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3천만의 세계최대 유랑민족
1946년에 사상 첫 민족국가 경험
'전설'이 된 미완의 단명 공화국
"독립국보다 자치권 획득이 순리"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쿠르드 민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게 하라. 쿠르드 민족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 우리들의 국기는 결코 떨어지지 않으리."
사상 첫 민족국가를 세운 쿠르드인들의 애국가는 가슴 벅찬 감회와 비장한 각오로 넘친다. 1946년 1월 22일, 이란 북서부의 마하바드에 있는 차와르-차러 광장에선 '마하바드 공화국'(Republic of Mahabad) 건립이 엄숙히 선포됐다.
카지 무함마드 대통령과 13명의 각료, 쿠르드 부족장들은 마하바드 시민들과 함께 뜨거운 가슴으로 국기에 경의를 표하고 애국기를 소리높여 외쳤다. 민족정부 출범선언 한 달 만의 개가였다.
세계 최대의 유랑민인 쿠르드족. 약 3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에게도 매우 작은 지역이긴 하나 한때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마하바드 공화국은 수천년의 쿠르드 역사에서 처음으로 가져본 민족국가. 인구라야 4만 가구에 불과하고 이란 영토 중 한 귀퉁이를 겨우 떼어내 세운 나라였지만 숙원을 성취해낸 감격은 무척 컸다.
건국의 아버지 카지 무함마드는 낡은 군복 코트를 걸치고 수염을 약간 기른 50세의 단구였다. 자신에게 매우 엄격해 술은 물론 담배조차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념과 용기를 가진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호소력있는 목소리로 쿠르드인들을 단합시켰다.
이란 거주 쿠르드인 가운데 3분1 정도밖에 끌어들이지 못한 미완의 국가였으나 기나긴 민족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주권을 행사해보지 못한 쿠르드인들로선 실로 감개무량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격랑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쿠르드족. 그들은 터키 동남부, 이라크 북부, 이란 북부, 시리나 동부와 아르메니아에 흩어져 산다. 이들 다섯 개 나라의 거주지를 보통 '쿠르디스탄'으로 부르나 말 그대로 '쿠르드인이 사는 땅'일뿐 범민족적 단일국가로서 주권을 행사해본 적은 없다.
한반도 정도 크기인 쿠르디스탄은 43%가 터키의 영토이고 이란과 이라크에 31%와 18%가 각각 속한다. 또 6%는 시리아령이며, 2%는 아르메니아 등 옛 소련령. 인구로는 터키가 1천600만 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이란과 이라크에 각각 700만 명과 450만 명이 산다. 시리아에도 150만 명이 거주한다.
아랍의 한가운데 있지만 인종적으로 아랍인과는 계통을 달리할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도 같지 않아 물과 기름처럼 겉돌아왔다. 인종적으로는 아리안족 이란계 백인이어서 셈족 아랍인과는 뿌리부터가 다르다. 언어도 인도-유럽어족이어서 셈어족인 아랍어와 터키어와는 통하지 않는다.
억압, 수탈, 농락으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온 게 쿠르드족의 운명. 주변국의 역학관계에서 철저히 이용됐다가도 그 가치가 떨어졌다 싶을 땐 가차없이 배척됐다. 강대국과 지배국의 필요에 따라 독립과 자치라는 달콤한 미끼가 던져졌다가 이용가치가 없거나 장애가 될 듯하면 참혹한 대량살육의 소용돌이로 내몰리곤 한 것이다.
쿠르드족이 독립국가 꿈을 성취할 절호의 기회는 1차세계대전 직후에 있었다. 전승 연합국과 오스만 터키가 1920년 8월에 체결한 세브로 조약이 그것이었다. 이 조약은 쿠르드 주민이 원한다면 발효 1년 이내에 독립적이고 완전한 자치권을 터키 공화국 내에서 부여받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1923년 연합국과 새로 맺은 로잔 조약에서 대부분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터키령으로 규정하면서 쿠르드족의 독립국 건설과 지위 문제는 완전히 무시됐다. 그리고 터키 공화국이 창설되자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투르크는 쿠르드족 박해와 동화정책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배반과 좌절의 역사는 수없이 이어졌다. 가까이서 그 예를 찾자면 이란의 이슬람 혁명기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집권기를 들 수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적극 가담해 자치권 회복의 기대를 키웠던 쿠르드족은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범이슬람주의에 따라 분리독립의 꿈을 접어야 했다. 후세인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 동안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이 이란의 첩자 노릇을 하며 반정부ㆍ이적행위를 한다는 구실로 무려 18만여 명의 쿠르드인을 학살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쿠르드인들에 대한 관심이 언론보도의 전면에 최근 다시 등장했다. 지난 10월 17일 터키 의회가 자국군의 이라크 월경작전을 승인하면서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것. 터키 정부는 골머리를 앓아온 쿠르드노동자당(PKK) 반군의 소탕을 위해 군사작전에 돌입했고, PKK반군은 이에 강력 저항하고 있다.
불똥은 인근 쿠르드족에게까지 미쳐 이라크 정부와 이라크의 쿠르드자치정부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이라크에선 마수드 바르자니 쿠르드자치정부 수반은 물론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까지 쿠르드족 출신이어서 그 어느 때보다 쿠르드족이 어깨를 펴고 있는 상황. 자칫 터키와 대규모 무력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어 이들로선 복잡미묘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이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주목된다.
그렇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쿠르드족이 단일주권국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럴 전망은 무척 어둡다. 쿠르드 전문가인 장병옥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교수는 "쿠르드족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상호 이해관계도 달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기는 힘들 것"이라고 진단한다. 현실적 해법은 성급한 주권 확보의 꿈을 일단 접고 이라크에서처럼 자치권 획득으로 가는 게 순리라는 것이다.
마하바드 공화국의 최후가 이를 상징해준다고 할까. 내부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친소 마하바드 공화국은 소련이 발을 빼고 이란군이 진주하자 1946년 12월 14일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역부족을 실감한 카지 대통령은 "마하바드는 이란 정부군을 평화롭게 맞을 준비가 돼 있다"며 체념 어린 어조로 투항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공화국이 선포됐던 바로 그 자리인 차와르-차러 광장에서 이듬해 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한때 우렁차게 광장에 울려 퍼졌던 애국가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짧은 주권의 시대가 가고 긴 유랑의 시대가 다시 온 것이다. 그러나 쿠르드인들에겐 지금도 단명의 마하바드 공화국이 꿈처럼 아득한 전설로 남아 있다.
공지현 박사(한국외대 아랍어과)는 행정과 교육 기관에서 쿠르드어 공식 채택, 쿠르드어 정기간행물 발간, 쿠르드 극장 설립, 쿠르드 여성의 정치활동 보장 등이 마하바드 공화국의 업적이라고 말한다. 공화국의 붕괴 요인으로는 국가 운용의 미숙, 외세(소련) 의존 정부에 대한 동족들의 의구심 등을 꼽을 수 있다는 것.
공 박사는 "공존과 화해를 부르짖는 21세기에 자기 말과 글, 문화를 가진 민족을 방치한다는 건 인류문명에 대한 명백한 죄악이다"며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한다. 서방국과 관련국들이 쿠르드족의 문화적 동질성 보장-민족적 자치-국가 건설이라는 단계적 목표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치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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