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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⑦] 1300원에 딸을 팔던 조선의 아버지들

'딸을 팔아먹는 것쯤은 동양천지에서는 그리 신기할 것이 아니다'

이전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⑥] 조선에선 매춘업 성립 불가능… ‘성(性) 지배’ 수준에 머물러



“대구에서 39세 된 아비가 15세 된 딸을 160원에 팔아먹은 것을 딸의 동창생들이 구하려고 몸값을 모은다 한다. 딸을 팔아먹는 것쯤은 동양천지에서는 그리 신기할 것이 아니다. (중략) 혹은 남의 딸과 아내를 꾀어 다 팔아먹기, 혹은 제 아내를 팔아먹는 일도 있다. (중략) 팔아서 먹는 놈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사다가 먹는 놈도 있다. 이른바 예기(藝妓), 창기(娼妓), 작부(酌婦), 첩(妾)같은 것이다” (-1934년 이광수의 글 “팔려가는 딸들”-)


“경성부내 사간정 14번지 김ㅊ(22)이라는 여자는 27일 종로서에 출두하여 ‘차라리 기생노롯은 할지언정 유곽의 창기 노릇은 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눈물을 지으며 호소하였다. (중략) 그 부모가 쪼들리는 생활난에 견디다 못하여 10여일 전에 만주국 도문에서 유곽을 경영하는 신XX에게 1300원을 받고 초향을 창기로 팔기로 계약을 했는데, 유곽 주인은 매일 와서 유곽으로 가자고 조르나 김초향은 노래와 웃음을 파는 기생생활은 할지언정 고기까지 파는 창기노릇은 할 수 없으니 경찰서에서 좋도록 처리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1937년 3월 28일자 매일신보 기사, ‘돈에 눈 어두운 부모, 죽기보다 싫다는 딸은 팔려고, 딸은 경찰을 찾아 읍소’-)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일제하 공창제는 인신매매를 통해 성을 공급하는 성매매 시장이었다다며 호주제(戶主制)와 하층 계층의 취약한 가족윤리가 공창제를 성립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7회차 동영상 강의 '인신매매, 공창으로의 길'(44)에서 조선 공창제의 성립 배경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성병 감염률, 일제시대에 5%vs 1950년대에 25~30%

 

우선 이영훈 교장은 당시 조선 공창업의 실태를 살폈다대좌부창기취체규칙에 따르면 공창업에 종사했던 여성들은 창기, 작부, 예기 세 분류로 나뉘었다


창기는 성매매만을 전업으로 하는 여성을, 작부는 요리옥(料理屋, 방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나 음식점 객석에 앉아 손님을 접대하는 여성을, 예기는 춤과 노래 등의 예능을 파는 여성을 뜻했다창기와 작부에게는 예능을 제공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예기와 작부의 경우원칙적으론 성매매가 금지됐지만손님의 요구에 따라 성매매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기에는 과거 조선의 기생들이 포함됐다. 기생제는 1910년 대한제국의 패망과 더불어 해체됐는데 이후 기생은 123패로 분화됐다. 1패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춤과 노래를 하지만 성매매는 하지 않는 기생, 2패는 예능의 수준이 낮고 성매매도 겸업하는 기생, 3패는 기생을 자처한 민간의 매춘부였다.

 

공창제 초창기에 관련업 종사자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1916년을 기준으로 조선인은 2000명 이하였던 데에 비해 일본인은 4000명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점차 조선인 수가 늘어나면서 1929년에 일본인의 숫자를 넘어섰다. 일본인은 공창제가 끝날때까지 4000명 수준으로 종사자들의 숫자가 정체됐던 것에 반해, 조선인들은 1939년에 9433명으로 크게 증가했다이 교수는 이처럼 조선인들의 숫자가 늘어난 이유에 대해 “1930년대에 조선인도 참여하는 대중적 매춘사회가 활짝 열리기 시작하면서, 전통 기생들이 예기나 작부로 모습을 바꿔 널리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창기예기작부와 포주는 법적 형식상 평등한 지위로서양자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상업적 계약 관계였다는게 이 교장의 해석이다대좌부창기취체규칙 제 7조에는 대좌부 영업주는 창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창기 의사에 반하여 계약의 변경 또는 포주인 대좌부 영업자의 변환을 강요할 수 없다’, ‘함부로 창기의 계약 폐업통신면접을 방해하거나 또는 타인으로 하여금 방해하게 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이영훈 교장은 이들의 성병 감염률도 밝혀냈다그에 따르면 1937년을 기준으로 일본인 창기(103247)와 조선인 창기(78919)의 유병율은 각각 4.7%(4868)와 5.2%(4113)를 기록했다예기의 경우 일본인의 유병율은 5.5%(49779명 중 2743), 조선인의 유병율은 3.1%(62360명 중 1957)이었다작부의 경우에는 일본인의 유병율이 5.0%(19850명 중 997), 조선인의 유병율이 4.6%(68218명 중 3156)를 나타냈다.


이영훈 교장은 “(당시매춘업 또는 풍속업에 종사하는 여인들의 성병 감염률이 5% 전후였다는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사창가의 위안부들의 성병감염률이 25~30%였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며 “(1950년대에 성병 감염률이 높아진 이유에는공창제도가 폐지된 탓도 있겠지만신생 한국정부의 위생행정보건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이어 일제시대 창기예기작부는 꽤 엄격하게 관리통제된 위생 환경에서 접객업에 종사했다고도 덧붙였다.



호주제가 딸을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영훈 교장은 조선인 여인들의 유입 경로에 대한 설명도 이어나갔다. 그는 조선시대에는 사람을 사고 파는 대상이 노비에 한정됐지만, 19세부터 노비가 아닌 상민 남자가 자기 가족 모두를 노비로 파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지배와 더불어 민적법과 호적법, 민법이 시행되면서 (조선에) 일본식의 호주제 가족이 성립했는데, 이같은 새로운 가족제는 역설적이게도 빈곤한 호주에게 딸을 팔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이러한 제도적 변화가 공창제를 성립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하층계층의 가족윤리가 극히 취약했다는 문화적 조건도 이러한 상황을 조성하는데 한몫했다고 강조했다.




상놈과 종놈, 지배와 약취 당하면서 가족윤리 취약해져

 

이영훈 교장은 1921년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린 상인의 타락이라는 글을 소개했다.

 

종래 常人(상인)은 극도로 타락해서 信道(신도)의 자유도 就學(취학)의 자유도 없이 그야말로 사람의 부스러기로 살아왔다. 양반은 그들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常人(상인)들도 스스로를 우습게 여겼다. 염치와 도덕이니 하는 것은 그들의 알바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난은 한층 그들의 양심을 마비시켰다. 조선의 娼妓(창기)하면 누구나 경상도 여자가 가장 많음을 생각할 것이다. 그곳에 가서 알아보니 창기들은 모두 그것 미천한 상인들의 생활난으로 자기의 딸을 방매한 것이다. (-1921년 개벽(開闢) 15-)


이 글을 읽고난 뒤, 이 교장은 경상도가 가장 반상의 차별과 억압이 심했던 곳이라며 양반마을에 속하거나 인접한 상민 마을의 경우에는 양반의 오래된 지배하에 가족윤리가 취약해져, 조금이라도 생활이 곤란해지면 쉽게 딸을 파는 풍토가 성립해있었다는 이야기라고 해설했다.

 

그는 오랜 세월 상놈, 종놈으로 지배와 약취를 당하면서 상민의 가정윤리는 극히 불건전한 양상으로 성립하는 실정이었다호주는 가족을 양육하고 보호할 의무보다도, 억압하고 갈취하는 권리에만 충실한 실정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영훈 교장은 공창제는 호주제 가족의 도입으로 호주가 가족의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자, 근대가족 윤리가 성숙하지 않은 하층 빈곤계층의 부모나 호주가 딸을 소개업자에게 일정 금액을 받고 팔아넘긴 것이 창기 공급의 기본 경로라며 일제하 공창제는 인신매매를 통해서 성을 공급하는 성매매 시장이었다는것이 강의의 결론이라고 말했다.

 




다음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⑧] 역외로 진출한 조선의 매춘업… '위안소도 직접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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