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④] 일본군 위안부 인권, 50년대 미군 위안부보다 나아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은 ‘위안부 문제의 진실’ 5회차 강의 '조선의 기생, 또 한 범주의 위안부'(3월 3일)에서 이른바 군 위안부 역할을 맡았던 조선시대 여성들에 대해 설명했다.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양반 지배계층에 의한 성 착취를 다룬 것이다.
조선 시대의 향락 문화를 주제로 한 이날 강의에서 이 교장은 “오늘날 한국인들은 조선시대가 성적으로 청결한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엄격한 정조(貞操) 강요 사회...하층 여성에게는 관행적인 성 착취
먼저 이 교장은 양반가 여인들과 하층민 여성에게 각기 따로 적용했던 조선시대의 이중적인 성(性) 도덕률을 짚었다. 조선시대 지배층은 양반가 여인에게는 엄격한 정조 관념을 요구한 반면, 기생 등 하층민 여성에게는 ‘수청(守廳)’이라는 이름으로 성적 위안을 제공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기관과 군사 기구에는 관비(官婢)가 존재했다. 이는 관(官)에 소속된 계집종이란 뜻으로, 크게 급수비(汲水婢)와 기생, 두 부류로 나뉜다. 급수비는 물을 긷고 밥을 짓는 허드렛일을 담당했다. 기생은 관(官), 또는 양반이 벌이는 잔치나 연회에서 춤과 노래, 성적 위안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의 성적 위안을 수청이라고 불렀다.
이 교장에 따르면 수청은 기생 같은 관비에게만 강요했던 게 아니었다. 민간 양반가에 속한 계집종도 때때로 수청을 들어야 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와 하룻밤 묵을 때에도 계집종에게 수청을 들게 했다. 계집종 역시 양반 지배층의 성적 지배와 폭력에 시달리던 성 착취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이들 하층민 여성에게는 정조율(貞操律)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반가 여인에게는 달랐다. 이들은 남편이 죽으면 평생 재가도 할 수 없었으며 ‘외간 남자’를 만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됐다.
이 교장은 “하층 천민에게는 관행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성적 폭력을 행사했던 사회였지만, (양반층 여인의 정조관념으로 인해) 조선시대는 성적으로 청결한 사회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부연했다. 사대부 여인에게 비인간적인 정조율을 강요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성적 위안을 전담했던 계집종의 존재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가는 곳마다 기생․계집종과 동침한 양반 관료들
이영훈 교장은 조선의 관료였던 박취문의 ‘부북일기(赴北日記)’를 근거로 당시 양반 계층과 기생 간의 난잡했던 성관계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박취문의 일기는 1644년 12월부터 1년 5개월간 함경도에서 군관으로 근무하던 기간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그와 동침한 기생들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1644년 무과에 급제, 군관으로 일하게 된 박취문은 울산에서 함경도로 올라가는 동안 머물렀던 곳곳에서 민간의 계집종과 기생을 제공받았다.
이 교장은 “집을 떠난 지 이틀 뒤인 1644년 12월 11일 그는 어느 좌수(지방 향청의 우두머리)의 집에 숙박하며 그 집 계집종 통진아와 동침했고, 12월 16일 어성현에 이르러서는 기생 춘일아와 잤다. 12월 30일에는 강릉부에 이르러 기생 연향과 잤다. 1645년 1월 2일에는 강릉의 (기생) 근리개와 동침했다”는 일기 내용을 소개했다.
박취문은 자신과 동행한 군관들의 동침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다. ‘(군관) 숙회는 (기생) 매화와 잤다’, ‘(군관) 이선달은 기생 대향과, (박취문) 사촌은 기생 막개와 잤다”는 식이다.
막장 드라마 뺨치는 박취문 일기의 다양한 일화들
이 교장은 박취문의 일기에 기록된 몇 가지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박취문과 근리개와의 동침이 끝난 후다. 근리개는 박취문에게 ‘이틀 전에 연향과 잤느냐’고 물었다. 박취문은 ‘그렇다고’ 답했는데 근리개가 대성통곡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와서 무슨 영문이냐고 물었다. 근리개는 ‘박취문이 이틀 전에 잤다는 연향이에게 성병이 있지 않느냐. 이제 내가 성병이 옮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근리개의 어머니도 통곡했다. 박취문은 일기에 주(主)와 객(客)이 모두 근심해서 밤을 지새웠다고 썼다. 박취문은 아침에 그 집을 나서면서 약값으로 쓰라고 쌀 2석을 줬다. 꽤나 큰 화대를 지불한 셈이다. 이후 일기에 박취문이 성병으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기생 근리개와 그의 어머니는 (보상을 노리고) 연극을 했는지도 모른다.”
“박취문은 임지(任地, 임무를 받아 근무하는 곳) 함경도 회령에 도착해 기생 월매를 만난다. 월매는 박취문의 아버지 박계숙이 회령에서 군관을 할 때 관계를 맺었던 배종이란 기생의 딸이다. 박취문은 아버지가 쓴 일기에 배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박취문이) 월매라는 기생을 만나 내력을 들으니 그녀가 배종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것이다. 그래서 비감에 젖어 눈물을 무수히 흘렸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러고서는 함께 ‘동속’했다고 적었다. 확실치 않지만 동속은 성적 교섭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양반 군관의 부자(父子)가 변방 기생의 어머니와 딸을 대를 이어 관계한 것이다.”
“박취문은 경성부로 근무지를 옮기는데 거기서는 향촌이라는 방직기(房直妓, 군관에게 제공하는 기생)를 배정받게 된다. 그 때 다른 군관은 방직기를 배정받지 못했다. 기생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러자 경성부사가 태양이라는 민간 계집종을 불러 방직기 구실을 하라고 명한다. 그러면서 (태양에게) ‘너의 전 남편이 죽은 지 몇 년 동안 수절(守節, 정절을 지킴)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하지만 방직기가 모자라니 어쩔 수 없다. 군관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모셔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태양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경성부사는 태양의 어머니와 오빠를 잡아와 곤장을 친다. 그때서야 태양은 할 수 없이 군관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이 같은 일화들을 전한 뒤 이 교장은 “기생이나 사가의 계집종, 천한 여인의 성은 그녀의 것도, 남편의 것도 아니었다”며 “조선왕조와 양반 관료의 소유나 다름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저는 박취문의 여성 편력을 보며 멀지 않은 우리 역사의 또 한 범주의 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박취문의 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점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종대왕, 기생을 세습적 군 위안부로 제도화
이영훈 교장은 지난해 3월 자신이 출간한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나오는 조선시대 기생 제도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교장은 “기생의 역사는 신라시대, 고려시대까지 올라가는데, (당시는) 신분이 세습되는 관비는 아니었다”며 “기생을 천한 신분의 관비로 두고, 어머니의 기생 신분을 딸이 세습하여 기생의 역을 져야 한다는 법(종모법, 從母法)이 만들어진 것은 세종 때의 일”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기생을 군 위안부로 제도화한 것도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받들고 있는 세종”이라고 짚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세종은 ‘북쪽 변방에서 근무하는 군사들이 멀리 집을 떠나 추위와 더위에 고생이 참 많도다. 이에 기녀를 두어 장교와 병사를 접대하게 함이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고 명했다. 이렇게 생겨난 군사 위안 제도가 조선의 기생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장은 “변방의 군사를 위안하기 위해 설치하라는 것이 세종이 명한 지시였는데, 어느덧 수령과 빈객을 위안하는 제도로 널리 확산됐다”며 “그렇게 된 배경은 집안의 계집종을 손님의 침실로 보내 성 접대를 시킨 것이 (이미) 민간에서 풍속과 관행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조선왕조 500년간 어느 누구도 ‘기생제 폐지’ 주장하지 않았다”
이영훈 교장은 “18세기 이후 기생제는 노비제와 함께 쇠퇴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평안도 영변부에는 19세기 전반까지 30명의 기생이 있었고, 주요 감영(監營, 오늘날 도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며 “조선왕조 말까지 끝내 기생제는 철폐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될 때에도 기생은 사라지지 않고 이후 계속 존속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장은 “조선왕조 500년간 노비제와 기생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다”며 “조선시대는 신분의 강제와 더불어 천민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정당화되었던 사회”라고 강조했다.
이로 인해 계집종 등 천민 여성들은 “정조 관념이 박약하다”는 편견에도 시달려야 했다. 이 교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신소설을 보면 계집종을 그렇게(정조율이 없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러한 선입견은 조선의 신분제가 조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0세기 들어와 성에 대한 신분적 폭력은 상업적인 매춘시장으로 바뀌게 된다”며 “20세기 공창제의 역사를 두고 ‘일제가 나쁜 풍속을 들여왔다’는 말도 일면 진실이긴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 이전 (조선시대)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도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라며 강의를 맺었다.
다음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⑥] 조선에선 매춘업 성립 불가능… ‘성(性) 지배’ 수준에 머물러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