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전혜조 기자|지난 4월 8일 코엑스에서 열린 화랑미술제 사전 오픈 현장은 VIP와 프레스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은 푸른 보랏빛과 오색 색동이 어우러진 학고재 갤러리 채림 작가의 부스였다.
이날 채림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나무는 지구가 하늘에 쓰는 시라고 한다. 저는 제 작업이 나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서 끄집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은 옻칠과 한지에서 출발한다. 나무의 진액인 옻칠과 나무가 몸을 내어준 한지를 바탕으로 화면을 만들고, 그 위에 산수의 결을 입혀나가는 방식이다.
작가 작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기법에 따라 분화되는 다양한 ‘산수’ 시리즈다. 그는 색동의 ‘동’이 뜻하는 ‘한 칸’에 주목해 한 칸 한 칸 정성스럽게 색을 이어 붙이며 확장되는 ‘색동산수’를 선보인다. 이는 하나가 곧 전체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감각을 풀어낸 결과물이다.
여기에 한지를 조각조각 겹쳐 면을 구성하는 ‘조각산수’와 한지의 질감을 직접 만져 각을 세우고 공기를 넣어 입체감을 준 ‘주름산수’가 더해지며 채림만의 독자적인 화면이 완성된다.
지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전시를 통해 주목받은 연작 ‘아리랑 칸타빌레’ 역시 이 같은 조각들이 한 화면 안에서 조화로운 하모니를 이루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제주 쇠소깍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잠시 멈춤(Caesura)’이다. 옻칠의 색채와 한지의 주름을 살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풍경과 내면의 멈춤을 함께 담아냈다.
한라산에서 내려온 민물인 효돈천과 바다가 만나는 쇠소깍의 풍경은 작가에게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성찰의 장소로 다가왔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작품 앞에 잠시 멈춰 서 숨을 고르며 마음의 평화를 찾길 바란다고 말했다.
화면 전반을 감싸는 푸른 보랏빛도 작가가 오랜 시간 붙들어온 색이다.
채림은 나쓰메 소세키의 구절을 인용하며 ‘겉으로는 느긋해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고 짚었다.
그 슬픔을 지워내기보다 품고 살아갈 용기를 전하고 싶어 푸른 보라를 택했다는 의미다. 그 색에는 미움과 갈등을 지나 조금 더 화합 쪽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스며 있다.
이 같은 시선은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의 작업은 완벽하게 계산된 결과만을 좇지 않는다. 신인 시절 한 장인으로부터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채림은 그 과정에서 생긴 낯선 흔적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우연한 실수에서 발견한 독특한 느낌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작은 성과와 실수가 겹겹이 쌓여 삶이 만들어지듯, 자신의 작품도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그 바탕에는 고독한 작업 시간이 있다. 산 위 작업실에서 홀로 화면과 마주하는 시간은 작가에게 외로움보다 깊은 집중의 시간으로 다가온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소음에서 벗어나 옻칠이 굳고 색이 스미는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동안 화면의 층도 깊어졌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화려한 색을 품고 있으면서도 전체 분위기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사전 오픈 현장에서는 작품이 빠져 생긴 빈자리도 눈에 띄었다. 채림은 “오히려 시선을 더 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빈자리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깨닫게 된 채림의 작업은 전통을 단순히 현대적으로 바꿔놓은 산수화에 머물지 않았다. 색동과 쇠소깍, 나무의 기억과 작가의 고독, 그리고 실수마저 정성의 한 층으로 쌓아 올린 시간이 포개지며 관람객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들여다볼 시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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