어. 야마다 이치로는 좋은 사람이었어. 그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많이 있었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었어.”


이영훈 교장은 “그녀는 죽는 날까지 결코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다”며 “이용낙 같은 양반 나부랭이들의, 정대협과 같은 직업적 운동가들이 품은 반일 종족주의의 적대 감정과는 거리가 먼 정신세계였다”고 강의를 맺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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