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2)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0.10.10 15:07:47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 論争)’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18년 12월 7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은 일본 위키에서는 늘 이런저런 내용 변경이 존재하는 항목 중에 하나이지만, 큰 골격은 그대로다. 일본 내에서는 2000년대 이전부터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한 대논쟁이 있었던 탓에 관련 더 이상 급작스런 연구의 진전이나 인식의 변화는 없다.  난징사건 자체보다 오히려 이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서사를 형성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미디어워치 편집부는 앞으로 일본 위키의 관련 항목들인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도 차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은, 일중전쟁(日中戦争, 지나사변(支那事変)) 도중인 1937년(쇼와 12년) 12월에 수행된 난징전(南京戦)에서 발생했다고 여겨지는 ‘난징사건(南京事件)’에서의 학살 존재 여부 및 그 규모 등을 논점으로 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일본과 중국간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여 정치적 영향 하에서 계속됐다.


목차


1 논쟁사


2 각파의 주요 논자와 그 특징


3 주요 논점

   3.1 희생자 수

   3.2 인구 추이

        3.2.1 인구 추이의 논점

   3.3 학살의 대상

        3.3.1 일반 시민에 대해


(계속)





1 논쟁사(論争史)

1937년 난징전(南京戦) 이후 일본 외무성에서도 ‘난징사건’은 심각한 사건으로 여겨져서 그 내용이 외무본성(外務本省)에도 전달됐다. 또한 일본 육군의 고급 간부인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사령관의 후임인 중지나(中支那) 방면 군사령관인 하타 슌로쿠(畑俊六) 장군과, 중국 파견군인 제11군 사령관에 오른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장군처럼 당시에도 난징에 파견된 일본군의 행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서 이 사건을 확인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군인이 아닌 일반 국민들로서는 엄격한 보도 통제와 일본 군부의 선전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가 보도하는 내용 이상으로는 난징사건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전후에 도쿄재판을 통해 알려지게 된 난징사건은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졌다. 

1971년, 아사히(朝日)신문에서 저널리스트인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가 ‘중국여행(中国の旅)'을 연재하면서 다시 거론되었던, 난징사건 당시의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난징사건 당시 일본 육군의 두 장교가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시키는지를 겨뤘다는 경쟁)’ 문제를 두고 허구라고 지적한 비평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그리고 작가 스즈키 아키라(鈴木明)에 의해서 큰 논란이 벌어지는 일이 있었다.



1982년에는 문부성이 ‘침략’을 ‘진출’로 고쳐 썼던 ‘제1차 교과서 문제(第一次教科書問題)’와 관련하여, 전후에 이 사건을 다룬 일이 거의 없었던 중국으로부터 일본은 갑자기 항의를 받게 됐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검정교과서에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을 반영하여서 사태 진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가운데 근현대사 비평가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난징사건 허구설을 발표하면서 부정파를 대표하게 됐다. 

1989년, 구(舊) 일본 육군 장교의 친목 및 상호 부조 단체인 가이코샤(偕行社)가 편집한 책인 ‘난징전사(南京戦史)'에서는 ‘난징사건’을 두고 “불법살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희생자는) 포로, 패잔병, 편의병(便衣兵, 게릴라병) 등 중국인 병사 사망자 약 16,000여명, 민간인 사망자 15,760명”으로 추정했다.

부정파는 1995년 종전 50주년에 있었던 ‘부전결의에 대한 저지운동(不戦決議阻止運動)’과 연계하여 새로운 논객인 아지아(亜細亜)대학 교수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편집자주 : 본인은 2000년 전후로는 ‘히가시나카노 오사미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뒤에 히가시나카노 슈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대학 교수 사토 카즈오(佐藤和男)가 포로 살해는 국제법상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히토츠바시(一橋)대학 교수인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와 논쟁이 벌어졌다.

해외에서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반일 단체가 난징사건 당시 안전지대를 만들어 인명을 지킨 독일인 기업가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의 일기를 복각(復刻)하고,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의 작가 아이리스 장(Iris Chang)을 지원하면서, 관련 논쟁이 국제화됐다. 하지만, 역사학자 J. 포겔(Joshua A. Fogel)은 아이리스 장의 책은 오류가 많다고 혹평을 했다. 

영어권에서는 정치적 이해를 배제한 '중간파'의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부정파’도 뒤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중국 측의 과장을 프로파간다로 보면서 이를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일본의 학살인정파조차도 희생자 수를 ‘20만명 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거리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일본 측에서 가해자로서의 의식을 강조하는 사회운동가인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의 생각(단, 마쓰오카 다마키도 30만명 설은 지지하지 않음)을 지지하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의 논쟁은 ‘환상파(부정파)'라는 새로운 논객들이 눈에 띄고 있다고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말한다. 한편, ‘학살허구설'의 논리는 이미 파탄이 났으며, “학살은 있었다”는 쪽이 올바르다는 학문적 결론은 확고히 내려졌다고 학살인정파의 쓰루분카(都留文科)대학 교수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주장하고 있다.

부정파인 자민당의 토이다 토오루(戸井田徹), 니시카와 쿄코(西川京子) 등 국회의원에 의한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의 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議員の会)'은, 2007년에 난징문제 소위원회의 위원장인 토이다 토오루에 의한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의 답변 등을 통해서,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와 사토 카즈오(佐藤和男)의 설을 포함한 난징사건에 대한 검토 결과를 (1차 자료에 의한 조사로서) 발표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일본어, 영어로 수록한 ‘난징의 실상(南京の実相)’을 출판, 미국의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하고, “난징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이하 ‘# 당시의 국제보도에 대한 의논’‘# 국제연맹의 결의’’# 당시 중국 정부의 인식’을 참조).

그리고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이 양국 공동으로 진행된 학술 연구를 통해 난징사건(1937년)에 대한 양국 전문 학자들에 의해 분석이 이뤄지게 되었다. 2005년, 고이즈미 정권의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무상이 일본과 중국의 역사 공동 연구를 제안했고, 2006년의 일중정상회담에서 역사 공동 연구가 결정되었으며,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라는 이름으로 양국의 역사 전문 연구자에 의해서 2010년 1월에 보고서가 발표됐다. 여기서 일본 학자와 중국 학자, 양쪽 모두 전시국제법 위반으로서의 중국 병사 및 중국 민간인 학살이 일정 규모로 있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다만 일본 측은 그 규모에 여러 설이 있다고 했으며, 또 중국 측은 대규모였다고 했다. 또한 학살의 원인에 대해서 일본 측은 분석적으로 기술했다.

이외에도, △ 아즈마 시로(東史郎)의 우편대(郵便袋) 재판'(아즈마 시로 쪽이 패소, 편집자주 : 1937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 제16사단 20연대의 병사였던 아즈마 시로가 난징에서의 학살과 관련하여 당시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일기를 1987년에 출간했다. 이 일기에 등장하는 옛 전우에 의해 1993년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당했고, 아즈마 시로 쪽이 최종 패소했다.),  ‘100인 참수 재판’(원고 패소, 편집자주 : 100인 참수 경쟁 장교들의 가족이 난징사건 당시 관련 문제 보도한 마이니치신문 등에 대해서 과장왜곡이 됐다면 소송을 제기해 벌어진 재판으로 신문사 측이 승소했다), △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에 대한 샤수친(夏淑琴)의 명예훼손 재판’(히가시나카노 슈도 측이 패소, 편집자주 : 난징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샤수친 씨가 찍힌 사진의 진위 문제가 쟁점이었던 재판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벌어진 재판에서 모두 샤수친 측이 승소했다) 등의 재판도 있었다.

현재도 일본과 중국의 난징사건 인정파와 일본의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난징사건 부정파가 마찰을 빚는 경우는 자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아베 담화 지식인 회의 좌장 대리)는 자신이 참여한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를 되돌아보면서, “난징사건과 관련해 일본군의 학살을 인정한 것에 대해 (일본내에서) 괘씸하다는 비판이 있다”며 “하지만 학살이 없었다는 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기타오카 신이치는 ‘일본인들 중 일부에서 난징사변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중국 측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의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 위키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항목을 참고하라.


2 각 파의 주요 논자와 그 특징(各派の主な論者とその特徴)

‘난징사건', ‘난징대학살’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제설(諸説)을 제시하고 있다.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난징사건과 관련 각 학파의 입장을  ‘대학살파(大虐殺派)’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호라 도미오(洞富雄),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 / △ ‘중간파(中間派)’ (하타 이쿠히코,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  ‘환상파(マボロシ派)’(스즈키 아키라(鈴木明),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환상파를 중국에서는 ‘허구파’라고 부르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는 2007년 시점에서 환상파와 중간파의 영향력이 커지고, 대학살파의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군사역사가인 하라 다케시(原剛)도 대학살파, 중간파, 환상파(학살부정설)로 분류한다.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본인을 포함해 대학살파를 ‘사실파(史実派)’라고 부르고 중간파를 ‘학살소수파(虐殺少数派)’라고 부른다. 

• 교토(京都)대학 교수인 노무라 코이치(野村耕一)는 난징사건과 관련 각 학파의 입장을  ‘학살파(虐殺派)’(가사하라 도쿠시,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  ‘중간파(中間派)’(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하라 다케시(原剛)) /  ‘환상파(まぼろし派)’(스즈키 아키라(鈴木明),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로 분류한다.

• 나카소네평화연구소(中曽根界平和研究所) 주임연구원인 호시야마 다카시(星山隆)는 난징사건과 관련 각 학파의 입장을   ‘학살인정파(虐殺肯定派)’(가사하라 도쿠시) /   ‘중간파(中間派)’(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  ‘학살부정파(虐殺否定派)’(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로 분류한다.

다음의 구분과 ‘파(派)의 명칭’과 인명은 어디까지나 연구자에 따라서 각기 다른 호칭일 뿐이며 하나의 기준일뿐임을 덧붙인다.

대학살파학살인정파(大虐殺派・虐殺肯定派)

그러나 30만명-20만명 이상이라는 숫자를 주장하는 쪽은 다음과 같은 중국의 연구자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난징대학살기념관
국군역사문물관(国軍歴史文物館, 중화민국) 
쑨자이웨이(孫宅巍)
아이리스 장(Iris Chang)

다음의 일본 연구자의 경우, 예를 들어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11만 9천 명 이상의 희생자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난징성 안쪽의 민간인 희생자는 1만 2천 명쯤이라고 주장하면서 주된 불법 살인은 중국병사에 대한 살인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이노우에 히사시(井上久士) 
・오노 켄지(小野賢二)
・에구치 케이이치(江口圭一)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 가사하라는 본인을 포함해 ‘사실파’라고 자칭하고 있다.
・다카사키 류지(高崎隆治) 
・히메다 미쓰요시(姫田光義)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호라 도미오(洞富雄)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와타나베 하루미(渡辺春巳)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

환상파학살부정파(まぼろし派・虐殺否定派)

마쓰오 이치로(松尾一郎)는 1998년부터 자유주의사관연구회(自由主義史観研究会)프로파간다사진연구회(プロパガンダ写真研究会)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을 하면서 난징사건 관련 사진들을 연구했다. 마쓰오 이치로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와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가 도용했다고 호소하고 있다.

・아라 켄이치(阿羅健一)
・가츠오카 칸지(勝岡寛次)
・고분유(黄文雄, 황원슝, 황문웅) – 대만계 일본 지식인
・스즈키 아키라(鈴木明)
・세키헤이(石平, 스핑, 석평) – 중국계 일본 지식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 본인도 학살부정파를 자칭하고 있다.
・토미자와 시게노부(冨澤繁信)(일본 ‘난징' 학회 이사)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일본 ‘난징' 학회 회장)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미즈마 마사노리(水間政憲)(PHP연구소에서 난징사건 부정 등의 도서를 다수 발행)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
・햐쿠타 나오키(百田尚樹)는 소설가이지만, 저서인 ‘일본국기(日本国紀)’ 등을 통해서 부정론(일본이 난징을 점령한 후 20만 명의 난징 인구가 후에 25만 명이 될 정도로 치안이 좋았다, 당시의 사진을 봐도 중국인은 일본군 점령 후에  치안이 이루지는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이 나오므로 학살은 거짓이다 등)을 자료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전개했다. (30만명 살해설은 문제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외의 부정론의 경우는 ‘# 당시의 국제보도에 대한 논의’ ‘# 팀펄리 저작에 대한 프로파간다 의혹’ ‘# 편의병 및 전시국제법’ ‘# 인구추이의 논점’ ‘# 의문의 사진(학살부정파에 대한 반론)’ ‘# 투항병・포로의 취급 및 전시국제법’ ‘# 일반시민에 대해’ 등에서 사실오인과 의문점이 있다).
・켄트 길버트(Kent Gilbert)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 - “이른바 ‘난징대학살’이란 없었다”고 하면서 난징사건은 중화민국 정부의 프로파간다라고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와 난징사건의 진실을 검증하는 모임(慰安婦問題と南京事件の真実を検証する会) - 일본 민진당자유민주당으로 구성된 의원 연맹.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議員の会) - 일본 자유민주당내의 의원 연맹.

중간파(中間派)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교수다. ‘학살파’의 입장에 서있는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기타무라 미노루를 (중간파가 아닌) ‘학살부정파’로 규정한다. 기타무라 본인은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 개별적인 살해 사안에 대해서는 자료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있다. 기타무라는 난징재판에서 검찰 측이 제시한 “20만명의 학살”에 대해, “중화민국에 의한 전시선전의 허구”라며, 이 전시선전의 성립 과정을 해명하고, “10여만 명의 시신을 매장 처리했다”라고 칭하는 ‘숭선당(崇善堂, 난징전 당시 구호단체 중 하나)’의 실무 능력 문제를 지적(이 단체의 인원장비로는 자칭하는 일정으로 자칭하는 숫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는 한편, ‘무푸산(幕府山) 포로 살해 사건’(피해자 수 약 1만 8천명)에 대한 새로운 자료(친일 정권이 발행한 중국어 신문)를 발굴함과 동시에, 난징사건을 당시 일본군에 의한 비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7년, 기타무라는 편의병이나 포로에 대한 살해는 인정하면서도,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은 없었다고 밝혔다.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 다만 ‘환상파학살부정파'가 주된 지지자였던 영화 ‘난징의 진실’(난징사건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정치적 창작이라고 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찬동자이다.
・나카무라 아키라(中村粲)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하라 다케시(原剛) – 군사역사가인 하라 다케시는 중국 정부의 ‘대학살설'은 인구와 당시 병력, 또한 ‘숭선당(崇善堂)’ 기록과 노소(魯甦) 증언의 신빙성을 보면 성립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학살부정설 쪽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른바 ‘난징사건 전시 프로파간다론’도 난징사건이 없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 측의 포로와 중국인에 대한 멸시뿐만 아니라, 중국 측의 민중 보호 대책의 부족도 사건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가이코샤(偕行社)의 ‘난징전사(南京戦史)’
・야마모토 마사히로(山本昌弘)
・D.아스큐(David Askew)
・밥・T・와카바야시(Bob T. Wakabayashi)
・조슈아 포겔(Joshua A. Fogel)
・T. 브룩(Timothy James Brook)

이상과 관련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 위키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 항목을 참고하라.



3 주요논점(主要な論点)
 
3.1 희생자수(犠牲者数)
 
사건의 희생자수에 대해서는 30만명설에서 영(0)명설까지 여러 설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설이 나오고 있는 배경으로 “학살” 개념에 대한 정의, 지역기간, 매장 기록, 인구통계 등에 있어서 자료 검증의 차이가 꼽힌다.
 
  30만명 이상 – 1947년 국민당 정부의 난징군사법원 판결서에 따른 것이다. 중국 공산당 정부의 견해도 이에 의거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설에는 난징성 바깥의 희생자 수는 없다. 30만 명 설은 자료적 근거가 부족하며, 일본 측 학자들은 지지하지 않는다.

  20만명 – 극동국제군사재판 판결에 따른 것이다.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사령관에 대한 판결문에서 10만 명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일본 학자들이 지지하는 의견은 아니다(일본 학자들 중에서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가 약 20만 명이라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주변의 농촌 피해 등까지 포함한 숫자이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본인의 가설 중 하나이다).

이하는 일본 측 학자들이 지지하는 의견이다.
 
  11만 9000명 이상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의 난징 교외의 희생자수까지 포함한 설로서 중국 군인 희생자 80,000명, 민간인 희생자 3만 9천 명(난징성 안쪽 : 1만 2천 명, 농촌 : 2만 7천 명), 총 11만 9천 명 이상이라고 한다.
 
  4만명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중국병사 희생을 3만명, 일반인 희생자를 1만명(난징성시(南京城市)의 경우만)로 보면서 4만 명을 상한으로 했다.*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난징의 중국군 병력 10만명 중에서 5만명이 전사했으며, 4만명의 포로 중에서 3만명이 살해됐다’(생존 포로는 1만명)고 추정한다. 이는 ‘대만공식전사(台湾公式戦史)’와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 이누마 마모루(飯沼守) 소장의 일기, 그리고 상하이 파견군 우편장(郵便長) 사사키 모토카쓰(佐々木元勝)의 12월 15일 일기 내용 나는 포로가 약 4만 2천명이라고 들었다에 부합한다.]

이외에도 일본의 중국학자인 쿠노 테루오(久野輝夫)는 37,820 명이라고 한다. 중국 문헌에서는, 중국군 약 11~12만 명 중 약 4~6만 명이 난징에서 전사, 포로(행방불명을 포함)라고 한다.

  1~2만명 – 난징사건 연구자인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는, 중국 병사 희생자 8천 명과 일반인 피해자 5000명 (난징성 시와 주변 농촌의 일부(장닝구(江寧県))를 합쳐서 총 1~2 만 명이라고 한다. 당시 전투상보(戦闘詳報) 등의 공식 기록에는 약 1만 명 전후의 패잔병(포로)에 대한 살해 기록도 있다.
 
  영(0)명 – 이는 ‘대학살’ 부정설전시국제법상의 합법설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재반론도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설은 일단 30만 명의 시민에 대해서는 ‘대학살’은 커녕, 시민에 대한 단순 살해도 거의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편의병(게릴라병)과 포로투항병에 대한 살해는 전투행위의 연장이거나 전시국제법상 합법적이었다고 한다(사토 카즈오(佐藤和男)의 전시국제법상의 합법설이 그 근거다). 중국 군인에 대한 살해는 전시국제법상의 합법이었을 뿐인 만큼, 시민군인에 대한 불법 살해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난징안전구(南京安全区)에서의 구미인의 기록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저널리스트의 기록에 대해서는 그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국민당이 사건 이듬해에 300번이나 했던 기자회견에서도 난징사건이 언급되지 않았을 정도로, ‘당시 난징사건에 대한 보도가 없었다’, ‘국제연맹도 난징사건을 무시했다’고 주장한다(단, ‘국민당의 기자회견이 없다=난징사건이 없다’는 아니다・당시 국제 보도에서는 난징사건이 언급되었다・국제연맹이 난징사건을 무시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는 재반론도 있다). 또한 국민당 정부 기록에서도 오히려 난징에서의 인구 기록 증가가 확인되고 있으며, 또한 일본군의 비행으로 고발된 살인은 총 26건이고 목격된 사건은 합법적 살인 1건뿐으로 기본적으로 ‘대학살’을 증명하는 사진은 없다고 주장한다.*

[* 편집자주 : ‘난징사건’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단순히 이 사건의 ‘실존’이나 ’규모’ 문제 논의 여부에만 집중해서는 곤란하다. 이 사건에 대한 세세한 진상 관련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중국 공산당 측의 잘못된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기 때문이다. 본 항목 내용에서는 상세히 다뤄지지 않고 있으나 일본의 자유보수파가 난징사건과 관련해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중국 자국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과 관련한 중국 공산당 측의 위선 내지는 이중잣대 문제다. 가령, 중국에서는 난징사건 전후에도 농민반란이나 공산혁명 등으로 인해 내부에서 수시로 민간인에 대한 수십만, 수백만 규모의 대량학살이 벌어졌었으며, 심지어 가장 최근인 1989년에도 ‘천안문 학살’이 벌어졌었다. 티벳, 신장위구르 등에서 사실상의 홀로코스트성 학살도 역시 현재진행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난징학살기념관 등을 통해서 외세인 일본군과 관계된, 또 교전 상황이라는 맥락도 있는, 80여년 전의 난징사건의 경우만 단독적으로, 지속적으로 심각한 범죄로 집중추궁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난징에서의 대학살이 전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난징사건 전후에 중국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 문제가 규모 등에서 훨씬 상위인데도 말이다. 이는 프로파간다요 음험한 정치적 의도 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 일본 자유보수파의 입장이다. 실제로 중국은 지금 인터넷 어디에서도 ‘천안문(톈안먼) 학살’은 아예 검색조차 되지 않으며, 수백만이나 죽었다는 것이 정설임에도 불구하고 용어상으로도 이미 어폐가 있는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사실상의 학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제대로된 정부 차원의 공식적 연구나 조사조차 없이 여전히 쉬쉬하고만 있는 형편이다(이런 이중성은 심지어 친중화되고 있는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위키 백과의 경우, ‘난징사건’은 ‘난징대학살’로 공식 호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천안문 학살’은 ‘1989년 텐안먼 사건’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일본 자유보수파의 입장에서는 난징사건의 실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본 위키 항목도 이런 한계점을 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관련 진상규명을 통해  난징사건’에 대한 역사적 제자리 찾기가 이뤄진다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 학살’과 비교해 중국이 난징사건을 더 큰 역사적 범죄로 부각시킬 명분도 그만큼 퇴색하는 만큼 관련 논쟁은 여전히 중요성을 갖는다는 반박 역시 있다.]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의 2010년 1월 보고서(일본 측) : 일본은, 전시국제법 위반으로서의 중국병사중국민간인 학살이 일정 규모로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일본 측의 연구는 20만 명을 상한으로, 4만명, 2만명 등 다양한 추계가 있다. 이처럼 희생자 숫자에 여러 설이 있는 배경으로는 ‘학살’(불법살해) 개념의 정의, 대상으로 하는 지역기간, 매장 기록, 인구 통계 등 자료에 대한 검증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3.2 인구추이(人口推移)

난징의 인구는 일중전쟁 이전에는 100만명을 넘었으나 상하이사변 이후의 폭격과 난징 공격 직전의 중국 정부 수뇌부의 충칭(重慶)으로의 이전, 부호들의 소개(疎開, 이전) 등으로 난징전 당시의 인구는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다. 

‘스마이스 조사(スマイスの調査, 미국인 선교사 루이스 스마이스(Lewis S.C. Smythe)에 의한 난징 지역에서의 전쟁 피해에 대한 1937년부터 1938년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난징 공격 직전인 11월에는 약 50만명(다른 설도 있음)으로 반감했다.

구미인의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南京安全区国際委員会)’는, 도시 인구가 “일본 점령 직후에 약 20만”이라고 예측하고서 난민 구제를 했다.

12월 13일 일본 점령 후, 일본 측이 난징에서 주민등록을 하고, 약 16만 명(어린이와 노인의 일부가 포함 안 됨)이 등록했으며,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는 어린이노인 등을 포함한 인구로 약 25만 명을 산정(算定)했다. 스마이스 조사는 일본군 점령시 12월 12~13일 난징의 인구는 약 20~25만 명이라고 했다. 또한 석 달 후 1938년 3월의 인구는 22만 1150명으로, 이는 조사하지 못했던 경우를 포함한 전체 인구의 80~90% 정도로 봤다(즉 전체 인구는 약 24만-26만 명). 즉 석 달 동안 인구 증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욘 라베는 점령 후 안전구역에서의 인구 증가가 있었던 것은, 안전구역 밖에서의 인구 유입에 의한 증가가 아니냐고 추측하고 있다.

1984년 가이코샤(偕行社) 전사(戰史) 편집위원인 우네모토 마사미(畝元正己)는 20만명설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1937년 12월 17일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 제 6호 문건 ‘난민구 특수 지위의 해석(難民区の特殊地位の解釈)’에서 “(12월 13일) 모든 시민은 대부분 완전히 난민구 안쪽으로 집중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12월 13일에 입성한 일본 장병의 증언도, 안전구역(난민구) 이외의 성남(城南), 성서(城西), 성동(城東), 성북(城北) 지구에서는 주민들이 거의 목격되지 않았다. 우네모토 마사미는 그렇기 때문에, 안전구역으로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동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3.52㎢의 좁은 안전구역에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3.52㎢에 20만 명이 있었다고 한다면, 1㎢당 56,818명의 인구 밀도인 것이다. 

또한, 우네모토 마사미(畝元正己)는 스마이스 조사에서 난민 수용소에 27,500명, 난민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고 안전구역에 있던 사람이 68,000명(총 95,500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 그리고 12월 17일 국제위원회 문서에는 49,340~51,340명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20만 명이 안전구역에 수용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3.2.1 인구추이의 논점(人口推移の論点)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는 난징시의 인구가 20만 명(실제는 일본군 점령 당시 난징 시민의 난민 추정 인구) 밖에 없기 때문에, (중국 측 주장 희생자 숫자인) 30만 명을 살해할 수가 없고 30만 명 설은 허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난징사건의 집단 학살로서 가장 많았던 것”은, 바로 점령 시의 난징 시민들로 추정되는 20만 명의 숫자에서는 “누락”이 됐던 난징 방위군 부상병, 투항병, 포로, 패잔병의 전시국제법을 위반한 처형이라고 지적하면서, "숫자를 만진 무의미한 논쟁은 학살의 실태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반 시민의 희생자를 보면, 난징성 시내의 점령 전, 즉 난징전 전후에 피난중인 시민이 병사와 함께 휘말려 살해되고(숫자는 불명), 난징 시외의 농촌에서도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주민 학살을 한 기록이 있다(다만, 난징 성내에서 떨어진 난징 행정구 농촌부의 피해자는 보통은 난징사건의 피해자로는 추산하지 않는다). (이하 ‘# 일반 시민에 대해’ 참조) 
 
2007년 일본의 ‘난징사건의 진실을 검증하는 모임(南京事件の真実を検証する会, 회장: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 사무총장 :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은, 당시 난징의 인구는 일본군 점령 직전에는 20만이라는 추정치가 기록되어 있다(국민당 정부가 감수하고 1939 년에 출판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기록 “Documents of the Nanking Safety Zone”(국민당 정부 외무부 고문 서숙희(徐淑希) 편집). 또한 점령 1개월 후인 1월에는 인구 25만이라고 기록(스마이스 조사 : 주변부에서의 유입에 따른 증가)되어 있으며, 5만 명도 늘었다고 하면서 “30만의 시민 학살”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

[* ‘난징사건의 진실을 검증하는 모임’의 2007년 공개 질문에 따르면, “국민당 정부 국제문제연구소 감수, Documents of the Nanking Safety Zone, 1939 년 출판, 상해”, 그리고 도미사와 시게노부(冨澤繁信) ‘원전에 의한 난징 사건의 해명(原典による南京事件の解明)’에서는 “난징안전구 토안 서숙희(徐淑希), Documents of the Nanking Safety Zone. Kelly & Walsh, 1939. 중경 국제 문제 연구소의 원조로 편찬”이라고 쓰여져 있다. 버지니아 대학의 TOKYO WAR CRIMES TRIAL DIGITAL COLLECTION에는 원본이 온라인으로 공개되고 있는데, “Documents of the Nanking Safety Zone. Edited by Shuhsi Hsu, PhD, sometime adviser to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Prepared under the Auspices of the Council of International Affairs, Chungking. “Printed by Kelly Walsh, Limited, Shanghai-Hong Kong-Singapore. 1939.””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2015년에 작가 햐쿠타 나오키(百田尚樹)도 “30만의 시민 학살”은 있을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다.]

근현대사 연구자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역시 이런 인구 증가는 일본군 점령 후 치안이 좋아졌기 때문에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난 것은 난징시 전체보다는 어디까지나 구미인에 의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가 보호했던 난징안전구다. 인구 증가의 이유는 난징 시내에서 구미인에 의해 보호받고 있던(일본군의 출입 제한 있음) 안전구역으로 시내에 잠복한 인구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라고 욘 라베는 추측하고 있다

3.3 학살의 대상(虐殺の対象)

3.3.1 일반 시민에 대해(一般市民に関して)

일본 측 연구자의 일반적인 의견은, 난징사건 당시에 일본군에 의한 난징성 안쪽에서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 숫자는 중국병사를 대상으로 한 불법살인 숫자보다는 훨씬 적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뒤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구미의 선교사들이 조직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약 2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있다. 

난징사건에서의 피해자를 12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도 난징성 안쪽의 민간인 희생자는 1만 2천명 쯤이며, 당시의 주된 불법 살인은 중국병사에 대한 살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군에 의한 난징사건의 민간인 사망자수를 나타내는 조사였던, 사건 직후에 행해진 스마이스 조사에서는 사망자가 6천 6백명~1만 2천명으로 기록되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민간인 희생자 수가 과대해지지 않았던 이유로, 난징시 함락 이전부터 구미 선교사들이 조직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에 의해서 난징시내에 안전구역이 설정되어있었기에 많은 이재민이 대피할 수 있었던 것을 꼽고 있다.*

[* 난징안전구는 난징 공략 이전인 11월, 전재(戰災)에 휘말려 난징성 시에서 피난을 할 수 없는 시민 등을 구제하기 위해 조직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별칭 : 난징난민구 국제위원회)가 난징성 시내에 미국 대사관에 협력을 의뢰하여 설정한 지역이다.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는 미국인 선교사(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와 여성 선교사 윌헬미나 미니 보트린(Wilhelmina Minnie Vautrin) 등)을 중심으로 한 15 명 정도로 구성됐는데, 욘 라베(John Heinrich Detlef Rabe)가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고, 난징 함락 전에 난징안전구로 시민의 피난을 호소했다. 이 안전 구역은 이재민에 의해 난징 함락 직후에는 약 20 만 명(여러 설이 있음)이라는 추정치가 있으며 난징성 시내에서는 난징안전구 이외에는 주민이 많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하타 이쿠히코는 ‘라베의 감사장(ラーベの感謝状)’에도 나오듯이 난징안전구(별칭 ‘난민구’)에 대해서는 일본군이 포격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점령 후에도 일본군이 조직적인 주민 학살을 벌인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 ‘라베의 감사장’은, 1937년 12월 14일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의 욘 라베가 일본군에 제출한 문서 '난징안전구 토우(檔, 관청에 저장되는 기록) 안’ 제 1호 문건(Z1) 이다. 이 문서의 시작 부분에서 "귀군 포병 부대가 안전구를 공격하지 않은 점에 대해 감사드리며, 안전구 안쪽에 거주하는 중국인 민간인 보호와 관련하여 향후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귀하와 접촉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안전구 내에서도 일본군이 패잔병 사냥을 목적으로 하여서 실수 등으로 많은 민간인들을 잡아 안전구 밖으로 끌고가 살해하거나 하는 등의 시민에 대한 위법살인 등 문제있는 행위는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구 일본군의 난징 점령시에 중국인들이 난징에서 평화롭게 사는 모습이나 이들이 일본군과 교류하는 모습을 촬영한 당시의 일본측 보도사진의 대부분은 난민구(안전구), 즉 일본 군인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난징의 많은 민간 중국인이 피난하고 있는 지역, 또 그 안전한 거주를 구미인의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가 보장하고 있던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또한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에 따르면, 난징 주변에서 일본군이 빈번히 조직적으로 마을 단위로 주민들을 학살하는 등 난징성 바깥의 농촌 지역에서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군하는 중에 살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농촌에서의 학살에 대해서는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에서 중국 측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스마이스 조사에서도 농촌 지역의 피해자를 2만 6천 명 이상으로 기록하고 있고, 난징성 안쪽의 피해자 수를 웃돌고 있다.
 
난징시내에서의 시민들에 대한 살해는, 안전 지역으로 피난민의 피난이 끝나기 이전, 즉 일본군의 난징 도시 함락(12월 13일) 전후에 일본군의 공격, 소탕, 폭력에 휘말리면서 적지 않게 존재했었다고 여겨진다(성 밖에 나가서 장강(長江)을 건너 도망하는 도중 시민들(부녀자도 포함)이 병사와 함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는 증언, 일본군에 의한 공격이나 폭력으로 살해되었다는 증언(‘신루커우 사건(新路口事件)’)이 있다). 

이 시점에서 난징성 안에서 살해된 이들의 실제 숫자는 불명이며, 난징성 바깥에서 점령 전쟁 후에 피난 중인 많은 시민들(숫자는 불명)이 군인들과 함께 전투 등에 휘말려 살해된 시신이 장강으로 흘러갔다는 기록(도쿠가와 요시치카(徳川義親)와 욘 라베가 남긴 기술 등)은 존재하지만 그 숫자도 불명이다.

다만, 관련하여 중국군 패잔병에 의한 폭행이 일본군의 소행으로 오인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중국 측의 ‘한간사냥(漢奸狩り), 친일파 중국인이나 일본인 유학생에 대한 색출)’이나, ‘견벽청야전술(堅壁清野作戦, 초토화작전)’이라는 방화작전이 이뤄져서 중국 측도 역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고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등이 반박을 하고 있다. 실제로 다수의 패잔병이 편의(便衣)로 갈아입고 안전구역(난민구)으로 피했다는 것은 학살파인 쑨자이웨이(孫宅巍)나 우스 카쓰미(臼井勝美) 등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난징에서 일본군의 난폭 행위로 여겨졌던 것 중에는 실은 중국 측 교란 공작대의 소행으로 벌어진 사건도 있었다고 1938년 1월 4일 뉴욕타임스가 보도하고 있다. 또한 선교사인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도 일본군의 범행뿐만 아니라 중국인에 의한 범행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난징사건 연구자인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는,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등에 의한 중국 패잔병 공작설(즉, 일본군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행이 실은 중국군 패잔병의 폭행이었다고 하는 것)은, 중국군 병사로 의심되는 인물과 관련하여 안전구역에서의 체포 사건을 두고서 일본 측이 “중국 병사도 나쁘다”고 선전했던 당시 기사를 과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공작대를 사로잡았다는 것이 어느 부대였는지도 분명하지 않으며, 이와 관련한 제16사단 관계자, 헌병대 관계자의 일기나 증언, 관련 신문 기사도 전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중국군이 함락 전에 난징 시내와 그 주변의 건물을 불태운 것은 당시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되었으며, 중국군이 난징시를 불태웠던 것은 남부와 남동부의 성벽 주변의 일부와 성의 서쪽 방면에 있는 건물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성내의 난징안전구 바깥 중심가의 방화(태평로(太平路) 주변 등)를 비롯한 시내의 광범위한 방화는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욘 라베와 루이스 스마이스 등 구미인의 기록도 있다.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 이이누마 마모루(飯沼守)도 일기에서 소련 대사관 방화는 일본군에 의한 혐의가 있다고 했다. 

단, 방화(放火)와 관련하여, 주택과 마을에 대한 소각(방화)은 전쟁 시에 전술이 될 수 있고, 방수(防守)되는 도시, 마을, 주택 또는 건물에 대한 공격이 헤이그육전조약(ハーグ陸戦条約)에서 금지된 사항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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