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내달 15일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전대)를 앞두고 리커창(李克强.52) 랴오닝(遼寧)성 당서기가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다.
홍콩 등지의 외신과 관측통들은 17전대에서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단에 진입할 후보 1순위로 예외없이 리 서기를 꼽고 있다.
일본 도쿄신문도 18일자에서 중국공산당 소식통을 인용, 내달 17전대에서 리커창 서기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하면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도했다.
리 서기는 후 주석이 최고지도자에 오른 단계별 절차를 똑같이 밟아 이번에 국가부주석이나 중앙서기처 서기 등 직무로 당무의 중추를 장악하고 순리대로 될 경우 오는 2012년 후 주석에 이어 당 총서기로 오르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출신 배경 = 리 서기의 고향은 후 주석의 원적(原籍)과 같은 안후이(安徽)성이다. 안후이 딩위안(定遠)현의 당 간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졸업후 고향의 농업공사에 배치돼 농민 생활을 한 경력을 갖고 있다.
문화대혁명 종료후 대입시험 부활과 함께 1978년 23세의 나이로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 학생회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로 근무할 때에는 학생회 주석 장웨이(張휘<火+韋)와 함께 `양대 호걸'로 불리기도 했다.
1982년 대학졸업후 공청단을 관장하던 후치리(胡啓立)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에 의해 발탁돼 공청단 중앙에 들어간 그는 당시 상무서기이던 후 주석과 함께 근무하면서 후보위원, 후보서기, 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1993년 리 서기는 후 주석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공청단 최고위직인 중앙 제1서기에 올라 5년을 재직했다. 공청단 경력만 16년에 이르러 후 주석보다 내부 기반과 인맥이 튼튼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공청단 중앙 재직기간에 베이징대 대학원에 진학,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1998년 44세의 나이로 허난(河南)성 성장 대리 겸 부서기로 임명돼 최연소 성장 및 첫 박사학위 보유 성장을 기록한 그는 정치지도자로서 경력에 주요한 전기를 맞았다.
낙후한 농업지대였던 허난성에서 동부 연해안의 자본과 인재를 끌어들여 경제를 크게 끌어올렸으며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04년 노후 공업지대인 동북지방 진흥의 임무를 받고 랴오닝성 서기로 옮기게 됐다.
◇장.단점 = 공청단파의 핵심이자 후 주석 직계 인맥으로 후 주석의 신임이 지나치게 두터운 탓에 이것이 경쟁 파벌의 경계감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또한 지도자로서는 필수인 공업과 농업, 지방을 고루 학습했지만 중앙부처 근무 경험이 없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허난성 재직시절 탄광 매몰사고, 화재사고, 에이즈촌 문제 등 사회문제가 빈발했다는 점도 과오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것 외에는 대외적으로 공개된 리 서기의 스타일은 모두 장점 일색이다. `리틀 후'라는 별명처럼 성실함과 함께 절대 화를 내지 않고 몸가짐이 흐트러짐이 없는 점이 후 주석과 일맥상통하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인관계가 뛰어나며 학구적 자세를 갖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대학시절부터 공청단 서기, 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 청년정치학원장 경력을 지내는 등 정치적 야심도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논문 장학금이나 원고료를 받으면 동료들과 식사를 하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두텁게 했으며 인민해방군 고위층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홍콩에서 출간된 책자 `중공(中共) 제5대'가 전하고 있다.
리 서기는 또 랴오닝의 대형 재난 때마다 현장에 나타나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이며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신중함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북 진흥 및 국유기업 개혁이라는 두 과제를 안고 랴오닝성으로 옮겨온 그는 그동안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올들어 랴오닝성의 경제성장률을 13년만에 최고치로 끌어올리며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있다.
최근엔 단일 외자유치 규모로는 역대 최고로 꼽히는 인텔 반도체공장을 다롄(大連)에 유치하기도 했다.
공청단 선배로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유혈진압에 반대하다 실각한 후치리 정치국 상무위원과의 친분 외에는 민주화나 정치개혁 등에 대한 사상적 입장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변국과의 인연 = 랴오닝 서기로 재직하면서 해외를 오가며 쌓은 인연이 대부분으로 주변국이나 서방국과의 공식적인 외교 무대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2005년 리 서기의 방한 당시 면담을 가졌던 이해찬 전 총리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일부 대기업 회장과 안면을 텄을 뿐 별다른 한국계 인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부터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거론됐던 리 서기를 청와대는 직급상의 문제를 들어 예방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일본과는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리 서기는 1985년 3월 중일 우호교류의 일환으로 구성된 중국 청년대표단의 간사로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일본 정계지도자와는 지속적인 교류를 가져왔다.
당시에도 리 서기의 간단치 않은 면모가 일본 외무성 관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전 일본 민주당 대표도 2005년 랴오닝성을 방문한 뒤 "리 서기가 장차 중국의 미래 지도자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랴오닝이 중국 지방에서도 가장 일본과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하다는 점도 일본 정계가 리커창의 등장을 환영하고 있는 대목이다.
현재 랴오닝과 일본의 도시간 자매결연이 20쌍에 이르고 랴오닝에 진출한 일본 기업이 5천904곳에 이르며 외자계약액만 126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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