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칼럼> 관계의 격상

  • 등록 2008.02.14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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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그 앞에 하얀 국화꽃이 조화로 놓였다. 어린아이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며 편지를 썼다. 상복 차림의 시민은 허리를 꺾어 '석고대죄'를 한다. 잿빛 거리에 만시지탄의 아픔이 떠도는 가운데 관계당국의 관리소홀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높다. 언론은 연일 현장분위기를 감성어린 뉴스로 전한다.
국보 제1호 숭례문. 하나의 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서울의 관문이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을 저미는 애틋한 벗으로 시민 곁에 다가왔다. 무생물의 사물에서 생물의 인격으로 바뀌어 우리 마음 속에 깊이 파고든 것이다. 요즘 숭례문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들은 이를 잘 웅변한다.
죽으면 누구나 신이 된다고 했던가. 숭례문 역시 소실되고 나서야 명실상부한 국보로 '추앙'받고 있다. 평소에 멋진 건물이 하나 서 있구나 정도로 스쳐 지나쳤던 필부필부들도 그 역사적 가치와 무게를 실감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흡사 '국상(國喪)'을 당한 듯 애도 물결이 넘실대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고 하겠다.
만남은 항용 '나와 너(I-You)'의 관계와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대별되곤 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동등한 만남이다. 내가 있어 네가 있고, 네가 있어 내가 있는 '인격적 관계'다. 반면에 '나와 그것'의 관계는 불평등한 만남이다. 그래서 이는 나를 위해 너를 이용하는 '비인격적 관계'의 성격을 가진다.
'나와 너' '나와 그것'의 관계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둘의 만남이다. 서로 사랑으로 만나고 수평적으로 교감할 때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가 되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수직적으로 이용하려들 땐 '나와 그것'의 비인격적 관계로 달라진다.
지금의 숭례문 상황이 그렇다. 커다란 국가문화재급 문짝쯤으로 여겼을 때 숭례문은 한낱 '나와 그것'의 관계였다. 비인격적 사물이었을 뿐 숨결 느껴지는 동등한 인격적 대상이 아니었다. 일반시민은 물론 문화재청, 서울시, 중구청 같은 관계당국마저 '나와 그것' 관계에 머물렀던 것 같다. 관리감독이 터무니없이 소홀해서다.
숭례문은 처절ㆍ장엄하게 자신의 최후를 불태우며 국민들의 진정한 사랑이 됐다. 화마에 쫓겨 쏟아지는 기왓장과 불길에 타서 흩어지는 서까래들은 610살의 '신선'이 사라지며 울리는 장송곡이었다. 실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 절로 무릎을 꿇었고,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 '남대문'이라며 통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더 이상 찾기 힘들다.
이번 화재사건은 관계의 의미를 성찰케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가까운 가족간의 관계는 물론이려니와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들, 나아가 주변 사물과의 관계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는 사색의 시간인 것이다. 가버린 뒤에 애달파하기보다 함께 있을 때 맘껏 사랑하는 게 지혜가 아닐까.
알고 보면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 산다. 풀이나 나무처럼 무심코 대하는 자연도 가만히 귀기울이면 우리와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과 교감이 오갈수록 '나와 그것'의 관계는 '나와 너'의 만남임을 알 수 있고, 궁극적으로 너와 나 구분없는 '우리(We)'임을 인식한다. '우리'는 자아의 경계를 허물 때 되찾을 수 있는 보석이다.
이번 화재는 비록 죽어서일 망정 숭례문과 국민의 관계가 '나와 너', 나아가 '우리'로 격상되는 계기가 됐다. 또한 그간 소홀히 대해온 문화재를 새로운 시선을 바라보게 하고 있다. 숭례문은 자신을 소신공양하여 국민들의 각성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준 것이다. 늦었으나마 우리의 눈물과 애도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상실과 이별은 고통과 슬픔을 치유제삼아 변화와 성숙을 잉태하는 또 하나의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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