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 = 유용욱 주필 |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한 국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의 성역(聖域)이다. 객관적 사실(Fact)의 튼튼한 반석 위에 쌓아 올린 역사적 기억은 시대의 이정표이자 사회적 통합을 유지하는 기둥이다.
그 기둥이 정파적 목적이나 상업적 흥행을 위해 흔들릴 때, 사회는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과 인지적(認知的) 균열(龜裂)을 겪게 된다. 최근 극장가를 둘러싸고 대중적 분노와 거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암살자들』을 바라보는 필자의 시선은 참담함과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영화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과 창작물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었으나, 그 실상은 픽션(Fiction)의 탈을 쓴 지능적 역사 왜곡이자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을 정략적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문화적 탈선에 다름아니다.
역사는 성역(聖域)인가, 흥행(興行)과 선동(煽動)의 소모품인가
영화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영부인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이라는 엄혹한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서사(敘事)의 핵심 골격으로 채택한 것은 확정된 사법적 진실도, 냉철한 국제 외교 사료(史料)도 아니다. 영화는 사건의 배후에 당시 박정희 정권의 자작극이나 음모가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과거 북한 대외 선전 매체나 극단적 음모론자들이 주장해 온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중심 모티브(Motif)로 끌어들였다.
제작진과 연출가는 “사건의 진실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가설과 상상의 형태로 다루었을 뿐이며, 영화 시작 전 픽션임을 분명히 고지했다”며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은 책임 있는 창작자의 태도가 아니라, 법적 ·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치졸한 변명에 불과하다. 이미 진범과 배후 세력이 사법적 · 역사적으로 명백히 밝혀진 사건에 대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사실과 혼재시켜 스크린에 나열하는 행위는 관객의 무의식을 오염시키는 위험천만한 문화적 가스라이팅이다.
‘픽션’이라는 무책임한 면죄부와 법치(法治)의 한계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예술인들의 창작 자율성을 존중하지만, 그 자율성이 법치주의의 한계와 사자(死者)의 인격권을 침범하는 것까지 허용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 형법 제308조는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자의 명예를 훼손한 자’를 엄히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원 역시 작품 서두에 “본 영화는 허구”라는 형식적 자막을 삽입하거나 ‘가설(假設)’의 형식을 취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체적 면책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다.
표현물의 전체적인 맥락과 연출 기법이 실존 인물이나 고인(故人)에 대해 구체적인 허위 사실을 진실인 양 암시하거나, 그로 인해 사회적 평가를 치명적으로 실추시킨다면 이는 예술의 자유가 보호하는 합리적 한계를 명백히 일탈(逸脫)한 위법 행위로 포섭(包攝)된다.
과거 법원 역시 실제 기록 영상과 극화된 재현(再現) 장면을 교묘하게 배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허구를 사실로 오인(誤認)하게 할 위험이 있는 영상물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인용 및 해당 장면의 삭제를 명한 바 있다.
실제 기록과 연출된 허구를 나란히 배치하여 대중에게 정황적 착시를 주입하는 행위는 미디어학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인식적 오염(Cognitive Pollution)’이다.
헌법재판소 또한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타인의 권리나 명예,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 제21조 제4항의 한계를 준수할 것을 엄격하고도 일관되게 제시해 왔다.
예술이라는 포장지로 감싼 음모론이 사자(死者)의 명예를 난도질하고 유족의 가슴에 또다시 대못을 박을 때, 법은 이를 ‘주관적 상상력의 유희(遊戲)’가 아닌 ‘위법한 명예훼손’으로 심판해야 마땅하다.
역사적 팩트와 외교 사료(史料)가 증언하는 실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의 진실은 서늘할 정도로 이미 명확하다. 1974년 12월, 사형 집행을 앞둔 범인 문세광은 최후진술에서 “나는 조총련에 속은 바보였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께 진정으로 미안하다”며 뼈저린 자백과 회한(悔恨)의 눈물을 남겼다.
나아가 2002년 북한의 김정일은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에게 “당시 사건은 하급자들이 저지른 일로 사전에 알지 못했다”며 북한 측의 관여를 사실상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독일 외무성 정치문서보관소 등에서 발굴된 국제 외교 사료 역시, 사건 직후 북한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김대중 추종자들의 소행”이라는 식의 정치적 공작을 펼쳤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객관적 사료와 진범의 자백, 사법부의 확정판결이 엄존(儼存)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틀어 ‘정치적 자작극’이라는 망상(妄想)을 유포하는 것은 역사의 도덕률을 파괴하는 심각한 모독(冒瀆)이다.
편향된 문화 헤게모니의 독점과 ‘내로남불’의 성역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본질은, 왜 이러한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 영화가 대한민국 극장가에서 ‘예술’이라는 미명(美名)과 ‘시대적 화두(話頭)’의 탈을 쓰고 대담하게 상영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지난 수십 년간 형성되어 온 대한민국 미디어 · 문화 생태계의 기형적 구조, 즉 특정 진영이 독점해 온 ‘문화 헤게모니(Culture Hegemony)’의 오만함과 깊은 연관이 있다.
과거부터 대한민국 문화 권력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진지전(War of Position)’의 스펙트럼 속에서 대중의 역사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서사(敘事)를 선점해 왔다.
그들은 ‘독재 대 반독재’, ‘선 대 악’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구축하고,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당위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정교하게 기획된 감성적 서사 속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근대화 주역들은 악마화되었고, 그 반대편은 정의의 투사로 미화(美化)되었다. 사실과 기록 대신 스크린 속 감정선이 대중의 역사의식을 좌지우지하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이들 문화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전유한 스크린 위에서 ‘내로남불’의 이중잣대를 서슴없이 휘두른다. 이들의 성역화와 성역 파괴는 지독할 정도로 편향되어 있다.
특정 진영이 주도하는 광주 5·18 관련 이슈는 이미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다양한 시각을 다각도로 조명해 보자는 순수한 학술대회나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조차 ‘역사 왜곡’이자 ‘범죄’로 몰아세우며 극렬한 발작 반응을 보인다. 학문의 자유와 검증의 영역조차 금기시하며 성역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반면,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를 놓은 보수 우파의 상징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국가 지도자로서의 공과(功過)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넘어, ‘마누라까지 죽인 정권’이라는 천인공노할 패륜(悖倫)적 음모론과 무참한 폄훼(貶毀)를 서슴지 않는다.
자신들의 비극은 애당초 접근조차 불허(不許)하는 성역으로 만들고, 상대 진영의 비극은 자극적인 픽션으로 재단(裁斷)하여 팝콘과 함께 팔아치우는 셈이다.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나 민감한 현대사의 아픔을 소재로, 말도 안 되는 배후 음모론을 담은 영화가 제작되었다면 그들이 과연 ‘표현의 자유’라며 찬양했겠는가?
자신들의 비극은 성역화하고 남의 비극은 흥행 도구로 소비하는 이 기만적인 행태야말로 지금의 대한민국 문화 권력이 빠져 있는 도덕적 해이의 극치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왜곡된 서사가 문화적 선동에 무방비로 노출된 청년 세대에게 미칠 영향이다.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뉴스와 기록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영화 속 재연 장면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강력한 ‘사실’로 수용될 위험이 크다.
주연 배우들이 “젊은 세대에게 현대사를 알릴 수 있는 계기”라며 자신만만하게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라. 역사적 팩트가 아닌 음모론을 현대사로 가르치겠다는 것은 문화적 교육이 아니라 대중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지능적 여론 조작’에 다름아니다.
‘거짓’이 예술의 옷을 입을 때 언론과 시민이 해야 할 일
그동안 보수 우파 진영은 이러한 문화적 침탈 앞에서 무기력함을 면치 못했다. 눈앞의 정치적 정쟁과 단기적 경제 지표에 매몰되어 문화를 한낱 유희나 대중적 소모품으로 치부했던 게으름과 무지(無知)가, 결국 문화 생태계를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음을 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문화는 강요나 행정적 제재로 바꿀 수 없다. 서사의 왜곡은 오직 더 높은 격조와 진실에 기반한 매력적인 서사로만 극복할 수 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음모론 영화를 보며 극장 밖에서 핏대만 세우는 ‘무기력한 관객’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미래 세대는 계속해서 거짓 서사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술은 사실 앞에 겸허해야 하며, 역사의 무게는 영화 입장권 한 장의 가격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픽션이라는 그늘 뒤에 숨어 시대의 비극을 흥행과 정략의 도구로 소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가설’과 ‘상상’이라는 유희가 객관적 진실과 사법적 정당성을 침범할 때, 문화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사회를 파괴하는 치명적 독소(毒素)로 전락한다. 거짓이 예술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때, 언론과 관객,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명확하다.
단호하고 냉철한 ‘진실의 잣대’를 들어 그 음흉한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픽션의 폭주를 막아내고 역사적 사실의 엄숙함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적 영혼들과 유족들 앞에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역사의 도덕률을 지켜나가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유용욱 주필
- 1993년 KBS 공채 19기
- KBS 전략기획실 성과평가부장
- KBS 법무실장
- KBS N 경영본부장
- 현) 인싸잇 경기 편집국장 및 공동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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