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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알아야 할 1.21 사태

北 본모습 안다면 ‘안보’ 외치게 될 것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가늠하려고 하면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 평화만을 봐 온 청년들에게는 국가보안법이 왜 있어야 하는지, 안보가 정말 중요한지 혼란스러울 게다. 쓸데없이(?) 전투기 사업에 왜 돈을 들이는지, 미군 주둔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을 거다.

1968년 1월 21일이었다. 1.21사태,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 혹은 김신조 사건이라 불리는 일이 발생한다.

청와대를 폭파하고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목을 따러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서울까지 진입했다. 요즘 청년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거다.

“청와대를 깨부수고 박정희의 목을 따서 자동차를 탈취하여 북으로 돌아가려 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27살 북한무장간첩 김신조의 얘기였다.

31명의 무장 특공대들이 5일분의 식량만을 갖고 북한 연산을 출발, 휴전선 미2사단 방책선을 뚫고 법원리를 거쳐 노고산을 경유, 비봉을 넘어 세검정 자하문을 지나 청운동 부근에 6일 만에 도착했다.

이후 검문에 부딪치자 이들은 검문하는 종로서장을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경찰병력과 첫 접전에서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공비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시내버스 안에 수류탄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 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됐다.

교전 끝에 공비 31명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현장에서 5명이 사살됐고 생포했던 1명은 치안국 복도에서 자폭했다. 이후 소탕작전 끝에 22명은 사살, 2명은 도주했다.

그 중 김신조는 경복궁 담을 넘어 인왕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우리 국군에 의해 생포됐다. 수류탄을 까 자살을 하려다가 살고 싶은 마음에 항복했다고 후일 털어놨다. 참고로 그때 잡지 못한 탈주병 2명은 여전히 존재한다. 북한으로 돌아갔을지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생포한 김신조에 따르면 대통령 관저 폭파와 요인 암살, 주한 미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의 살해, 육군본부 폭파와 고급 지휘관 살해, 서울 교도소 폭파,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괴 간첩 대동 월북하는 것 등이 최초 그들에게 떨어진 지령이었다.

이 지령을 위해 투입될 대원은 76명이었으나 돌연 31명으로 축소됐다.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른 조치였다.

이들이 장비한 습격용 무기는 기관단총(PPS) 31정(1인당 1정씩 휴대), 실탄 9,300발(1인당 300발씩 휴대), TT권총 31정(전원 휴대), 대전차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방어용 수류탄 252발(1인당 8발씩 휴대), 단도 31정(전원 휴대)이었다. 놀랄만한 화력으로 기습공격을 당했을 시 어떤 식으로 전개됐을지 생각만해도 몸서리 쳐진다.

만약 실제로 우리 대통령이 암살되고 청와대가 폭파당했다면 그 혼란을 틈 타 북한의 전면전도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이 일이 있은 후 박정희 대통령은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휴전선 일대에 철책선을 둘렀다. 한미 방위조약에 따른 1억불의 군사원조를 받았고 미 공군 주력기를 한국에 추가로 배치했다.

안보가 대폭 강화된 것이다. 김신조 사건을 비롯해 그 시대에 한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 행위는 우리에게 경제성장과 더불어 북한의 기습적인 테러로부터 항상 방비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됐다.

요즘 청년들은 일부 선동세력의 주장에 따라 우리의 높은 안보의식을 폄하한다. 국가보안법을 막연히 정부 반대론자들을 잡아들이기 위한 법으로 이해하고, 국민들의 반공정신마저 정부에게 세뇌당한 것으로 주장한다.

당시 1968년은 곧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충격적인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이후 이틀 만에 동해안에서 업무 수행 중이던 미군의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피랍되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전쟁 분위기였다.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나포됐고. 선원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승무원 82명을 송환했다.

그 뿐인가. 그해 10월 30일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에 민간인 23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두 달여에 걸친 교전 끝에 우리 군은 공비 중 107명을 사살하고 5명 생포, 2명이 자수해 막을 내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리 국민들은 북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고 확고한 정신적 무장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간첩을 색출하거나 잦은 해킹의 배후가 북한이라는 발표가 있음에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어뢰를 맞아 천안함이 폭침됐다는 과학적 분석이 나왔음에도 좌초설을 믿고 있지 않은가.

북한이 어떤 집단인지를 기억하는 국민들은 나라를 잃으면 경제고 복지고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잊어버린 건가. 오늘날 북한을 믿어야 한다며 안보를 뒷전으로 미는 행태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전쟁은, 아픈 우리의 기억이 잊혀져 갈 때 다시 찾아 올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김승근 기자 he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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